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자의 사랑
에릭 오르세나 지음, 양영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동거도 결혼처럼 인정해주는 나라 프랑스. <프랑스 남자의 사랑>이라는 제목을 보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제목 밑에 그려진, 비정상적으로 왜곡되고 뒤틀려 보이는 신체와 손가락을 가진 남자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책의 오른쪽 상단에 조그맣게 그려진 에곤 실레의 <아르투어 뢰슬러의 초상>을 본 순간, 이 책의 이야기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다양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인간 내면의 이야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틀 간격으로 이혼한 아버지와 아들. 아들 에릭의 나이는 28세, 그의 아버지 나이는 50대였다. 사랑에 계속 실패하는 이들 부자의 관심사는 지속되는 사랑이다. 사랑의 실패 이유를 찾던 에릭의 아버지는 비슷한 상황에서 배우 브루스 리와 그의 아들 브랜든 리가 맞는 죽음을 예로 들며 선대에서부터 사랑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상한 가설에 도달하게 된다. 왜 똑같이 애정전선에서 실패하는지, 사랑도 혹시 유전이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엉뚱한 연구는 에릭과 아버지를 쉼 없는 사랑 이야기 속으로 초대한다.

아버지의 조사에 따르면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가문은 양복쟁이였던 보르도 쪽 조상님 한 분이 쿠바로 이민을 결심하면서 어긋나게 되었다고 한다. 에릭의 증조할아버지이자 양복쟁이였던 아오우구스틴은 흉쇄유돌근 활성화를 위해 카페 콘솔라시온 테라스에 매일 두 시간 동안 머물라는 의사의 처방을 받게 되고, 그 사소한 시작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는 참말 같은 거짓말을 하는 거죠. 혁명이라는 끔찍한 거짓말이 그에겐 진실이었죠. 그를 하루하루 지탱해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일종의 척추였다는 말이죠. 125

 

 

에릭이 재혼하던 다음 날 사라진 아버지. 아버지에게 듣지 못한 아오우구스틴의 뒷얘기는 에릭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더욱 각인시킨다.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의 유전자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 자신에게서 떠난 아버지를 위해 재혼한 이자벨과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연기하기로 한다. 이자벨이 행복하다는 거짓 편지를 쓸 때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대부분의 일상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몸부림과 뒤엉킴의 순간이었을 뿐, 행복이라는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의 성공이 단지 결혼 생활의 유지에 있다면 거짓말이 가득한 이자벨의 편지는 더 이상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에 불과하다는걸, 서커스가 막이 내리면 떨어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는 걸, 무대가 아닌 진짜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걸.


그런데, 혹시 비밀이 진실을 더 잘 간직하는 건 아닐까?

 

미화하거나 필연적으로 왜곡할 수밖에 없는 일상. 내심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은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했던 에릭이지만 자신에게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사랑의 실패 이유를 찾아 헤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책의 시작 부분, 그 이유를 찾고 있던 에릭에게 쿠바 카리브 해의 풍경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말이지, 너도 잘 알다시피, 브레아 섬은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잖아. 작은 섬이 무려 365개나 되잖아. 1년의 하루마다 대응하는 섬이 하나씩  있는 셈이지. 그렇다면 결론은 이런 거지. 너한테 행복을 안겨준 바로 그 풍경이란 것 자체가 일시적이고 조각나 있다는 거야. 그러니 네가 대체 무슨 수로 여자에게, 그 여자가 충분히 기대할 권리가 있는 단단한 화합과 신뢰를 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우스갯소리처럼 흘려 들었던 맥스웰 방정식 세 번째 법칙은 두 극지방을 중심으로 자장이 최대라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했을 때 보았던 모습은 극지방에 있는 그를 보았을 때였다. 그와 가까워지면서 느끼는 내면의 괴리. 사랑의 실패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진실에 다가가는 순간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고 결혼계약은 깨지는 것이다. 사랑은 목적지를 향한 것이 아닌 길을 살피는 여정이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처럼, 가혹한 진실 너머에 사랑이 있다. "제발 부탁이니, 그 어떤 디테일도 잊어버리지 마세요, 기회가 되면 얼마든지 샛길로 빠지라니까요. 옛날 옛적에. 이젠 우릴 방해할 사람이라곤 없어요. 그리고, 우리에겐 시간도 많고요. 특히 사랑이 문제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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