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열의 시대 - 20세기의 문화와 사회
에릭 홉스봄 지음, 이경일 옮김 / 까치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19세기 말, 유럽에서의 아르누보와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그리고 신개념의 문학들은 하나의 거대한 문화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연계성이 없이 파생되었을지는 몰라도 그 과거를 따라가 보면 산업화의 시작점에 수렴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즉, 신기술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물리, 생물 및 화학 등의 신과학, 봇물처럼 쏟아져 버린 변증법적 철학들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이들의 동시다발적인 행태의 주체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중간계급이다. 중간계급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중산층과는 다른 의미인 것이 유럽의 귀족이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그들의 정신적 물질적 자산이 왕정이 무너지면서 그 자리를 기술에 의한 부의 축적이 가능했던 중간계급이 출현하며 이들이 문화 등 모든 면을 주도하였음을 의미한다.

급속히 발달하는 기술 문명은 오로지 귀족의 후원을 통한 예술에 자연스레 손을 뻗치게 되는데 한 예로 오페라가 지난 80여 년 동안 한편도 새로이 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기술로 인하여 다른 파생적 문화가 이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이는 귀족의 전유물이던 문화와 여가와 정신, 하류계급의 올곧은 소유물이었던 생활과 일과 몸이 중간계급이 파생되어 나오므로 그 벽이 허물어졌다. 단어에 비판적인 의미가 담긴 부르주아적 의미의 문화가 인류학적 의미의 문화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신기술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재화가 모든 것을 재편성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예술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놀랄 만큼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간계급의 정체성은 유럽에서의 유대인의 정체성과 상당히 맞물려 있는데 그들이 20세기 초에 거의 모든 면에서 결정적인 변화의 주체가 된 데에는 왕정시대의 관직 등용의 금지가 부를 창출하는 쪽으로의 삶으로 이어졌다. 더 나아가 산업화 시대의 자본주의와 교묘히 맞물려 막대한 부의 창출이 지성에의 표출로 이어지게 된 것은 설득력이 있는 것이 19세기 초의 새로운 학문의 개척자들 중에 상당수가 유대인인 것을 봐도 자명하다. 즉 권력의 그늘이 기술로 인한 부의 양지를 통해 지성으로 표출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유럽의 이야기이다.

변화의 속도가 20세기 초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20세기 말은 기계의 발달이 초국가적 문화적 공생을 야기하고 이는 더욱더 가속될 것이다. 이른바 대중이 즐기는 것은 로마제국 시대의 검투사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나 오늘날의 극단 스포츠, 전 세계의 가장 큰 관심을 끄는 축구 경기는 초국가적인 문화 사업이 되어 버렸고 그 옛날과 오늘날의 다른 점은 이들 선수를 부르주아스러운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여기에 연예인도 다를 바가 없다. 글로벌 사회가 기술에 의해 더욱더 진작될수록 이런 현상이 지속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는 없어도 당분간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다. 이의 장점은 사회가 극우 또는 급진적인 방향이 아니라 그와는 관계없는 아이콘에 대중이 방점을 꽂는 데서는 희망을 품게 한다.

‘파열의 시대’는 저자가 20세기 초부터 21세기 현재까지의 문화와 사회를 조망한 책이다. 하나의 사회학으로 여겨지는 것이 그가 다루는 주제는 예술 외에 비록 한정적이지만 과학, 종교 등 다양한 측면을 그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20세기 과학이 종교를 완전히 밀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20세기 식의 종교전쟁은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과학적 논리가 하급적 감성보다는 분명히 우위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종교는 정치와 맞물려 있음에 저자는 주의를 환기시킨다. 물론 꼭 정치적이 아닐지라도 개인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어떤 무신론자일지라도 죽음의 장례식에는 여하튼 간에 종교의 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에 종교는 결국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세적 관점에서 항상 인간 곁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는 분명히 맞다. 필자가 비록 크리스마스 날에 백팔 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언정 그것 또한 종교적 의식이 있음이고 한반도에서 그 누구가 죽어 염이라는 의식을 안 치르고는 장례를 치를 수 없는 것을 보더라도 종교라는 의식은 비록 과학과 평행선을 달릴지라도 대중적이지 않을 만큼의 한반도의 무신론자일지라도 결국 의식의 테두리 안에 있음을 많은 사람은 간과하고 있다.

책 전체를 통해 저자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는 아니더라도 사회주의자적인 뉘앙스를 풍기기는 한다. 전체를 조망함에 있어 일관성 있는 주제라기보다는 어떤 부분은 어떤 특정의 책에 대한 비평(물론 장문)을 실음으로 그가 써 놓은 작품들을 모아놓아 파열의 시대의 조망의 간헐적인 단속이 있다. 물론 이는 필자의 생각이고 어느 내가 몰랐던 과학자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자본주의 시대에 유럽에서는 따는 유명했다는 것이 파열이라 하면 나는 할 말은 없겠지만...

문화 전반에 약 100년 동안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조망한 수준 높은 책, ‘파열의 시대’는 비록 미래를 얘기할 수 없다고 저자는 얘기하지만 그에게 미래의 예측 능력은 그의 방대한 지식으로 예술을 논하고 과학을 논의 장으로 끌어들이며 종교의 영속성에 대해 논하며 그것이 설령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세계가 어떤 미래를 가질 것인가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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