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
마빈 클로스 외 지음, 박영록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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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아공 월드컵.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대한민국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기쁨과 함께 함께 16강에 진출할 국가들의 면모가 속속들이 들어나면서 이제 여기저기서 월드컵 이야기 뿐이다. 우승후보국으로 점쳐지던 프랑스, 이탈리아의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이변과 더불어 새로운 우승 후보국들에대한 기대가 점쳐지면서 이제 월드컵은 축제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전 세계의 눈이 바로 지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스타디움을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불과 한 달전만 하더라도 남아공 월드컵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불안한 치안상황, 갖가지 설비에 대한 의구심 등이 과연 남아공이 성공적인 월드컵을 치뤄낼 수 있을까 걱정하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월드컵 초반부터 삐끄덕 거렸다. 그리스 선수단의 숙소에 강도가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나질 않나, 성숙하지 못한 시민 문화가 경기장의 질서를 흐트러뜨리질 않나, 많은 사람들은 남아공의 월드컵 개최는 역시 무리한 결정이었다고 탄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 월드컵이 남아공에서 치뤄지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불과 40,50년 전인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남아공은 모든 국제 단체경기에 참여할 수 없었다.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국가라는 이유로 1976년 국제축구연맹으로부터 제명되었고, 그 이후로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남아공은 국제 경기에서 영원히 볼 수 없는 국가가 될뻔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2004년 5월 15일 남아공은 2010년 월드컵 개최국으로 결정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개최되는 사상 첫 월드컵이었다.

국제축구연명으로부터 제명되면서부터 아프리카 대륙 사상 첫 월드컵 개최국이 되기까지의 2-30년이라는 시간동안 남아공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스포츠 축구가 남아공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저항의 상징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여기 축구를 통해 인종차별과 맞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FIFA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나 개인이 아닌 단체의 이름으로 회원이 된 남아공 로벤섬 마카나축구협회.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남아공 월드컵 개최가 그들에게 얼마나 가슴벅차고 의미 있는 일인지를 알려준다.

 

 
로벤섬 수용소에서 시작된 그들만의 리그
 
"목표는 남아공 국민 중에 단 한명의 흑인도 남지 않는 것이다". 남아공의 각료였던 코르넬리우스 멀더는 이렇게 선언했다. 1948년 백인들만의 선거로 집권에 성공한 국민당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채택했다. 인종차별정책인 이 정책은 백인의 우위를 법적으로 확실하게 다지고 흑인들을 짓밟기 위한 정책이었다. 정부는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하고, 모든 상점에는 '백인 전용'을 알리는 표지판을 부착하도록 했다. 식당, 영화관, 호텔은 물론 공원과 버스정류장도 백인과 흑인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 명백하게 갈렸다. 스포츠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남아공 정부는 백인들로만 구성된 축구 대표팀을 만들었다(물론 국제연맹으로부터 출전을 거부당했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치범으로 구속되었다. 흑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웠던 세딕, 리조, 토니, 마커스 역시 그렇게 로벤섬으로 오게 되었다. 로벤섬은 케이프타운 해변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바위섬으로 악명 높은 감옥이 있는 곳이었다. 2천 명이 넘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거대한 수용소에는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고 온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가장 악질로 여겨지는 정치범들이 수용된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삶은 가히 인간들의 삶이라 할 수 없을만큼 가혹한 삶이었다.

일례로 흑인 죄수들에게는 반마지 발판만 지급되었다. 백인 우월론자들에게 그들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개인 신발도 지급되지 않았다. 대신 신발을 수북히 쌓아 놓은 신발 더미에서 매일 아침 짝이 맞는 것을 찾아 신어야했다. 늦게 일어나기라도 하면 신발이라 부를 수도 없는 다 헤어진  신발을 그것도 짝도 맞지 않게 신어야했다. 기준 식사량 역시 백인들에 비해 적었고, 그것도 그나마 식사량에 맞게 나오면 다행이었다. 대부분이 먹을 수도 없는 것들이 식사 함량에 아주 미달되게 지급되었다.

 이토록 혹독한 감옥 생활이었지만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축구'였다. 공이 지급될리가 만무했다. 그들은 간수들의 눈을 피해 자신들의 셔츠를 뭉친 후 묶어 임시로 축구공을 만들었다. 옷으로 만든 축구공으로 놀다가 간수가 오면 재빨리 원상태로 풀어 놓았다. 이렇게 로벤섬 수용소에서 몰래 축구가 시작되었다. 길고 지루했던 감옥 생활에 즐거움이 찾아왔고, 수감자들에 눈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침대는 한쪽으로 치워졌고, 5인 혹은 8인조 미니 경기가 매일 밤 펼쳐졌다. 그들은 축구를 꿈꾸기 시작했고, 조용히 그러나 흑인들도 축구를 할 수 있다며 그들의 권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이 열리다

"우리가 축구하는 것을 허가해 주십시오." 당연히 쉽지 않았다. 수감자들의 얼토당토한 요구에 더욱 화가 났고 간수들은 수감자들을 더욱 가혹하게 내몰았다. 하지만 수감자들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독방 생활과 갖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때마침 세계에서도 남아공에 주목하고 있었다. 1961년에 FIFA는 모든 국제경기에 백인으로만 구성된 남아공 대표팀이 출전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1964년에 열린 도쿄 올림픽 역시 인종차별의 이유로 축출되었다. 로벤섬에서 축구에 대한 요구를 1년 이상 한 어느날 국제적십자사의 로벤섬 방문이 있었다. 정부는 잘 보여야만 했다. 그렇게 그들은 축구할 권리를 얻어냈다.

1967년 어느 바람 부는 토요일 오전, 축구 경기가 시작됐다. 수감자들 중 무작위로 사람을 뽑아 레인저스, 벅스 이렇게 두 팀을 만들고 경기를 시작했다. 축구화나 운동복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있었고 대부분이 맨발이었다. 경기 휘슬리 울렸다. 진짜 공으로 축구를 해본지 3-4년이 지났고, 제대로 먹지 못해 체력은 바닥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선수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축구를 하고 있었다. 로벤섬에서 축구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로벤섬에서는 축구 리그가 시작되었다. 7개의 클럽에서 시작해 10개 클럽까지 만들어졌고, 협회의 이름도 만들어졌다. 협회 이름은 '마티에니(돌을 의미함)'로 지어졌다 의미가 힘들다는 이유로 후에 '마카나'로 바뀐다. 마카나는 1819년 식민주의 세력에 맞서 영국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 감금되었던 코사 족 지도자의 이름이었다. 마카나축구협회(MFA)는 정관을 작성해 1969년 발표한다. 피파의 규정과 수칙을 적용했으며 이는 그들이 로벤섬에서의 축구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올해의 축구 선수를 선정할 계획도 세우고 이적에 대한 규율도 세운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었다.

1969년 드디어 MFA의 첫 번째 시즌이 시작되었다.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로벤섬 수용소에는 온통 축구 이야기로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있었다.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간수들도 은근히 자신들이 지지하는 팀이 이기기를 응원했고, 남몰래 선수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국저그 배경, 피부색, 인종이나 종교적 신념의 문제를 모두 떠나 로벤섬은 하나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축구는 해묵은 인종차별의 문제까지 뛰어넘으며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주었다.

 

 
로벤섬에도 위기가!


모든 스포츠에는 승패가 있다. 그래서 스포츠가 더욱 즐겁기도 하고, 그래서 스포츠가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로벤섬에서의 축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동등하게 하나가 되고, 그 어느것으로도 하나가 될 수 없었던 그들을 축구라는 것으로 연대감을 느끼게 했지만 역시 축구에도 승패가 있었고 이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문제를 만들었다. 축구 실력이 향상되면서 리그는 더욱 치열해졌고 더욱 경쟁적으로 변해갔다. 

 문제는 심판관이었다. 공정한 심판을 진행하려면 선수들과 거리를 두어야했지만 감옥이라는 특성상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경기가 지기라도 하면 심판관들에게 공격적인 언행을 퍼부으며 그들을 괴롭혔다. 심판관들은 경기장에서 호각을 불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선수들은 심판관들이 오심판정을 했다며 협회에 심판 교체 혹은 판정 번복을 요청하기도 했고 재경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들의 길고 긴 지루한 싸움은 결국 축구를 하고 싶어하고 축구를 보고 싶어하는 팬들에 의해 매듭이 지어진다. 이들이 싸우는 동안 경기가 열리지 않자 수감자들은 물론 간수들까지 축구 경기를 보고 싶다며 아우성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리그는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지만 1976년 소웨토 사건으로 수감자들이 대대적으로 들어오며 다시 한번 갈등이 빚어졌다. 

정부가 아프리칸어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입안하자 흑인들은 다시 한번 분개했다. 흑인 학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영어와 토착어로 교육을 하고 있었고, 언어에 대한 통제는 그들의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다시 한번 봉기한 것이었다. 이번 봉기로 대규모의 흑인들이 정치범으로 잡혀 로벤섬에 들어왔고 이 젊은 소웨토 세대의 흑인들은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그들 눈에는 선배들이 백인들에게 붙어 아무 생각없이 굴욕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놓고 윗 세대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두 세대를 엮어준 데는 또 다시 축구의 힘이 컸다. 윗 세대들은 자신들이 어렵게 쟁취한 권리에 대해 얼마나 힘든 고통을 견뎌내야만 했는지를 설명했고, 젊은 세대들은 축구할 권리를 위해 타협한 배신자라는 생각을 차츰 접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스포츠는 세대 갈등마저 잠재웠다. 젊은 피의 수혈로 로벤섬 리그는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축구는 1990년 로벤섬 교도소가 폐쇠될 때까지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스포츠는 위대하다


"스포츠는 인격을 형성하고, 사회 변혁을 가져오고, 사람들을 공동의 목표를 위해 뭉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_ 254쪽 중에서

1990년.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끝내 무너지고, 새롭고 젊은 다인종 국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새롭게 탄생한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2010년 당당하게 월드컵 개최국으로 전세계 손님을 맞는다. 남아공이 월드컵 개최국이 되기 까지는 이렇게 길고도 험난한 역사가, 로벤섬 수용자들의 피와 땀이 있었던 것이다.

남아공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선 국가였지만 그 속내는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자유를 부르짖다가 잡혀간 수많은 정치범은 로벤섬 수용소에 갖힌 사람들과 닮아 있었고, 소웨토 항쟁에서 학생들이 봉기한 것은 광주 학생운동을 연상시킨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1993년에 민주화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우리 김대중 전 대통령도 2000년에 같은 상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2002년에, 남아공은 그보다 8년 늦은 2010년에 월드컵 개최국이 되었다.   

올초 신문에 난 서평을 읽다가 읽고 싶어 사뒀던 책을 이제야 다시 꺼내 읽었다. 왜 진작 읽지 않았을까 후회도 했고 동시에 지금이라도 이 책을 읽게 된 것에 감사했다. 시나리오 작가 답게 극적인 이야기 구성도 맛깔나게 잘해냈고,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로벤섬 자료를 이잡듯 잡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낸 것도 대단했다. 한편의 거대한 드라마를 보는 듯했고, 긴 여운을 남겨주는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의 표지는 당시 로벤섬에서 축구를 했던 수감자들의 존재를 알리는 단 한장의 사진이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지워져 알아볼 수가 없다. 남아공 정부에 그들은 한 명의 인간, 한 명의 선수가 아닌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들의 얼굴을 찾아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들의 얼굴을 한명 한명 떠올려보려 애썼다. 남아공의 현 모습을 비판하는 것에 앞서, 그들에게 월드컵 개최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보는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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