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속 '시라노 에이전시'는 연애에 서투른 이들을 위해 100퍼센트 사랑을 이루게 해주게 도와준다는 일종의 연애 도우미이다. 의뢰인이 '사랑(?)'을 의뢰해오면 우선 의뢰인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분석해 상대방이 좋아할만한 스타일로 변신시킨다. 옷 스타일, 머리 스타일은 물론 말투 하나, 손짓 하나까지 모두가 연애에 적합하도록 바꾸어주는 것이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진가는 의뢰인이 분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뢰인이 의뢰한 그 상대방에 대한 분석에서 발휘된다. 그녀가(대부분의 의뢰자는 남성이었기에)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등등을 파악해 의뢰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에 대한 관심과 배려, 거기다 공통점까지 갖춘 남성에게는 호감을 가지게 된다는 연애의 기초상식을 아주 잘 응용해 상대방의 마음을 쟁취하도록 돕는 것이다.


영화 속 병훈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희곡 <시라노>의 주인공 '시라노'의 이름을 따 이 시라노 에이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사랑하는 부하를 위해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응원했던 시라노처럼 다른 사람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일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의뢰자가 의뢰한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옛 애인인 희중임을 알게 되고 갈등을 하지만, 결국은 자신 역시 시라노처럼 그들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영화 속 병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줬던 시라노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궁금해 <시라노>를 찾아서 읽게 된 게 이 책을 잡은 이유였다.

 

   
 

시라노 : 그녀의 마음을 식게 만드는 것이 그토록 두렵다면, 자네 입술과 내 문장들을 그녀의 마음에 곧 불이 붙을 걸세! 약간 협력하면 어떻겠나? 어떤가, 자네는 날 보완해 주고 내가 자넬 보완해 준다면? 자넨 당당하게 걷고, 난 그림자처럼 자넬 따를 걸세. 자네의 재치가, 자넨 나의 아름다움이 되는 거지.

 
   


 

시라노는 자신의 사촌 록산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미소는 완벽했으며, 그녀의 몸짓은 세상의 모든 신성을 담고 있었다. 시라노의 유일한 즐거움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었고, 그녀와의 대화는 그의 삶에 활력소였다. 하지만 시라노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다. 그는 기형적인 거대한 코를 가지고 있는 아주 못생긴 추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시라노는 록산이 자신의 부대에 배속 받은 부하 크리스티앙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크리스티앙은 잘 생긴 외모에 말끔한 체격까지 젊고 멋진 귀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크리스티앙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교양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앙 역시 록산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그녀의 사촌인 시라노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게 된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은 편지를 써주고 심지어 그를 대신해 창 밖에서 사랑의 대사를 읊기까지 한다. 록산은 그의 달콤한 속삭임과 진심어린 편지에 매료되어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게 끝이 나면 재미가 없듯이 이들 사이에도 사랑의 훼방꾼이 등장하게 되고 록산을 짝사랑하던 드 발베르 자작의 음모로 크리스티앙은 전쟁터로 끌려가게 된다.  크리스티앙과 함께 전장에 나간 시라노는 크리스티앙 몰래 계속해서 사랑의 편지를 보내게 되고, 록산은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위험을 무릎쓰고 전쟁터로 달려오지만 크리스티앙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록산이 진정한 자신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나서이다. 크리스티앙은 죽었지만 여전히 그가 남긴 편지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살아가던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시라노와의 대화 중에 그 편지를 쓴 사람은 크리스티앙이 아닌 시라노였음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것은 크리스티앙이 아닌 편지 속에 담긴 그 영혼의 주인공 시라노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자신의 눈을 즐겁게 해준 크리스티앙이 아닌,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충만하게 해준 시라노였던 것이다.

 

이 희곡의 결말은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결말과는 반대다. 편지 뒤에 숨겨져 있던 시라노의 사랑을 깨닫는 록산의 이야기로 끝나는 <시라노>에 비해,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의뢰인이었던 상용과 희중이 이어지면서 끝난다. 시라노 역할을 했던 병훈은 그들의 사랑을 이어주고 조용히 퇴장한다. <시라노>의 록산이 후에 깨닫게 되는 것처럼 영화 속 희중 역시 상용 뒤에 숨겨진  병훈의 존재를 눈치 챘다. 하지만 그녀는 장막 뒤에 숨겨진 병훈을 택하지 않고, 서툴고 어슬프지만 마지막 순간 자신의 힘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상용을 받아들였다.

 

희중은 왜 자신이 꿈에 그리던 연애를 할 수 있는 병훈 대신 하는 것마다 실수투성이에 어설픈 상용을 택했을까? 그건 아마도 사랑은 화려한 수사나 꾸밈이 아닌 투박하지만 진실되고 어설프지만 마음이 담긴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크리스티앙 역시 록산에게 솔직히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려 시도했지만 사실을 말하지 못한채 전장에 나가고 만다. 만약 그가 사실대로 꾸밈없는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했다면 록산은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역사에는 만약은 없다지만, 소설은 무수히 많은 만약이 존재할 수 있기에 또 다른 이야기를 조용히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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