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인간 엔키두, 여신 아루루가 던진 진흙 한움큼에서 태어난 그는 들판의 동물들 품에서 성장했습니다. 한오라기의 실도 걸치지 않은 채 짐승처럼 털이 난 몸으로 그는 자유롭고 또 태평하게 자연을 뛰놀았겠지요. 그러던 어느 날 덫 엔키두와 마주친 덫 사냥꾼이 매춘부인 샴하트로 하여금 엔키두를 유혹하게 합니다. 샴하트와 찍짓기를 한 엔키두는 그녀의 조언에 따라 면도를 하고 옷을 입고 우루크의 도시로 입성하게 되요. 야수들과 야생을 누비던 삶을 버리고 남자답게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 노동도 시작합니다. 목동들의 야영지, 양 우리에서 빵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엔키두는 그렇게 문명인이 되어버려요.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만나게 된 것은 어느 백성의 결혼식 때였는데 엔키두는 왕의 초야권에 반기를 듭니다. 어쩌저찌 화해한 두 사람은 우정을 약속하며 형제처럼 다정한 사이가 되었구요.
엔키두는 훔바바를 죽이고 싶은 길가메시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길잡이이자 동료로써 그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고대의 숲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려워도 그가 길가메시에게 공포를 주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길가메시였지만 삼나무가 빼곡이 들어찬 훔바바의 숲에서는 공포로 몸이 움츠러들거든요.
암새, 숲비둘기, 멧비둘기, 어미 원숭이와 새끼 원숭이의 꽥꽥 대는 소리가 숲 전체에 메아리치며 길가메시에게로 쏟아집니다. 길가메시는 겁쟁이처럼 팔이 뻣뻣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엔키두의 격려에 용기를 끌어올립니다. 죽음을 잊고 숲으로 진입하는 길가메시의 모습이 궁금한데 텍스트가 너무 많이 훼손됐어요. 끝도 없이 늘어지는 말줄임표에 눈물이..😂😂 중간과정은 생략됐지만 영웅들은 삼나무 숲을 지키는 훔바바를 죽이고 거침없이 숲을 파괴합니다. 훔바바의 일곱 아들 귀뚜라미, 새된 소리, 태풍, 비명, 간교... 폭풍우도 도끼에 잘려나갑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얼마나 거대한 공포였는지 또한 자연을 정복하는 게 얼마나 커다란 업적이었는지를 두 영웅이 보여주고 있어요. 삼나무를 모조리 잘라내며 숲을 황무지로 만든 영웅들은 제일 크고 웅장한 삼나무로 엔릴 신전의 장식문을 만들거든요.
삼나무 숲의 정복이 끝난 후 의관을 정비하는 길가메시. 긴머리를 등 뒤로 늘어뜨리고 왕관을 쓴 그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이쉬타르 여신마저 한눈에 반하고 맙니다. "오라, 길가메시, 내 신랑이 되어라! 내게 그대의 결실을 다오, 오 내게 다오!" 여신의 절절한 청혼에도 길가메시는 꿈쩍도 하지 않고 외려 이쉬타르를 모욕하는데요. 이쉬타르의 열 손가락이 넘어가는 연인과 남편들의 말로가 가히 좋지 않았던 탓입니다. 누구는 날개가 부러졌고 누구는 난쟁이가 되었으니 내가 지겨워지면 나는 또 어떻게 되겠냐는 거지요. 이쉬타르는 중상모략 말라며 분개하는데 어찌나 화가났는지 아버지 아누 신 앞에서 땡깡을 피워요. 울고 불고 소리치고, 도무지 신이 벌일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귀찮았던 아누 신이 하늘의 황소를 데려가게 합니다. 황소 녀석 보통 잘 싸우는 게 아닌지라 엔키두 얼굴에 침을 뱉고 꼬리 타래로 똥도 뿌리고 그러는데요. 저는 무슨 초딩도 아닌데 이 장면이 넘 웃겨서 읽으면서 조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영웅의 귀환, 이들 앞에는 영광스런 삶이 기다릴 것 같았지만 신들은 두 인간의 과용을 벌하듯 엔키두를 죽이기로 합니다. 엔키두는 야생을 버리고 문명세계로 오게 만든 덫 사냥꾼과 매춘부를 원망하고 저주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죠. 병상에 누운 엔키두는 전투에서 스러져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운명을 한스러워 하며 영면에 듭니다. 이후 길가메시는 사자 가죽을 걸치고 우타나피쉬티가 발견한 영생의 길을 찾기 위해 방랑을 시작합니다. 전갈인간을 만나고 마슈 산을 오르고 태양 보다 앞서 달린 끝에 죽음의 물을 건너 우타나피쉬티를 만나는데요. 우타나피쉬티는 저 유명한 대홍수의 이야기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배에 실어 목숨을 구했던 일화를 말해줍니다.
순서대로 비둘기, 제비, 까마귀를 꺼내 날려보냈는데 앞서 두 마리는 앉을 곳이 없어 되돌아왔지만 마지막 까마귀에 이르러서는 활개치고 날아다니며 돌아오지 않았다더라 하는 장면에선 성경이 생각나기도 했어요.
엔릴은 대홍수에 모든 인간이 휩쓸려 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격분하지만 우타나피쉬티에게 천기를 누설한 에아는 엔릴을 비난하기 바쁩니다. "죄 지은 자에게 그 죄를 물으시오! 과오가 있는 자에게 그 과오를 물으시오!"(p161) 사자와 늑대, 기근과 역병이 사람 수를 줄일 수도 나라를 응징할 수도 있는데 대홍수를 일으킨 건 너무 과했다는겁니다. 반성을 했는지 어쨌는지 엔릴은 우타나피쉬티와 그의 아내를 축복해 영생을 내리는데 길가메시는 그 방법을 쓸 수 없어요.
대신에 여섯 날 이레 밤 동안 자지 않는 숙제를 받았는데 그간의 여정이 너무 힘들었던 탓일까요? 길가메시는 자리에 쭈그려 앉자마자 잠이 들어버리고 영생의 길에서도 영영 멀어지게 됩니다. 고생 끝에 좌절감만 갖게 된 길가메시를 동정해 우타나피쉬티는 그가 불로초를 가져갈 수 있게 해줍니다. 신과 같이 영영 살아 숨쉴 수는 없어도 젊음을 되찾을 순 있겠구나 기뻐하는 길가메시. 과연 그는 우루크 성벽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오래도록 도시를 바라보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 오라, 엔키두, 아비도 몰라보는 물고기 새끼야 어미 젖도 빨지 못한 거북과 자라의 새끼 놈! (p84) : 애비애미 없는 놈이라거나 부모도 못알아보는 놈이라는 욕은 어쩌면 태초부터 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 어느 병사도 너를 위해 허리띠를 푸는 데 더디지 않고 그는 흑요석, 청금석, 금을 네게 주리! 금 귀고리를 그가 네게 주리니! 신들 중 가장 재주 있는 이쉬타르는 네가 안정된 가정과 잔뜩 쌓인 재물을 가진 사내에게 다가가게 하리! 그의 아내는 일곱 자식의 어미이건만 너 때문에 버려지리! (p111) : 아니 이건 아니지!! 죽을 날 받아놓고 샴하트를 저주하던 엔키두가 샤마쉬 덕분에 마음을 고쳐먹고 샴하트를 축복하는데요. 인기 끌고 돈 많이 벌어라 하는 것까진 그러려니 하겠지만 남의 집 멀쩡한 부인네는 왜 건드려요 왜?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 내 친구, 분주한 야생 망아지, 고지대의 당나귀, 야생의 퓨마, 내 친구 엔키두, 분주한 야생 망아지, 고지대의 당나귀, 야생의 퓨마 : 길가메쉬가 엔키두를 부르는 애칭이 넘 귀여워요. 둘이 연애하냐고요. 꽁냥꽁냥. 이런 상상하는 내가 정말 싫지만 길가메시 귀욤😍
🟢 수두룩한 새 떼를, 그득한 물고기 떼를, 풍성한 수확을 그가 주시리 그가 아침에 떡을 비처럼 저녁에 밀을 회오리처럼 내리시리.(p154) : 황금이 아니라 떡과 밀을 내리는 에아 신, 이 한 문장에 벌써 배가 불러요.
🔵 내가 낳았고 이들은 내 사람들이건만! 그런데 이제, 그들이 물고기 떼처럼 바다에 꽉 찼구나!(p157) : 대홍수의 풍경
⚫ 그다지도 생을 갈망했던 자를 보오! 잠이 안개처럼 벌써 그 위로 숨쉬는구려.(p162)
여기까지의 내용이 1부. 심연을 본 사람 : 바빌로니아 길가메시 서사시 표준 판본 이구요. 2부에는 수메르어 길가메시 시들이 나오는데 1부의 바빌로니아 표준판, 아카드어 판과 다른 점이 많아요. 길가메시는 아카의 사절단과 전투를 벌이는데 엔키두는 여기서 길가메시의 부하로 등장합니다. 인기가 많은 버전 A는 "산 자의 산으로 가는 왕"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엔키두가 길가메시의 부하로 나오구요. 후와와(=훔바바)를 죽이는 방법도 달라요. 두 명의 누이와 결혼 동맹을 맺자고 하고 고운 밀가루, 가죽 물병, 큰 샌달, 작은 샌달(발이 네 개? 아님 짝짝이?), 수정 같은 보석을 줄 테니 공포와 광휘를 달라고 요청하는데요. 일곱번이나 광휘를 내어준 후와와는 모든 힘을 잃고 엔키두에게 목이 잘려 죽는답니다. B 버전은 제목이 "만만세"인데 내용도 짧고 인기도 적고 인지도가 덜한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3부에는 바빌로니아 길가메시 서사시의 구버전 파편들이 실려있어요. 길가메시 약간 찐따 같이 우는 때도 있는데 공이랑 방망이를 잃어버렸을 때 "오 내 공! 오 내 방망이! 오 공, 내가 맘껏 갖고 놀지 못했건만! 오 경기, 시합을 다 하지도 못했건만!" 하고 흐느낄 때 동네 바보 보는 느낌이었어요. 영웅에게도 장난감은 참 중요한 거였더라구요. 엔키두가 길가메시 장난감 찾으러 저승을 간다는 게 무척 충격적이고 길가메시가 하지 말라고 한 온갖 짓을 다 저지르는 모습도 웃겼습니다. 엔키두가 저승에서 못돌아오자 길가메시가 엉엉 울며 아버지 신들(한둘이 아님;)을 찾아가 사정하는데 그들이 입 꾹 다물고 대꾸도 안하는 게 무척 현실적(?)이에요. 2부의 길가메시와 엔키두 사이에는 아무 낭만이 안느껴져서 1부 보단 별로였어요. 호칭도 내 야생 망아지, 내 당나귀, 내 퓨마에서 "제가 총애하는 하인, 제 변함없는 동반자, 제게 조언한 이!"로 바뀐단 말입니다. 그 시절에도 사산아들에 대한 동정심이 컸는지 저승의 아기들이 금은으로 된 식탁에서 시럽과 버터기름 속에서 놀더라고 말해서 짠했어요. 3부는 앞서 1, 2부보다 시기상 더 앞선 것인데 내용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대요. 이런 점이 서사시의 특징이라는가봐요.
제가 고전 읽기에 많이 익숙해진건지 길가메시 서사시가 독자 안가리고 유독 재미난 책인건지 구분이 안갑니다. 인류 최초의 신화인만큼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흥미진진 합니다. 운율을 살린 서사시의 번역이 취향의 호불호가 심한 편인데 이번 공경희 역자님의 번역은 편안하게 읽히더라구요. 길가메시 태블릿이 계속해 발굴되고 있는 상황이라 언젠가는 말줄임표 없는 완역본을 읽게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흰개미가 파먹은 나무마냥 구간구간 공백이 많은 편이라 그 점은 감안하셔야 해요. 기원전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고대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사실에 마냥 황홀하고 황송해서 전 뭐 불완전한 책이고 어쩌고는 아예 생각도 못했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삼분의 이는 신이요 삼분의 일은 인간인 아름답고 당당한 천하장사 왕 길가메시. 살아생전의 바람대로 오래오래 살아남아 고대 서사시의 찬란함을 느끼게 하는 그는 정녕코 왕중의 왕, 가장 전능한 왕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