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둔황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조행덕은 진사시험을 치루기 위해 고향인 호남을 떠나 수도 개봉으로 상경하는 길이었다. 진사시험은 고급관리로의 등용문인 중요한 시험이라 합격만 하면 그의 앞길은 탄탄하게 보장받는 그런 시험이었다. 총명한 머리에 뛰어난 실력까지 겸비한 그였기에 조행덕의 합격은 당연한듯 보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중 잠에 빠져 그만 자신의 순서를 놓치고 말았다. 시험 한번 보지 못하고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게 된 것이다. 자신의 어이없는 실수에 망연자실한 조행덕은 장안의 자잣거리를 하릴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맨 먼저 행덕의 눈에 비친것은 두꺼운 판자에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는 여자의 하반신이었다.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더 자세히 보니 그 판자 위의 여성은 하반신 뿐 아니라 온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채 대자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서슬퍼런 칼을 들은 한 남자가 당장이라도 칼을 휘둘러 여성을 내리칠 것 같은 기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자, 어느 부분이라도 좋으니 사요 사!"
판자 위의 여성은 서하 출신의 여성으로 남의 남자와 정을 통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일종의 공개처형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행덕은 이상하게도 그녀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를 얻어 뭘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를 풀어주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끓어 올랐다. 그는 자신의 돈을 털어 그녀를 사겠노라고 했다. 전체는 팔 수 없고 부분만 팔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높던 칼잡이였지만, 조행덕이 내놓은 돈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만 그녀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가까스러 풀려난 그녀는 조행덕에게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가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란 걸 알고는 조행덕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문자가 적힌 천 조각 하나를 건넨다. 문자에 능한 조행덕이었지만 처음 보는 글자였다. 순간 조행덕은 이 문자의 기원을 찾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
|
|
| |
재물과 목숨, 권력은 한결같이 그것을 소유하는 자의 것이었으나, 경전은 달랐다. 경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불에 타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무도 경전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었다.
타지 않고 지금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_ 199쪽 중에서 |
|
| |
|
 |
서하. 1038년 중국 서북부를 기점으로 내몽고, 둔황, 란저우까지를 아우르며 11~12세기 독창적인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었던 나라였다. 동쪽으로는 송나라를, 서쪽으로는 위구르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불교문화를 전승하고 자신만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을 만큼 문화적으로도 성숙했던 나라였다. 하지만 문자에 능한 조행덕 조차 처음 보는 문자로 느껴질만큼 서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한족, 위구르족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만들었던 서하 왕국. 그 신비로움 때문일까? 소설 <둔황>을 통해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는 서하 왕국과 막고굴을 통해 그 풍부한 상상력을 마음껏 뽑낸다.
우연히 만난 서하 여인이 건넨 문자를 보고 그 기원을 찾아 떠난다는 조행덕의 모험담을 담은 소설 <둔황>은 비록 소설이지만 그 배경만은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서하 문자에서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된 수천 종의 경전까지 이노우에 야스시는 그것들을 통해 사막의 모래바람만큼 비장하고 밤하늘의 달빛만큼이나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한낯 선비에 불과하던 조행덕은 주왕례를 만나 전장에 나가 싸우며 진정한 남자로 성장하며, 전쟁 중 만난 위구르 왕족 여인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며 사랑을 깨닫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자를 숭배했던 조행덕은 어쩌면 사막의 모래 언덕처럼 한순간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서하 왕족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그 문자가 기록된 경전을 지켜낸다. 이것이 이 소설 <둔황>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조행덕이 이 소설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찾는 곳. 자신이 사랑한 문자가 담긴 경전을 실어다 나르고, 전장에서 만난 위구르 왕족 여인이 자신에게 사랑의 징표로 남겨준 목걸이를 묻기로 결심한 곳. 그곳이 이 소설의 제목인 둔황, 막고굴이었다. 실제로 막고굴은 1900년 왕원록이라는 도인에 의해 발견 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방대한 경전과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했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과연 이 경전들이 누구에 의해,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와 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기에 아직도 학자들에게 의해 연구가 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노우에 야스시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고, 그 상상력은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 <둔황>을 낳은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은 실존 인물이고, 몇몇 경전과 장소는 실제 역사에 기초한다. 하지만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문자를 사랑한 한 남자가 사막 벌판을 오가며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수십, 수천가지의 경전을 등에 이고 사막 밤하늘의 이슬을 맞으며 묵묵히 걸어갔던 낙타 행렬과 조행덕을 비롯한 인부들의 행렬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그 안에 담긴 수십만 개의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느꼈던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도 함께 그려진다. 천 년의 깊은 잠을 깨고 세상에 다시 나온 막고굴의 경전들처럼 이 책을 덮는 순간 나 역시 깊은 꿈을 꾸고 나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프면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