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의 재림
나하이 지음, 강지톨 그림 / 좋은땅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경의선 책거리 낭송 인문학 수업으로 어린 왕자를 낭송했었다. 인생 전반전을 지나 후반전에서 만난 어린 왕자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서서히 삶의 중심축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 어린 왕자가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며 어린 왕자의 방황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길들인 것에 책임이 있다'라는 말은 청춘의 사랑과는 다른 삶의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어린 왕자>는 자기 별에 남겨진 장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까지의 여정을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의 눈으로 기록한 책이다. 어린 왕자가 떠나버린 사막은 황량함과 그리움이 가득했다. 어린 왕자가 떠난 후 조종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 장미와 만났을까. 사랑의 책임을 깨달은 어린 왕자는 어떤 삶을 만들어갈까. 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어린 왕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기본 편'이었다면 <어린 왕자의 재림>은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게 된 어린 왕자의 사랑 '실천 편'을 상상해서 써 본 한국소설이다. 

 

너도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어서 깨어날 준비를 해.
넌 네 별로 돌아가야 한다며? 15

어린 왕자는 뱀에 물려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새로운 소명을 갖고 자신이 떠나왔던 별 B612로 돌아간다. 하지만 언제나 깨달음의 발걸음은 늘 한 발자국 늦는 법이다. 장미는 자연의 섭리대로 시들어 죽고 만다. 존재의 부재는 뒤늦은 사랑의 현실을 보여준다. 사랑의 깨달음이 늘 해피엔딩이 될 수는 없었다. 사랑했던 장미의 죽음과 자기 별의 소멸은 더 이상 과거의 어린 왕자로 살 수 없음을 뜻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왕자에게는 장미가 남기고 간 씨앗과 상자 속의 양, 번데기라는 친구들이 있었다.

어린 왕자는 새로운 별에서 장미가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며 지구에 남겨진 조종사와 여우를 떠올린다. 장미를 책임지기 위해 돌아왔는데 책임져야 할 장미는 사라져버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었었다. 그런데 새로 태어난 장미와 나비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조종사와 여우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찾아 지구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예전에 지구에 가기 전 들렀던 여러 행성에 다시 방문하지만 행성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은 처음 방문했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린 왕자야, 네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될 일은 생각하지 마. 61

어린 왕자는 행성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자신만의 대답을 만들어 간다. 여섯 개의 별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에서 어린 왕자는 누군가의 신하도, 우상도 되고 싶지 않았고, 슬픈 기억이지만 장미와의 추억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떠나보지 않은 사람은 뜬구름 잡는 얘기밖에 할 수 없으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도 금방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린 왕자는 여우와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여우가 아닌 뱀을 만난다. 뱀은 여우가 기다림에 지쳐 죽었다고 했다. 늘 한걸음 늦은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종사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가는 길에 길들여지고 싶어 하는 사막 고양이와 길들여지고 싶어 하지 않는 낙타와 자기보다 아이들을 위하는 선인장을 만난다. 그리고 드디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조종사를 만나게 된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조종사와 함께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어린 왕자>의 결말은 상상 속에 남겨지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본편보다 뛰어난 속편은 없고 독자들의 높아진 눈높이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편을 쓴 이유는 어린 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가기 위해 스스로 뱀에게 독을 청하는 것과 같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며, 소멸은 탄생을 의미한다고 했다. <어린 왕자>를 통해 만났던 자기 안의 어린 왕자는 책이 출판되는 순간 더 이상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실존을 위해 마시는 독배라면 기꺼이 마셔주겠다는 작가의 신념이 느껴졌다.

모든 것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는 카멜레온에게 세상은 감상 따위는 필요 없는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삭막한 세상일뿐인 것처럼 사막을 걸으며 겪는 갈증은 신기루 같은 오아시스만을 꿈꾸게 한다. 하지만 조종사가  어린 왕자를 위해 목숨을 내어줬을 때 그의 마음속에 죽어있던 누군가는 깨어났다. <어린 왕자의 재림>은 사랑의 책임을 깨닫고 다시 별에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을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법칙은 변하지 않고 녹록지 않은 현실의 법칙도 여전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지켜야 하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삶이 내게 주는 시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에 책임이 따른다는 깨달음은 시작일뿐이다. 우리는 삶에서 깨지고 부서지면서 다시 또 사랑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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