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접한 세계 크로스 1
김연수.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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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이 세 개라면 선은 세 개, 점이 네 개라면 선은 여섯 개가 된다. 점이 하나 늘어날 때마다 연결의 가능성은 훨씬 더 크게 확장된다. 문학도 비슷하다. 서로 다른 작가의 세계가 만날 때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의 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 근접한 세계는 바로 그런 연결의 실험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한국의 소설가 김연수와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공통의 주제인 윤리적 딜레마를 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쓰인 두 편의 소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읽다 보면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무엇이 옳은가그리고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김연수 작가의 우리들의 실패가 정치와 사회적 사건 이후에 남겨진 인간의 삶을 탐구한다면,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의 결정적 순간은 예술과 진실 사이에서 갈라지는 개인의 선택을 다룬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해 수렴한다.

 

1. 우리들의 실패 - 개인의 실패인가, 시대의 실패인가

 

사람의 삶에서 실패는 보통 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어떤 실패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김연수 작가의 단편 우리들의 실패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 손동하는 대통령 탄핵 이후 벌어진 정치 스캔들에 연루된 인물이다. 설정만 보면 정치 르포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의 관심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있지 않다. 작가가 탐색하는 것은 실패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과 기억의 방식이다.

 

소설은 기자가 손동하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인터뷰라는 방식은 겉보기에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인터뷰는 오히려 진실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손동하는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고 기자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어디까지 자기 합리화인지 독자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그 애매함이 바로 이 소설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손동하가 말하는 실패는 단순히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그는 마땅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를 안고 살아간다손동하는 대의를 위해 희생했다고 믿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감정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존재할 때 우리는 그를 쉽게 비난하거나 옹호할 수 없게 된다.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인식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인간의 희망이나 후회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짚으로 만든 개일 뿐입니다. 잠시 존재하다가 그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지요.” (49쪽)

 

이 문장은 인간의 삶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도 선택의 책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제목이다

나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들의 실패일까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지만 결국 하나의 현실 속에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의 선택은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어떤 사람의 생존은 또 다른 사람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는 한, 살아남았다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죽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겠죠.” (72쪽)

 

이 문장은 소설의 핵심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 연결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며, 그 연결 속에서 누군가는 실패하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실패를 완전히 개인의 문제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소설은 실패의 원인을 밝히기보다 실패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바라본다. 과거의 선택은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삶은 계속 흔들린다그래서 우리들의 실패는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2. 결정적 순간 - 사진이 포착하는 윤리적 딜레마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정적 순간은 제목부터 흥미롭다. 사진에서 말하는 결정적 순간은 찰나의 장면을 포착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그 순간은 한 사람의 세계를 완전히 뒤흔드는 진실의 발견을 의미한다.

 

주인공 미즈마키 가스미는 큐레이터다. 그녀의 오랜 꿈은 거장 사진작가 사카키 미노루의 전시를 여는 것이다. 그러나 유고전을 준비하던 어느 날, 그녀는 그의 작업실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사진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그녀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놓인다.

 

'진실을 밝히고 전시를 무너뜨릴 것인가' 아니면 '비밀을 덮고 예술적 업적을 지킬 것인가'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이 이야기 전체를 압도한다.

 

가스미가 처음 사진을 봤을 때 느낀 감정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생리적 혐오감이었다. 이후 그녀는 그 감정이 윤리적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스스로 되묻는다이 장면은 인간의 심리를 아주 정확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먼저 감정을 느끼고, 나중에 그 감정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는다.

 

가스미의 고민은 더 복잡하다. 그녀는 예술을 깊이 사랑하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평생 존경해 온 예술가의 명성과 그 작품 뒤에 숨겨진 가능성 사이에서 그녀는 쉽게 선택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일기, 기사, SNS 기록 등 다양한 형식을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구성한다. 하나의 사건을 여러 시점에서 바라보게 되면서 단일한 진실이라는 개념은 점점 흔들린다독자는 어느 이야기가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다. 결국 작가는 독자에게 판단을 맡긴다.

 

소설에는 예술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예술가의 인격과 작품을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는 태도 역시 등장한다. 그러나 작가는 어느 쪽도 완전히 편안한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외면할 것인가. 그 선택의 무게를 이 소설은 조용히 보여준다.

 

3. 두 소설이 남긴 질문

 

우리들의 실패가 정치와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공동체의 실패를 다룬다면, 결정적 순간은 예술과 진실 사이에서 갈라지는 개인의 선택을 보여준다.

 

주제도 배경도 다르지만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독자에게 질문을 남긴다.

 

무엇이 옳은가, 그리고 우리는 그 옳음을 끝까지 믿을 수 있는가.

 

근접한 세계는 분명한 결론을 주지 않는다. 대신 읽고 난 뒤에도 오래 남는 불편한 질문을 건넨다.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이 의도한 효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의 실패를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 실패가 사실은 우리가 속한 세계 전체의 실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이전처럼 편안하게 판단할 수 없게 된다그래서 이 책은 읽고 난 뒤에도 한동안 마음속에서 계속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아마도 그 질문을 붙들고 살아가는 일 자체가, 우리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노력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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