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 허밍버드 클래식 M 3
가스통 르루 지음, 신소영 옮김 / 허밍버드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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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밍버드 출판사 지원 도서입니다

"크리스틴, 나를 사랑해야 하오!"(p41) 사랑하는 여인의 분장실에서 들려오는 한 남성의 목소리에 라울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습니다. 노크 하려던 손을 떨구고 그는 문에 귀를 가져다 댑니다. 흐느끼듯 고통스러워하며 크리스틴이 답하는군요. "저는 오늘 밤 당신께 제 영혼을 드렸고, 이제는 죽을 지경이에요."(p43) 아름다운 크리스틴의 정절을 믿었던 자작은 그녀에게 자신 아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틴이 분장실을 떠나자마자 라울은 방으로 짓쳐들어갑니다. 질투는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분노로 변질된지 오래, 그와 결투라도 벌일 심산이었지만 어찌된 일일까요? 라울을 반기는 건 텅텅 빈 분장실에 떠도는 크리스틴의 향기 뿐입니다. 상대가 놀라 숨었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방을 뒤져도 남자의 머리카락 한 올 볼 수가 없습니다. 헛소리를 들은 것은 아닐진데 도대체 영문을 몰라 라울은 어리둥절하고 괴롭습니다.

음악의 천사가 자신을 방문했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한 아가씨 크리스틴. 그녀는 천사의 교습으로 단기간에 재능을 깨치며 오페라의 인기 있는 프리마돈나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세간의 찬사와 쏟아지는 관심이 기쁠만도 하건만 어느 순간 크리스틴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기 시작해요. 첫사랑 라울과의 만남을 천사가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남자가 생긴다면 나는 떠나겠소. 더는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거요." 세상에 어떤 천사가 신자(?)의 사랑을 질투하며 협박을 할까요. 목소리의 정체가 천사가 아닌 오페라의 유령임을 알게 된 크리스틴은 혼란에 빠지지만 그의 천재적 재능에서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의 가면을 쓰고 검은 망토를 휘두르며 도도하게 굴다가도 어느 새 발밑에 엎드려 사랑을 애걸하는 유령에 넋이 나간 크리스틴은 프시케와도 같은 호기심으로 그의 가면을 벗겨냅니다. 야생 동물처럼 금빛으로 번쩍이는 눈, 녹아 흔적도 없는 코, 괴물 같은 얼굴에 비명이 터져나오고 유령은 크리스틴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자신의 운명에 예속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죽음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리니. 갱생 불가능한 집착남에게 찍혀버린 크리스틴은 무사히 태양을 볼 수 있었을까요?

한편 무대 위에서 실종된 크리스틴의 뒤를 쫓는 라울에게 극장의 페르시아인이 접근합니다. "크리스틴을 구하고 싶다면 내 뒤를 따르시오." 페르시아인은 과거 유령의 목숨을 구했던 이가 자신이며 그만이 유령의 지하궁궐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페르시아 어린 왕비의 천재 건축사로 각종 미로와 고문의 방, 완벽한 비밀의 문을 제작했던 유령은 이곳 극장의 건축에도 참여하며 누구도 파쇄할 수 없는 요쇄와 수십 어쩌면 수백개의 비밀통로를 극장 내에 갖춰 놓았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유령의 집에 노크도 하기 전에 지하 호수 속 세이렌의 함정에 홀려 물 속에 잠겨죽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유령의 뒤를 쫓다 이미 몇 번이고 목숨을 잃을 뻔했던 페르시아인은 자신이 살린 유령 때문에 무고한 생명이 죽었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으로 권총을 챙겨 마지막 대결 장소로 향합니다. 지하로, 다시 지하로, 더 어둡고, 더 축축하며, 한 점 빛조차 들지 않는 유령의 땅으로 몸을 던집니다.

1911년에 출간된 소설인데 어제 출간된 소설처럼 하나도 촌스럽지가 않아요. 기형적인 외모와 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 천재적 재능의 오용으로 지하세계로 잠적한 유령의 섬뜩하고도 처절한 사랑이 엄청나게 인상적인 소설입니다. 집착, 스토킹, 감금, 폭행으로도 부족해 결혼 안해주면 파리를 날려버리겠다고 폭발물까지 모아놓고 협박하는 유령의 모습이 후덜덜. 열정은 넘쳐나나 지각없이 어리고 무모한 라울은 본인은 심각한데 읽을수록 코믹해서 애잔하니 귀여웠구요. 지하 함정과 장치들을 뚫고 유령의 집에 가까워지는 페르시아인과 라울의 추적은 인디아나 존스를 닮아서 장르가 로맨스에서 급 모험활극으로 변주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유령의 꾀임에 빠져 허우적대는 관리인들의 모습은 한편의 꽁트 같았달까요? 고딕 미스터리 호러 소설이라기에 마냥 어둡기만 할 줄 알았는데 유쾌한 장면들이 상당히 자주 등장했어요. 영화와는 설정도 달라서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쏠쏠하고 싶은데 저 솔직히 영화가 어땠는지 기억이 안나서요 ㅋㅋ(~ ̄▽ ̄)~ 허밍버드 클래식M 시리즈를 읽으며 새삼 실감합니다. 고전은 그냥 재미나서 고전인가봐요. 오페라의 유령도 찐 재미입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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