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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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십여 년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낱말은 '갈망'이었다.
<촐라체>와 <고산자>, 그리고 이 소설 <은교>를, 나느 혼잣말로 갈망의 삼부작'이라 부른다."
_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 박범신은 스스로 <은교>를 가리켜 '갈망 삼부작'의 마지막 편이라고 말했다. 이전의 두 작품이 추상적이었다고 한다면 <은교>에 이르러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했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독자들이 이 책을 '밤에만' 읽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신이 이 소설을 '밤에만'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읽어야 하고, 읽고 싶은 데는 그가 책 마지막에 붙인 작가의 말 몇 문장 외에는 다른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이 소설을 썼다며 스스로를 미쳤다고 평가한 박범신의 말처럼 나 역시 미친듯이 이 소설을 하루만에 다 읽어내려갔다.

 

소설은 일흔을 넘겨 돌아가신 이적요 시인이 남긴 마지막 노트로 시작한다. '내가 죽은 뒤 1주년이 되는 날 이 노트의 내용을 공개해달라'는 이적요 시인의 부탁을 받은 변호사는 2010년 3월 그의 1주기를 맞이해 시인이 남긴 노트를 읽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어린 처녀 한은교를 사랑하며 그녀에게 모든 인세를 상속하겠다는 내용과,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자신을 스승으로 섬긴 후배작가 서지우를 사실은 자신이 죽인 것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으로 이 노트의 프롤로그는 시작한다.

 

시인의 노트에는 은교와의 사랑, 그리고 은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젊은 후배작가 서지우와의 미묘한 갈등이 담겨 있었다. 그 노트를 읽어내려가던 변호사는 서지우 역시 비공개로 남겨준 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설의 중분부, 변호사를 찾아온 은교가 자신에게 맡겨두었던 서지우의 일기를 공개하고 이제 사건은 다각화된다. 부자지간보다 더 각별하다고 알려진 이 사제 지간에 어느날 한 여자, 열일곱 소녀 은교가 등장하고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사제지간과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욕망을 가진 남자라는 두 관계를 오가며 갈등이 고조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분명 시인 이적요다. 젊음이 없어졌다고 열정과 욕망이 사그라지는 건 아니며, 오히려 젊었을 때의 그것보다 더욱 강렬하고 더욱 간절해질 수 있다는 걸 이적요는 은교에게 바치는 사랑의 찬가 속에서 보여준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 이라고 은교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이적요 시인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가슴 저미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적요와 은교의 마지막 헤어짐 역시 아름답기 그지 없다. 소설의 마지막이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마음이 아팠던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쪼개져 있던 이야기의 퍼즐들이 맞춰지고 나면 후배 작가 서지우가 더 큰 여운을 남기며 다가온다. 절대로 따라 잡을 수 없었던 스승의 재능,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쳤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을 때의 무력함, 그래서 유일하게 스승을 이길 수 있었던 '젊음'을 무기로 스승의 심장에 칼을 꽃을 수 밖에 없었던 이 애증의 관계. 마지막에 스승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것을 알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를 읽는 듯한 유려한 문체, 그 안에 담긴 꿈틀대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은교의 눈물까지 모든것이 아름다웠던 소설이었다. <촐라체>와 <고산자>로 거꾸로 넘어가보련다.   

 

 

 

* 인상 깊은 책 속 구절들

 그런데 성불구가 되고도, 선생님 소설에서처럼, 욕망은 그대로 남아 있을까요?"
"그러믄요." 서지우가 냉큼 대답했다. "일흔이 다 됐는데도, 그러니까 그것이 불능인데도, 욕망은 젊을 때 그대로인 사람, 봤습니다."
_ 70쪽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니다.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본원적으로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열일곱과 너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_ 107쪽

나는 어느 한때 그애를 욕망으로 보았고, 또 한때 그 애를 덧없이 흘러간 내 청춘의 마지막 보상으로 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은 또한 이기주의적 범죄였다.
본능적 욕망을 따라가고 싶어했던 나의 짐승은 대체 내 어디에 그 긴 세월동안 숨어 있었단 말인다.
_ 235쪽

 

늙어서 힘이 없었다고 오해하지 말라. 나는 회복되었으며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애는 그 어느 때보다 치명적이라고 느낄 만큼 관능적이었고, 아무런 방비도 없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고요했다. 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 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비로소, 욕망이 사랑을 언제나 이기는 건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이 나를 사로 잡았다.
_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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