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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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여행을 떠나기 전날이면 늘 고민에 빠진다. 과연 어떤 책을 들고가야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그 오랜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고심해서 들고 간 한 권의 책이 10페이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재미없고, 흔들리는 기차의 미세한 진동까지 느껴질 정도로 머리가 지끈거리게 어렵고, 스마트폰에 검색어만 넣어도 줄줄이 그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며 심지어 그 내용이 책보다 더 재미있을만큼 깊이가 없는 컨텐츠를 담고 있다면 그 여행은 최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책을 고르는 시간은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 못지 않게 길다.

 

지난 금요일 쏟아붓는 눈보라를 뚫고 광주에 내려갈 일이 있었다. 왕복 6시간의 기찻길. 그래서 더더욱 중요했고, 전전날부터 대체 무슨 책을 가져가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이 책 <체스 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를 넣어갔다. 무난하게 고전을 가져가자, 거기에 두 단편의 주제 모두 관심있는 주제라 골랐던 것인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눈으로 덮힌 세상을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읽는 츠바이크의 이야기 세계. 놀랍고도 경이로웠다.

 

 

<체스 이야기>는 뉴욕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배 위에서 벌어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체스 챔피언 첸토비치와 무명의 신사 B박사가 벌이는 체스 게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첸토비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고로 아버지를 여인 뒤, 목사의 집에서 자라난 교양과 지식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두게 된 체스에서 천재성을 발휘하고 이후 전 세계 최고의 체스 챔피언이 된다. 그런데 그에게도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블라인드 체스를 두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즉 단 한판의 경기도(심지어 자신이 둔 체스도) 암기해서 두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 앞에 B박사가 나타난다. B박사는 첸토비치와는 반대로 블라인드 체스에 강한 이였다. B박사는 체스 경기 뒤에서 수를 알려주어 챔피언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첸토비치와 일대일로 두게 되는 체스에서는 초조함을 내비친다. 이 두 사람이 왜 서로 다른 체스 두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는지, 그래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두는 팽팽한 경기의 승자는 과연 누가되는지 그 심리묘사를 읽어내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이다.

 

 

두번째 단편 <낯선 여인의 편지>는 말 그대로 어느 낯선 여인에게 온 편지를 편지 내용 그대로 옮겨 적은 소설이다. "결코 저를 모르는 당신께"라는 제목으로 어느 신사에게 도착한 두툼한 편지. 호기심에 편지를 연 신사는 편지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 그 안에는 한 여자가 어린 시절 이웃집에 이사온 신사를 보고 첫 눈에 반해 평생 그 남자를 사랑한 내용이 담겨있다. 알고보니 바람둥이었던 이 남자는 스무살 무렵, 그리고 서른살 무렵 두 번이나 여자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지만 여전히 이 여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여인은 남자를 원망하기 보다는 그렇게 보내는 하루, 그렇게 가지게 된 아이에 감사한다.

 

 

철저하게 여인의 순애보를 외면했던 한 남자에게 바치는 이 여자의 편지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그 다음에는 안타까움으로, 그 다음에는 절절함으로 읽힌다. 나를 알아봐달라며 상대방에게 보내는 수많은 시그널과 우연을 가장한 만남들은 읽는 이가 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알려주고 싶을만큼 절절하고 아프다. 한 남자를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한 남자에게 이 여자는 그저 스쳐지나간 수많은 여인들 중 하나, 아니 두 번을 만났어도 처음으로 느꼈을만큼 존재 가치도 희미했다. 그리고 참았던 수십년의 사랑의 감정을 한번에 토하듯 편지로 쏟아낸다.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었는데 두 단편 모두 읽고 난 뒤 오랜 여운을 남겼다. 이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는 모두가 소름끼치게 놀라운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놀라운 이야기가 하나하나 밝혀질 때마다 그 인물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소설을 다 읽고나면 그 인물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된다. 놀라운 작가, 놀라운 이야기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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