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보이 - 2019 뉴베리 영예상 수상작
캐서린 머독 지음, 이안 숀허 그림, 김영선 옮김 / 다산기획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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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THE BOOK OF BOY <더 보이>

캐서린 길버트 머독 지음, 이얀 숀허 그림. 김영선 옮김

아담과 이브는 탐스러운 사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신의 뜻에 따라 사과를 탐하지 않았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에덴동산에서 끝없는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먹음직한 사과의 유혹은 매혹적이다. 하지만 쭈글쭈글한 오래된 사과였다면, 그들이 호기심을 가졌을까. <더 보이>는 쭈글쭈글한 보잘것없는 사과를 먹기 위해 겅중거리는 염소들을 달래며 사과나무에 오르는 곱사등을 가진 소년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사과나무에 오른 소년 ‘보이’에게 보이는 것은 순례자였다. 소년의 모습을 본 순례자 ‘서컨더스’는 소년에게 성-베드로의 계단에서 축일을 위한 순례 여행에 동행할 것을 제의한다. 소년은 주인에게 어렵게 허락을 받고 서컨더스와 동행한다. 소년은 동물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처음 동물들과 서로 말을 주고받는 지문을 읽었을 때는 외로운 소년의 상상놀이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앞으로 닥칠 위험 속에서 탈출의 실마리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서컨더스는 순례 중이라 했지만 사실 지옥에서 탈출해 일곱 개의 유물(갈비뼈, 이, 엄지손가락, 정강이, 뼛가루, 두개골, 무덤)을 찾고 있었다. 첫 번째 갈비뼈는 이미 손에 넣었고, 두 번째 유물을 손에 넣기 위해 뭐든 잘 타고 오르는 사람이 필요해서 소년에게 동행을 제의한 것이었다. 서컨더스는 뜨거워 만질 수 없는 유물을 소년은 손쉽게 등에 짊어졌다. 소년은 첫 번째 유물이 담긴 자루를 자신의 곱사등에 올리자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유물이 담긴 자루를 짊어지며 곱사등이 사라지자, 태어나 처음으로 평범한 삶의 행복감을 경험한다.

두 번째 유물을 찾고 돌려보내려던 서컨더스의 계획과는 다르게 소년이 처음 느껴본 행복감은 모험을 떠날 원동력이 된다. 소년은 일곱 개의 유물을 모두 찾아 서컨더스와 함께 로마로 가서 평범한 소년으로의 재탄생을 희망한다. 고생 끝에 일곱 개의 유물을 모두 찾고 서컨더스는 자신의 바람대로 천국으로 사라지지만, 소년은 평범한 소년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현실에 남는다.

사실 괴물처럼 보이는 소년의 곱사등 안에는 천사의 날개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를 처음 발견한 신부님의 말대로 끝까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날개의 존재와 가치를 제대로 보지도, 알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드러내지 말라고 했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면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된다.

"처음에 나는 날개를 애써 무시했다. 내가 소년이 되면 날개를 잃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날개는 만져 주면 너무나 좋아했고, 깃털들은 씻어 주면 행복해했다. 새장 속의 새들은 스스로 몸을 단장한다. 붙잡힌 매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도 몸단장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p 278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괴물로 취급받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숨겨진 날개의 가치는 더욱 빛났다. 스스로 드러낼 용기가 있을 때만이 날개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위험한 사람이고 생각했던 서컨더스와 모험을 떠났고, 자신의 쓰임이 다했음에도 모험을 계속하겠다고 선택했으며,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던 신부님 말씀을 조금씩 극복해 나갔다. 천사인 소년은 여전히 날개를 숨겨야 하겠지만, 더 이상 어깨를 움츠리며 걷지는 않을 것이다.

서컨더스는 자신은 마법사가 아니라 그저 '지혜'와 '열쇠'가 있을 뿐이라 했다. 지혜와 열쇠는 서컨더스처럼 어느 순간 내게 주어질 수 있지만 그것을 선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은 소년의 용기였다. 소년이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깃털을 조심스럽게 씻었을 때 벅차오르는 행복감과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며 기쁨을 느끼는 모습은 충만한 기쁨을 주었다.

책을 읽는 내내 유물을 찾는 긴장감보다 소년의 곱사등 안에서 자라고 있는 날개를 어떻게 감출지 걱정되었다. 꺼내어 빗질을 하고 씻을수록 튼튼해지고 커지는 소년의 날개를 보며 내 안에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담과 이브가 신의 말씀을 거역하고 잃어버린 것은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컨더스는 죽은 사람의 유물로 이루는 헛된 희망이 아니라, 소년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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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민화로 떠나는 신화여행 인문여행 시리즈 2
하진희 지음 / 인문산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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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를 공부하다 신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간이 남긴 그림과 글에는 삶을 관통하는 삶의 진리가 상징처럼 담겨있다. 이야기처럼 그림도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유가 있다. 인도 신화는 널리 읽힌 서양의 그리스 로마신화만큼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같은 아시아에 속해 있는 문명의 발생지 인도 신화를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옛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한국의 민화는 조선 후기 서민층 사이에서 유행하며 일상생활양식과 관습에 바탕을 두고 계승되었다. 반면 인도 민화는 13억 인구 수보다 많은 힌두교의 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도인들에게 신화는 현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를 인도 민화는 이야기한다. 이 책 <인도 민화로 떠나는 신화여행>은 동일한 제목으로 2010년에 나왔던 책의 개정판이다. 목차를 살펴보면 표지만 바뀐 것 같지만, 문명의 발생지로 과거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현재까지 살아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야기를 민화와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인도 민화 지역 분포도에 따라 분류된 세 가지 민화 양식 중 왈리 부족의 민화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소똥을 발라 바탕을 마련한 천이나 흙벽 위에 흰쌀가루로 그림을 그렸는데 작은 삼각형 두 개로 표현한 인간의 형상이 졸라맨을 연상시켰다. 한 장의 그림에 서사를 표현한 점이 특징이었다. 결혼식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면 결혼식 준비와 진행 과정, 결혼식 후 피로연 모습과 일상의 모습까지 모두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서사가 들어있지만 계획되지 않는 구성은 시작과 끝을 짐작할 수 없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을 연상시킨다.


왈리 그림에서 빠지지 않는 사람, 나무, 동물은 그들의 삶에 가장 소중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신을 숭배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지내는 모습은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주었다. 결혼식 하루 전날 부부가 살 집의 부엌 벽에 그려진 벽화는 몇 달 후면 지워져버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림 속 파라가타 신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마지막 장 '왈리의 옛날이야기'는 우리의 옛이야기와 비교하며 가장 재밌게 읽었던 부분이다. 가난한 남자에게 언제든 필요한 양만큼의 곡식을 얻게 해 주는 <마술 항아리>가 부잣집에 가서는 온갖 징그러운 벌레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부분에서 흥부와 놀부가 박을 타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두운 숲속에서 귀신을 만났지만 농부의 기지로 살아남은 <귀신과 농부>와 친절한 호랑이의 꾀임에 빠져서 잡아먹힐 뻔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목숨을 건진 거북이 이야기 <욕심 많은 호랑이>에서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얘기를 생각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달라도 이야기 속에 숨은 뜻은 같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인도 민화 속 사람의 형상은 주인공이라기보다 한 부분으로 다가왔다. 한치의 여백을 허용하지 않고 빽빽이 채운 공간 속에서 인간도 하나의 점이나 선, 면이었다. 그림은 대부분 좌우 대칭형으로 안정감과 균형감을 보여준다. 신과 인간과 자연이 균형을 이루던 삶을 그림으로 마주하니 마음이 평안했다. 현대 인류가 불행한 것은 이런 균형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때 인도 여행이 붐처럼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바쁜 현대인의 삶과는 동떨어진 세계에 대한 동경이 민화를 보며 다시 꿈틀거렸다. 문명이 들어서기 전 온전한 신의 세계와 글자가 사라진 곳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그림의 힘을 인도 민화에서 보았다. 좀 더 많은 옛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문자에 익숙해진 문명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뒷부분에 부록으로 수록된 왈리 그림 따라 그리기도 재미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며 자유롭게 그려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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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와 드레스메이커 비룡소 그래픽노블
젠 왕 지음, 김지은 옮김 / 비룡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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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스스로 선택하고 가꾸는 것은 소중한 거야

하녀처럼 살던 소녀가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한다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이라면 이 책을 보라. <왕자와 드레스메이커>는 여장을 하고 드레스를 즐겨 입는 세바스찬 왕자와 드레스를 만드는 소녀 프랜시스, 두 주인공의 만남과 성장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이야기다.

프랜시스는 가난한 재봉사다. 왕자의 눈에 들기 위해 치장하는 파티 따위에 관심 없는 아가씨의 요청으로 프랜시스는 특이한 드레스를 만들었다. 파격적인 드레스는 세바스찬 왕자의 눈에 띄어 그의 전속 재봉사가 된다. 왕자의 본분은 왕에게 나라를 물려받아 다시 왕이 되는 것. 아버지의 아버지, 그 위에 아버지도 모두 장군이었던 집안 계보는 그에게 암묵적으로 똑같은 미래를 강요했다. 그러나 세바스찬 왕자가 가장 행복한 시간은 여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는 시간이었다.

그의 내면 속에 도사리던 욕망은 재봉사 프랜시스를 만난 뒤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그에게 꼭 맞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때마다 그림자처럼 숨어있던 욕망은 더욱 강해진다. 욕망이 실현된 사람의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에너지는 프랜시스에게도 영향을 준다. 단지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꿈은 왕자의 드레스메이커로 대리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왕자의 조력자만으로는 자신도 세상으로 드러날 수 없음을 깨닫고 안전과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왕자의 곁을 떠난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 주던 드레스메이커가 사라지자 왕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시기를 맞는다. 그녀를 돕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야 했지만,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왕이라는 지위와 가족들의 시선에 자신을 드러낼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평범한 왕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세바스찬 왕자는 그녀가 만들어준 드레스를 모두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드레스를 입는다. 그러나 결혼하기로 예정된 줄리아나 공주의 오빠와 마주치면서 그의 실체는 만천하에 드러난다. 모든 사실이 드러난 세바스찬 왕자와 자신만의 길을 택한 프랜시스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서로 다시 만난다.

청소년기는 거울 속에 비친 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며 다가서게 되는 시기다.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내면의 욕망 사이에 갈등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청소년기의 자아정체성 형성과 자존감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자신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세바스찬 왕자와 프랜시스는 보여준다.

두 주인공의 중성적 이미지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산업화로 새롭게 등장한 신흥 계층에 의해 왕정이 서서히 무너졌듯, 아이들은 세상이 만든 보이지 않는 위계와 질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사랑할 용기를 꿈꿔야 한다. 그들의 선택은 번데기를 탈출한 나비처럼 참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내면에 숨겨진 욕구를 실현하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또래 친구들에게도 긍정적인 힘을 준다. 그들의 성장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은 혼자였으면 이루기 힘든 일들을 거울을 바라보듯 서로를 바라보며 시너지를 만들어 나갔다는 점이다. 작가 젠 왕의 그림은 그들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무한한 에너지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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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 -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마라
얀 드로스트 지음, 유동익 옮김 / 연금술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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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로 살 때 가장 행복하다"

‘기대다’라는 뜻은 근거와 이유를 둔다는 것이다. 생각에 온전히 기대려면 모호함이 아닌 분명함이 되도록 생각에 다가서야 한다. 나로 산다는 것은 내 생각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관점과 개성은 생각 속에 드러나며 나로 살 때 인간은 행복하다.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여러 경계에 부딪혀 생각해야 한다. 모호한 경계를 분명하게 만드는 것은 치열하게 나만의 생각을 분리해 내게 맞는 인생철학을 세우는 것이다. <생각에 기대어 철학 하기>에서는 여섯 갈래로 나누어진 철학자의 삶의 철학과 행복을 들여다보며 생각의 경계를 세우는 연습을 할 수 있다.

534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에 총 6강으로 구성된 책에는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학파,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샤르트르, 푸코의 철학이 소개되어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 주장하면서도 서로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은 달랐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행복은 곧 쾌락에 있다고 주장한 반면, 스토아학파는 금욕적인 덕의 생활에 행복이 있다고 말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두려움의 이유를 알면 행복할 수 있다 생각하고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두려움을 없애려 했다. 스토아학파는 일원론을 주장하며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어 선, 행복, 자연을 따르는 삶은 이성과 동일하다 보았다. 이성을 따르지 않고 감정대로 살아가는 행위는 행복과 멀어지는 행위라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토아학파와 달리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이성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현재 있는 것만을 보지 않고 될 것, 될 수 있을 것을 동시에 보았다. 그는 행복이란 우리의 인간 됨을 바로잡는 것이며, 선한 삶을 위한 근본은 우리 본성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스피노자는 삶의 필연을 이해할 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범신론 일원론을 수립했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이성이며 정신이며 신이다 생각했으며, 결정된 인생에 대해 고통을 겪는 자세는 현명하지 못하다 보았다. 샤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비정립적 자기의식 상태를 일컫는데, 이는 인간을 진정한 자유의 세계에 눈뜨게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욕망을 쫓아 이루어진 삶인지, 정말 행복한 삶인지 물어보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라는 말이 인간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준다. 철학은 곧 생각하는 능력과 의심하는 능력을 키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길러 준다. 인간만이 자신에게 묻고 답하며 새로운 길을 끊임없이 찾아 나설 수 있다. 각각의 철학자들의 생각에 맞닥뜨리면 나의 경계를 알게 된다.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철학자들도 모두 삶에 의문과 해답을 찾아가며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었다. 그 대답은 각자가 다르며 누구도 자신의 행복에 대한 기준을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다. 생각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이미 철학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철학이 없다 해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다. 반대로 인생철학을 세운다고 행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내 생각이 기초가 되지 않은 삶은 공허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가꾸는 데 선택권이 있으며 바람직한 삶이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자유를 돌보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저자의 말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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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다른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9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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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피부에 넣는 필러를 녹일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며 피부 조직에 흡수되어 변형된다고 한다. 주입된 필러는 무게 때문에 뼈에 구멍을 만들 수 있다. 문득 완전히 제거할 수 없으며 평생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무게를 가진 필러가 책 속의 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은 사람들의 생각을 환기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떤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인가. 책을 덮자마자 ‘이게 뭐지?’하고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읽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두 가지 이야기는 피부에 삽입된 필러처럼 묘하게 얽히고설키어 어느 것이 주입된 필러이고 실제 피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책은 소설가가 펼쳐 놓은 상상과 허구의 세계가 결코 상상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평생토록 무게를 가지고 뼈까지 내려앉게 만드는 필러처럼.

“그게 정말 있는지 없는지 같은 건 당시의 내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이 우리에게 몹시 의미 있는 장면이 되었다는 점이에요." p.65

“당신이 무얼 기억하든 그런 사람은 없어. 연구실 같은 건 없어. 당신이 기억하는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그냥 그것 모두 다 이 소설일 뿐이잖아. 내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그렇다고 믿는 이야기들일 뿐이라고.” p.109

두 이야기는 순서를 두고 교차로 진행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신약개발사업을 하고 있는 남편을 둔 아내의 독백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남편은 키우지도 않는 개를 찾는 전단지를 만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결혼을 앞둔 여행에서 찍은 사진 속 까만 점을 고래라고 말하는 남자와 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믿어 주는 것이, 아니 믿기로 결정한 여자의 모습은 뭔가 부자연스럽다. 인간은 합리성에 따라 논리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심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키우지도 않는 개를 찾는 남편을 위해 비슷한 개를 사 온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가 남편의 약이라 말했던 약을 보며 그녀의 약이라 말하며 그녀는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라 말한다. 뒤늦게 뭔가 놓친 부분이 있었는지 첫 페이지로 돌아가 보았지만, 이야기 속에는 두 등장인물의 정상과 비정상을 가늠할 수 있는 근거는 보이지 않았다. 둘 중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일까.

“실은, 당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어.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그건 실수였지. 당신에게는 말해줘야 할 것 같았어……. 내가 말하면, 그게 무엇이 됐든 미양은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미양은 나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를 만큼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세상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양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지금 내 감정이 진짜라는 걸, 내 사랑에 하나도 거짓이 없다는 걸, 미양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지금 내가 진짜 나라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지?”p.58

두 번째 이야기는 한 소설가와 그의 아내 미양에 대한 이야기다. 미양은 양산에 사는 선배네 집을 방문한 뒤부터 집안의 가구가 성에 차지 않는다. 함께 가구점에 들러 가구를 살펴보는 동안 가지 않을 여행지와 있지 않는 가구를 들먹이며 점원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피는 소설가와 무심한 아내의 모습은 여느 부부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소설가를 닮은 사람을 남편이라며 찾는 광고가 스치듯 지나간다.

미양은 결혼 전에 도박은 안 된다는 것과 소설 속에 자신을 등장시키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소설가의 책 속에 주변인들의 이야기는 조금씩 각색되어 들어가게 마련이다. 미양은 소설가의 책 속에 등장하는 자신의 부분들이 모두 자신으로 여겨질까 염려한다. 소설가가 중고서점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독자를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묘하게 흘러간다. 그녀는 소설가로서 그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남편으로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도망쳤지만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된다.

소설가의 소설인지 실제 상황인지 두 이야기의 접점은 그곳에서 시작된다. 소설의 시작은 늘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전해진 이야기의 조각들이 파편처럼 조각난 상태로 있다가 붙여지고 잘라내어 재탄생 되는 것이다. ‘그이의 얼굴이 무척 낯설더라고요.’라는 말이 ‘맹세코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의 얼굴’이 되고, 제약회사에 다닌다던 남편은 신용불량자로 탈바꿈되었다. 소설가는 이런저런 살을 붙여 다음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런데 인터넷 게시판에 등장한 글에서 소설가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쓴 이야기와 비슷했다. 마치 자신이 짜깁기해 생성한 새로운 이야기가 도용된 느낌이 든 것이다. 더구나 남편을 찾는다는 인터넷 게시글 댓글에는 자신의 사진과 자주 가는 중고서점의 주소가 올라와 있었다. 소설가는 급기야 게시글의 전화번호로 연락하게 된다. 소설가는 글이 아닌 진짜 현실 속 사건으로 빠져든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달인이다. 그들이 지어내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는 어디일까. 그의 작품 <엿보는 손>에서는 누군가가 써준 자서전의 글을 자신의 삶이라 믿고 살았던 아버지가 나온다. 한권의 책을 읽은 뒤 달라진 삶은 누가 부담하느냐는 작가의 외침은 끝나지 않고 <당신과 다른 나>를 출판해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다시 묻고 있었다. 관심 품목을 클릭할 때마다 소셜 웹 광고창에 뜨는 광고들처럼 내가 읽는 책들이 집계되어 미래의 일상을 결정하게 된다면 소설가의 책무가 조금 무거워질까.

툭. 책표지의 전체 그림이 엽서 크기로 따로 제작되어 끼워져 있었는데 바닥에 떨어졌다. 전체 그림을 보았을 때 생경함. 내가 보고 경험하는 내 현실도 표지로 선택된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부분을 들춰보고 맞춰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현실 앞에 경계는 무의미해 보인다. 소설가는 삶의 부분을 섬세하게 발췌하고 오려내어 극한으로 몰아가 즐기는 사람이다. 독자는 소설가의 장단에 맞춰 진흙탕에 빠지기도 하고 늑대를 만나기도 하며 현실의 극한에 다가가 보는 것으로 족하다. 오늘 내가 열어 볼 상자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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