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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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인도에 가져갈 세 권의 책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완성한 책이 있다.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프랑수아 아르마네, 문학수첩)이다. 작가는 메일을 보내면서 추신으로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제외해 달라고 요청한다. 많은 작가들이 추신을 무시하고 대답한다. "셰익스피어요!!" 작가들의 작가, 모든 시대의 작가, 이상적인 서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작가, 서거 400주년에도 여전히 후대 작가들의 영감이 되는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기리기 위해 호가스 출판사가 기획하고 7명의 작가가 뭉쳐 글을 썼다. 시작은 지넷 윈터슨, 겨울 이야기를 다시 쓴 <시간의 틈>이다.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는 친우 보헤미아의 왕 폴렉세네스와 아내 헤르미오네의 불륜을 의심한다. 임신 중인 아내의 뱃속에 자신이 아닌 폴렉세네스의 아이가 있다는 생각은 그를 미치게 만든다. 폴렉세네스에 대한 독살 시도는 신하 카밀로의 경고로 좌절되고 폴렉세네스의 탈출은 레온테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다. 딸이 태어나자 아내의 부정을 더욱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레온테스. 급기야는 재판을 진행한다. 헤르미오네의 정숙한 성품을 알기에 온 왕궁의 사람들이 그를 말린다. 억울한 마음에 레온테스의 분노는 더욱 커지고 급기야는 아이를 내다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델피의 신탁이 도착했다. 헤르미오네 무죄! 폴릭세네스 무죄! 아이 역시 무죄! 죄인 레온테스는 들으라. 버린 아이를 되찾지 못하면 너는 후계자를 갖지 못할 것이다! 예언에 레온테스가 광분한다. 전령이 뛰어온다. 레온테스의 외아들 마밀리우스의 사망 소식. 헤르메오네가 실신하고 레온테스는 회개한다. 늦었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느님은 우리를 벌할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 벌할 수 있으니까.(p33)

<시간의 틈>의 기본 줄거리와 캐릭터는 원작과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보헤미아의 왕 폴렉세네스를 분한 현대인 지노가 동성애자이며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로 분한 리오와 십대 시절 연애를 한다는 것 정도일까? 그들은 연애가 아니라고 하지만 시간을 나누고 키스를 하고 몸을 섞고 서로를 위해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연애가 아니면 또 무얼까? 동성애자라기 보다 양성장애자라는 말이 더욱 적합할 수도 있겠다. 지노는 리오와 그의 아내 미미 모두를 사랑했으니까. 리오 또한 마찬가지다. 읽다 보면 리오가 질투하는 것이 소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사랑하는 아내 미미인지, 말 그대로 소년인, 이었던, 회색 눈동자가 아름다운 남자 지노인지 알 수 없다. 미미로 태어난 헤르미오네 또한 남편의 부정을 의심한다. 미미를 처음 만난 날, 프랑스를 산책하며 창녀를 산 남자, 미미는 리오를 잘 안다. 안다고 믿었다. 어째 관능적이고 질퍽하고 타락한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전혀. 황사로 흐려진 하늘처럼 감추는 게 많고 텁텁한 관계. 그들이 서로를 오해하고 관계의 창을 닫은 것이 이해가 간다. 독을 쌓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무의식 중에라도. 때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 마음이 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p37)

이야기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잃어버린 아이를 주운 남자와 그의 아들이다. 솁과 클로.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기 퍼디타를 잃어버린 사랑의 설명서로 이해한 따뜻한 부자. 퍼디타는 그들 속에서 사랑과 음악으로 성장한다. 작가에 따르면 "하나의 이야기에 가능한 결말은 세 가지밖에 없다."(p395)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를 제외한다면 세 가지 가능한 결말은 이렇다. "복수, 비극, 용서." 셰익스피어의 인상적인 이야기들은 대체로 비극으로 끝나지만 겨울 이야기는 새로운 삶을 암시하며 낙천적으로 마무리 된다. 시간의 틈은? 작가는 그를 모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뜬금없이 소설 속에서 튀어나와 고백한다. 나도 모르는 새 작가 후기를 펼쳤는가 싶어 감짝 놀랐다. "30년이 넘도록 나에게는 이 희곡이 개인적인 글이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 입양된 업둥이 그리고 동성애자, 그는 퍼디타였고 지노였고 리오였고 어쩌면 헤르미오네였을 수도 있겠다. 비극이 아니라 희극으로 마무리 된 글에 그래서 안심이 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만든 건 항상 자리를 비우는 신이 아니라 추락자, 루시퍼 같은 인물이라는 거지. 우리는 죄를 짓거나 지위를 잃은 게 아니야, 우리 잘못이 아니었지.우리는 이렇게 태어났어. 우리가 무얼 하든 그건 결국 추락이야.걷는 것조차 일종의 잘 통제된 추락이지." 우리가 이걸 안다면 고통을 견디는 게 더 쉬울 거야."(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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