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의 재림
나하이 지음, 강지톨 그림 / 좋은땅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경의선 책거리 낭송 인문학 수업으로 어린 왕자를 낭송했었다. 인생 전반전을 지나 후반전에서 만난 어린 왕자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서서히 삶의 중심축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 어린 왕자가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며 어린 왕자의 방황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길들인 것에 책임이 있다'라는 말은 청춘의 사랑과는 다른 삶의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어린 왕자>는 자기 별에 남겨진 장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까지의 여정을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의 눈으로 기록한 책이다. 어린 왕자가 떠나버린 사막은 황량함과 그리움이 가득했다. 어린 왕자가 떠난 후 조종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 장미와 만났을까. 사랑의 책임을 깨달은 어린 왕자는 어떤 삶을 만들어갈까. 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어린 왕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기본 편'이었다면 <어린 왕자의 재림>은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게 된 어린 왕자의 사랑 '실천 편'을 상상해서 써 본 한국소설이다. 

 

너도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어서 깨어날 준비를 해.
넌 네 별로 돌아가야 한다며? 15

어린 왕자는 뱀에 물려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새로운 소명을 갖고 자신이 떠나왔던 별 B612로 돌아간다. 하지만 언제나 깨달음의 발걸음은 늘 한 발자국 늦는 법이다. 장미는 자연의 섭리대로 시들어 죽고 만다. 존재의 부재는 뒤늦은 사랑의 현실을 보여준다. 사랑의 깨달음이 늘 해피엔딩이 될 수는 없었다. 사랑했던 장미의 죽음과 자기 별의 소멸은 더 이상 과거의 어린 왕자로 살 수 없음을 뜻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왕자에게는 장미가 남기고 간 씨앗과 상자 속의 양, 번데기라는 친구들이 있었다.

어린 왕자는 새로운 별에서 장미가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며 지구에 남겨진 조종사와 여우를 떠올린다. 장미를 책임지기 위해 돌아왔는데 책임져야 할 장미는 사라져버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었었다. 그런데 새로 태어난 장미와 나비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조종사와 여우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찾아 지구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예전에 지구에 가기 전 들렀던 여러 행성에 다시 방문하지만 행성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은 처음 방문했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린 왕자야, 네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될 일은 생각하지 마. 61

어린 왕자는 행성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자신만의 대답을 만들어 간다. 여섯 개의 별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에서 어린 왕자는 누군가의 신하도, 우상도 되고 싶지 않았고, 슬픈 기억이지만 장미와의 추억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떠나보지 않은 사람은 뜬구름 잡는 얘기밖에 할 수 없으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도 금방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린 왕자는 여우와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여우가 아닌 뱀을 만난다. 뱀은 여우가 기다림에 지쳐 죽었다고 했다. 늘 한걸음 늦은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종사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가는 길에 길들여지고 싶어 하는 사막 고양이와 길들여지고 싶어 하지 않는 낙타와 자기보다 아이들을 위하는 선인장을 만난다. 그리고 드디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조종사를 만나게 된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조종사와 함께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어린 왕자>의 결말은 상상 속에 남겨지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본편보다 뛰어난 속편은 없고 독자들의 높아진 눈높이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편을 쓴 이유는 어린 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가기 위해 스스로 뱀에게 독을 청하는 것과 같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며, 소멸은 탄생을 의미한다고 했다. <어린 왕자>를 통해 만났던 자기 안의 어린 왕자는 책이 출판되는 순간 더 이상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실존을 위해 마시는 독배라면 기꺼이 마셔주겠다는 작가의 신념이 느껴졌다.

모든 것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는 카멜레온에게 세상은 감상 따위는 필요 없는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삭막한 세상일뿐인 것처럼 사막을 걸으며 겪는 갈증은 신기루 같은 오아시스만을 꿈꾸게 한다. 하지만 조종사가  어린 왕자를 위해 목숨을 내어줬을 때 그의 마음속에 죽어있던 누군가는 깨어났다. <어린 왕자의 재림>은 사랑의 책임을 깨닫고 다시 별에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을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법칙은 변하지 않고 녹록지 않은 현실의 법칙도 여전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지켜야 하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삶이 내게 주는 시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에 책임이 따른다는 깨달음은 시작일뿐이다. 우리는 삶에서 깨지고 부서지면서 다시 또 사랑을 배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학교 국어 공부법 - 밑줄 쫙 서한샘 박사의 지상 강의
서한샘 지음 / 한샘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내 또래 엄마들 중에서 어릴 때 한샘 선생님 강의나 책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국어는 한샘'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는데 서한샘 선생님께서 참고서가 아닌 국어공부법에 관한 책을 출판하셨다고 해서 찾아보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선생님께 한 수 배워 아이들과 즐겁게 국어를 공부할 수 있다면, 한샘 선생님처럼 내 이름으로 된 참고서 하나 정도는 남길 수 있다면 하는 꿈에 부풀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독서지도와 논술지도를 공부하며 이제는 국어공부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이 내심 기뻤다.

서한샘 선생님의 <중학교 국어공부법>은 중학교 국어를 '다섯 개 기둥 세우기'라고 생각하고 시, 소설, 논설문, 문법, 어휘로 나누어 예문과 함께 국어 공부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서문에서도 밝혔듯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손녀를 위해 쓴 책답게 어린 손녀에게 말하듯이 설명하는 문체가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온다. 다른 책들과의 차별점은 한 가지 기둥 설명이 끝날 때마다 삽입된 추억의 사진들을 꼽을 수 있다. 사진 속에는 그의 꿈 너머 꿈, 어린 손녀에게 전해 주고 싶은 자신의 일생 이야기가 화석처럼 고스란히 담겨있다. 저자의 사진들은 공부가 끝이 아니라 공부를 하면 자신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삶을 즐길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다섯 개의 기둥 중에서 가장 열심히 읽은 부분은 국어의 네 번째 기둥 '문법'이었다. 독서지도사 과정을 공부하면서도 가장 어려웠던 국어 문법 과정을 기초부터 배울 수 있었다.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는데 서한샘 선생님께서 수년간 쌓아올린 가르침의 노하우를 만나볼 수 있어 유익했다. 선생님 말씀에 따라 책 속 문제를 풀었을 뿐인데 음운의 체계가 물 흐르듯 머릿속에 들어왔다. 좋은 선생님은 많은 것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을 쉽게 가르치는 것이 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닌데 왜 학생들은 공부해야만 하나? 지금 초등학교 중학년인 첫째 아이도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주 물어본다. 학교 공부만 공부가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있지만 입시를 목표로 하는 수단에만 얽매여 넓은 시야를 갖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녹록지 않는 현실을 알아버린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다그치지만, 아이들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납득시키기는 여전히 어렵다. 부모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하고 남들이 하니까 시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아이들은 제대로 세울 수 있는 경험이 부족하기에 부모는 늘 아이보다 더 넓은 시야에서 판단을 내리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서문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린 나이에는 운명이 없지만 4,50대가 되면 운명은 있다는 말이 참으로 뼈아프게 다가왔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은 감퇴하고, 체력은 부족한데 해야 할 일은 많아진다. 뒤늦게 운명길을 개척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몸소 느끼기 때문이다. 국어 공부의 다섯 기둥을 세우는 방법도 유익했지만 뼈 있는 말씀에 공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공부를 가르치고 싶은 부모라면 한샘 선생님의 프롤로그는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남자의 사랑
에릭 오르세나 지음, 양영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동거도 결혼처럼 인정해주는 나라 프랑스. <프랑스 남자의 사랑>이라는 제목을 보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제목 밑에 그려진, 비정상적으로 왜곡되고 뒤틀려 보이는 신체와 손가락을 가진 남자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책의 오른쪽 상단에 조그맣게 그려진 에곤 실레의 <아르투어 뢰슬러의 초상>을 본 순간, 이 책의 이야기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다양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인간 내면의 이야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틀 간격으로 이혼한 아버지와 아들. 아들 에릭의 나이는 28세, 그의 아버지 나이는 50대였다. 사랑에 계속 실패하는 이들 부자의 관심사는 지속되는 사랑이다. 사랑의 실패 이유를 찾던 에릭의 아버지는 비슷한 상황에서 배우 브루스 리와 그의 아들 브랜든 리가 맞는 죽음을 예로 들며 선대에서부터 사랑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상한 가설에 도달하게 된다. 왜 똑같이 애정전선에서 실패하는지, 사랑도 혹시 유전이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엉뚱한 연구는 에릭과 아버지를 쉼 없는 사랑 이야기 속으로 초대한다.

아버지의 조사에 따르면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가문은 양복쟁이였던 보르도 쪽 조상님 한 분이 쿠바로 이민을 결심하면서 어긋나게 되었다고 한다. 에릭의 증조할아버지이자 양복쟁이였던 아오우구스틴은 흉쇄유돌근 활성화를 위해 카페 콘솔라시온 테라스에 매일 두 시간 동안 머물라는 의사의 처방을 받게 되고, 그 사소한 시작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는 참말 같은 거짓말을 하는 거죠. 혁명이라는 끔찍한 거짓말이 그에겐 진실이었죠. 그를 하루하루 지탱해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일종의 척추였다는 말이죠. 125

 

 

에릭이 재혼하던 다음 날 사라진 아버지. 아버지에게 듣지 못한 아오우구스틴의 뒷얘기는 에릭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더욱 각인시킨다.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의 유전자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 자신에게서 떠난 아버지를 위해 재혼한 이자벨과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연기하기로 한다. 이자벨이 행복하다는 거짓 편지를 쓸 때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대부분의 일상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몸부림과 뒤엉킴의 순간이었을 뿐, 행복이라는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의 성공이 단지 결혼 생활의 유지에 있다면 거짓말이 가득한 이자벨의 편지는 더 이상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에 불과하다는걸, 서커스가 막이 내리면 떨어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는 걸, 무대가 아닌 진짜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걸.


그런데, 혹시 비밀이 진실을 더 잘 간직하는 건 아닐까?

 

미화하거나 필연적으로 왜곡할 수밖에 없는 일상. 내심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은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했던 에릭이지만 자신에게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사랑의 실패 이유를 찾아 헤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책의 시작 부분, 그 이유를 찾고 있던 에릭에게 쿠바 카리브 해의 풍경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말이지, 너도 잘 알다시피, 브레아 섬은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잖아. 작은 섬이 무려 365개나 되잖아. 1년의 하루마다 대응하는 섬이 하나씩  있는 셈이지. 그렇다면 결론은 이런 거지. 너한테 행복을 안겨준 바로 그 풍경이란 것 자체가 일시적이고 조각나 있다는 거야. 그러니 네가 대체 무슨 수로 여자에게, 그 여자가 충분히 기대할 권리가 있는 단단한 화합과 신뢰를 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우스갯소리처럼 흘려 들었던 맥스웰 방정식 세 번째 법칙은 두 극지방을 중심으로 자장이 최대라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했을 때 보았던 모습은 극지방에 있는 그를 보았을 때였다. 그와 가까워지면서 느끼는 내면의 괴리. 사랑의 실패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진실에 다가가는 순간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고 결혼계약은 깨지는 것이다. 사랑은 목적지를 향한 것이 아닌 길을 살피는 여정이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처럼, 가혹한 진실 너머에 사랑이 있다. "제발 부탁이니, 그 어떤 디테일도 잊어버리지 마세요, 기회가 되면 얼마든지 샛길로 빠지라니까요. 옛날 옛적에. 이젠 우릴 방해할 사람이라곤 없어요. 그리고, 우리에겐 시간도 많고요. 특히 사랑이 문제라면 더더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인생 최고의 책
앤 후드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마도 우리 어린 시절에서 가장 충실하게 산 날은 좋아하는 책과 함께한 날일 것이다. p.26

에이바는 짐과 이혼 수속 중이다. 남편인 짐은 털실 예술가(뜨개 그라피티) 델리아 린드스트롬과 외도하다 들통나자 그녀를 떠났다. 에이바는 절망과 상실감을 해소하려 친구이자 사서인 케이트에게 독서모임 멤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독서모임에서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과거와 자신이 진짜 원했던 인생이 어떤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책은 에이바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 각자의 시선으로 각각의 시공간을 따라 전개된다. 커다란 판 퍼즐 위에서 맞는 부분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퍼즐이 완성되어 가듯이 각각의 조각에 집중하다 막판에 마지막 퍼즐이 완성된 순간 모든 조각이 그녀의 인생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반전이었지만 그 반전에 숨어있는 또 다른 반전이 긴장감의 끈을 팽팽히 잡아당기며 책을 끝까지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아이를 가진 부모의 입장에서는 에이바의 딸 매기의 외줄 타기 같은 일탈이 가장 염려스럽고 안타까웠다. 무게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부모의 방황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가끔은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 싫을 때가 있다. 환상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 참혹한 현실을 마주보기 싫은 것이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도피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매기의 아픔이 주사기에서 흘러나온 약물의 힘처럼 내게도 전달되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독서모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정신없이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실제 모임을 하며 겪을법한 일들에 오랜만에 정신 줄 놓고 읽은 책이었다. 더불어 케이트의 북클럽 독서 목록에 있는 책들의 숨겨진 매력까지 알게 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마법이다. 냉담한 공공장소에 개성을 부여하고 회복하는 뜨개 그라피티처럼 독서는 우리들 삶의 한 부분을 회복시켜 준다.

독서는 5차원의 세상에 살고 있지만 2차원에 머물러 있는 나를 다시 원상복구 시켜주는 열쇠이기도 하다. 내가 살았던, 살고 있는, 살아가게 될 삶의 순간들.  그 순간들이 모여 내 삶이 된다는 것을 작가는 케이트의 독서 모임에 등장하는 책을 소개하며 각자가 바라보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 준다. 내 인생 최고의 책은 내 삶의 한 부분이 책 속에 박제된 책이다. 다시 읽기만 해도 다시 그 순간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당신 인생의 최고의 책은 어떤 책인가.


<케이트 북클럽 독서 목록>
페니(1월): 오만과 편견
루크(2월): 위대한 개츠비
에마(3월): 안나 카레니나
루스(4월): 백 년 동안의 고독
오너(5월): 앵무새 죽이기
모니크(6월): 브루클린에서 자라는 나무
키키(7월): 호밀밭의 파수꾼
제니퍼(9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존(10월): 제5도살장
에이바(11월): 클레어에서 여기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죽으러 갑니다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쭙잖은 얼개의 추리물은 싫어한다. 셜록처럼 사소한 상황 증거만으로도 범인을 가려내거나 csi처럼 과학적 실험과 검증을 통한 분석을 감상하는 것이 개인적 취향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표지 그림 때문이었다. 몇 주전 읽었던 안나 클라라 티돌름 동화책 <두드려 보아요>의 표지 그림과 묘하게 실루엣이 겹쳤다.

 

똑같이 문 앞에 서 있지만 어린이가 두드리는 문은 설렘을, 어른이 두드리는 문은 두려움이 담겨있다. 아이 눈에 비친 문 뒤의 세계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세계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때도 뒷장에 어떤 그림이 나타날지 뜸을 들이고는 했었다. 그렇지만 어른이 선 문 앞은 다른 느낌이다. 땅의 경계가 사라진 문의 모습은 현실의 문이 아니다. 뻔한 결말이 예상되는 현실세계의 문은 아무런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른들의 세계는 호기심만으로 살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아무 일 없이 지내면 벌레 취급받고, 마음속 상처도 쉽고 빠르게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릴 때 삶의 이유와 희열을 안겨주었던 소중한 일상은 그 가치가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평범한 일상은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될 수 없었다. 되려 누구나 겪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인식은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 새로운 희망을 갖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죽음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 태성은 이전에 살았던 기억이 사라진 채 삶의 출발선에 놓이게 되었다. 경찰이 자신의 기억이라 말해준 것은 친부모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뿐이다. 번개탄을 피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부모는 감옥에 있었다. 그는 최저생계비만을 받고 살아가야 할 인생에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한다. 그렇지만 혼자 죽기는 무서웠기 때문에 단체로 자살을 할 수 있는 카페에 가입하고, ‘메시아’라는 닉네임을 가진 카페지기 한동준의 도움을 받아 외딴곳에서 단체로 자살하기로 한다.

그러나 한동준은 네 명의 자살 지원자들에게 세상을 뜨기 전에 원하는 일을 하고 죽자고 제안하며 5일의 시간 동안 단체 자살을 유예한다. 기대나 희망이 없어 찾아든 자살 지원자들에게 죽음이 유예된 5일의 시간은 희망고문에 불과하다. 그렇게 희망을 가져봐야 어차피 닥쳐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갈수 없을 텐데 '왜' 희망을 주는 것인가. 개돼지 같은 하층민에게는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마저 사치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주려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지금도 실낱같은 희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메시아' 한동준은 이 세계에 천국의 문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죽음에 이를 수 있을까?


 

난...... 살고 싶었어.

 

 

 

가진 자의 논리에 따라 살아야 하는 인류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피폐해졌다. 내가 먼저 살고 봐야지 남까지 챙기면서 살아갈 여력은 남아있지 않다. 간혹 조금은 인간적인 모습을 가진 자들도 스스로 이중적인 모습을 자각하고 새로운 세계의 규칙에 따르게 된다.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가시질 않았다. 잔혹한 이 세계에서 진정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무엇이 그토록 인간을 잔인하게 만드는 것일까. 매일 죽음을 되뇌는 구차하고 하찮은 삶일지라도 악착같이 살아가는 이유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학습된 경험은 강화되어 새로운 악마를 낳았다. 변절자는 누구보다 새로운 규칙에 충성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더 인간적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음 문 앞에 선 사람은 누구일까. 아, 다시 돌아가고 싶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똑똑' 문을 두드리던 그 시절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