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이 해결될 가능성은 얼마나 되지?"
(중략).
"가임률이 올라간 사례도 있고, 그대로라는 연구 결과도 있어요. 이 부분 관련 영역은 모든 게 다 애매모호하죠. 불임을 겪는 사람 다섯 명 중 한 명은 원인 불명 판정을 받으니까요." - P39

이소가이는 약물 요법에 대해 낙관하고 있었다. 내인성 우울증의 원인은 여전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치료에 사용되는 약제는 잇따라 강력한 게 개발되고 있었다. 환자 역시 복약지도를 준수하고 있었다. 항우울제와 경우에 따라서는 항불안제를 병용하면 병세가 길어지는 ‘지체화‘는 막을 수 있으리라. - P40

며느리를 후대를 이을 도구로 여기는 나쁜 관습은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도다 마이코는 매정한 환경의 희생자라고도 할 수 있었다. - P41

불임 때문에 고민하는 여성들 중에는 오히려 의사가 당황할 정도로 절실하게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략). 어째서 이렇게까지 임신하기를 바라는 걸까? - P41

만약 여성들이 임신을희망하지 않는 생물이었더라면 인류는 이미 진작에 멸망했을 터였다. 과거 20만 년에 걸친 역사 속에서 인간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다. - P41

새로운 맨션으로 이사하고 한 달이 지났다. 『쾌적하게 사는 법』의 판매 부수는 눈에 보일 정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추가로 인쇄할 일은 없을 것이란 게 편집자 하시모토의 의견이었다. - P44

슈헤이는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역 이름을 확인하면서 ‘그렇지만‘ 하고 생각했다. 보수 중 1200만 엔은 맨션 계약금과 각종 수수료로 사라졌다. 더욱이 100만 엔은 가구를 새로 구입하고 이사하는데 사용됐고, 남은 돈은 세금으로 사라졌다. - P44

현재 나쓰키 부부에게는 둘이서 겨우겨우 저축해 모은 100만 엔가량의 예금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매월 대출 상환금으로 14만 엔, 관리비와 전기, 난방 요금을 합치면 20만 엔 전후의 돈이 고정적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 P45

취재처는 시립 동물 구호 센터였다. 어느 주간지에서 ‘버려지는 불쌍한 반려동물‘을 주제로 잡은 2페이지짜리 기획이었는데, 데이터 원고와 사진 촬영을 포함해 2만 엔짜리 일감이었다. - P45

슈헤이는 숄더백에서 A4판 문서를 꺼내 하시모토에게 건넸다.
(중략).
"좀 지나치게 딱딱한 거 아냐? 게다가 경제나 범죄 분야는 경쟁상대가 엄청나게 많다고." - P48

하시모토는 팔짱을 꼈다.
"기껏 이름을 알렸잖아. 당분간은 같은 노선을 유지하는 게 나을거 같아." - P48

"잠깐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실은 다른 일 얘기가 있어."
(중략).
"그래서, 날 파견하겠단 소리야?"
(중략).
"아니, 고정급, 18만 엔부터 시작인데……………… - P49

"가나미보다 적게 받는단 말이야?"
(중략). 슈헤이는 자신이편집자의 덕을 봤다는 사실을 깜빡했음을 깨닫고 말했다. - P49

"미안. 그 책이 잘 나간 뒤로 모든 게 바뀌어서. 자만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종종 들어."
하시모토는 웃음을 짓더니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 P50

회사 화장실에서 나온 가나미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중략).
생리가 밀리는 이유는 뭘까? 슈헤이와 결혼한 뒤 아사가야의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에도 2주 정도 밀렸던 적이 있었다. 고마고메의 맨션으로 이사한 탓에 생활 환경의 변화가 몸에 영향을 미친 걸까? - P51

 회사에서 가장 먼 곳을 골라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고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가격은 880엔이었다. - P52

임신이었다.
가나미는 한동안 멍하게 테스트기를 바라봤다.
슈헤이와 자신의 아이가 배 속에 깃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걸까?  - P53

가나미는 용기를 내 고백했다.
"아기가 생긴 것 같아."
그러자 슈헤이는 가나미가 본 적도 없는 표정을 지었다. 놀란 듯 멍한 듯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 P54

4

이튿날 슈헤이는 일어나기 무섭게 전화번호부를 펼쳤다. 기재된 의료 시설 중 믿을 만한 대형 병원을 찾았다. - P55

분교의료대학병원은 역사가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넓은 부지 한가운데 본관과 신관 병동이 두 개 서 있었다. 각 층 외벽에는 땜질한 흔적이 있는 배관이 깔려 있었다. - P56

가나미는 고개를 들어 천장에서부터 늘어뜨려진 안내판을 봤다. ‘정신과‘라고 쓰여 있었다. 멍하게 걷다가 길을 잃은 듯했다. 마침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고 산부인과가 어딘지 물어 그쪽으로 향했다. - P57

탐지기를 빼낸 뒤 가나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때 히로카와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임신 주수를 헤아리는 법, 유산을 방지하기 위해 평소 생활할 때 주의할 점, 다음 혈액 검사 시기 등을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생리한 날을 기준으로 예정일은 내년 1월 27일이 되네요." - P59

계산 결과는 빠듯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얻어낸 출산, 육아, 교육 비용과 자신들의 경제 상태를 저울질해 보면 선택지는 단 하나 뿐이었다. - P59

책을 출판하기는커녕 전처럼 잡지 기사의 데이터 취합 정도밖에 못 한다면매출 원리금도 가나미의 고정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나미는 계약직인 탓에 복리후생 혜택도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었고 아이를 낳기라도 하면 계약 해지를 통보받게 될 터였다. - P60

슈헤이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더 행복하게 키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나서 생각해 보자. 우리 아이도 그쪽이 훨씬 좋다고 생각할 거야." - P62

16층 높이에서 땅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자 맨션을 나서는 가나미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아내가 이렇게 불쌍해 보이기는 처음이라 슈헤이는 동요했다.  - P63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음이 현실에서 동떨어져 둥실둥실 하늘을떠다니는 것 같았다.
배 속에 아기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나미는 행복했다. 이 행복감 속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 P63

깜찍한 핑크색 망토가 보였다. 같은 색의 오버올과 함께 입히면 되는 듯했다. 여자아이라면 이 옷을 입혀 주고 싶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가격표를 봤다.
9800엔. - P64

본 적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가나미는 깨달았다. 아는 사람한테 이런데서 훌쩍거리는 모습을 보이다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그보다도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이라면 들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누구더라.  - P65

초인종이 울렸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슈헤이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귀가가 늦어지는 아내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중략).
어떻게 자동 잠금 장치가 있는 현관을 통과했는지 수상하게 생각하면서 슈헤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그러자 들어 본 적 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P66

문 너머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가 버린 건가 하고 문구멍에 눈을 가져다대자 여자의 머리칼이 나부끼더니 재빠르게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움직였다. - P67

슈헤이는 애를 태우며 뭐라고 말해야 쫓아낼 수 있을지 생각하던 중 가나미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68

문구멍 너머로 확인했지만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긴장하면서 문손잡이에 손을올리고 자물쇠를 푼 뒤 문을 확 젖혔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어라 하고 뱉었다. 좌우를 둘러봤지만 조용한 복도엔 개미 한 마리조차 없었다.
방금 일은 대체 뭐였을까? - P68

아내를 불안에 떨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슈헤이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고는 빈손인 가나미에게 물었다.
"찬거리 사러 갔던 거 아녔어?"
"오늘은 시켜 먹어도 될까? 좀 피곤해서." - P69

나쓰키 부부는 피자를 주문했다. 그러나 가나미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중략).
"오늘 예전 친구를 만났어."
잠에 빠져들기 전에 가나미가 말했다.
"다음에 우리 집에 데려와도 될까?" - P70

5

도다 마이코의 상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병 증세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도 자꾸만 나빠졌다. - P70

마이코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초조해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결혼하고 5년, 10년이 지나서 겨우 아기가 들어서는 사람도 있어요. 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는 말은 앞으로 임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니 비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지만 몇 년이나 더 걸린다니요. 시어머니께서 기다려 주지않으실 거예요." - P71

(전략). 하지만 전화를 받은 남편은 우유부단하게 "일이 있어서요."라고 말했고 시어머니는 심지어 "모든 걸 의사 선생님께 일임하도록 하지요."라고 도전적인 어조로 응수했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가정 환경이 눈에 선했다.  - P71

"시어머니껜 제가 확실히 말씀드리지요. 남편 분께서도 분명 이해해 주실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입원을 하셔도 좋습니다."
"입원요?"
마이코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중병에 걸렸다는 선고처럼 들렸던모양이었다. - P72

마이코가 한바탕 우는 모습을 지켜본 뒤 이소가이는 말했다.
"전에 드린 명함은 갖고 계시죠?"
"네."
"힘들 때에는 언제라도 전화 주세요. 상담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않으셔도 됩니다." - P75

슈헤이는 아무 잡지사에서나 일이 들어오길 기다리면서 인터넷으로 인공 임신 중절에 대해 조사했다. 조사에 따르면 21주 이내에만 합법적인 수술이 가능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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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몸은 그야말로 ‘세포들의 공화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말을 이런저런 형태로 접해 보았으리라. 이내 죽음 이야기도 틀림없이 듣게 된다. 어려서 듣는 죽음 이야기는 이런 식이다. - P84

그렇지만 하늘나라로 주님을 찾아간 할머니는 뭔가 이상하기만 하다. (중략). 그러니까 어제는 분명히 옆에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할머니의 시신을 수습하고, 목사는 하느님께 그녀의 영혼을 거두어 달라며 기도를 올린다.  - P85

현실은 죽음의 자연성을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강요한다. 일단, 학교에서 주섬주섬 챙겨 들은 지식들로 죽음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다른 한편, 눈물 몇 방울 흘리고 나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떠나간 망자를 추억하기보다 유산이야기에 더 열을 올리는 사람들 탓에 죽음은 더없이 자연적인 것으로 포장된다.  - P86

이른바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귀납법에 근거를 두고 있는 거야. 여보게들, 그러니까 자연법칙이라는것을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지금까지 늘 해가 동쪽에서 떴다고 해서, 내일도 반드시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는 거니까. - P87

자유죽음을 알게 됨과 동시에 우리는 ‘에셰크(échec)‘¹¹라는 것을 경험한다(이런 앎을 두고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죽음이 무엇인지 하는 깨달음을 우리는 결코 얻을 수 없다. 혹 근접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느지막한 말년에나 가능한 일이다). 왜 독일어텍스트에서 프랑스어 단어를 써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이 말은 실패한다. 좌절한다는 뜻을 가진다.


11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이 말은 체스를 둘 때 외통수에 걸린 것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한다.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다. - P89

원칙적으로 따지고 든다면 사람은 ‘에크‘ 속에서도 살 수있다. 물론 아주 치욕적인 말하자면 ‘비자연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  - P90

. 사람들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마치 무슨 수치스러운 짓을 입에 올리기라도 하듯 자살이라고 부르는 자유죽음을 그는 감행했다. 그래도 ‘에셰크‘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이제 ‘에셰크‘는 당사자의 등 뒤에서 상존하는 위협이다. - P90

이런 자연성은 할머니의 죽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끊임없이 ‘에크‘의 위협을 받으며 사는 사람은 많기만 하다. 수험생, 파산자, 평론가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작가, 창작력의고갈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화가, 병자, 눈물로 아무리 호소해도 대답이 없는 사랑, 돌격 명령을 앞두고 덜덜 떨고 있는데 장교에게서 질책을 받는 군인 등등. 이들에게 자유죽음은 구원의 약속이 된다. - P92

인간성과 존엄성, 이게 바로 그 두 개념이다. 자유죽음은 인간의 특권이다. - P93

자유죽음을 구하는 사람은 상대가 신뢰를 가지고 접근할때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사실을 아는가! - P93

 ‘자살의 철학‘이라는 제목의 두쪽(책의 전체 분량은 650쪽이다)에 걸친 짤막한 글에서 배슐러는 자유죽음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이 갖는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강조한다. - P94

그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자살은 자유와 존엄성 그리고 행복추구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행위라는 점을 나는 사실을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바로 인간성과 존엄성을 방패 삼아 ‘에크‘에 맞선다(여기서 아직 자유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물론 자유도 앞으로 다루겠다). - P95

주관은 ‘에셰크‘를 당했음에도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처럼 때만 되면 먹고 싸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 - P96

자살을 감행하는 사람에게 있어 자유죽음이란 모든 죽음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이지만, 자유죽음은 지극히 자연적이다. 그것도 드높은, 유일하게 우리 손으로 설정한 기준, 즉 존엄성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 P97

. 별로 원하지 않는것, 거리, 얼굴들, 풍경 등 정말 볼썽사나운 것들을 보고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치를 떠는 인간에게 제발 사교성 좀 가지라고 준엄하게 타이를지도 모른다. - P98

 먹고 싸고, 죽이고, 쾌락에 몸을 떨며, 죽임을 당하는 존재. 그저 무서움에 부들부들 떨 뿐이다. 도대체 왜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그저 아무것도 아닌 없음으로 돌아가면 왜 안 되는 것인가?  - P98

. 에로스는 살아 있는 자들의 논리, 즉 종족 보존이라는 논리와 맞아떨어지지만, ‘구토는 종족 보존 본능에 충실한문명 패거리가 아우성을 치며 부정하는 것이다. - P99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 내가 확인하고자 하는 점은 다만 다음과 같은 것일 따름이다. - P99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자살하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에게 자유죽음이란 언제나 지극히 자연적이다. 그들이 느끼는 치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 P100

자살자는 완벽한 없음 앞에서 부들부들 떤다. - P100

자신의 존엄성으로 모순을 품어 안았으면 그만 아닌가? - P101

‘자살학‘의 최신 연구 성과들이 신빙성을 갖는다면(여기서나는 수없이 쏟아져 나온 자살 연구들의 극히 일부밖에 모르기 때문에 정말 믿어도 좋은지 판단을 유보하겠다), 자유죽음은 우리에게 알려진 거의 모든 형태의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 P103

 인생 논리는 본능일 뿐 아니라, 내가 앞장에서 보여줬듯, 논리라는 원칙에 들어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 곧 존재와 인생의 이성은 도무지 없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 P104

 A=A라는 동일률은 있음의 근본 경험을 담아낸 논리다.²⁰

20 형식 논리의 최고 원칙. 같음과 다름을 구분하는 게 앎의 출발점이라는 플라톤의 근본사상에서부터 출발한 원칙이다. A는 A인 동시에 B일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확장 해석으로 동일률은 논리학의 기둥이 되었다. A는 B가아니라 A라는 점에서 동일률은 인식론의 근본 원리기도 하다. 이로부터 유추해 ‘있음‘은 ‘있음‘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 뿐, ‘없음‘과 동격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존재론의 근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아메리는 죽음을 ‘없어짐‘으로 놓고 논의를 풀어가려고 시도한다. - P104

 결국 자유죽음이란자기 부정으로 존재한다. 자유죽음은 긍정인 동시에 부정이다. 바로 그래서 어처구니없는 모순이다. 자유죽음은 이 모순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중의 모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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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전략).
"괜찮아.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날 거야."
구미가 말했다.
"응." - P9

가나미는 평소처럼 민망함을 계면쩍은 웃음으로 무마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구미의 표정을 살폈다. 동갑인데 어쩌면 이렇게나 다를까? 어쩜 이렇게 의지가 되는 걸까? 구미는 장난꾸러기 남학생들로부터 가나미를 보호해 주는 보디가드였다. - P10

‘이제 곧 6학년이니까 겁먹어선 안 돼. 구미처럼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 P10

"벌써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구미는 신사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나미는 황급히 구미의 뒤를 쫓았다. 그 순간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나미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 P11

구미가 펜라이트로 고양이의 엉덩이 쪽을 비추며 말했다.
"아직인가?"
가나미는 뭔가 자그마한 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외쳤다.
"구미야! 아기 고양이야! 젖을 먹고 있어!" - P12

가나미는 작은 목소리로 응원했다.
"힘내!"
"대단하다."
구미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응."
"아기 고양이들 이름 지어주자."
가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미의 젖을 물고 있는 아기 고양이 두 마리를 바라봤다. - P13

셋째가 태어난 건가 싶었지만 방금 끊어낸 탯줄이 붙어 있는 그 살덩이는 움직임이 없었다. 썩은 고기같이 기분 나쁜 색을 띠고 있었다. 가나미도 얼굴을 찌푸렸다. - P14

"구미야, 나 몸이 이상해." - P14

"우리 병이라도 걸린 걸까?"
그렇게 말한 가나미의 말허리를 구미가 끊었다. - P14

서로의 눈을 바라본 구미와 가나미는 시선을 그대로 고정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이야."
"응.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 P15

1장

이변異変


1

가재도구가 전부 이사 갈 집으로 실려 나갔다. 낡아 빠진 목조 아파트 방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보스턴백 두 개와 남성용 정장, 파티 드레스뿐이었다. - P16

결혼 후 맞는 두 번째 봄. 막 지나간 올해 겨울은 마치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축제처럼 요란했다.  - P16

둘이서 결혼 신고서를 제출할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고생은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가나미는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빨리 결실을 맺은 듯했다.  - P17

가나미는 자신보다 15센티미터 정도 키가 큰 슈헤이를 올려다봤다. 아침부터 계속 힘쓰는 일을 했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 P17

슈헤이가 물었다.
"안 피곤해?"
"괜찮아."
"그럼 일단 잠깐 헤어지도록 할까?"
슈헤이의 말을 듣고 가나미는 손목시계를 봤다. - P18

아사가야의 아파트를 나선 나쓰키 슈헤이는 전철을 갈아타고 고마고메에 위치한 새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에서 도보 12분. 18층짜리 고층 남향집. 방 세 개에 거실, 부엌으로 구성된 4670만 엔짜리 집. 슈헤이는 구멍이 뚫리도록 살펴본 신축 분양 맨션 광고를 떠올리면서 신록 향기가 감도는 주택가를 걸었다. - P19

가구 운반은 한 시간여 만에 끝났다. 네 명의 인부들 역시 싹싹하게 굴었기에 슈헤이는 각각 5000엔씩 팁을 얹어 줬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큰 씀씀이였다. - P20

내성적인 가나미와 바람둥이인 슈헤이. 슈헤이를 잘 알던 지인들에게는 그가 가나미 같은 타입의 여자와 사귀는 게 의외였던 듯했다. 물론 슈헤이 자신도 놀랐다.  - P21

그로부터 2년.
슈헤이는 새로운 자기네들의 성을 한 번 더 둘러봤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가나미의 덕택이리라. 아무런 미래 계획도 없이 눈앞의 향락만을 좇던 무일푼의 자유기고가가 도심에 위치한 맨션을 살수 있을 정도로 출세한 것이다 - P21

슈헤이는 저자 부분을 재차 바라보고는 아직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은 붙박이장에 꽂았다.
나쓰키 부부에게 어마어마한 인세를 안겨 준 베스트셀러였다.
책에는 『쾌적하게 사는 법』이라고 쓰여 있었다. - P22

2

아사가야의 아파트는 별 탈 없이 될 수 있었다.
(중략). 장년의 집주인은 잘 차려입은 가나미를 보고 마치 자신의 딸을 보는 듯 흐뭇해했다. 보증금도 90퍼센트 정도 돌려줬다. - P22

슈헤이와 만나기로 한 ‘그곳‘으로 향했다. 하라주쿠 외곽에 위치한역 근처 도민회관 로비였다.
(중략).
결혼 전에 얼마나 이곳을 들락거렸던지. 드레스 자락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벤치에 걸터앉으며 가나미는 향수에 젖어들었다. - P23

교제를 시작하고 3개월째, 슈헤이가 4페이지에 달하는 특집 기사를 혼자 써 내려가는 엄청난 일을 끝낸 밤 두 사람은 아자부에 위치한 바에서 축배를 든 뒤 유명한 큰 호텔의 한 방에서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다. 가나미에겐 첫 경험이었다. (중략).
"결혼하지 않을래?"
손을 멈추고 돌아본 가나미에게 슈헤이는 평소 표정대로 말했다. - P24

나쓰키 부부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회관을 나섰다. 택시를잡고 아카사카에 위치한 호텔로 향했다. 자신들이 주빈인 파티 회장. 남편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 P25

"그나저나 정말 잘됐어. 오늘 같은 날이 오다니."
키가 큰 하시모토를 올려다보며 가나미도 기뻐했다. 하시모토는 북크래프트에서 일하는 가나미의 동료이기도 했다. - P26

슈헤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나미의 팔을 잡았다. 가나미는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져 고개를 떨구었다.
"너희 둘은 여전하네." - P26

오후 6시 무렵 연회가 시작됐다. 우선은 출판사 부장이 연단에서서 축사를 읽기 시작했다. 출판 시장이 불황을 맞은 오늘날 무명 자유기고가가 쓴 책이 2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정말로 경이로운 일이라며 내용뿐만 아니라 시류를 읽는 저자의 능력이빼어났다는 점 등을 유창하게 읊었다.  - P27

(전략).
"왠지 부인 자랑을 줄곧 들은 것 같은데."
하시모토가 웃는 와중에 연회가 끝났다. - P28

긴자에 있는 바에서 새벽 1시에 2차가 끝났다. 하시모토가 슈헤이에게 택시 티켓을 건네줘서 나쓰키 부부는 빈 택시를 잡아 몸을 실었다. - P28

가나미를 껴안으며 슈헤이는 묘한 달성감을 맛봤다. 가나미가 마침내 진정한 의미로 인생의 반려자가 되어 주었다는 만족감이었다. - P35

슈헤이의 온기에 감싸인 채로 가나미는 자신의 몸에 물었다.
하복부에 자리하던 열기는 아련한 욱신거림으로 변하여 남아 있었다.
가나미는 잉태했음을 느꼈다. - P36

3

이소가이 유지에게 이날은 평소보다도 배로 바쁜 날이었다.
오전 외래 진료 시간에 시간이 걸리는 초진환자가 세 명이나 찾아왔다. 그 외에도 우울증과 신경증 환자가 각 네 명씩 방문했다. - P37

히로카와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이소가이는 골격이 드러난 얼굴의 미간을 찌푸렸다.
"HLA(조직 적합성 항원-옮긴이)가 일치한다고?" - P37

"그렇지만 최근 들어 이걸 유산의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설도제기되고 있어요.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도다 씨의 불임은 원인 불명이 되겠지만요."
이소가이는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 도다 마이코의 병세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29세의 기혼 여성 체형은 말랐고 비만이 되기 쉬운 순환기질(독일 심리학자 크레츠머가 분류한 성격 유형의 하나로 조울증의 이전 단계로 볼 수 있다--옮긴이)도 아니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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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Enumerative Combinatorics?


1.1 How to Count

The basic problem of enumerative combinatorics is that of counting the number of elements of a finite set. - P1

1.1.4 Example. There are actually formulas in the literature ("nameless here forevermore") for certain counting functions f(n) whose evaluation requires listingall (or almost all) of the f(n) objects being counted! Such a "formula" is completely worthless. - P2

Example 1.1.5 provides a simple illustration of the general principle that, informally speaking, if we have an identity involving power series that is valid when thepower series are regarded as functions (so that the variables are sufficiently smallcomplex numbers), then this identity continues to remain valid when regarded asan identity among formal power series, provided the operations defined in the formulas are well defined for formal power series. It would be unnecessarily pedanticfor us to state a precise form of this principle here, since the reader should havelittle trouble justifying in any particular case the formal validity of our manipulations with power series.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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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전략.
자넬 홉슨은 18세기 과학자들에게 인종을 구별하는 근본적인 수단은 피부색이었다고 설명한다.  - P99

(전략). 결국 과학자들은 코이족 특유의 신체 특징인 (이것 역시 미심쩍은 개념이지만) 큰 엉덩이를 내세워, 이것이야말로 코이족이 인간 위계에서 가장 바닥을 차지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 P100

코이족 여성의 신체와 엉덩이에 흥미를 보인 건 해부학자뿐만이 아니었다. 유전과 인종에 관심이 깊었던 통계학자 프 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은 1853년의 저서 《열대 아프리카 탐험가 이야기 The Narrative of an Explorer in a Tropical South Africa》에 발가벗은 "호텐토트" 여성을 만나서 "정확한 신체 치수"를 알아낼날을 학수고대한다고 적었다.⁴¹ - P101

41Francis Galton, (Narrative of an Explorer in Tropical South Africa: Being anAccount of a Visit to Damaraland in 1851), 4th ed. (London: Ward, Lock & Co., 1891), 54. - P372

골턴과 다른 우생학자들은 백인이 유색인종보다 더 위계가 높은 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백인으로 분류하는 사람들 내에서 급을 나누는 데에 열중했다. - P101

1899년 경제학자 윌리엄 Z. 리플리 William Z. Ripley는 큰 인기를 끈 저서 《유럽의 인종 Races of Europe》에서 에머슨과 터너보다 더 넓게 유럽인들을 분류했다. - P102

인종 위계는 이렇게 요동치면서 19세기 미국의 과학, 철학, 대중문화에 스며들었고, 개인의 신체 부위(코, 머리, 엉덩이 무엇이든)는 그가 어떤 인종에 속하는지 결정하는 체계의 구성요소로 여겨졌다.  - P103

 학자 사브리너 스트링스Sabrina Strings에 의하면 헤일이 편집장으로 있던 시대에 여성의 날씬함을도덕성 • 아름다움. 백인성과 동일시하는 뒤틀린 논리가 처음등장했다고 한다.⁴⁵ - P103

45 Sabrina Strings, (Fearing the Black Body: The Racial Origins of Fat Phobia)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2019). - P372

그런데 19세기 사람들은 정확히 무엇 때문에 흑인 엉덩이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엉덩이가 흑인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그토록 지독한 연상 관계를 맺게 된 건 어째서였을까? 샌더길먼은 19세기 중반에 엉덩이가 여성 생식기의 대용품으로 여겨졌다고 설명한다. - P104

흑인 여성의 커다란 엉덩이는 그에게커다란 생식기가 달렸음을 암시한다고 여겼고, 커다란 생식기는 높은 성욕과 더불어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증거가 되었다. 엉덩이에서 외음부를 연상하는 건 기묘하다.⁴⁷ - P104

47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엉덩이와 외음부를 자주 연관짓는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는 주로 엉덩이를 뜻하지만, 어느 때엔 외음부를 의미하기도 하는 복숭아 이모지일 것이다. - P373

블라지오에 의하면 인종을 불문하고 여자가 큰 엉덩이를 지녔다는 건 과도한 성욕을 지녔음을 의미했다. - P105

1905년, 의사이자 개혁가였던 해블록 엘리스 Havelock Ellis는장장 6권짜리 《성 심리 연구 Studies in the Psychology of Sex》의 네 번째권을 펴냈다.⁴⁹ (중략). 그러나 안타깝게도 엉덩이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만큼 깨어 있지 못했다. - P105

49 Havelock Ellis, (Studies in thePsychology of Sex), vol. 4 (Philadelphia: Butterworth-Heinemann, 1942).
샌더 길먼은 "Black Bodies, White Bodies"의 분석에서 엘리스를 언급하기도 한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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