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하창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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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식민지 시기, 아일랜드 태생의 장교와 인도여자 사이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자란 고아 소년 킴은 거대한 대포 잠잠마 아래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빨간 모자를 쓰고 탁발그릇을 품은 티베트에서 온 구루, 노승, 성자, 성인. 어떻게 불려도 좋을 지혜로운 테슈 라마가 거리에 침잠해 있던 킴의 운명에 무지개를 띄운 것이다. "저분은 단지 우리가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일 뿐이야."(p19)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해 화살의 강을 찾아 하산하여 석가모니의 발자취를 좇고 있는 스님을 처음 본 순간 킴의 입에서 나온 현명한 말과 태도가 나를 매료시켰다. 다른 모든 아이들이, 그들의 말을 빌자면, 우상숭배자인 늙고 고단한 이방인을 겁내고 비웃을 적에 유일하게 킴만이 나서서 그를 불가사의한 집(박물관)으로 안내하고 구걸로 탁발그릇을 채워 배를 채우게 했으며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스님은 벼락처럼 그가 자신의 제자될 이임을 알아 보았고 소년은 첫눈에 그를 사랑하게 된다. 아니 두 사람 모두가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함께 길을 나섬에 한치 주저함도 없을 정도로. 

화살의 강을 찾아서 인도의 모든 강을 건너야 하는 스님과 킴의 긴 여정이 12세에서 16세까지 계속되는 동안 인도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라호르와 티베트에 이르는 소박하지만 장대한 걸음이 떠들썩하다. 때로는 기차의 삼등열차에 올라타 닭장 같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때로는 2400키로미터에 이르는 눈이 부신 대간선도로를 따라 걸으며, 또 때로는 북부인도왕국의 나이든 부인의 가마를 얻어 타기도 하며 한 강을 살피고 또 한 강을 살피며 나아가고 나아가는 킴과 테슈 라마의 여정이 어찌나 감동적이던지. 마치 서유기의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인도판 버전을 보는 듯도 한 이 기이하고 우습고 신기하고 아름다운 사제와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책을 잡기도 전부터 저항적 읽기를 하리라던 내 결심을 열두번쯤 무너트렸다. 아이 같이 순수하고 지혜로운 노승과 천방지축 악마 같이 영악하지만 노승을 너무나 사랑하여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쉰가지쯤 댈 수 있는 킴을 읽다 보면 백인우월주의자이며 제국주의의 기치에 글쓰기를 다 바쳤던 러디어드 키플링의 가증스러움을 자꾸만 깜빡하게 되는 것이다. 

반란(인도의 입장에서는 여지없는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자신의 사촌까지 죽여버렸던 매국노 늙은퇴역군인은 영국으로부터 훈장과도 같은 재산과 존경을 받으며 그의 아들들까지 장교로 만들어 떵떵거리고 살고 있었다. 인도의 민족들은 특히 북부의 소수민족들의 경우엔 영국인으로부터 지배 당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복종의 태도를 보인다. 가난한 인도인들은 그들의 재산을 훔쳐가기 위해 만들어진 기차에서도 삼등석, 다리를 펼 수도 없는 자리에나 올라탈 수 있을 뿐이며, 기차선로 아래로 엎드려 있었단 것만으로 (물론 그들에겐 북인도왕국의 밀정이라는 숨은 직업이 있었지만) 경찰이란 공권력으로부터 정도 이상의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피부가 하얀 백인들은 죄책감 없이 검은 인도인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고 때로는 총을 쏠 수도 있었으니까. 북인도왕국의 힘없는 왕들이 러시아와 손을 잡아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 또한 여정의 와중 영국정부의 스파이가 된 킴으로 인하여 끝끝내 무산되고 만다. 테슈 라마의 인도로 화살의 강을 만나 윤회의 수레바퀴에서는 벗어났을지언정 제국주의의 포화 속에서 백인으로서의 자부심만큼은 킴조차 뿌리 뽑지 못했던 탓이다.

세상 모든 이들의 친구, 모든 별들의 친구인 킴이 붉은 황소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을 지나쳐 테슈 라마와 헤어짐 없이 쭈욱 길을 나아갔더라면.. 그 한가지의 아쉬움을 뒤로 하며 책을 덮는다. 식민역사의 아픔을 모르지 않는 국가의 국민으로, 독자로써 좋은 책이었다 말하기가 죄스럽다. 그럼에도 도무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빠져읽은 것 또한 사실이라 테슈 라마와 킴의 여정을 추천하지 않을 도리도 없다. 키플링이 일찍이 그가 썼듯이 윤회의 수레바퀴가 공정함을 알고 그 자신과 그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글쓰기를 했다면 어떠했을까 다 늦은 바람으로 안타까움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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