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부엌 - 맛있는 이야기가 익어가는
오다이라 가즈에 지음, 김단비 옮김 / 앨리스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첫문장 :
싱크대도 작고 조리 공간도 좁다.
하지만 여기서 만들지 못할 요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강렬한 무언가가 있다.

양과좌점 코안도르, 남극의 쉐프, 리틀 포레스트, 카모메 식당. 일본의 부엌 그도 아니면 일본의 음식을 엿볼 수 있는 영화들. 도쿄의 부엌 그 첫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곧장 그 영화들을 떠올렸다. 옅고 짙은 마루. 잡다한 물건들로 수선스런 선반.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한 그릇. 르쿠르제 그도 아니면 내가 알 수 없는 메이커의 무쇠 냄비와 주전자. 바람에 흩날리는 새하얀 커튼현대적이거나 아름다운 것은 아닌데 작고 좁은 조리대와 싱크대에 어울린 이런 풍경들은 갑갑하다기 보다 식탁 위에 소박한 입맛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만난 책이 또한 그랬다. 작가가 매주 한 곳씩 103군데나 되는 도쿄의 집들을 방문하여 엮은 책 속에서 만난 부엌들은 눈 돌아가게 화려하거나 부럽게 아름답지는 않다. 작가가 전문 사진가가 아니라 아마추어여서 그럴 지도 :) 그러나 생활의 맛, 풍경으로 뿜어내는 맛이 있어 좋다. 각각의 부엌이 가진 사연들이 부엌보다 더 진한 사연으로 맛을 우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고령에 혼자 지내는 사람인 경우엔 취재를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부부인 경우엔? 설령 노숙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쑥스럽게 부엌을 소개해 준다. 노숙에 부엌? 말이 앞뒤가 안맞는 것도 같지만 정착형 노숙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이 일본에는 있는가 보다. 강변에 얼기설기 엮은 오두막집 같은 곳에 사는 이들. 그러나 손님이 오면 합판을 주워 만든 테이블에 캔커피를 대접하는 여유가 있다. 부엌에서 엿보는 아이를 기다리는 부부와 아이를 포기한 부부의 삶은 닮고도 달라서 각각의 커플을 모두 응원하게 된다. 어머니의 온기를 잊고 싶지 않아 그가 떠난 후에도 마루바닥 하나 교체하지 않는 딸의 부엌과 어머니가 떠나자 마자 집을 허물고 이사 나간 또다른 딸의 삶도 있었다. 남편을 위해 20년 가까이 매실을 담았지만 별거 후 올해를 그냥 지나쳤다는 만화가는 입으로는 돌아와도 이제 줄 방은 없다고 하지만 부엌 한 켠에 여전히 자리한 매실병에서는 그녀의 다른 속내가 비치는 듯도 했다. 고향에서 보내온 조미료 및 식량박스에 의지해 음악생활을 이어가는 대학생과 요리하진 않지만 레시피 노트 작성과 조리도구 모으기가 취미인 직장인도 기억에 남는다. 42세가 되어 드디어 세 가지 반찬은 만들 줄 알게 되었다고. 과연 나도 늦지 않았구나 싶다. 요리쯤 조금 더 천천히 시작해도 되겠어 :-) 가장 감명 깊었던 사연은 장국영에 반해 홍콩 가정식 요리를 만들게 된 주부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고 자란 거리의 맛을 좇아 홍콩까지 찾아가 요리를 배우고 그가 팬들의 곁을 떠난 지금까지도 그 요리들로 본인과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 먹는 거 참 귀찮고 대단찮게 여기는 나지만 베란다에 말리고 있는 돼지고기 하나에까지도 정다운 웃음이 터졌다. 사는 거 참 별 거 없는데 별 거 없는 걸 이토록 재미나게 꾸리는 사람이 있구나 감탄하고 말았다.  

쓰고 보니 특별한 사연의 열거가 되었지만 실은 평범한 이야기를 가진 부엌이 훨씬 많다. 평범하지만 "고향과의 거리. 지금까지 걸어온 길. 얼마나 사랑받으며 자라왔는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생활신조와 장래의 꿈까지" 모두가 달라서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다. 부엌의 수다스러움에 푹 빠진 시간, 나의 주방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주말 오늘, 책은 잠깐 내려놓고 정성 들여 부엌을 정리해봐야겠단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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