망해버린 이번 생을 애도하며 - SF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종합소설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지혜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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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달로 본인의 의사(혹은 가족의 의사)와 재정만 갖춰지면 원하는 날짜까지 냉동되었다고 깨어날 수 있는 때가 도래했다. 냉동을 선택하는 이유는 상당히 다양하다. 책 속 주인공 또한 각자의 상황과 사정에 의해 냉동을 선택한다. 의류업체 사무직으로 일하는 가은은 8년간 교제한 규선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규선은 국내 유수의 냉동 전문 클리닉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얼마 전 규선의 회사에서는 50년 만에 깨어나는 인물 B-17903에 대한 이야기가 퍼진 적이 있다. 그가 냉동이 된 이유는 꿈속에서 만난 여성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다. 황당한 이유로 냉동이 된 그는 자신이 지목한 날짜에 해동이 된다. 어느 정도의 적응훈련을 거친 후, 자신의 꿈과 똑같은 의상과 꽃을 준비하여 그녀를 만나러 나간다. B-17903의 본명은 기한이다. 그는 예지몽을 잘 꾼다. 취업에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 학교에 유일하게 남은 윤정에게 집적이는 기한. 윤정이 큰 가방을 들고 떠나는 꿈을 꾼 후, 너의 미래를 꿨다는 감언이설로 윤정을 꼬셔 밤을 보낸다. 그리고 매몰차게 윤정을 차버리는 기한. 윤정은 그렇게 아이를 낳지만, 기한은 꿈에서 만난 다른 여성을 만나겠다는 빌미로 냉동인간이 되어버린다. 윤정은 아이를 데리고 기한의 엄마를 찾아가지만, 욕만 먹고 쫓겨난다. 둘째를 임신 중이던 기한의 누나 기연은 윤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잠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만 남겨놓고 사라지는데...

한편, 가은은 냉동인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규선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그녀 역시 냉동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가은은 냉동인간이 된 이유를 여전히 모른다. 엄마에 의해 강제로 냉동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달 후, 부모님은 한날한시에 사망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그저 자신을 스토킹하는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뿐... 규선에게 고백하기 위해 마음을 졸이던 어느 날, 한 남자가 가은의 눈앞에 나타난다. 큰 꽃을 들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그를 보는 순간 그 예전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가은을 중심으로 책 속에는 다양한 인간들이 등장한다. 물론 가은처럼 냉동되었다가 원하는 날짜에 깨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중 가장 마음이 쓰였던 것은 가은이 살고 있던 집의 주인이자, 쌍둥이를 낳자마자 냉동인간이 되어 17년 만에 깨어난 주원이라는 인물이었다. 늦은 나이의 결혼과 출산을 한 주원은 아이들을 위해 아이를 낳자마자 냉동인간이 된다. 17년간 엄마의 부재를 겪으며 살았던 아들 나훈과 딸 나경은 이미 고등학생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사라졌던 엄마가 돌아왔지만, 이미 엄마가 필요한 나이는 지나버렸다. 오히려 엄마라는 존재가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주원은 자신의 부재를 메꾸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지만, 쉽지 않다. 엄마와 자녀들의 마음이 다르다. 아이들을 위해 냉동인간을 선택했지만, 주원은 17년간의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눈을 맞추고, 첫 발을 떼고, 엄마를 이야기할 때, 친구와 다투고 마음이 상했을 때, 아이들이 엄마의 부재를 몸과 마음으로 느꼈던 그때 주원은 아이들 곁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훈과 나경은 엄마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들 사이의 거리감이 책 속에 그대로 드러나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은 사랑이라고 믿지만, 상대는 폭력이라고 느끼는 스토커의 이야기가 책 속에도 등장한다. 결국 집착과 폭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랑(누가 봐도 사랑이 아니지만)을 지켜내지 못하자 결국은 복수를 선택하는 모습과 그를 피해 결국은 미래로 딸을 보내는 부모의 모습. 아무 이유도 모르고 떠나야 하는 딸의 모습이 겹쳐지며 소름 끼치도록 화가 났다. 과연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냉동 상태에게 시간이 얼마나 흐르던, 다시 깨어났을 때는 냉동인간이 된 그 시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덕분에 민증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만약 냉동인간이 등장하는 시대에 도래한다면, 얼굴만 보고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아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까? 영원을 사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그 옛날부터 인간의 소원은 영원을 사는 것이었다.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냉동인간이 되는 경우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다양한 이유로 냉동인간이 된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꽤 신선하면서도 흥미로웠다. 과연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질까? 냉동인간과 그들이 냉동을 선택하게 된 이유. 해동 후의 이야기들이 이어져서 읽는 내내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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