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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파이어 1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평점 :
"그놈들은 질문밖에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 오히려 왜 자기가 그런 꼴을 당해야만 하는지 묻지.
그건 결국 자기가 저지른 짓을 깨긋이 까먹었다는 이야기야."
"그놈들에겐 죄책감 같은 것도 없다는 건가? 후회나 공포, 자기혐오 같은 것도?"
"없지." 단호한 대답이었다.
_ <크로스파이어1>, 111쪽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살인범이 더욱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에게 죄책감이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또 그들에게는 살인의 특별한 목적이 없다. 치정이나 원한에 의한 복수가 아닌, 살인자체가 목적이 되고 그냥 살인을 즐기는 거다. 살인을 순전히 재미로 여기고 범행을 저지른다. <모방범>의 범인이 그랬고, <나는 지갑이다>의 범인 역시 그랬다. <크로스파이어>에 나오는 살인범들 역시 그렇다. 여고생을 차로 치어 죽이며 그 과정에서 살려달라 애원하는 여고생들을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스포츠 킬링'이라고도 부르는 이런 살인자들의 범행은 범행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일종의 쾌락 살인인 셈이다. 그래서 더욱 무섭다.
<크로스파이어>는 미야베 미유키가 제기하는 무차별 살인, 쾌락 살인에 한가지 더 의문을 제기한다. 바로 이들을 처단할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 있는가이다. 이 소설 속에서 소녀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일종의 스포츠 킬링을 즐기는 범죄 집단은 청소년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형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이들은 법의 심판도 받지않고, 죄책감 없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이는 살인 사건 조차 잊은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염화 능력의 소유자 아오키 준코는 그들을 자신이 처단한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이러한 능력을 가지게 된 데는 이런 처단에 대한 당위감이 있다고 여기는 거다.
아오이 준코가 짝사랑하고 있던 다다의 여동생이 연쇄살인집단에 의해 희생당하고 이를 지켜보던 준코는 본격적으로 사회적 악(법의 심판을 받지 않는 자들)을 저지르는 자들을 자신의 능력으로 처단하기 시작한다. 준코는 염력으로 불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 힘으로 다다를 대신해 복수를 하려고 한다. 한편 원인 모를 연쇄방화사건을 쫓는 형사 이시즈 치카코는 준코의 뒤를 쫓으며 준코 뿐 아니라 이런 초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어릴적 바로 눈 앞에서 갑자기 몸에 불이 붙어 죽은 동생의 범인을 쫓는 마키하라를 만나 사건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초능력자의 등장에 사실 적잖은 당황을 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에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되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읽었던 전작 <모방범>과 <나는 지갑이다>와 같은 전형적인 사회적 미스터리 스타일을 생각했다. 한 사건을 둘러싸고 얽힌 여러 이해관계들을 보여주며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는 그런 것을 기대했는데 전혀 예상 밖이었다. 옮긴이 후기를 보니 그녀의 작품에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것은 이 책이 처음은 아닌듯하다. 그녀의 첫 소설 <용은 잠들다>, <데드 존>에서 이미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번 <크로스파이어>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그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으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사회적 적응을 하지 못하는 그들의 애환을 주로 담았다.
미야베 미유키는 책의 후반부 기누가사의 목소리로 아오키 준코와 같은 초능력자가 사회를 대신해 범죄자를 제거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밝힌다. "아사바 게이이치(흉악범)는 일반인들에게 있는 것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특이 능력자가 될 수 있었죠. 반대로 아오키 준코는 일반인들에게 없는 것을 지니게 되어 특이 능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같은 부류의 인간이죠. 결과적으로 둘 다 똑같이 위험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살인자가 된 거죠." 스토리의 전개보다, 내용의 통쾌함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결말이다. 영화로도 개봉된 작품이라고 하니 영화로도 만나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