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
윤성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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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어린 딸을 잃은 아버지의 이야기. 어린이날에 읽는 <첫문장>은 뒷맛이 참 시고 아린 소설이었다.

근식의 별거 없는 이력 중에 그래도 독특함을 꼽자면 어린 시절 네 번이나 죽을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리 위에서 구름 구경을 하다 떨어져 죽을 뻔한 처음엔 고작 아홉살이었는데도 자살이란 오해를 받았다. 새아버지 밑에서, 의붓 형제들과 함께 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리라 어른들이 저마다의 오해로 떠들어대는 말에 변명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해해 주어 좋기도 했던 것 같다. 냇가에서 뱃놀이를 하다 떠내려오는 수박을 끌어 안고 구사일생한 적도 있었다. 중학생 때는 학년이 바뀐 걸 까먹고 2층을 1층이라고 착각해 창 밖으로 뛰어내린 적도 있다. 네 번째로 죽을 뻔 했을 땐 공장에 근무하다 생일 케이크를 사러간 때였다. 운동화 끈이 풀려 잠깐 묶는다고 앉은 사이 코 앞으로 간판이 떨어졌다. 그 후로 취업에서 대학 진학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아내를 만났고 결혼을 했고 딸을 낳았다. 죽음을 이겨낸 다음의 삶은 꼭 좁은 모퉁이를 비집고 나간 다음처럼 숨통이 트이곤 했다. 그러나 딸의 인생은 그렇지 못했다. 죽음이 빗겨가기만 했던 근수와는 달리 딸은, 아마도, 곧장 죽음을 대면한 모양이다. 단 한번의 미수도 없이. 예스를 답할 땐 캭!!을 노를 답할 땐 개실망!을 외쳐 버릇없다고 엄마한테 혼나던 딸도 버릇없는 딸을 을러 혼내키던 아내도 이제 더는 근식의 곁에 없다. 죽음과 이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조카의 결혼식을 치르고 하룻밤 누나집에서 묵고 나온 근식은 계획없이 터미널 여행을 시작한다. 아니 터미널 방황이라고 해야 옳을까. 직장에서 해고되어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으니까.. 그냥.. 또 그냥.. 누나한테 변명하자면 이런 얘기를 하게 될텐데 근식은 누나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원주, 횡성, 춘천, 경주, 거제, 통영, 김해, 군산, 부여, 인천, 순천, 여수를 도는 내내 꺼진 휴대폰을 충전하지도 않는다. 쭈욱 연락을 못했으니 가족들은 또다시 동생의 자살을 걱정하고 있을지도.

그러나... 걱정 마세요. 잘 먹는다곤 할 수 없지만 끼니는 거르지 않고 세 끼 챙겨 먹고 있습니다. 잠귀신이 붙은 듯 잠도 많이 자구요. 오며가며 사람들과 얘기도 많이 나눠요. 두 번쯤 아이를 구한 적도 있습니다. 어쩌면 딸의 자서전이 될 글의 첫문장을 찾아낸 것도 같아요. 빙글빙글 출구를 찾지 못한 로타리를 돌고 있지만 지금 이곳은 오거리. 당장 길을 찾지 못한대도 빠져나갈 길이 다섯개는 됩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살아 돌아가겠습니다... 통화가 됐다면 근수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을런지.

좋은 날이니까..불행을 상상하고 싶진 않아서.. 오래 비워졌던 집에서 곰팡이가 쓴 냄비를 버리고 냉장고를 비우고 집을 청소하고 휴대폰을 충전하고 김근식을 박근식으로 바꾸는 개명신청서를 접수하고 누나와 매형에게 혼이 나고 그러다 어쩌면 아내와 통화하고 앵두나무를 보러 다시금 터미널로 향할지 모를 근식을 상상하며 책을 덮는다. 김근식을 덮고 박근식으로 시작하는 인생의 첫문장을 써내려갈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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