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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조르바가 죽었다는 편지가 배달되었다. 마음이 울컥했다.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조르바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아이들까지 모두 잠든 깊은 밤, 정신을 반짝이게 하는 책은 많지 않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책을 읽는 순간 나를 깨어있게 했다. 몸으로 현실과 부딪히며 살아온 조르바를 동경하는 화자(니코스카잔차키스)를 보며 나도 같은 마음이 되어 갔다.
항구의 어느 카페에서 화자는 조르바를 만난다. 그리고 한 눈에 조르바에게 호감을 갖게된다. 크레타 섬으로 함께 가자는 화자의 제안을 조르바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책을 읽는 내내 의문이었다. 어떻게 둘은 그렇게 한 순간에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크레타 섬으로 갈 수 있었는지.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때 쯤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화자는 끊임없이 삶의 해답을 찾고 있었고, 조르바는 살아 움직이는 답안지와 같았다. 둘은 처음 만난 그 날, 서로 꼭 들어맞는 한쌍임을 알았다.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냉소적이면서도 불길같이 섬뜩한
그의 강렬한 시선이었다. "
크레타 섬으로 간 화자와 조르바는 광산개발 사업을 진행한다. 하지만 둘 다 돈 버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크레타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을 만끽하는 하루 하루의 삶이 바로 이들이 크레타 섬에 온 이유 같았다. 화자는 기쁨을, 때론 슬픔까지도 춤으로 표현하는 조르바를 보며, 자신이 그동안 끊임없이 찾아온 진리, 삶의 해답을 찾아 나간다. 그리고 매일 밤 조르바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두 가지 죽음이 등장한다. 조르바로 인해 화려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다시금 삶의 기쁨을 되찾아가 던 모텔 주인 부블리나. 그리고 한 청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지탄받는 매혹적인 과부. 부블리나는 조르바의 결혼 약속에 한껏 부플어 있었다. 조르바가 부활절 아침 준비한 절정의 환희를 맛보지 못한 채, 앓아 눕게 되고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한다. 부블리나의 죽음은 현실의 비루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죽음을 슬퍼하는 형식적인 울음을 위해 자리한 여인들은 부블리나가 죽으면 어떤 물건을 차지할 지 논쟁을 벌이고, 마당에는 이미 마을 청년들이 부불리나의 가축을 잡아 먹기 위한 물이 끓고 있었다. 조르바가 함께 하긴 했지만, 부블리나가 남긴 물건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숨을 거둔다. 화자와 마음을 나누게 된 매력적인 과부는 교회에 가던 중 마을 사람들에 둘러싸인다. 조르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부는 마을 사람의 칼에 죽음을 맞는다. 화자와 조르바는 그렇게 자신들의 여인을 보내고 만다.
조르바와 글쓴이, 화자는 슬퍼하지만 슬퍼하지 않는다. 울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통나무 운반용 도르레가 모두 무너져 버렸을 때도 그랬다. 그렇게 크레타 섬에서의 일들이 일그러져 버렸을 때도 조르바는 춤을 추었다.
글쓴이는 조르바를 통해 새롭게 세상을 바라본다. 관념 속에 갇혀 있던 세상이 조르바를 통해 현실이 되고 만져지게 되었다. 그래서 조르바는 그 어떤 스승보다 위대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며 어느새 나도 그리스인 조르바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의 단순함, 유쾌함, 치열함은 모두 내가 늘 동경해 왔지만 하루도 그렇게 살아보지 못한 이상향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