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3월 1일에 읽었던 종말의 바보 리뷰를 이제서야 쓰다니.
3.1절에 일본 소설 리뷰 쓰기가 머쓱해 잠시 둔다는 게 미루고 미루다 20일까지 와버렸다.

책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낭만적이고 또 신난다. 찡찡 울다가 아, 뭐래? 하며 큭큭 웃다가를 반복. 종말이 코 앞이니 세상은 하 수상한데 사람들은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쓰담쓰담해주고 싶은 인물이 한둘이 아니었다. 종말이 배경인 동화, 종말 속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를 읽는 기분이랄까. 이사카 코타로라는 작가는 마냥 유쾌한 글만 쓰는 줄 알았다가 (아무래도 명랑한 갱의 이미지가 나한텐 압도적이었던 듯)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도 그렇고 종말의 바보도 그렇고 참 놀라게 된다. 물론 집들코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종말의 바보는 또 너무 취향이라 이 두 소설을 연달아 읽으니 이사카라는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 종말의 세상, 그 세상의 작은 조각 센다이의 힐즈타운에서 시작하는 몇 없는 주민들의 이야기, 첫편은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종말의 바보였다.


1. 종말의 바보

첫 장면에서 인물들이 쌀 5kg를 구입하길래 나는 아직 종말의 상황이 뉴스를 타지 않은 줄로 알았다. 종말의 개봉인가? 하며 출근하고 돌아와 3.1절을 맞고 다음 장을 읽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이미 5년 전에 종말의 상황이 전해지고 앞으로 남은 지구의 시간은 고작해야 3년이 전부. 왜 이렇게 평화롭나 했더니 한차례 살인, 강도, 자살이라는 슈퍼 태풍이 전일본을 휩쓴 상태였다. 그리고 그 태풍의 눈 안에서 3년 후의 종말이 아니라 집으로 오겠다고 연락해 온 딸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남자, 오베가 떠오르는 그런 가장이 등장한다. 딸이 나를 죽이러 오는 게 아닐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는 피식피식 웃었지만 굉장히 재수없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연약한 인간이고, 핍박받는 사회인이고, 그 스트레스와 불안을 풀길 없어 만만한 자식과 아내를 질타했던 아버지이자 남편. 그 변명이 혐오스러웠음에도 이미 네 죽음 내 죽음 우리 모두의 죽음이 예견된 상태라 그런지 그런 그를 용서하려는 딸이 심정적으로 이해가 됐다. 물론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2. 태양의 딱지

주인공 부부의 이야기 보다 태어날 때부터 아팠고 진행성이라 계속 더 아파할 아이를 키우는는 쓰치야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진득하게 기억에 남는다. 아이가 아프지만 그래도 매일을 즐겁게 살고 있는 가장, 그러나 막연하게 뒤를 쫓는 두려움. 내가 늙거나 먼저 죽으면 아픈 아이는 혼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당연한 두려움 앞에 전해진 비보, 종말.

"소행성 충돌 때문에 앞으로 3년이면 끝장이야. 모두 똑같아. 그렇잖아? 그야 무섭지. 하지만 우리의 불안은 사라졌어. 우리는 아마 리키하고 함께 죽을거야. 아니, 모두 함께지. 그렇게 생각했더니 굉장히 편해지더라. " (p78)

"다른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요즘 나는 정말 행복해." (p78)

쓰치야의 말을 듣고 주인공 남자는 생각한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감탄인지 경탄인지 모를 감정으로 가슴이 뭉클했다"고. 순간 나도 말문이 막혀 이 페이지에서 한참을 주춤했던 기억이 있다. 달리 표시하지 않아도 문단을 옮겨 쓰기 위해 페이지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만큼 뚜렷하게 남은 쓰치야의 마음. 아이의 몇 해 남지 않은 시간에 좌절하고 고통받을 부모들에 대해서는 상상해 본 적이 있지만 아픈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차라리 온가족이 다함께, 확실하게 끝나게 될 시간에 대해서 감사하고 행복해 할 부모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뭐야? 뭐지? 잠깐 의아했다가 곧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납득하게 됐다. 종말의 바보를 읽을 때처럼 평가하고 재단하는 마음 없이 그냥 충격적이었고 동시에 감동적이었다. 인간의 이런 류의 나약함은 차라리 마음에 든다.


3. 농성의 맥주

인질이었던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여론의 호도, 참지 못한 여성의 자살, 그에 대한 형제의 복수.
소행성에 선수를 뺏기기 전에 여론을 몰아간 대상에게 죽음을 선사하겠다는 일념이었으나 알고 보니 그 복수의 대상이 자살을 목전에 두고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복수의 형태는 무엇이어야 할까? 


4. 동면의 소녀

소녀의 부모는 살아남기 위해 우악을 떨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한 채 생을 저버린다. 어린 딸만 남겨둔 채로.

/ 아버지와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
/ 아버지의 책을 전부 읽는다.
/ 죽지 않는다.

노력할 필요도 없이 잘 실행하고 있는 첫 번째 목표는 물론이거니와 곰팡이처럼 번식하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 포자 퍼트리기를 멈춘 서재의 책까지 모두 읽어 두 번째 목표까지 달성! 죽지 않는다는 세 번째 목표도 현재 진행형이다. 사 년의 매일매일을 책 읽는데에만 집중했던 미치는 친구와의 만남으로 애인을 찾는다는 네 번째 목표를 가지게 된다. 비지니스 서적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세 명의 의견을 들어라"(p157)라는 문구를 실행하여 마치 이솝 우화처럼 그녀는 사람들을 찾아서 집을 나선다. 처음으로 만난 인물은 첫 번째 이야기 종말의 바보 속 주인공 가토리 부부, 두 번째 인물은 동경하던 동급생이었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동급생의 어머니로 대신하게 되었고, 세 번째 인물은 제자의 이름과 최고 점수만큼은 잊지 않는다는 옛 과외 선생이었다. 이들과의 만남 끝에 종말이 겨울잠이라면 혼자서 자는 건 쓸쓸하다며. 역시나 애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던 미치는 곧 동화처럼 쓰러진 남자를 보게 된다. 그 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희미하게 드는 예감 앞으로 점프! 막연히 희망하기 보다 긍정적으로 실천하고 움직이는 미치의 소녀 같은 낭만과 목표들이 예뻤다. 가장 좋았던 이야기.


5. 강철의 울

소년 만화 잡지 점프에서 봄 직한 이야기였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은 잽, 잽, 라이트훅을 날리겠다는 우직하고 열성적인 킥복싱 선수와 그를 동경하는 소년. 종말의 선언 이후 방 안에 틀어박힌 아버지와 남은 시간만큼은 올곧게 잘 살아내고 싶은 아들의 갈등. "앞으로 3년이잖아... 어차피 3년이야. 최대한 평화롭게 살고 싶지 않아?", "세상을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잖아. 이 집안을 말하는 거야. 세상은 불가능하더라도, 이 집 정도는, 우리는 평화롭게 살 수 있잖아. 아니야? 아버지는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p210) 아버지를 향해 외치는 소년의 분노에 가슴이 뜨끔뜨끔. 종말의 소식이 들린다면 가장 먼저 방에 틀어박힐 유형의 인간이 나라서 남 일 같지 않았다. 나 또한 저와 다를 것 없이 크게 좌절하다 우울감에 빠지지 않을까. 죽을 용기도 없이. 소년의 아버지처럼 말이다. 이사카 코타로 식으로 단편들의 끝, 심해의 지주에가서야 긴가민가 이어지는 부자의 뭔가 흐뭇해지는 해피엔딩도 좋았고, 소년의 땀내나는 로망도 두근두근했지만 그 중에서도 저 외침이 가장 인상 깊게 남았다. 


6. 천체의 돛배


동면의 소녀에 이어 두 번째로 좋았던 이야기. 역시나 소년만화 같은 느낌으로 태양의 딱지처럼 중심인물 보다 천체 오타쿠인 주변 인물인 니노미야의 이야기가 좋았다.

"충돌할 때 넌 어쩔 거야?"
거기에서 니노미야가 뺨을 누그러뜨리고 평소의 긴장한 눈매에서 힘을 빼더니 나를 향해 웃었다.
"당연히 망원경을 봐야지."
"당연한 거냐?"
"그야 지금까지 우리는 지구에서 몇십만 킬로미터 아니면 몇백만 킬로미터 떨어진 혜성을 보면서 기뻐했어. 그걸 훨씬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거야. 게다가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이쪽으로 다가오는 거니까." 말할수록 흥분하는 그에게 나는 압도당했다.
"굉장하지 않아? 진짜로, 만약에 정말로 떨어진다면 굉장한 일이야. 지금부터 잠이 안 올 정도야."

혜성 충돌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글이글 하게 타오르는 니노미야의 말에 얼이 빠졌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 그런데 그게 정말 유쾌했다. 거짓말이지? 하고 되묻는 야베의 마음이 이해가 가서 더 웃음이 났다. 물론 종말이 닥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읽는 이야기라 웃을 수 있는 거겠지만 이 놈 정말 재미있지 않냐고, 괴짜 친구를 소개하듯 주변에 마구 얘기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7. 연극의 노

종말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다함께 살게 되는 동화 같은 이야기.


8. 심해의 지주

슈이치의 아버지는 망루를 만든다. 홍수가 일어났을 때 건물이 가라앉더라도 망루에 앉아 물에 휩쓸려 가는 거리를 바라보겠다는 괴짜 아버지를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느 새 부자는 함께 망루 앞에 서있다. 종말의 그 날, 아내와 함께 딸을 한 칸이라도 더 높이 올려 1분 1초라도 더 오래 살게 하겠다, 추하더라도 생에 대해 악착을 떨겠다고 결심하는 슈이치의 그 마음이 그대로 망루를 만든 그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괴짜의 부성애는 이런 식으로 표현 되나봐 하며 잔잔히 웃었다. 아버지에 대해 혀를 차는 슈이치 또한 보통 인물은 아니라 이 상황에서도 테이프 반납을 미룬 손님에게 연체금을 받으러 다니는 기행을 벌이는지라 그런 점도 재미있었고, 여태 읽은 이사카 코타로의 단편 같은 연작집의 특성 그대로 힐즈 타운의 바보들이 우르르 등장하는 장면들에도 눈가가 시큰시큰했다. 상투적이지만 어딘지 가족 드라마 같은 결말이 맘에 든다.    


수월하게 읽혀서 넘어가는 페이지가 가볍게만 느껴졌는데 책을 덮은지 스무날이 넘어가도록 여운이 길게 남는 소설이었다. 명랑한 갱을 이어 이사카월드 안에서 가장 마음에 든 작품이기도 하고. 그러나 장은진의 날짜 없음과 마찬가지로 종말의 바보 또한 생존본능을 쫓아 이리저리 도망치며 살아남는 사람들의 얘기가 아니므로 투쟁, 극복, 승리!를 모토로 한 극적인 재난 소설을 원하시는 분이라면 비추다. 이들은 대체로 재난 극복에 대한 최소한의 의지조차 없다. 좀비도 아니고 회오리도 아니고 눈사태도 아니고 지구를 때려박는 혜성충돌이니 별 뾰족한 수도 없다. 그래서 이들은 그저 살아간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올지 안올지 모를 내일과 그 너머의 종말에까지. 그 잔잔한 살아나감이 감동적이고 유쾌하고 웃음이 나는 아주아주 재미난 이야기 모음집, 추천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