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 열여섯 소년, 거장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산책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눈이 멀어서 더이상 책을 읽을 수 없게 된다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일 거다. 평생 글을 읽을 수 없는 슬픔.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여기 눈이 먼 작가이자 국립도서관장이 있다. 수차에 걸쳐 노벨 문학상 수여를 거부한 사람. 20세기 후반의 현대 지식인과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카프카와 조이스와 같이 '보르헤스적'이라는 형용사를 만들어 낸 사람. 바로 보르헤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낯설지만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20세기 현대문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작가로 불린다. 꾸준히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사색한다. 시에서 시작한 죽음, 시간, 정체성과 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문제를 단편 소설에서 보여준다. 현대문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그의 작품 <픽션들>과 <알렙>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이 있어 만나볼 수 있다. <픽션들>은 소설과 에세이의 중간 즈음이고, <알렙>은 본격적인 단편소설의 문체를 보여준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은 세계적인 저술가이자 독서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이 십대 시절 보르헤스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쓴 책이다. 망구엘은 십대시절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일을 했는데, 당시 우연한 기회에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게 된다. 서서히 시력을 읽어가 그토록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보르헤스가 책을 읽기위해 망구엘에게 책을 읽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있잖니, 눈이 멀지 않은 시늉을 하며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처럼 책을 탐독하고 싶어. 새로 나온 백과사전이 얼마나 갖고 싶은지 몰라. 지도의 강줄기를 따라가고 수많은 항목에서 놀라운 내용들을 찾아내는 상상을 한단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실명에 대해 문학적인 표현을 많이 남겼다. 자신에게 '책과 어둠'을 주신 건 '신의 아이러니'라 했고, 호머나 밀턴 같은 역사 속 유명한 장님 시인을 언급하며 자신을 비유했고, 자신은 눈이 먼 세 번째 국립도서관장이라 불러달라했다. 망구엘은 보르헤스와의 놀라운 경험담을 풀어놓는다. 망구엘은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으며, 자신이 원하는 책을 직접 책장에서 골라내기도 했다. 책방에 갈 때도 있었는데 보르헤스는 책등을 어루만지며 피부로 책을 느꼈다.
작가이자, 독서가이자, 친근한 할아버지 같은 보르헤스의 책에 대한 사랑은 눈이 멀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책에 관한 그만의 독특한 생각들, 책에 대한 무한한 애정, 그리고 책을 바라보는 세계관 등이 운치있는 일러스트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이 책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하는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독서의 역사>로 이미 세계적인 저술가가 된 망구엘이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이 책을 쓴 것은 자신에게 책의 세계관을 심어주고 지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경험이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