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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그 순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떠올려 보자. 소설의 큰 줄거리가 기억에 남을 수도 있고(조디 피콜트의 <19분>처럼), 소설 속 특정 캐릭터가 떠오를 수도 있고(<도리언 그레이스의 초상>에서의 주인공 처럼), 밑줄을 박박 그어뒀던 인상적인 구절이 떠오를 수도 있다(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처럼). 그런가 하면 이 책 <잉글리시 페이션트>처럼 이해는 가지 않고 실체를 알 수도 없지만 묘한 '분위기'만을 남기는 소설도 있다.
낯설지 않은 이 책의 제목은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와 동일한 제목이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작품상 등 9개 부분을 석권한 영화의 원작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옮긴이의 글에 따르면 영화와 이 책 사이에는 큰 간극이 놓여 있다고 한다. 영화는 모태와 분위기만 책에서 따 왔을 뿐 완벽하게 각색하여 만든 것 같다(읽어보면 알겠지만 각색이 없이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거다). 영화의 원작인 이 책은 1992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을 수상해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깊고 아름다우며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사막에 있는 남자는 마치 찾아낸 우물 속에 있는 것처럼,
갇혀 있는 그래도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시원한 그늘 속에 있는 것처럼 하나의 이름 속으로 빠져들게 돼.
_ <잉글리시 페이션트>, 187쪽
2차 대전이 종전에 접어들고 있을 시기, 이탈리아 빌라 산 지롤라모에 위치한 한 수도원. 그곳에 낯선 남녀 네명이 모이게 된다. 누구의 조국도 아니고 어떤 이해관계도 없는 네 명의 사람들에게 이 공간은 중립적인 지역이며 평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화상을 입고 해나의 간호를 받고 있는 영국인 환자 알마시, 캐나다 출신이나 유럽 전선으로 파견된 간호사 해나, 시크 교도이지만 영국군 공병인 킵, 그리고 이탈리아인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캐나다에서 온 도둑이자 연합군 스파이인 카라바지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마치 그곳과는 분절된 제 3의 세계같이 평화롭게 느껴지는 이 수도원에서 네 명의 주인공은 평화를 유지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해나가 보여주는 행동이다. 해나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줄 게 없고, 아무런 공감대가 없는 영국인 화자를 간호하기 위해 모두가 떠난 수도원에 영국인 환자와 단 둘이 남게 된다. 그가 잠들 수 있게 어두움 속에서도 촛불에 의지해 책을 읽어주고, 그가 잠들면 수도원 전체에 퍼지는 무서운 침묵을 견디고, 녹아내리는 그의 몸에 있는 곳곳의 상처를 묵묵히 닦아내며 말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친구였던 카라비지오의 만류와 설득에도 그녀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녀의 행동은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뛰어넘은 성녀와 같은 모습이다.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주는 헌신. 전쟁 중의 모습이라 더 그렇게 와 닿는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네 명의 삶과 처지는 각각 다르지만 텅빈 수도원에서 벌이는 넷 만의 축제는 이들을 하나로 엮어준다. 어딘가에서 축음기를 찾아와 움직일 수 없는 영국인을 위해 그의 방에서 <얼마나 오래 이렇게 지내왔던가>라는 음악을 틀어놓고, 아껴 왔던 술병을 꺼내어 입술을 촉촉히 적시며, 처음으로 깔끔한 옷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와 음악에 몸을 던지는 모습.
독백을 통해, 혹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과거의 기억을 맞춰가고 서로에게서 공감대를 발견하는 모습과, 수도원 바깥 저 멀리서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날아가지만 그들이 존재하는 수도원이라는 공간은 지극히 평온하게 느껴지는 것. 이 책이 남기는 분위기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게 아닌가 한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 책을 읽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수많은 시적인 표현과 아무런 예고 없이 순식간에 현실과 과거를 넘나드는 스토리텔링 때문이다. 몰입을 하려고 하면 할 수록 나를 더 텍스트 바깥으로 튕겨나가게 만들었고,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뜨렸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이 책을 들고다녔지만 이 책이 내게 남긴건 수도원에서 벌어진 그들만의 축제의 장면이었다. 하지만 100퍼센트 이해를 낳지 않으면 또 어떠랴. 적어도 이 소설의 '아우라'만은 내게 남겨 줬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