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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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미술관에서처럼, 우리 두 사람 뿐, 세상엔 아무도 없었다. _ 43쪽 중에서

한 미술관 강연회장에서 열린 조그마한 파티. 저 멀리서 한 남자가 그녀의 눈동자를 주시한채 천천히 걸어온다. 파티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그녀의 눈에는 그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손이 닿을 듯 말듯한 거리에 선 남자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세상엔 그와 그녀 달 둘 뿐, 아무도 없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이 한마디를 건넨 사람은 바로 그녀의 남편 회사 헬데겐 사에서 주최하는 상공인협회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베르톨트다. 베르톨트가 이런 도발적인 말을 건넨 그녀의 이름은 마리안네. 마리안네는 헬데겐 사를 경영하는 남편 막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들 권터, 그리고 남편의 아버지이자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시아버지와 함께 '적어도 남들이 보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런 마리안네에게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한 남자의 도발적인 고백.  그녀는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대로 따르기로 결심한다.

이 소설은 시작부터 도발적이다. 늦어도 11월에는 읽고 말거라며 벼루던 한스 에리히 노삭의 소설 <11월에는 늦어도>의 시작은 지극히 통속적이며 이성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발칙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의 고백에(사실 그는 사랑한단말을 건넨 것도, 함께 도망을 가자고 한 것도 아니지만) 주인공 마리안네는 그날 밤 집을 나와 그와 함께 열차에 몸을 싣고 다른 도시로 떠난다. 몇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을 버려둔 채.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고, 도덕적인 금기를 깨며 시작된 이들과 같은 사랑이라면 보통의 소설가들은 그 모든 희생과 고통을 덮어버릴만큼 행복한 결말을 그려준다. '뒤늦게 진정한 사랑을 만난 그녀는 새로운 행복을 만끽하며 오래도록 그와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달랐다. 마리안네의 행복은 불과 몇 시간만에 무참히 깨진다. 베르톨트와 함께 탄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마리안네는 베르톨트가 당시 미술관에서 고백을 하던 그 남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작품을 써내야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베르톨트는 안정된 회사를 운영하는 재벌 막스와는 달랐다. 그는 작품이 올려지는 11월까지만 그녀에게 자신을 이해하고 기다려달라고 말하지만, 마리안네는 자신이 도움이 되어 줄 수도 없고 오히려 그에게 방해만 되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날 시아버지로 부터 온 편지를 받아든 마리안네는 가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가정을 떠나던 날 그녀의 짐 싸는 것을 도와준 것 처럼 베르톨트는 자신을 떠나가는 그녀의 짐 싸는 것을 다시 한번 도와준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안네의 입장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녀의 심리상태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베르톨트에게 고백을 들을 이후 집을 떠나 열차에 오르기까지의 불과 몇 시간 동안 그녀의 머릿 속에서 몰아치는 광풍, 낯선 도시에서 베르톨트와 몇 개월의 시간을 보내며 고통 받는 이상과 현실사이의 괴리, 시아버지의 회유 아닌 회유로 다시 가정으로 돌아와 막스와 베르톨트 사이에서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한채 갈팡질팡하는 그녀의 모든 심리상태가 이 소설에서 고스란히 표현된다. 그 누군강의 강요가 아닌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만 내려진 결정이기에 마리안네는 누구를 원망할 수도, 남을 탓할 수도 없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하며 이상 속 사랑을 쫓는다.

마리안네의 모든 행동을 '사랑'이라는 이유로 합리화 할 수는 없지만 '행복'이라는 이유로는 설명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마리안네는 말했다. "사람들을 속이는 건 어렵지 않아요. 모두들 절 부러워하죠. 사람들은 내가 무척 행복한줄 알아요.(76쪽)" 남들이 보는 행복, 남에게 보이는 행복은 마리안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베르톨트에게 떠난 것도, 그 삶에서 만족 못하고 다시 막스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온 것도 모두 그녀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한 그녀의 인생 도박이었던 것이다.

베르톨트와 약속했던 11월,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 그는 다시 한번 그녀를 찾아온다. 그리고 다시 자신과 함께 떠날 것을 제안한다. 이전과는 달리 마리안네를 잡는 막스를 뿌리치고 그녀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베르톨트의 차에 오른다. 그리고 집에 홀로 남은 막스는 몇 시간 후 다리 난간에서 떨어져 강물로 빠져버린 두 남녀가 탄 차 사고 소식을 접한다.  

이 세상에는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결말이었을까? 아니면 영원한 사랑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을까?  2010년 11월 아주 위험한 책을 한 권 만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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