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로 어제까지 로비를 아름답게 장식했던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자취를 감췄다. 그 대신 새롭게 등장할 차례를 기다리는것이 설날 소나무 장식과 현수막, 거대한 연 등이었다. 올해 마지막 날 밤부터 설날 새벽까지 시설부 스태프들이 밤샘 작업으로 다시 로비를 꾸밀 것이다. - P5

유니폼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직장용이다.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호텔 유니폼으로 갈아입는것과 동시에 탈의실 로커에 넣어둔다.
착신 표시를 확인해보니 신입 프런트 클러크 요시오카 가즈타카였다.  - P6

"조금 전에 여성 고객님이 체크인을 하셨는데 방이 마음에 안든다고 하십니다. 예약 때의 조건과 맞지 않는다고요."
나오미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꾹 참았다.
"그렇다면 다른 방으로 옮겨드리면 되잖아요. 이 시간이면 아직 빈방이 있죠? 그런 일로 나한테 전화하지 말아요." - P6

 나오미가 주목한 것은 예약 때의 희망 사항이었다.
‘도쿄 타워가 보이는 곳‘, 그리고 ‘실내 벽에 초상화나 인물 사진이 없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이것인가. - P7

스탠더드 더블, 넓이는 약 25제곱미터다. 창가에 소파가 배치되었고 그 창문 너머로 도쿄 타워가 내다보이는 것이 홍보 포인트다. 호텔 공식 사이트에는 ‘타워 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있다.
투숙객, 즉 아키야마 구미코는 더블베드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이는 50세 전후일까. 회색 스웨터에 검은 바지 차림이었다. - P8

아키야마는 여전히 벽 쪽을 향한 채 턱을 치켜들었다.
"예약할 때 내가 초상화나 사람 얼굴 사진 등이 눈에 띄지 않는 방으로 해달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그런데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잖아요."
나오미는 당혹스러워하면서 다시금 실내를 둘러보았다.
"이방 어딘가에 방금 말씀하신 그런 것이 있습니까?" - P9

"저기예요. 갈색 빌딩 앞에 은빛이 나는 건물이 보이지요?"
그의 집게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던지던 나오미는 흠칫했다. 그 건물 벽면에 유럽인인 듯한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거대한 포스터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예리한 눈빛으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 P9

"대단히 죄송합니다." 나오미는 두 손을 몸 앞에 맞대고 허리를 45도 각도로 꺾었다. "저희 호텔의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죠? 계속 커튼을 닫아둬야 하나요? 모처럼 도쿄 타워가 보이는 방을 예약했는데 야경을 즐기지 말라는 건가요?" - P10

"결국 찾지 못하면 어쩌지요?"
"그럴 경우에는 포스터를 어떻게든 없애는 수밖에 없어요."
"그쪽 빌딩에 연락해 포스터를 철거해달라고 하자고요? 그건 안 됩니다. 오케이해줄 리가 없어요."
나오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요시오카를 쏘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죠? 안 됩니다. 라니. 요시오카씨, 신입사원연수에서 대체 뭘 배웠어요?" - P11

"시도해보기도 전에 포기하지 말 것. 아니, 시도해서 안 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 것. (후략)." - P12

(전략). 포스터를 설치한 주체는 빌딩의 홍보부지만 그걸 발주한 곳은 빌딩 관리회사였다. 그곳 광고 담당자에게 연락해 사정을 설명하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포스터를 내려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해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면 곤란하죠, 라고 담당자가 딱 잘라거절했다. - P12

"제 눈으로 모두 다 확인했습니다. 아깝다, 하는 방은 있었어요. 바로 앞 건물이 10미터만 높았으면 그 포스터가 완벽히 가려지는 위치였어요. 옥상에 대형 칸막이라도 세울 수 있으면 좋을텐데."
지금 그런 걸 세우는 건 불가능하다. 과연 허락해줄지 어떨지도 알 수 없다. 애초에 어디서 그런 비용을 마련할 것인가. - P13

아키야마가 미심쩍은 얼굴로 다가왔다. 머뭇머뭇하는 느낌으로 포스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깜짝 놀란듯 입이 헤벌어졌다. "저건…………."
(중략).
정체는 풍선이었다. 어제 행사에서 쓰고 남은 흰색 풍선에 헬륨가스를 주입해 포스터 바로 앞에 자리한 건물 옥상에 띄운 것이다. 그 숫자는 300개 정도였다. 물론 건물 관리회사에 허가를 얻었다. - P14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는 금지. 호텔리어는 입이 찢어져도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돼요."
"새삼 몸에 스미도록 배웠습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 P15

나오미가 아는 인물이었다. 너무 잘 알아서 순간 현기증이 날것 같았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후지키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시 소개하지. 경시청 수사 1과의 이나가키 경감님이셔." - P16

2

(전략).
닛타의 스마트폰이 울린 것은 스튜디오 구석에 놓인 의자에앉아 타월로 땀을 닦고 있을 때였다. 스포츠백에서 꺼낸 스마트폰의 착신 표시를 보고 저절로 입가가 삐뚜름해졌다. 일순 무시해버릴까 생각했지만 뒷일이 귀찮아질 것 같아서 받기로 했다. - P18

‘공식 재청‘이란 사쿠라다몬의 경시청에 출근해 사건 발생대비해서 대기하는 팀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다음 대기 팀은 ‘비공식 재청‘이라고 하지만, 닛타 팀은 그것조차도 아니었다. 연달아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호출이 걸릴 리 없는 것이다. - P19

닛타는 타월을 목에 건 채 스포츠백을 손에 들고 그녀에게 한쪽 눈을 찡긋한 뒤에 출구로 향했다.
약 40분 뒤, 양복으로 갈아입은 닛타는 경시청 안의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모토미야가 지시한 회의실로 가보니 길쭉한 책상 몇 개가 줄줄이 놓였고 남자 30여 명이 단상 쪽을 향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 P20

"한 시간 안에 오라고 하셨잖아요." 닛타는 손목시계를 선배형사에게 내보였다. "아직 15분 전이에요." - P21

모토미야는 혀를 끌끌 차면서 얼굴을 홱 돌렸다. "흥, 좋겠다, 독신으로 사는 녀석은 돈도 펑펑 쓰고. 나는 황금 같은 휴가에도 가족 서비스를 하느라 녹초가 되는데." - P21

"야구치 씨 팀이야. 우리는 저 친구들이 맡은 사건을 지원하게될 테니까 자네도 그렇게 알고 있어."
(중략).
"목소리 좀 낮춰." 모토미야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유가 있어. 우리한테 지원해달라고 요청한 이유가 있다고 하긴 뭐, 그 대부분이 자네와 관련된 것이지." - P22

옆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더니 그 시선을 깨달았는지 노세가 닛타 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희미한 웃음을 띠며 인사를 건네왔다. 닛타도 잠깐 고개를 숙여 응했다. - P23

오자키가 한가운데 서서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단숨에 분위기가 팽팽히 긴장했다.
"이렇게 급하게 소집해서 미안하다. 특히 이나가키 팀은 돌연한 호출에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네들을 부른 데는 이유가 있다. 지극히 특수한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잠시 뒤에 양쪽 팀장이 설명하겠지만, 한마디로 정리하면 야구치팀이 담당한 사건에 특이한 동향이 있었고 그에 따라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단 이번 기회를 살리는 데는 반드시 이나가키 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내가 직접 판단했다. 양해해주기 바란다." - P24

"그러면 현재 우리가 담당한 사건에 대해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야구치는 등 뒤의 액정 모니터로 다가가 리모컨을 손에 들고 전원을 켰다.
(중략).
그 사건이구나, 라고 닛타는 금세 생각이 났다. 이달 초순에 일어난 살인 사건이다. 네리마구의 한 원룸에서 혼자 살던 젊은여성의 타살 사체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 P25

"가장 가까운 파출소에서 경찰관 두 명이 해당 원룸에 출동해인터폰을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관리실에 사정을 말하고 그 원룸에 사는 사람에 대해 문의해본바, 거주자는 이즈미 하루나라는 여성으로 밝혀졌습니다. (중략). 경찰관은 지역 담당 상사와 협의한 다음, 관리실의 허락을 얻어 비상열쇠로 해당 원룸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좁은 원룸이라서 경찰관들에 의하면 문을 연 순간에 변사사건인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 P26

침대는 창가에 놓여 있었다. 사체는 그 위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보시는 대로 누군가와 다툰 듯한 흔적도 없고 어딘가를 뒤진것도 아닌 걸로 보입니다. 즉시 관할서 형사과에서 출동해 현장보존 작업을 하는 것과 동시에 사체는 도쿄도 감찰의무원*으로이송되었습니다."


*도쿄도 내의 모든 변사체에 대해 부검을 시행하는 행정시설. - P27

새로 표시된 화면을 보고 닛타는 헉 숨을 삼켰다. 한가운데 여성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 가슴과 등 양쪽에서 두 줄로 길게 나온 선이 합쳐져 전기 콘센트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 피해자에게 수면제를 먹여 잠들게 한 뒤, 두 갈래로 가른 전기 코드의 한쪽을 가슴에, 다른 한 쪽을 등에 부착하고 심장에 전기를 통하게 해서 감전사시켰다. 라는 것입니다. (후략)." - P28

"아까 사망 원인에 대해 얘기했지만 또 한 가지, 부검에 의해 중요한 것이 밝혀졌습니다. 피해자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4주째로 접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듯이 양성을 나타내는 임신 테스트 시약이 원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남자가 있었던 것인가. 하지만 닛타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어떻든 대단한 미모의 여성이다 - P30

밀고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경시청 여러분께
정보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네오룸 네리마 원룸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범인이 아래와 같은 날짜와 장소에 나타날 것입니다. 반드시 체포해주십시오.
*12월 31일 오후 11시
*호텔 코르테시아도쿄 새해 카운트다운 파티장

밀고자 드림 - P31

3

기나긴 회의를 마치고 닛타가 경시청 문을 나설 무렵에는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사쿠라다몬에서 지하철을 타고 유라쿠초에서 내렸다. - P31

닛타가 잔을 들자 노세는 쑥스러운 듯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관할서에서 그저 나 편한 대로 조용히 움직이는 게 더 성격에맞는데 말이야. 본청 쪽은 나하고 영 안 어울리지만 명령이 떨어졌으니 어쩔 수가 없더라고."
"무슨 말씀이세요, 노세 씨의 능력을 관할서에만 묶어두는 건너무 아까운 일이죠."
"아이쿠, 그러지 좀 마. 비행기 태우는 건 질색이야."  - P33

몇 년 전, 도쿄 시내에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범행 현장에 남겨진 기묘한 메시지를 해독한 결과, 다음에 사건이 일어날 장소는 호텔 코르테시아 도쿄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자 오자키 관리관이 생각해낸 것이 몇몇 수사원을 호텔 직원으로 위장해 잠입시킨다는 작전이었다. - P34

문제의 밀고장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미 각오는 했었지만, 각 팀으로 나뉘어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이나가키가 우선 꺼낸 말은 호텔 코르테시아도쿄에 잠입 수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 P35

"맞아,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범인의 정체는 모르지만 호텔에 나타난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라는 상황은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말이야." - P36

피해자가 교제하는 남자와 함께 있던 사진을 갖고 있다. 당연히 남자 쪽의 정체도 파악했다…………. 밀고자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애초에 이번 사건의 발단 자체도 밀고에 의한 것이었어." - P36

"신고자와 밀고자, 나아가 범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추리는 어떨까요?"
노세는 가느다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호오, 대담한 의견이네." - P37

"이번에 노세 씨는 어떤 일을 맡으셨습니까?"
"주변을 훑어보는 탐문 수사를 맡았어. 특히 피해자의 교우 관계 등을 파고 있어. 근데 솔직히 말해서 전혀 걸리는 게 없어. 성과는 제로야. 월급 도둑이라는 말을 들어도 대꾸할 말이 없다니까." - P38

닛타는 풋콩을 입에 툭 던져 넣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임신 상대가 누구냐는 것이겠지요?"
"물론이지. 근데 어디를 어떻게 들여다봐도 남자와 교제한 흔적이 눈에 띄지를 않아. 스마트폰에도 연락을 주고받은 흔적이 전혀 없더라니까. 펫숍 관계자 쪽에도 알아봤는데 다들 하나같이 그녀에게서 사귀는 남자 얘기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거야, (후략)." - P39

"그렇게 깊은 관계였으면서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는 건 비밀로 해야만 하는 상대였다는 얘기일까요?"
"응, 나는 그럴 거라고 생각해."
"상대 남자에게 가정이 있었다든가?"
그렇지, 라고 노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 P40

"조금 전에 성과는 제로라고 했지만, 실은 딱 한 가지 마음에걸리는게 있었어." 노세가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중략). 노세는 다시 수첩을 꺼내 펼쳤다. "아, 그렇지, 워드로브였어." - P41

닛타가 머릿속에 그린 것은 아키하바라에서 이따금 볼 수 있는 젊은 여자의 특이한 옷차림이나 코스튬 의상이었다.
취향이 특이했다는 얘기인가요? 그 친구는 본인에게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답니까?"
"그건 물어보지 못한 모양이야. 아마 본인 모르게 슬쩍 옷장안을 들여다봤던 것 같아." - P42

"패션에 관한 얘기는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야. 실은 여기서부터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가 이어지거든."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증거 수집팀에서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이즈미 하루나 씨는 올가을부터 인터넷으로 자주 의류를 구매했다는 거야. 겉옷뿐만아니라 속옷이며 액세서리 등도 사들였어. 스마트폰에 기록이남아 있었던 모양이야." - P43

"옷의 취향이 다시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는데요."
"응, 그 말도 맞는데 문제는 왜 달라졌느냐는 거야. 방금도 말했지만 남자는 연인에게 이미지 변신 같은 건 원하지 않아. 이미지를 바꾸는 건 여성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야." - P44

"최면술?" - P44

"아까 스마트폰에 남자 흔적은 없다고 하셨지요? 그러면 두사람은 어떻게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을까요?"
(중략).
"스마트폰을 하나 더 갖고 있었다는 것." 노세는 검지를 번쩍세웠다. "그 남자와 연락할 때만 쓰는 스마트폰. 그걸 남자가 빌려줬고 이즈미 하루나 씨를 살해한 뒤에 가져갔다고 생각하면 앞뒤가 딱 맞아떨어져." - P45

4

젊은 벨보이가 컨시어지 데스크로 뛰어왔다.
"조지 화이트 고객님이 방금 도착하신 것 같아요." 그는 귀에 인터컴을 꽂고 있었다. 도어맨에게서 연락이 들어온 것이리라. - P47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저도 반갑습니다."
"지난번에 왔던 게 두 달 전이지요? 그때는 나오미 씨에게 크게 신세를 졌어요. 이래저래 정말 도움이 되어줬죠."
"감사합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조지 화이트 님, 곧바로 체크인하시도록 할까요?"
"웅, 그렇게 해줘요."
"조지 화이트 님의 객실은 이번에도 이그제큐티브 플로어입니다. 보통 카운터에서도 체크인이 가능합니다만 전용 카운터에서 수속하시겠습니까?" - P48

두 달 전에 방문했을 때, 나오미는 그에게서 미국에 화지의 뛰어남을 다시 소개하고 싶은데 뭔가 좋은 아이디어는 없겠느냐, 라는 상담을 받았다. - P49

어떻게 해야 할지 나오미는 고민에 빠졌다. 조지 화이트의 의견을 다시 물어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전에 다시 한번 그와의 대화를 되짚어보았다. 컨시어지는 그저 고객이 하라는 것만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고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그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P50

그날 밤, 나오미가 조지 화이트에게 제안한 것은 지의로 만든 스노보드웨어였다. 그것이라면 만들어줄 수 있다는 업자를 찾아낸 것이다.
프로 스노보더 선수에게 그 옷을 입히고 실제로 눈 위에서 달리게 하면 그 실용성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해보았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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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우리 모두는 이미 목요일 날 법정에 출두해야 한다는 통지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목요일이 왔지만 우리가 증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 P203

홈즈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좀더 밝은 얼굴로 말했다.
「이번 수사 경험 자체가 나한테는 귀중한 것이었으니까요. 내 수사 파일에 이보다 더 흥미로운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사건은 단순하긴 했지만 몇 가지 대단히 교훈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지요」 - P204

「그럴 겁니다. 어디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해 보기로 하지요. 보통 사람들에게 많은 사실을 알려주면, 사람들은 결과를 예측해 낼 수 있습니다. 즉 많은 사실을 머릿속에 입력하면 그걸 가지고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떤 결과를 말해 주었을 때, 그러한결과에 이르게 된 전 단계들을 마음속으로 더듬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러한 능력이 바로 내가 말하는 역추리, 또는 분석적 사고라는 것이지요」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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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우리 모두는 이미 목요일 날 법정에 출두해야 한다는 통지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목요일이 왔지만 우리가 증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 P203

홈즈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좀더 밝은 얼굴로 말했다.
「이번 수사 경험 자체가 나한테는 귀중한 것이었으니까요. 내 수사 파일에 이보다 더 흥미로운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사건은 단순하긴 했지만 몇 가지 대단히 교훈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지요」 - P204

「그럴 겁니다. 어디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해 보기로 하지요. 보통 사람들에게 많은 사실을 알려주면, 사람들은 결과를 예측해 낼 수 있습니다. 즉 많은 사실을 머릿속에 입력하면 그걸 가지고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떤 결과를 말해 주었을 때, 그러한결과에 이르게 된 전 단계들을 마음속으로 더듬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러한 능력이 바로 내가 말하는 역추리, 또는 분석적 사고라는 것이지요」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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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르게 해주의 두 손이 가볍게 들렸다. 가늘게 눈을뜨자 거리의 흰 가로등 빛이 마치 무대 위 조명처럼 느껴졌다. 해주는 성큼 발을 내디뎠다.  - P68

그날 해주는 얻고 잃은 것이 하나씩 있었다. 얻은 것은 노래하는 아경과 자유롭게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잃은게 있다면 그날 어딘가에 부딪쳐 골절이 된 엄지발가락 때문에 한동안 무용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 P69

공연 시작 시간보다 다소 늦게 도착한 해주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스툴 의자나 긴 벤치 의자에 앉은 채로 빽빽이 들어차있었다. - P70

얼굴이 달아오른 해주가 뒤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계좌번호 알려줘."
어쩔까 하고 순간 망설인 해주였지만, 지금 자존심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해주는 계좌번호를 적어 톡으로 보냈다.
"보냈어." - P72

더듬더듬 찾아간 미술관에서 해주는 한 할아버지의 얼굴모습이 세대별로 연대기처럼 그려진 그림들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 P75

아빠의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낸 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당장 시급한 월세를 생각하면 아빠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만 그도 잠시뿐, 해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P75

어렸을 적 춤을 처음 가르쳐준 건 아빠였다. - P76

아빠가 전에 없이 크게 화를 낸 건 그렇게 어렵게 해온 무용을 포기하겠다고 했을 때였다. 대학에서 현대 무용을 전공한 해주가 그 길을 포기하고 스트리트 댄서로 춤을 추며 살고 싶다고 했던 바로 그때 - P77

아빠가 실망 어린 눈초리로 해주를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내쉬었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대신."
"네
"대신?"
"아빠는 너 못 본다."
어쩌면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해주는 펜을 내려놓았다. - P80

(전략). 당장 행사나 백댄서 일자리가 있는지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려보고 안 되면 알바 자리라도 급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어 나가려는데 휴대전화 액정에뜬 은행 입금 메시지가 해주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입금액: 1,000,000원입금자 : 권아경‘ - P81

단 하루의 전시


초록색 나뭇잎들 사이로 간간이 붉은색 단풍이 엿보이기시작한 가을이었다. 언제든 그만둘 마음으로 출근하는 거야그대로였지만, 호수는 어느덧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른 부암동의 정취와 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공기만은 좋다고 생각했다. - P82

"나 같은 노인도 여기 취직하자마자 진작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게 벌써 이 년이 넘었어. 잘 버텨봐, 호수 청년."
방황하던 호수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했는지 할머니가눈을 찡긋했다.
"・・・・・・고맙습니다."
호수가 쑥스러워하자 할머니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냐, 아냐. 나도 항상 밝은 호수 청년 덕에 기분이 좋아.
아 이렇게 산밖에 없는 동네에 호수가 생겼잖아." - P83

"혹시 작가님은 어떤 분이세요?"
무슨 질문이든 하지 못할 대답이란 없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오 실장이 금세 얼굴을 붉히며 허공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 그야..... 회사 차원에서 관련 있다는 것만 알고 나도뭐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해. 아니, 그게 궁금해?" - P85

"아, 그래? 다행이네. 이상하다 하는 사람은 없고?"
"네. 아직까진 특별히 없어요."
오 실장이 안심한 표정을 짓는 사이 미술관 출입구로 한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관람객이려니 했는데 일행이 모여 있는 쪽으로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검은 볼캡을 깊이 눌러쓰고 오버사이즈 후드 집업과 오버사이즈 팬츠를 매치해 입은차림이었다. - P86

"아, 원래는 안 그래요. 오늘은 해주 님 사연으로 완성된 작품이 조금 특별하게 하루만 전시되는 거라서요."
"맞아요. 그래서 오늘 꼭 작품을 보셔야 합니다."
앞서 걷던 호수가 뒤돌아보며 다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전시관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 P87

"전 오래 가족과 떨어져 지냈어요. 가족들은 제가 미술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부모님은 인생을 잘 살아가는 방법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세요. 저도 그렇게 살아가길 바라시고요. 하지만 그런 부모님의 기대로부터 저를 얼마나 잘라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 도움이나 지원 없이 스스로 고립되었다고 느낄 만큼요. 그것 때문에 부모님과 사이가 벌어진 건 속상한 일이긴 하죠......." 말끝을 흐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다미가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일만 있는 건 또 아니니까요. 나름 좋은 점도 있고." - P89

발밑에 빗물이 차고 빗줄기가 얼굴을 때리는 와중에도 움직임 없이 서 있던 호수가 빗속으로 발걸음을 떼자 어깨 위로 빗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 P92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니까요

전시실에 들어간 해주는 당황한 낯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작품이라고 보일 만한 건 없었고 빈 액자만이 벽면에 걸려 있었다. - P93

성미가 강퍅하기만 했던 아빠가 몇 년 새 헐렁해진 바지만큼이나 힘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꿈속에서만 가끔 어른거렸던 아빠였다. 가끔 떠올리고도 바로 솟구치는 원망으로 북북 지워버리곤 하던 아빠가 정작 앞에 나타나자 해주는 복잡한 심경으로 인해 일말의 반가움조차 표현하기가 어색해졌다.
"아빠는 웃는 표정 짓기 힘들어하잖아." - P95

해주는 갑작스럽게 관심을 보이는 아빠가 의아하고 부담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어떤 춤을 추는지 보고나 싶었어. 너무 과격한동작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는 건 아닌지 아빠도 내심 걱정되었으니까. 네가 엄지발가락 골절된 게 무용 때문이 아니었다는 걸 아빠가 모르는 줄 알았니?" - P97

아빠에게 춤을 계속해보라는 얘기를 들을 줄도, 들을 마음도 없었던 해주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꾹 참았다. 단지 그 말만으로 아빠와 과거에 겪었던 상처와 불화가 말끔히 해소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P98

"그런가. 사고 이후로는 아예 음악을 듣지 않아서 잘 몰라. 그냥 좋았어."
휴대폰 속 플레이리스트를 손으로 넘겨보던 해주가 그중한 곡을 골라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 P100

해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중년에게는 어울릴법하지 않은 어딘가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아빠의 동작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 P101

"아빠. 진짜 웃는 아빠 같다."
"내가 웃는 모습이 보여?"
"응, 조금."
해주는 아빠의 환한 웃음을 선명하게 마주 보았다.
"나는 아빠가 늘 화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어."
"웃는 아빠입니다, 오늘은." - P105

"그건 어디서 난거야?" 하고 아빠에게 묻는 순간이었다.
"선해주."
별안간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해주야." - P103

"맞아 미술관에서 너의 사연을 어떻게 작품으로 표현할지고민하다 내게 연락을 준 거래. 아버님과의 어떤 연결고리를찾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을 알려드렸어. 만나 뵈면 좋을 것 같다고 내가 제안하기도 했고. 허락도 없이 미안해." - P104

아빠는 그저 해주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해주는 아빠의 얼굴 구석구석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 얼굴 너머로아빠가 웃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 P106

미술관을 나와 아경과 함께 걷는 내내 해주의 마음에 못내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돈 보내준 거 봤어. 바로 갚을게. 고마워."
돈 때문에 아경 야속하게 만들었을 걸 생각하자 해주는미안해졌다. - P106

해주는 아이 버스킹하던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때를 떠올렸다. 간밤의 들뜬 기운과 개운한 땀이 온통 해주를 뒤덮고 있던 그때, 아경은 해주에게 늘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 P108

"사랑해."
아경이 나지막이 해주의 말을 따라 하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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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01

내 나이 열다섯이던 해에 나는 간염에 걸렸다. 나의 병은 그해 가을에 시작되어 다음 해 봄에 끝났다. 묵은해의 날이 점점더 추워지고 어두워질수록 나의 몸은 자꾸만 약해져갔다. - P6

나의 첫 바깥나들이는 블루멘 가에서 반호프 가까지 가는것이었다. 세기 전환기에 지어진 블루멘 가의 어느 육중한 건물 3층에 우리 집이 있었다. - P6

바로 그때 그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의 손길은 조금 거칠었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는 어두컴컴한 현관을 지나 안마당으로 나를 이끌었다. 건물 위쪽의 창문과 창문들 사이로 팽팽하게 잡아맨 빨랫줄에는 빨래들이 널려 있었다. 마당에는 목재가 쌓여 있었다. - P7

(전략).
그날 어머니는 의사를 불러왔고, 의사는 간염이라는 진단을내렸다. 그 후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만약에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그 여자 집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 P8

02

반호프 가의 그 건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 건물이 언제, 왜 헐렸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서 살았다.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것은 70년대 혹은 80년대에 지은듯한 5층짜리 건물로 지붕 밑에 다락방이 하나 있고 돌출창이나 발코니 없이 매끈하게 밝은색으로 회칠이 되어 있다. - P9

나는 이미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건물을 알고 있었다. 그건물은 옆으로 늘어서 있는 다른 건물들을 압도했다. - P10

나이를 먹은 뒤에는 꿈속에서 수시로 그 건물을 보았다. 언제나 비슷한 꿈들이었다. 그것은 단 한 가지 꿈과 테마가 변형된 것들이었다. - P10

우선은 분명히 어느 도시의 건물들틈에 서 있어야 할 게 넓은 들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만 이상할 따름이다. 다음 순간 나는 그 건물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이제 나는 더욱더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그 건물을 보았던 장소가 기억나는 순간 나는 차를 돌려 그 건물을 향해 돌아간다. - P11

나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 건물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P12

03

나는 그 여자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 P13

건물 안에는 석고 세공품도 거울도 폭이 좁은 양탄자도 없었다. 건물 정면의 화려함과는 다른, 계단실이 원래 간직했을 법한 소박한 아름다움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계단의빨간 페인트는 사람들의 잦은 발길 때문에 가운데 부분만 일렬로 벗겨졌고, 계단을 따라 어깨 높이로 붙어 있던 초록색 문양의 리놀늄도 닳아 없어졌으며, 난간의 살이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끈이 묶여 있었다. 어디선가 세제 냄새가 났다. - P13

그 집에는 화장대와 테이블, 의자 네 개 안락의자 그리고 석탄 난로를 갖춘 작고 비좁은 거실도 하나 있었다. 거실은 겨울에도 전혀 불을 때지 않았으며 여름에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 P14

04

"잠깐 기다려" 내가 일어나서 가려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
"나도 나가야 해. 같이 좀 걷자."
나는 현관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부엌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 P16

그녀는 나의 시선을 느꼈다. 나머지 스타킹을 잡으려다 말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려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빛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놀란 눈빛이었을까, 무언가를 묻는 듯했을까, 다 안다는 표정이었을까, 나무라는 눈빛이었을까. - P17

몇 년 뒤 나는 내가 단순히 그녀의 몸매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몸놀림 때문에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 P18

비록 내가 지금에 와서는 그것을 깨닫고 이렇게 이야기까지하지만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도 무엇이 나를 그토록 흥분시키는지에 대해 생각만 하면 늘 다시금 흥분되었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나는 그 우연한 조우를 다시 기억 속으로 불러들였다. - P19

05

일주일 뒤 나는 다시 그녀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일주일 내내 나는 그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나를 만족시키고 나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 P20

바깥세상, 즉 마당이나 정원 또는 길거리에서 보내는 자유 시간의 세계는 아주 희미한 소리가 되어 병실로 들어올 뿐이다. 병실 안에는 환자가 읽고 있는 이야기와 형상들의 세계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 P20

그런데 환자의 병이 나으면 이 모든 것은 끝나고 만다. 하지만 병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된 상태라면, 병실은 외부 세계에 대해 방수 처리되고 이제 병이 거의 나아 전혀 열이 나지 않는 환자라 하더라도 미로 속에서 헤맨다. - P21

그 당시 슈미츠 부인을 찾아가려는 용기가 어디에서 솟아났는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그동안 받아온 도덕 교육에 스스로가 반항을 한 것일까? 음탕한 눈길이 욕망을 실제로 채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쁘고, 적극적인 상상이 상상을 직접 행동으로옮기는 것이나 다름없다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P22

나는 당시 그렇게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하면서 나의 음탕한생각을 기이한 도덕적 계산으로 정당화시키고 양심의 가책을 침묵시켰다. - P22

06

그녀는 집에 없었다. 건물의 현관문이 조금 열려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계단을 올라가 초인종을 누른 후 기다렸다. 나는 초인종을 다시 한 번 눌렀다. 집 안의 문들은 열려 있었다. - P24

슈미츠 부인이었다. 한 손에는 석탄 양동이를 다른 손에는조개탄 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제복 차림이었다. 재킷과치마로 된 제복이었다. 그녀가 전차의 차장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층계참에 다다를 때까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 P25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집에서도 지하실에서 석탄을 날라온 적이 있었고 또 그때마다 별문제가 없었다. 물론 우리 집에서는 석탄이 그렇게 높이 쌓여 있지는 않았다. - P26

석탄 산더미가 진정되고 나서야 나는 석탄 더미에서 빠져나와 두 번째 양동이를 채웠다. 그러고는 빗자루를 하나 찾아내 지하실 입구까지 굴러가 있는 석탄 조각들을 판자 칸막이 안으로 쓸어 넣고 문을 잠근 다음 양동이 두 개를 들고 위로 올라왔다. - P26

나는 머뭇거리다가 스웨터와 셔츠를 벗고 다시 엉거주춤 서있었다. 물은 금방 차올라 욕조가 거의 가득 찼다.
"신발 신고 바지까지 입은 채로 목욕을 할 거니? 쳐다보지않을게, 꼬마야."
하지만 내가 수도꼭지를 잠그고 팬티까지 다 벗고 났을 때, 그녀는 나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 P27

"샴푸로 머리도 감아 큰 타월을 금방 갖다 줄 테니까."
그녀는 옷장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는 부엌에서 나갔다.
나는 몸을 씻었다. 욕조의 물은 더러워졌다. 나는 물을 새로 받으며 쏟아지는 물줄기로 머리와 얼굴을 깨끗하게 헹구었다.
나는 그대로 누운 채 목욕물 데우는 난로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 P28

나는 두려웠다. 서로의 몸을 더듬는 것이, 키스가, 그리고 내가 혹시 그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내가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 P29

07


그날 밤 나는 그녀에게 흠뻑 빠졌다. 나는 깊이 잠들지 못했고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녀를 어루만지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베개나 침대보를 움켜잡고 있음을 깨닫곤 했다. 격렬한 키스 때문인지 입술이 아팠다. - P30

그녀가 나와 함께 잤다는 사실에 대한 대가를 치르느라 그녀에게 흠뻑 빠진 것일까? - P30

마찬가지로, 그때까지는 나의 마음속에 아무런 이름도 갖고있지 않던 그 여자 역시 그날 오후에 내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다음 날부터 다시 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 P31

"왜 그렇게 늦었니? 엄마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버지의 목소리는 걱정스럽기보다는 화난 듯이 들렸다. - P32

아주 어렸을 적에 형과 나는 늘 치고받고 싸웠으며 그 후로는 말로 싸움을 벌였다. 나보다 세 살 위인 형은 이 두 가지 면에서 언제나 나를 앞섰다. 언젠가부터 나는 형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형의 공격적인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 형은 기껏해야 불평을 늘어놓는 것으로 그쳤다. - P33

나는 가끔 그의 가족인 우리가 그에겐 가축과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 P34

아버지는 나를 건너보았다.
"저 내일부터 다시 학교에 나갈래요.‘ 너 네 입으로 그렇게말했지, 그렇지 않니?"
"그래요."
아버지에겐, 내가 어머니가 아닌 그에게 그것을 물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또 내가 다시 학교에 나가야 할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고 우물쭈물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띈 것 같았다. - P35

08

다음 며칠 동안 그 여자는 새벽 근무조였다. 그녀는 낮 열두시에 집에 돌아왔고, 나는 그녀의 집 앞 층계참에서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날마다 마지막 수업을 빼먹었다. - P36

나는 차라리 샤워를 생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저분한 것을 끔찍하게 싫어해 아침마다 샤워를 했다. - P36

"이름이 뭐예요?"
나는 7일인가 8일 째 되는 날에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중략).
그녀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이름이 뭐냐고요!"
"그건 왜 알려고 그러니?" - P38

"내 이름은 미하엘 베르크예요."
"미하엘, 미하엘, 미하엘." 그녀는 내 이름을 음미했다. "내꼬마의 이름은 미하엘이고, 대학생......."
"고등학생이에요."
"・・・・・・고등학생이고, 나이는, 열일곱 살?"
나는 그녀가 내게 덧붙여준 두 살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 P39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제대로나눈 대화였다.
"고등학교 1학년. 병이 나서 지난 몇 달 동안 공부를 거의 못했어요. 1학년을 마치려면 앞으로 멍청할 정도로 공부만 해야할 거예요. 난 지금 이 시간에 학교에 있어야 해요."
나는 그녀에게 내가 수업을 빼먹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 P40

 그녀는 이불을 홱 젖혔다. "당장 내 침대에서 나가그리고 공부를 하지 않으려면 다시는 찾아오지마. 네가 하는공부가 멍청하다고? 멍청하다고? 차표를 팔고 개찰하는 일이어떤 건지 알기나 하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벌거벗은 채로 부엌에 서서 갑자기차장이 되었다.  - P40

"미안해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게요.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앞으로 6주 뒤면 1학년이 끝나거든요. 한번 해볼게요. 하지만 당신을 다시 못 보게 된다면 해낼 수 없을 거예요. 나는......."
나는 처음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녀의 말이 분명 맞았다. - P41

09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왜 이리 슬픈 걸까? 잃어버린 행복때문일까? 나는 그 후로 몇 주 동안 행복했다. - P42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보인다. 나는 돌아가신 어느 부유한 친척 아저씨가 유품으로 남겨 나한테까지돌아온 우아한 양복 몇 벌을 입고 다녔다. - P43

바로 이것이 나를 슬프게 했을까? 당시 나의 가슴을 가득채웠던, 생에서 결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끌어냈던 그 열의와신념 때문인가? 지금도 나는 가끔 아이들과 십대들의 얼굴에서 그 당시의 나에게서와 똑같은 열의와 신념을 발견한다. - P44

"꼬마야, 넌 정말 별걸 다 알려고 드는구나?"
장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녀와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릴 생각은 아니었다.  - P45

그런 생각과 제안이 내게 전혀 수치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게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어머니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나는 독방을 얻으려고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 P46

지금의 내가 서른여섯 살 난 여자를 본다면 나는 그 여자를 젊다고 여길 것이다. - P46

책 읽어주는 일 때문이었다. 우리의 첫 대화가 있던 날 한나는 내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키케로의 연설문 그리고 물고기와 바다를 상대로 한 노인의 싸움에 대한 헤밍웨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P48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전반 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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