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컬렉션 -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단 하나의 보물
KBS 천상의컬렉션 제작팀 지음, 탁현규 해설.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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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없었다면 나는 첨성대의 신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수학여행 단골 여행지가 경주였는지 납득시켜 주었다면, ‘천상의 컬렉션’은 지금 우리가 왜 문화재를 다시 봐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박물관에 견학을 가도 솔직히 별 감흥이 없었다. 화려한 액자로 만들어진 설명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천상의 컬렉션>은 한국 예술 천오백 년 사, 최고의 작품들을 책으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선조들의 기술과 미학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국가 대표격 문화재를 깊이 보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책은 회화, 공예, 도자, 조각, 전적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탐내던 '책가도'에 대한 내용이 가장 흥미로웠다. 정조는 화려한 업적만큼이나 영화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졌던 왕이다. 영화배우 현빈이 군 제대 후 복귀작으로 선택한 영화 <역린>도 정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화려한 용모를 단숨에 가렸던 책가도의 모습이 이 책 속에 등장한다.

 

책에 따르면 원래 정조가 책가도를 유행시킨 뜻은 검소하게 학문에 정진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책가도의 소재는 책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건으로 점차 영역을 넓혀가게 되었고, 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청나라의 물건을 가질 수 없었던 양반들이 책가도에 책 대신 다양한 물건을 그림으로 그려 욕망을 충족했다고 한다. 서민들의 책가도는 행복, 장수, 출세를 염원하는 상징이 솔직하게 부각되어 있는 점이 양반들의 책가도와 다른 점이었다. 계급에 따른 인간의 모습과 욕망의 표현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침 책장을 넘기다 보니 영화 속에 등장한 책가도의 모습이 보였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책가도는 장한종의 책가도로 정조의 책가도가 아니라 나중에 궁중을 나와 화려해진 책가도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정조가 화려함을 좋아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처럼 어울리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살아있는 아이를 넣어 만들었다는 에밀레종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 문화재를 폄하하려는 일제의 숨은 의도가 있었고, 의자왕이 선물해 일본 황실에 전해 내려오는 백제 바둑판은 오늘날의 기술로 재현하기까지 제작기간만 꼬박 3년이 걸렸다는 비화도 놀라울 뿐이다. 나라의 역사를 알면 애국심이 절로 생긴다더니 일제 시대 때 출토된 금관의 수난기를 읽고 나라 잃은 설움이 북받쳤다.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와 전쟁의 아픔은 문화재의 수탈과 소실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나 민족의 아픔을 느끼게 했다.

<천상의 컬렉션>은 무신들의 권력 과시용이었던 예술의 투자가 고려의 화려한 예술품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새로운 나라 사랑의 불씨를 지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책이다.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이는 법이다. 동계 올림픽 때 하늘에 쏘아 올린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며 선조들이 얼마나 지혜롭고 위대했는지 느꼈다면 이제는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명품 가방이 사랑받는 이유는 누구나 그것이 명품인지 알고 있어서다. 제대로 아는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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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운동할 나이가 되었네요 - 몸도 마음도 내 맘 같지 않은 어른들을 위한 본격 운동 장려 에세이
가쿠타 미츠요 지음, 이지수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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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라고 생각하면 일단 하기 싫다. 땀을 흘리면 끈적이고 냄새도 싫다. 어릴 때는 할아버지를 따라 새벽에 배드민턴을 치러 다니고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몸으로 하는 일은 잘 안돼서 피하게 된다. 그나마 하는 운동이라면 가볍게 걷는 정도다. 추운 날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뒹굴뒹굴하며 책을 읽거나 더운 날은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한가롭게 지내는 게 더 행복하다.

만으로 마흔 살이 되면 생애 전환기 건강 검진을 받게 되어 있다. 삼십 대에서 성장을 멈춰버린 강인한 정신력으로 여전히 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몸은 서서히 늙고 있었다. 근육량도 부족하고 콜레스테롤이 높아지는 마른 비만체질로 가고 있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았다. 이제는 재밌고 좋아서 운동을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운동을 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어느새 운동할 나이가 되었네요>는 운동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게 아닌데도 계속 하고 있는 가쿠타 미쓰요의 모습을 보면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읽기 시작했다.

싫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계속할 수 있는 일도 있다.

그녀의 책을 보면 이랬다가 저랬다가 흔들리는 마음이 꼭 내 맘과 같다. 결론을 기대하지 않아도 되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 '이거 다이어트에 강추해요, 진짜 좋아요, 저는 운동 없이는 못 살아요.' 이런 가식적인 얘기들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달리는 그녀와 그녀의 머릿속 생각들이 지루하게 나열되어 있다. 운동 따위는 좋아하지 않으면서 운동하고 있는 그녀, 운동 장려 에세이 따위는 좋아하지 않으면서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이 묘하게 비슷했다. 특별한 이야기도 없는데 자꾸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이유는 그녀가 달리는 이유와 같았다. 싫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계속할 수 있는 일!

40대 중반쯤 되면 대개는 자신이 대충 하는 것과 대충 하지 않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노력해도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청소를 대충 하든 혼자 있을 때 저녁식사를 대충 만들든 그건 이제 일상적인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다. 물건을 살 때 하는 암산도 자동차 운전도 '못한다'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기 때문에 안 한다. 안 하려 하는 자신을 부끄럽다고도 비겁한 녀석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142

그녀가 네 번째 풀코스 마라톤을 준비하던 때, 스멀스멀 올라오던 꾀부리고 싶은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제대로 된 목표를 세웠을 때였다. 마라톤에서 제대로 된 목표라고 해봐야 기록 단축밖에 없는데 '제대로' 연습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꾀부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조금 더 노력할 수 있지만 괴로우니까 노력하지 않을 뿐인, 한계라고 말하는 자신의 비겁함을" 말하는 모습에서 내가 운동을 시작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제대로 된 목표를 세워버리니까 시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뭘 그렇게 시작하기도 전에 열심히 하려고 해. 그래서 시작도 못하는 거잖아. 걷지 않는다는 것으로 위안을 받으면서 달리고, 달리다 보면 뛰고 싶은 날이 오기도 하겠지. 뭐, 그런 때 오지 않는다고 해도 걷지 않는 것을 칭찬해 주면 되잖아. 노력할지 말지는 다음에 정해도 된다고.

 

책은 나이트 하이킹과 보르도에서 열린 메독 마라톤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끝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이 흥미진진했던 것일까. 나이트 하이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드랜턴에 의지한 채 한 발자국씩 내딛는 기분은 어떨까. 랜턴을 끄면 곧 휩싸이게 될 어둠과 정적 속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끊임없이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와인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메독 마라톤은 그야말로 마지막 성찬과도 같은,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이런 재미가 있는데도 뛰지 않을 거야?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린다. 운동에 관한 고정관념을 날려준 그녀에게 감사를. 이제 슬슬 달려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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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의 재림
나하이 지음, 강지톨 그림 / 좋은땅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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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책거리 낭송 인문학 수업으로 어린 왕자를 낭송했었다. 인생 전반전을 지나 후반전에서 만난 어린 왕자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서서히 삶의 중심축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 어린 왕자가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며 어린 왕자의 방황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길들인 것에 책임이 있다'라는 말은 청춘의 사랑과는 다른 삶의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어린 왕자>는 자기 별에 남겨진 장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까지의 여정을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의 눈으로 기록한 책이다. 어린 왕자가 떠나버린 사막은 황량함과 그리움이 가득했다. 어린 왕자가 떠난 후 조종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 장미와 만났을까. 사랑의 책임을 깨달은 어린 왕자는 어떤 삶을 만들어갈까. 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어린 왕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기본 편'이었다면 <어린 왕자의 재림>은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게 된 어린 왕자의 사랑 '실천 편'을 상상해서 써 본 한국소설이다. 

 

너도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어서 깨어날 준비를 해.
넌 네 별로 돌아가야 한다며? 15

어린 왕자는 뱀에 물려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새로운 소명을 갖고 자신이 떠나왔던 별 B612로 돌아간다. 하지만 언제나 깨달음의 발걸음은 늘 한 발자국 늦는 법이다. 장미는 자연의 섭리대로 시들어 죽고 만다. 존재의 부재는 뒤늦은 사랑의 현실을 보여준다. 사랑의 깨달음이 늘 해피엔딩이 될 수는 없었다. 사랑했던 장미의 죽음과 자기 별의 소멸은 더 이상 과거의 어린 왕자로 살 수 없음을 뜻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왕자에게는 장미가 남기고 간 씨앗과 상자 속의 양, 번데기라는 친구들이 있었다.

어린 왕자는 새로운 별에서 장미가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며 지구에 남겨진 조종사와 여우를 떠올린다. 장미를 책임지기 위해 돌아왔는데 책임져야 할 장미는 사라져버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었었다. 그런데 새로 태어난 장미와 나비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조종사와 여우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찾아 지구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예전에 지구에 가기 전 들렀던 여러 행성에 다시 방문하지만 행성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은 처음 방문했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린 왕자야, 네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될 일은 생각하지 마. 61

어린 왕자는 행성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자신만의 대답을 만들어 간다. 여섯 개의 별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에서 어린 왕자는 누군가의 신하도, 우상도 되고 싶지 않았고, 슬픈 기억이지만 장미와의 추억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떠나보지 않은 사람은 뜬구름 잡는 얘기밖에 할 수 없으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도 금방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린 왕자는 여우와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여우가 아닌 뱀을 만난다. 뱀은 여우가 기다림에 지쳐 죽었다고 했다. 늘 한걸음 늦은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종사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가는 길에 길들여지고 싶어 하는 사막 고양이와 길들여지고 싶어 하지 않는 낙타와 자기보다 아이들을 위하는 선인장을 만난다. 그리고 드디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조종사를 만나게 된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조종사와 함께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어린 왕자>의 결말은 상상 속에 남겨지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본편보다 뛰어난 속편은 없고 독자들의 높아진 눈높이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편을 쓴 이유는 어린 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가기 위해 스스로 뱀에게 독을 청하는 것과 같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며, 소멸은 탄생을 의미한다고 했다. <어린 왕자>를 통해 만났던 자기 안의 어린 왕자는 책이 출판되는 순간 더 이상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실존을 위해 마시는 독배라면 기꺼이 마셔주겠다는 작가의 신념이 느껴졌다.

모든 것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는 카멜레온에게 세상은 감상 따위는 필요 없는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삭막한 세상일뿐인 것처럼 사막을 걸으며 겪는 갈증은 신기루 같은 오아시스만을 꿈꾸게 한다. 하지만 조종사가  어린 왕자를 위해 목숨을 내어줬을 때 그의 마음속에 죽어있던 누군가는 깨어났다. <어린 왕자의 재림>은 사랑의 책임을 깨닫고 다시 별에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을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법칙은 변하지 않고 녹록지 않은 현실의 법칙도 여전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지켜야 하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삶이 내게 주는 시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에 책임이 따른다는 깨달음은 시작일뿐이다. 우리는 삶에서 깨지고 부서지면서 다시 또 사랑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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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국어 공부법 - 밑줄 쫙 서한샘 박사의 지상 강의
서한샘 지음 / 한샘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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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또래 엄마들 중에서 어릴 때 한샘 선생님 강의나 책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국어는 한샘'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는데 서한샘 선생님께서 참고서가 아닌 국어공부법에 관한 책을 출판하셨다고 해서 찾아보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선생님께 한 수 배워 아이들과 즐겁게 국어를 공부할 수 있다면, 한샘 선생님처럼 내 이름으로 된 참고서 하나 정도는 남길 수 있다면 하는 꿈에 부풀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독서지도와 논술지도를 공부하며 이제는 국어공부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이 내심 기뻤다.

서한샘 선생님의 <중학교 국어공부법>은 중학교 국어를 '다섯 개 기둥 세우기'라고 생각하고 시, 소설, 논설문, 문법, 어휘로 나누어 예문과 함께 국어 공부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서문에서도 밝혔듯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손녀를 위해 쓴 책답게 어린 손녀에게 말하듯이 설명하는 문체가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온다. 다른 책들과의 차별점은 한 가지 기둥 설명이 끝날 때마다 삽입된 추억의 사진들을 꼽을 수 있다. 사진 속에는 그의 꿈 너머 꿈, 어린 손녀에게 전해 주고 싶은 자신의 일생 이야기가 화석처럼 고스란히 담겨있다. 저자의 사진들은 공부가 끝이 아니라 공부를 하면 자신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삶을 즐길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다섯 개의 기둥 중에서 가장 열심히 읽은 부분은 국어의 네 번째 기둥 '문법'이었다. 독서지도사 과정을 공부하면서도 가장 어려웠던 국어 문법 과정을 기초부터 배울 수 있었다.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는데 서한샘 선생님께서 수년간 쌓아올린 가르침의 노하우를 만나볼 수 있어 유익했다. 선생님 말씀에 따라 책 속 문제를 풀었을 뿐인데 음운의 체계가 물 흐르듯 머릿속에 들어왔다. 좋은 선생님은 많은 것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을 쉽게 가르치는 것이 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닌데 왜 학생들은 공부해야만 하나? 지금 초등학교 중학년인 첫째 아이도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주 물어본다. 학교 공부만 공부가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있지만 입시를 목표로 하는 수단에만 얽매여 넓은 시야를 갖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녹록지 않는 현실을 알아버린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다그치지만, 아이들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납득시키기는 여전히 어렵다. 부모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하고 남들이 하니까 시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아이들은 제대로 세울 수 있는 경험이 부족하기에 부모는 늘 아이보다 더 넓은 시야에서 판단을 내리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서문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린 나이에는 운명이 없지만 4,50대가 되면 운명은 있다는 말이 참으로 뼈아프게 다가왔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은 감퇴하고, 체력은 부족한데 해야 할 일은 많아진다. 뒤늦게 운명길을 개척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몸소 느끼기 때문이다. 국어 공부의 다섯 기둥을 세우는 방법도 유익했지만 뼈 있는 말씀에 공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공부를 가르치고 싶은 부모라면 한샘 선생님의 프롤로그는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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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자의 사랑
에릭 오르세나 지음, 양영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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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도 결혼처럼 인정해주는 나라 프랑스. <프랑스 남자의 사랑>이라는 제목을 보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제목 밑에 그려진, 비정상적으로 왜곡되고 뒤틀려 보이는 신체와 손가락을 가진 남자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책의 오른쪽 상단에 조그맣게 그려진 에곤 실레의 <아르투어 뢰슬러의 초상>을 본 순간, 이 책의 이야기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다양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인간 내면의 이야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틀 간격으로 이혼한 아버지와 아들. 아들 에릭의 나이는 28세, 그의 아버지 나이는 50대였다. 사랑에 계속 실패하는 이들 부자의 관심사는 지속되는 사랑이다. 사랑의 실패 이유를 찾던 에릭의 아버지는 비슷한 상황에서 배우 브루스 리와 그의 아들 브랜든 리가 맞는 죽음을 예로 들며 선대에서부터 사랑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상한 가설에 도달하게 된다. 왜 똑같이 애정전선에서 실패하는지, 사랑도 혹시 유전이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엉뚱한 연구는 에릭과 아버지를 쉼 없는 사랑 이야기 속으로 초대한다.

아버지의 조사에 따르면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가문은 양복쟁이였던 보르도 쪽 조상님 한 분이 쿠바로 이민을 결심하면서 어긋나게 되었다고 한다. 에릭의 증조할아버지이자 양복쟁이였던 아오우구스틴은 흉쇄유돌근 활성화를 위해 카페 콘솔라시온 테라스에 매일 두 시간 동안 머물라는 의사의 처방을 받게 되고, 그 사소한 시작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는 참말 같은 거짓말을 하는 거죠. 혁명이라는 끔찍한 거짓말이 그에겐 진실이었죠. 그를 하루하루 지탱해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일종의 척추였다는 말이죠. 125

 

 

에릭이 재혼하던 다음 날 사라진 아버지. 아버지에게 듣지 못한 아오우구스틴의 뒷얘기는 에릭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더욱 각인시킨다.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의 유전자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 자신에게서 떠난 아버지를 위해 재혼한 이자벨과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연기하기로 한다. 이자벨이 행복하다는 거짓 편지를 쓸 때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대부분의 일상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몸부림과 뒤엉킴의 순간이었을 뿐, 행복이라는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의 성공이 단지 결혼 생활의 유지에 있다면 거짓말이 가득한 이자벨의 편지는 더 이상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에 불과하다는걸, 서커스가 막이 내리면 떨어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는 걸, 무대가 아닌 진짜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걸.


그런데, 혹시 비밀이 진실을 더 잘 간직하는 건 아닐까?

 

미화하거나 필연적으로 왜곡할 수밖에 없는 일상. 내심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은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했던 에릭이지만 자신에게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사랑의 실패 이유를 찾아 헤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책의 시작 부분, 그 이유를 찾고 있던 에릭에게 쿠바 카리브 해의 풍경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말이지, 너도 잘 알다시피, 브레아 섬은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잖아. 작은 섬이 무려 365개나 되잖아. 1년의 하루마다 대응하는 섬이 하나씩  있는 셈이지. 그렇다면 결론은 이런 거지. 너한테 행복을 안겨준 바로 그 풍경이란 것 자체가 일시적이고 조각나 있다는 거야. 그러니 네가 대체 무슨 수로 여자에게, 그 여자가 충분히 기대할 권리가 있는 단단한 화합과 신뢰를 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우스갯소리처럼 흘려 들었던 맥스웰 방정식 세 번째 법칙은 두 극지방을 중심으로 자장이 최대라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했을 때 보았던 모습은 극지방에 있는 그를 보았을 때였다. 그와 가까워지면서 느끼는 내면의 괴리. 사랑의 실패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진실에 다가가는 순간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고 결혼계약은 깨지는 것이다. 사랑은 목적지를 향한 것이 아닌 길을 살피는 여정이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처럼, 가혹한 진실 너머에 사랑이 있다. "제발 부탁이니, 그 어떤 디테일도 잊어버리지 마세요, 기회가 되면 얼마든지 샛길로 빠지라니까요. 옛날 옛적에. 이젠 우릴 방해할 사람이라곤 없어요. 그리고, 우리에겐 시간도 많고요. 특히 사랑이 문제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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