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책 - 12가지 테마로 읽는 5000년 문명 중국
쑤수양 지음, 심규호 옮김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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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 5월에 북경대에서 양측 공동연구 결과발표회가 열리게 되어 방문하던 중 저녁을 먹으면서 북경대 교수들과 한담 중에 ‘왜 서구는 이겼는가?’에 대해 얘기가 오갔다. 그 곳 교수들도 그 점에 대해 평소에 생각한 것이 많은 듯 여러 얘기를 쏟아내었고 나름대로 그 이유에 대해 서로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 즉, 동양은 전통적으로 지나치게 관직을 숭상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공자 사상이 덧 붙여져 禮가 너무 중시되는 나머지 형식에 흐른 결과 근대에 이르러 서구에게 뒤질 수밖에 없다는 데에 어느 정도 일치를 보았다.

필자는 이 점이 항상 궁금하고 나의 주된 화두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우선 중국인 당사자에게 나와 비슷한 관점에 있다는 것에 열띤 토론장이 되어 버린 기억이 있다. 근래 들어 어찌어찌해서 ‘중국册’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읽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상당히 쉬운 편이다. 이 책은 중국일반인이나 학생들을 위한 일종의 총괄적 역사 소개서로서 원제는 ‘중국독본’이다. 비록 쉽게 써져 있을지라도 나같이 중국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읽고 왜 서구가 근대들어 강했는가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 나의 소득이다.

중국 고대의 네 가지 발명품인 제지술, 인쇄술, 나침반 및 화약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은 화악을 발명했지만 폭죽에 썼을 뿐이고, 서양은 포탄과 대포를 만들어 동양을 공격했다. 지남철을 발명했다고 자랑하지만 풍수에 이용했을 따름이고 서구는 항해에 이용하여 아시아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고, 제지술이 발명되었음에도 지폐를 만들지 못했고 기껏해야 제사 때 지전을 태우는데 활용했고 인쇄술이 발명되었으나 황력을 인쇄하는데 온 정신을 쏟았고 오히려 서적 인쇄에서는 서양보다 뒤떨어졌다.’라고 비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중국인들이 많다. 

 

위의 말은 맞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근대들어 서구의 침략을 받고 서구가 전 세계를 휩쓸게 된 데에는 더 근본적인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최초로 다 묶어 버린 나라가 진(秦)이다. 그때 서구는 로마가 도시국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시기로서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시기와 맞물린다. 즉 유럽은 부족 수준의 국가들이 난무하고 로마가 국가의 형태를 잡아갈 시기에 이미 중국은 거대한 땅덩어리를 하나로 통합시켜 국가 체제를 이미 완성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 한나라가 들어서고 비록 나라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적은 있으나 대세는 거대한 땅덩어리 전체를 통치하는 시대는 계속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적어도 명이 통치하던 시대까지 중국은 유럽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앞서 있던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보라. 비록 왕조가 바뀌기는 했어도 거대한 땅을 다스리는 체제가 지속되었던 것을..

유럽은 로마제국의 등장 이래 쇠망 후 여러 나라의 형태로 갈라지게 되고 그 와중에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고 제대로 대국으로서의 기량이 발휘되지 못했던 암흑기가 오랜 동안 지속되고 있을 때 중국은 비록 밖으로 부터의 침략은 있었을지언정 그들은 거대제국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즉 오래 전에 형성된 거대 제국을 유지하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란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다만 중국이라는 나라가 바다로 나아가는 데에는 동쪽으로 한정되어 있고 거대 땅을 유지하는 형상은 지속되어 밖으로 눈을 돌릴 필요성을 못 느낀 게 아닌가 한다. 정화의 원정은 300여척의 거대 선단이 인도를 지나 아프리카까지 이어졌어도 침략이 아니라 조공을 바치라는 선에서 이루어진 것도 바로 이 이유가 아닌가 한다.

반면에 유럽은 라틴어를 기반으로 다른 언어와 땅으로 조각조각 갈라짐으로 상대적으로 나라를 통치하기가 쉬웠으며 좁은 땅덩어리에서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급기야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차례로 대국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는 대항해 시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독일이 가장 늦게 대국의 면모를 보인 것도 바다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 독일 땅에서 바다로 진출하려면 북해라는 제한이 있었던 것이다. 자원이 더 필요하게 되어 유럽의 각국은 차례로 식민지를 건설할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 과정에서 모든 학문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항해에 필요한 것은 단지 선원과 배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찰스 다윈의 비글호는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고자 떠난 배였지 다윈의 진화론 연구를 하게끔 목적이 주어진 배는 결코 아니었다. 다만 항해를 위해서 선원 외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같이 갈 필요성은 절실히 느꼈을 터였다. 물론 서양의 논리학의 발달이 과학의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도 빼 놓을 수는 없다. 

결국 중국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적어도 명대까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국이었던 듯 싶다. 한 나라로서 이미 대국을 기원전 200년경에 건설한 중국으로서 그 체제 유지를 위한 노하우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발명품들을 만들게 했었을 지라도 그것의 적절한 이용의 필요성이 없을 만큼 너무 큰 나라였던 것이 서양굴기를 만든 핵심이 아닌가 한다. 이로부터 호된 시련을 겪은 것이다.  

비록 쉽게 써진 간략 중국역사책이지만 중국을 자세히 몰랐던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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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열의 시대 - 20세기의 문화와 사회
에릭 홉스봄 지음, 이경일 옮김 / 까치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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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유럽에서의 아르누보와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그리고 신개념의 문학들은 하나의 거대한 문화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연계성이 없이 파생되었을지는 몰라도 그 과거를 따라가 보면 산업화의 시작점에 수렴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즉, 신기술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물리, 생물 및 화학 등의 신과학, 봇물처럼 쏟아져 버린 변증법적 철학들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이들의 동시다발적인 행태의 주체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중간계급이다. 중간계급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중산층과는 다른 의미인 것이 유럽의 귀족이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그들의 정신적 물질적 자산이 왕정이 무너지면서 그 자리를 기술에 의한 부의 축적이 가능했던 중간계급이 출현하며 이들이 문화 등 모든 면을 주도하였음을 의미한다.

급속히 발달하는 기술 문명은 오로지 귀족의 후원을 통한 예술에 자연스레 손을 뻗치게 되는데 한 예로 오페라가 지난 80여 년 동안 한편도 새로이 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기술로 인하여 다른 파생적 문화가 이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이는 귀족의 전유물이던 문화와 여가와 정신, 하류계급의 올곧은 소유물이었던 생활과 일과 몸이 중간계급이 파생되어 나오므로 그 벽이 허물어졌다. 단어에 비판적인 의미가 담긴 부르주아적 의미의 문화가 인류학적 의미의 문화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신기술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재화가 모든 것을 재편성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예술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놀랄 만큼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간계급의 정체성은 유럽에서의 유대인의 정체성과 상당히 맞물려 있는데 그들이 20세기 초에 거의 모든 면에서 결정적인 변화의 주체가 된 데에는 왕정시대의 관직 등용의 금지가 부를 창출하는 쪽으로의 삶으로 이어졌다. 더 나아가 산업화 시대의 자본주의와 교묘히 맞물려 막대한 부의 창출이 지성에의 표출로 이어지게 된 것은 설득력이 있는 것이 19세기 초의 새로운 학문의 개척자들 중에 상당수가 유대인인 것을 봐도 자명하다. 즉 권력의 그늘이 기술로 인한 부의 양지를 통해 지성으로 표출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유럽의 이야기이다.

변화의 속도가 20세기 초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20세기 말은 기계의 발달이 초국가적 문화적 공생을 야기하고 이는 더욱더 가속될 것이다. 이른바 대중이 즐기는 것은 로마제국 시대의 검투사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나 오늘날의 극단 스포츠, 전 세계의 가장 큰 관심을 끄는 축구 경기는 초국가적인 문화 사업이 되어 버렸고 그 옛날과 오늘날의 다른 점은 이들 선수를 부르주아스러운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여기에 연예인도 다를 바가 없다. 글로벌 사회가 기술에 의해 더욱더 진작될수록 이런 현상이 지속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는 없어도 당분간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다. 이의 장점은 사회가 극우 또는 급진적인 방향이 아니라 그와는 관계없는 아이콘에 대중이 방점을 꽂는 데서는 희망을 품게 한다.

‘파열의 시대’는 저자가 20세기 초부터 21세기 현재까지의 문화와 사회를 조망한 책이다. 하나의 사회학으로 여겨지는 것이 그가 다루는 주제는 예술 외에 비록 한정적이지만 과학, 종교 등 다양한 측면을 그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20세기 과학이 종교를 완전히 밀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20세기 식의 종교전쟁은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과학적 논리가 하급적 감성보다는 분명히 우위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종교는 정치와 맞물려 있음에 저자는 주의를 환기시킨다. 물론 꼭 정치적이 아닐지라도 개인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어떤 무신론자일지라도 죽음의 장례식에는 여하튼 간에 종교의 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에 종교는 결국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세적 관점에서 항상 인간 곁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는 분명히 맞다. 필자가 비록 크리스마스 날에 백팔 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언정 그것 또한 종교적 의식이 있음이고 한반도에서 그 누구가 죽어 염이라는 의식을 안 치르고는 장례를 치를 수 없는 것을 보더라도 종교라는 의식은 비록 과학과 평행선을 달릴지라도 대중적이지 않을 만큼의 한반도의 무신론자일지라도 결국 의식의 테두리 안에 있음을 많은 사람은 간과하고 있다.

책 전체를 통해 저자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는 아니더라도 사회주의자적인 뉘앙스를 풍기기는 한다. 전체를 조망함에 있어 일관성 있는 주제라기보다는 어떤 부분은 어떤 특정의 책에 대한 비평(물론 장문)을 실음으로 그가 써 놓은 작품들을 모아놓아 파열의 시대의 조망의 간헐적인 단속이 있다. 물론 이는 필자의 생각이고 어느 내가 몰랐던 과학자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자본주의 시대에 유럽에서는 따는 유명했다는 것이 파열이라 하면 나는 할 말은 없겠지만...

문화 전반에 약 100년 동안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조망한 수준 높은 책, ‘파열의 시대’는 비록 미래를 얘기할 수 없다고 저자는 얘기하지만 그에게 미래의 예측 능력은 그의 방대한 지식으로 예술을 논하고 과학을 논의 장으로 끌어들이며 종교의 영속성에 대해 논하며 그것이 설령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세계가 어떤 미래를 가질 것인가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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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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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 그의 의지에서든 아니든 상관없이 주변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든다. 삶을 모르며 알 능력도 없으니 삶에 대해 관심도 없어 자신을 경멸의 대상으로 내던지고 이는 무의미한 감각으로 되돌아온다. 그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포기라는 단어를 만들어내며 이는 감성의 불완전으로 인한 불확실성의 세계에 갇혀 있음이다. 무릇 삶은 가치가 없어 시간 때우기임은 자명해 보이고 아무것도 모르니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고 오직 혐오의 대상으로서의 자아가 버티고 앉아있다. 감성이 증오스러움에 무엇이든 느낌으로 선택하지 않으니 공허하고 인생은 슬픔이다. 비웃음이 몸에 배어 있으니 자신과 타인을 모욕하고 한심한 생의 한 가운데에 기약 없이 서 있다. 무엇이든 요구하지 않고 요구받지도 않기로 작정한 이상 모든 꿈은 부질없으며 가능성 없는 희망은 비참의 나락에서 춤을 추고 무가치한 존재의 의식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부조리는 신성한 것이며 행동에 반하도록 행동하며 책을 읽지 않기 위해 책을 사고 영화 안 보려고 영화관에 가는 작가의 심성은 형편없이 찌그러져 있으며 그것이 그의 내면의 진실이다. 결핍을 보태니 무거운 침묵이며 곧 적막 속의 발가벗은 우주가 존재하매 불면을 즐기고 지루함을 숭상하며 초라함을 높이고 낡음에 반하며 추악한 자아의 내면을 반긴다. 죽음은 항상 그의 곁을 지키며 통증은 정체모를 질병이며 피로감 속의 잿빛 단조로움 가운데 검은빛을 쬐이면서 잊고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성의 피로는 곧 영혼이 숨 못 쉬는 피로로서 내장을 갉아먹어 곧 살아있는 죽음이다. 감정의 슬픈 무질서로 단념한 결과는 귀찮은 권태를 낳으며 황폐해진 내면엔 오로지 억압과 고립과 고독만이 우글거린다. 황량한 잿빛 하늘은 그의 집이며 근심은 그의 심장이고 추위는 그의 뼈이고 폐해는 그의 정신인데 급기야 오래되고 쓸모도 없으니 곧 패배의 전체이다. 타락으로 점철된 정신은 불행하며 이는 폐허를 약속하여 단절과 허약을 통해 쏟을 곳이 없는 증오로 구토한다. 삶이란 그림자의 움직임이어서 허영 속에 안주하며 그로 인한 실수의 심각성으로 그저 안에서 죽는 것을 살펴볼 뿐이다. 졸음 속에 무뎌진 감각은 오히려 날카로워서 그 초라함에 눈물은 어깨를 움츠리게 만든다. 몸에 달고 다니는 싫증은 행복의 고통을 막아주는 퇴보적 수단이요 진보적 광기이다.

 

이토록 속수무책 쓸모가 없는 존재가 불안이다. 그래도 그에게는 자유가 있다. 자신의 내면을 자신 있게 느끼고 그것을 또한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이 세상의 수많은 비논리적 낙관론자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아무 글도 못 쓰고 오로지 나는 낙관론자이다만을 앵무새마냥 8글자를 외칠 때 그의 불안은 장장 500여 쪽의 책이 되어 그의 사후 47년 만에 출간되었다. 페르난두 페소아, 당신은 진정코 인류였다. 영특한. 나는 그를 조심히 불안스럽게 그의 불안을 칭송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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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481번 까지 일련번호로 나열된 페스아의 소산문 형태의 글이다. 번호의 연계성이 적어 아무 때고 책을 펴서 아무 쪽이나 읽을 수 있을 만큼 단절되어 있고 소산문 또는 문장 하나 등도 세련되게(그가 매우 싫어할 단어일 테지만) 내면이 표현되어 있다. 오래된 자료로서 혹 지워진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네모로 표시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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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8
샤를 보들레르 지음, 윤영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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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러 붙은 소산문시에는 악마의 감성이 엿보인다. 지독하리만치 극대화된 독한 은유가 전체에 묻어 있다. 천사를 얘기하기에는 그의 꿰뚫는 듯한 지성을 덮은 감성이 허락하지 않는다.

 

대중의 무지가 더욱 드러나는 것은 그의 은유적 표현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래도 같은 인간으로서 어느 정도의 찬사를 늘어놓을 만해도 그는 그 대중을 무지막지하게 무식한 군중 속으로 다 같이 몰아넣는다. 보들레르를 제외한 대중의 무지처럼 들리기는 해도 그는 분명히 그 대중 안에 있음을 선언하는 이율배반적이며 어찌할 수 없는 필연에 자신을 같이 가두어 놓는다.

 

브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은 은유가 극대화된 소산문시의 결정체이다. 산문은 우울해서 묘사된 꽃조차 기쁨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며 그것이 작가 내면의 심연에서 진정으로 울려나오는 외침이라는 느낌이 곧 들게 한다. 그가 그토록 비난해마지 않던 대중의 무지란 무엇인가 ? 혹시 인간의 수평성에의 본질적 차이를 말하려는 게 아닐까 한다. 독한 감성으로 무장된 보들레르의 눈에는 대중이 보지 못하는 것이 보였고 대중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었으며 대중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꼈다.

 

지식의 깊이는 심연 속에 그 끝을 개체는 알 길이 없다. 그것을 모으면 알 수는 있어도 모아지지도 않을 뿐만이 아니라 개체는 그저 자신의 지식의 범위 안에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하나의 우주이다. 아인시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말한들 먹고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으며 칸트가 정언적 명령으로서의 도덕률을 증명한 것은 칸트라는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것을 이해조차하지 못하는 대중은 그저 그들의 우주를 가지며 살아간다. 우주의 저쪽을 알아낸 들 대중에게 무슨 영향이 있으며 관련 연구자들만의 우주일수도 있는 것이 그 지식이 들어와 앉지 않으면 그 우주의 비밀은 개체에겐 없다. 보들레르에게 대중의 무지라 함은 아마도 인간의 수평성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그도 그 대중 안에 속해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전혀 이율배반적이 아닌 것이다.

 

결국 우주도 개체화되어 있으며 개체의 우주는 개체의 뇌 속에 있으니 우주를 밝혀낸들 감성이 독하게 쏟아져 내린 들 모든 것이 다 개체적이 아닌가 말이다. 설령 그럴지라도 진리의 유일성은 존재하며 감성의 특수성 또한 존재하며 개체성을 벗어나 칭송 받음이 마땅하다.

 

그의 시는 특히 여자에게 질퍽지게 난폭하다. 여자를 몽매하고 멍청한 인간으로 줄곧 다루는 그의 눈은 독특하다.

 

보들레르의 우주는 독한 감성으로 무장된 인류사적으로도 드문 개체의 우주가 아니었을까 한다. 벤야민이 사물을 소산문으로 사유화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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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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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지구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에서부터 현재까지 진화적 관점에서 인류가 어떤 식으로 다른 종과는 다르게 지구에서 생존해 왔고, 물론 다른 종에 비해 지능이 놀라울 정도로 발달되어 있는 인류일지라도 적어도 현생 인류의 시작점인 7만년 전에서 가장 최근 까지 진화론의 핵심축인 자연선택의 법칙에 의해 인류는 성장해 왔고, 20세기 말 들어 부터 무언가 전혀 다른 이른바 지적설계의 법칙의 마당에 들어섰다고 주장하는 인류에 관한 연대기적 서술의 책이 바로 사피엔스이다.

 

관련 부분의 가장 최근의 각종 연구 결과를 담고 있는데 예를 들어 호모라는 종이 수직적으로 진화해 온 것이 아니고 일정 부분 오버랩되어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실지로는 지구상에 같이 공존한 기간이 있었는데 이는 유전자 분석을 통해 밝혀진 것인데 이는 매우 최근의 연구 결과인 것이다. 불이 사용되고 농경을 통하여 정착이 되고 농업혁명을 통하여 군집이 가능해졌고 언어와 수자로서 기록의 보관이 가능하게 되므로 대규모 집단화가 이루어지고 그 집단화는 본능적이 아닌 상상 속의 질서를 만들어 냄으로서 집단의 유지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여기서 상상 속의 질서라 함은 종교가 대표적인 구심적인 것이고 또는 크던 작던 어떤 집단의 이름을 이른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무형의 어떤 실체, 다시 말해 사피엔스가 아니고는 만들어낼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이른다. 이 상상력은 급기야 대규모 국가 및 제국 까지도 가능하게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보통 집단을 이루는 동물의 경우일지라도 그 수가 100 정도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이면 반드시 통제 불능으로 다른 집단을 구성하며 이는 수평적이다. 그런고로 사피엔스가 만들어낸 집단화는 그 크기에서 그 수직적 피라미드 구조에서 전체를 묶을 수도 있고 그 전체 안에 수많은 하부 구조를 가진 집단이 가능하다.

 

종교가 사피엔스에게 집단화를 이루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했다는데서 저자는 공산주의도 종교로 정의한다. 즉 공산주의 또한 상상속의 질서를 만들어내서 대규모 집단화를 가능케 했다는 관점에서는 같다는 것이다. 제국을 정의하고 이들 제국은 부침을 지속했으며 이러한 혼란 속의 질서는 자연선택의 방법으로 이루어졌고 인류가 살아가는 방법론에서는 적어도 500년 전까지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500년 전부터 새로운 창출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단연코 서구에서 왔으며 왜 서구에서 왔고 다른 지역에서는 시작되지 못했는가를 저자는 피상적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서구의 대항해 시대부터 인류는 오늘날의 문명사회의 바탕이 되는 새로운 지식을 쌓기 시작하게 된다고 하므로 이 시점이 사피엔스에게는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 단초적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서구가 지식을 독점한 것은 결국 길게 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단초를 만들어내게 된 인간의 부의 축적이라는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대항해가 시작되었을 지라도 탐욕을 위해 다른 모든 새로운 지식이 필요함으로 과학이 발달되게 한 것은 아이러니이다. 과학과 자본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이며 정치와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20세기 말부터 시작된 지적설계, , 진화의 자연선택을 따르지 않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모든 것을 조절하려 하는 행위, 수명을 늘리거나, 종교 대신 약으로 행복하게 만들거나, 우주를 항해하거나 하는 고도의 지적 행위들은 사피엔스를 신으로 만들게 해 줄 뿐만이 아니라 그 미래는 원래 역사란 예측이 불가능하므로 향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의문으로 남긴다. 본래 역사는 예측이 불가능하며 지난 역사에 대한 판단도 켤코 유일하지 않기도 하다. 이제 인류는 진화의 자연 선택의 법칙을 넘어서 지적 설계를 법칙으로 할 만큼 똘똘한 사피엔스가 되었다. 그것이 종말일지 아니면 더 큰 발전을 이룰지는 두고 볼 일이다. 지구의 나이와 생명체가 출현한 시기와 어떤 생명체가 지속되는 기간을 참조하면 비록 호모라는 면에서는 2백만 년이지만 사피엔스의 측면에서는 불과 수만 년 밖에 안 되었으므로 우리 사피엔스의 미래는 더 길지도 모른다. 비록 확률은 작지만 공룡의 멸종의 동기가 된 소행성의 충돌이나 급격한 자연재해가 빠른 시일 내에 닥치지만 않는다면...   

 

연대기라해서 특정의 시대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다양한 예를 들어오가며 설명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우며 전체적으로 일종의 강연 형식으로 쓰여진 책이므로 쉽다. 다만 이유 제시는 약간 추상적이고 피상적이어서 깊지 않는 것이 흠이다. 예로 나는 농업혁명이 인간에게 재앙이었다는 주장은 현대적 관점에서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또한 지식의 축적의 관점에서의 시기를 소홀히 다룬 것도 좀 그렇다.

 

저자가 젊은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지식 체계화가 원숙해지며 이 분야에서 영특한 인류의 한 사람으로 남을 것 같다. 그래서 기다려본다.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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