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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에르도사인은 지금 이 끔찍한 상황에서 자기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점성술사밖에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태껏 공들여 펼쳐놓은 상상의 세계는 연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점성술사는 돈이 있을지도 모른다. - P43

점성술사는 숲으로 둘러싸인 별장에 살았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이었지만 나무 위로 솟아오른 붉은색 지붕 때문에 먼 곳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 P44

에르도사인은 인동초 꽃을 입에 물고 점성술사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로 소풍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는데, 점성술사의 집이 시야에 들어오자 마음이 더욱 설레기 시작했다. - P44

에르도사인은 생각했다.
‘지금 대리석으로 만든 노와 금실로 짠 돛이 달린 배가 있다해도, 바다가 일곱 가지 화려한 빛깔로 물든다 해도, 달빛이 은은히 내려앉은 곳에서 백만장자 아가씨가 내게 키스한다 해도,
내 슬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야.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하는 거지? 하지만 도시보다는 여기에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여기에는 최소한 실험실 정도는 있잖아? - P45

"에르도사인, 이 친구가 바로 아르투로 아프네르입니다."
사석에서 점성술사는 이 남자를 ‘우울한 기둥서방‘ 이라고불렀다. 보통 때 같았으면 우울한 기둥서방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넸을 테지만 지금 에르도사인은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 P46

점성술사가 지휘봉을 들고 미국 지도가 걸린 벽 쪽으로 걸어가자 우울한 기둥서방도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도 앞에 멈춰 선 점성술사는 푸른색으로 채색된 카리브해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 P46

점성술사가 입고 있는 노란 외투는 스님의 법의처럼 보였다.
점성술사는 이어서 우울한 기둥서방에게 물었다.
"저들이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인다는 사실을 알아요?
"네, 전문(電文)에서 읽었어요."
우울한 기둥서방이 말했다. - P47

"KKK단은 수백만 명의 사람을 끌어들였는데..."
아프네르가 흥분해서 불쑥 끼어들었다.
"그 드래곤이라고 하는 자들, 이름만 그럴싸하지 죄다철도나 사기죄로 줄줄이 감옥에 들어간 판에…점성술사는 못 들은 척 하던 말을 계속했다." - P48

점성술사는 그러고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우리 비밀 조직은 회원들의 기부금이 아니라, 각 세포조직마다 설치될 사창가를 통해 나오는 자금으로 운영될 겁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런 고전적인 결사가 아니라 초현대식 조직이에요. 우리 조직의 구성원들은 모두 동등한 경제적 권리를갖게 될 것이고, 또한 각종 소득 및 수익을 공평하게 분배받을겁니다. (후략)." - P49

벽에 걸린 시계가 다섯 시를 알렸다. 에르도사인은 이제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저, 죄송한데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상의하려고 왔거든요. 혹시 600페소 정도 가지고 계세요?
점성술사는 지휘봉을 놓고 팔짱을 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저, 내일까지 제가 다니던 제당 회사에 600페소를 갚지 않으면 전 감옥에 가게 됩니다." - P49

"우리 회사 경리과 직원들 일하는 거 보면 한마디로 엉망이에요. 우리가 수금을 못 해왔다고 하면 경위를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게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가타부타 한마디 말이 없어요. 바로 그 점을 이용해서 수금한 돈을 일단 주머니에 챙기고 회사엔 못 받았다고 거짓말하는 거죠. 그리고 내가 써버린 돈은 다음에 수급한 돈으로 메우는 식으로요."
예르도사인은 삼각형의 정점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고, 나란히 앉아 있는 우울한 기둥서방과 점성술사는 이따금 서로눈빛을 교환했다. - P50

"혹시 돈을 훔칠 때 쾌감 같은 건 못 느꼈어요?"
"아뇨, 전혀.....
"그런데 구두는 왜 그리 낡아빠진 걸 신고 다녀요?"
"어디 돈이 있어야지요...………."
"아니, 그럼 빼돌린 돈으론 뭘 했어요?"
"그 돈으로 구두를 살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 P51

정신이 나갔던 건지 아니면 귀신에 홀렸던 건지, 에르도사인은 마치 그 돈을 탕진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던 것처럼 엉뚱한 데만 골라 돈을 써댔다. 예를 들어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과자를 사거나, 또 구경 한번 못 해본게 요리나 거북이 수프, 개구리 튀김 요리를 사 먹고 다녔다. - P51

점성술사가 옆에 앉은 우울한 기둥서방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1000페소 정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착수금인 셈이죠. 에르도사인,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가 해드릴 수 있는 돈은 300페소 정도뿐이군요. 하지만 당신 스스로 곤경에 빠진 겁니다. 안 그래요?" - P52

에르도사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부들부들 떨며 모자챙을 꽉 움켜쥐었다. (중략). 우울한 기둥서방은 자세를 바로하더니, 통통한 손으로 턱을 괴고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차분하게 말했다.
"진정하고 앉아요, 친구. 내가 600페소를 드리죠." - P54

그때 점성술사가 끼어들었다.
"자자,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내가 300페소, 당신이 300페소를 내놓는 게 어때요?"
"아닙니다. 그건 우리 사업에 꼭 필요한 돈이니 그냥 갖고계세요. 전 당장 쓸데가 없으니 괜찮아요. 게다가 여자 세 명이계속 돈을 벌어주고 있으니까요." - P55

말할 틈을 노리던 점성술사가 끼어들었다.
"나죠. 그런데 그 문제라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말하고 싶지 않은, 아니 말 못 할 그런 일이 있을걸요."
"그 돈은 회사에 언제쯤 갖다 줄 겁니까"
"내일이요."
"그러면 지금 수표를 써드리죠. 오전 중에 현금으로 바꿀 수있을 겁니다." - P56

에르도사인의 마음을 눈치챈 아프네르는 책상 옆에 앉아 있던 점성술사를향해 말했다.
당신의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의 복종심이 제일 중요하겠죠?" - P57

점성술사는 우울한 기둥서방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잠시 무슨 얘기를 나눈 다음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점성술사는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에르도사인이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몸집의 점성술사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P59

우울한 기둥서방

(전략).
그 순간 에르도사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엉뚱한 질문이튀어나왔다.
"돈도 그렇게 많이 벌면서 왜 그런 기둥서방 노릇을 계속하는 거죠?
이 말을 듣자 아프네르의 얼굴엔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봐요, 친구. 그런 기둥서방 노릇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요? 그 여자들이 알아서 매달 2000페소나 바치는데 내가 왜 이일을 팽개치겠어요? 당신 같으면 그렇게 할 것 같아요? 절대로아닐 겁니다. 내 말이 틀려요? - P59

에르도사인은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싶었지만 이미 돌이킬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기둥서방이 입을 열었다.
"내 말 잘 들어요. 만약 내일 의사가 나한테 와서, 지난 4년동안 내게 30000페소를 벌어다 준 스페인 출신 여자가 일주일안에 죽을 거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난 그녀에게 계속 일을 시킬 겁니다. 남은 엿새간 일하고 마지막 이레째 되는 날죽도록 말입니다." - P60

"불쌍하지도 않냐고? 이봐요, 친구. 그런 여자들을 동정할필요는 없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납고 가장 지독한 여자들이 바로 몸 파는 여자들이에요. 그런 표정으로 날 보지 마시구려. 그런 여자들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후략)." - P60

"(전략). 분명히 말하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잽니다. 이해가 안 가면 원시시대의 야만적인 부족들을 한번 생각해 봐요. 여자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하여간 안 하는 일이 없습니다. 반면에 남자들은 사냥을 나가거나 싸우는 일이 전부죠. 지금이라고 다른가요. (후략)." - P61

"(전략). 이 말을 잘 살펴보면 그런 여자들의 심리를 잘 알 수 있어요. 사실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고 소설가들조차 모르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는 셈이죠. 프랑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혼자 사는 매춘부는몸을 팔지 않는다.‘¹³" - P62

13) ‘창녀는 자기가 벌어 먹이는 남자가 있어야 비로소 몸을 판다.‘ 라는 의미. - P418

 달콤한 오후의향기에 취한 듯 에르도사인은 입을 벌린 채 멍한 시선으로 아프네르를 쳐다보았다.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가 아득히 멀게만 보였다. 에르도사인이 물었다.
"어쩌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아주 젊었을 때죠. 당시 난 스물세 살이었고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교수였어요. 이래봬도 난 수학 교수였단 말입니다." - P63

"(전략).
물론 지금은 내 말이 많이 생소하겠지만, 조만간 잘 알게 될겁니다. 만약 내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면, 포주 한 명이 여자 일곱을 거느리고 있는 현실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레포요라는 이탈리아 놈은......, 지금은 한물갔지만 한창 잘나갈 때는여자를 무려 열한 명이나 거느렸죠. 스페인에서 온 훌리오란자는 여덟 명 정도 데리고 있었고, 프랑스 놈들은 대부분 최소한 세 명 정도는 거느리고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여자들끼리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낸다는 겁니다.
(후략)." - P65

아프네르의 말을 들으니 에르도사인은 왠지 주눅이 들면서전에 점성술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울한 기둥서방이 길거리에서 여자를 보면 뭐라 하는지알아요? ‘이 여잔 5페소, 저 앤 한 10페소, 아니 20페소 정도는벌어 오겠는걸.‘ 그런답니다. 그게 다예요." - P66

"내 역할이라....... 점성술사가 돈을 모아서 주면 그 돈으로여자들을 모아 매춘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는 거죠."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점성술사에 대해 솔직히 어떻게 생각해요?"
"한마디로 미친놈이죠. 큰일을 할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입만 살아 나불대는 그런 위인인지도 모르죠." - P67

"점성술사는 당신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당신 얘기만 나오면 앞으로 아주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 에르도사인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 현 사회체제를 타도하기 위해선 우선 철저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참, 하던 얘기 계속하죠. 아직 이해가 잘 안 되는 게있는데……………, 당신의 위치가 대체 어떤 건지........" - P68

"그건 현실을 몰라서 하는 말이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세상이 어떤지 알고나 하는 소립니까?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 그것도 모자라서 어린애들까지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만약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라는 게 무엇인지그 실상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아베야네다에 있는 주물 공장이나 냉동 창고에 가보든지, 아니면 유리 공장이나 성냥공장, 담배 제조창……………, 아무 데나 가보세요." - P69

"우리 같은 잔챙이들이야 기껏 여자 한둘 정도 뜯어먹고 살죠. 그런데 자본가들은 저 수많은 대중들을 갉아먹고 산단 말입니다. 그런 자들을 대체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요? 사창가 포주와 대기업 사장 중에 누가 더 잔인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건당신 얘긴데, 월급이라야 고작 100페소 주면서 정직하게 살라고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던 게 바로 그들 아닙니까? 자기네들 지갑엔 10000페소나 들고 다니면서." - P69

"내가 원하는 거요? 이 말만은 해야겠네요. 도와주신 건고맙지만, 솔직히 말해 돈을 받고 나니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 수표 도로 드릴까요? 자, 여기 있습니다."
에르도사인은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아프네르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어서 가서 돈이나 갚아요." - P70

점성술사에게 들은 이야기였는데, 옛날에 아프네르는 어떤 카바레 댄서에게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정표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다른 여자들이 지켜보는데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 정부에게서 받은 비싼 목걸이를 벗어서 그에게 주었다. - P71

생애 최대의 굴욕

에르도사인은 그날 밤 여덟 시쯤 집에 도착했다. (중략). 아까 얘기했죠? 집에 도착하니 식당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전 문을 열자마자 얼어붙었어요. 아내가 외출복을 입고 의자에앉아 절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 P73

엘사의 충격적인 말 한마디에 에르도사인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때 대위가 끼어들었다.
"오래전부터 부인을 알고 지냈는데.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데요?"
"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엘사가 따지듯 물었다. 대위가 나서서 엘사를 거들었다.
"맞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물어보지 말아야 될 게 있는 법이죠." - P74

이 침입자는 그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지쳤다는 게 정확하게 무슨 뜻입니까?"
"권태, 고뇌, 그리고 불행하고 비참한 삶…………. 혹시 지금이 성경에 나오는 고난의 시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내 친구 중에 창녀와 결혼한 녀석이 하나 있는데 만날 때마다 그 녀석이 하는 말이 있죠. 자기랑 결혼한 그 창녀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매춘부라나. 이 세상 모든 게 성경에 쓰인 대로 이루어진다나.." - P76

"물론 그러시겠지. 당신은 돈을 잘 벌 테니까. 얼마나 벌어요? 500페소 정도?"
"대충 그 정도요."
"그래, 그 정도면 적당하네. - P76

엘사는 베일 사이로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의 여원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르도사인의 마음은 갈수록 허전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허무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의식이 점점 더 희미해지면서, 이젠 외마디 비명조차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 P77

또다시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천장에 매달린 노란전등에 비친 세 사람의 얼굴은 마치 밀랍으로 만든 데스마스크 같았다. 조금만 참으면 거북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상황도 다 지나가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막상 떠나버리면 에르도사인의 고통은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에르도사인이 대위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겁니까" - P78

"그렇죠? 이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투성이죠. 예컨대 내주머니에 권총이 하나 있는데....., 왜 당신을 쏘아 죽이지 않았는지 나도 설명을 못 하겠다니까요."
엘사가 고개를 들어 테이블 끝에 서 있는 그를 노려봤다. 대위가 물었다. - P79

"사실대로 말해, 엘사, 당신은 이렇게 구질구질한 생활 말고늘 멋지고 즐거운 일이 일어나기만 바랐잖아?"
"잘 모르겠어요."
"알겠어요, 대위? 우리 사는 게 늘 이런 식이에요. 테이블에같이 앉아서도 말 한 마디 안 하고....……." - P80

"좋아. 우리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우리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어. 삶의 행복, 사랑의 기쁨, 결국문제는 바로 이런 거 아니었겠어? 굳이 말은 안 했지만 우린 서로가 같은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 이제 그만 화제를 바꾸죠…………. 당신들, 앞으로 이 도시에 살 생각입니까?" - P81

대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에르도사인 씨, 우린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 가시겠다고....... 벌써요?"
엘사는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진짜 갈 거야?"
"그래, 떠날 거야…………. 언젠가는 당신도 내 마음을......"
"알아....... 당신 마음, 잘 알고 있어......." - P82

에르도사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방구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대위를 노려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억지로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왜 당신을 개 잡듯 쏴버리지 않았는지 알아"
그 말에 두 사람은 놀란 눈으로 에르도사인을 쳐다보았다.
"그건 말이야, 지금은 마음을 다 정리했기 때문이야." - P83

갑자기 에르도사인은 주머니에서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멀찌감치 집어 던졌다. 권총은 벽에 부딪히면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같은 놈한테 권총이 무슨 소용이야!" - P84

순간 대위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 후......, 조금만 더 참아줘요, 대위, 그 후로 난 늘 ‘모자란 놈‘, ‘덜떨어진 녀석‘ 소리를 들었어요. 그럴 때면 얼마나창피한지 내 마음이 온통 몸속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내 존재가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보다 더 하찮게 여겨졌죠……………. 화가 치밀었지만 덤빌 용기는 나지 않았어요. (후략)." - P86

대위는 조용히 에르도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건 당신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 용기를 시험해 보기 위해섭니다. 그러면 내가 그토록바라던 일을 성취하는 셈이니까. 내겐 천지개벽과도 같은 일이지・・・・・・ 그럼, 그만 가봐요." - P87

그때 에르도사인은 엘사도 자신만큼이나 불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엄청난 충격이 밀려들면서 의자 끝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괴로움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래서 가겠다는 거야? 정말로 내 곁을 떠나겠다고?"
"그래. 이러면 우리 인생이 더 나아지는지 보고 싶어. 내 손을 봐." - P89

에르도사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앞에 시멘트와 철근이 군림하고 있는 흉측한 도시의 모습이 나타났다. 뱀처럼 꿈틀대며 움직이는 군중 속으로 불쌍한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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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한마디로 앞으로는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은 나오더라도 배우가 아니니 연기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 게일반적인 현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일은 그저 얼굴이 나오는 영상을 대량으로 촬영해 영상 제작자들에게 대여하는 것이죠. 즉, 실제로 연기하는 건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고, 그 얼굴만 딥페이크로빌린 얼굴로 대신 가공하는 겁니다. 연기를 잘하는데도 외모가 뛰어나지 않아 주역을 맡지 못하는 배우, 또는외모는 뛰어나지만 연기력이 없어서 배우가 되지 못하는 사람, 그 양쪽을 이 기술로 구제할 수 있죠. 굉장하지 않습니까?" - P176

"아무리 성형을 해도 노화를 막을 수는 없잖아요." 모리나가가 말했다. "하지만 딥페이크를 쓰면 젊은 시절 얼굴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죠." - P177

유즈키는 도모와의 관계를 야요이에게만 털어놓았다. 야요이가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장례식장을 찾아갈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리라.
"불륜이라고 생각 안 했잖아. 그럼 당당하게 굴어." - P180

"마스터즈시 마리나에 지인이 있으세요?"
두 사람이 가게를 나가고 나서 야요이는 그렇게 물었다.
"네. 레스토랑 주방 직원입니다."
"주방 직원이요? 크루즈 구입이랑 상관이 있나요?" - P187

여자는 손수건을 받으며 친근한 어조로 물었다.
"마스터 눈에는 어때 보여요?"
"크루즈를 새로산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일 겁니다. 애초에 크루즈를 소유한 적도 없을 거고요."
여자는 쯧, 혀를 찼다. - P188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머리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그래요?"
"스마트폰과 신용카드 비밀번호가 같았습니다. 기억력에 자신이 없는 데다 경계심까지 부족한 거죠." - P189

가게를 나온 유즈키는 도부이타거리로 향했다. 좌우지간도모야가 자주 찾았다는 곳을 모두 보고 싶었다.
도부이타 거리에는 높은 건물은 별로 없고, 작은 상점들이 즐비했다. 바나 레스토랑 같은 곳뿐 아니라 밀리터리 관련 상점도 많았다. 미군 기지가 있는 도시라 그렇겠지. 도시 전체에 미국 문화의 영향이 짙었다. - P200

5

신사용품 매장에서 근무한다는 도가시는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에서도 기품이 배어 나오는 남자였다.
"어느 날, 친구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거울은 왼쪽 오른쪽이 반전 비치는데, 왜위아래는 그대로인 거냐고.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웃어 넘겼는데 막상 대답하려 하니 그 질문에대한 답을 아무도 말 못 하는 겁니다. 두 분은 어떻게생각하십니까?"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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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눈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든 순간 철렁했다. 방금 전 그 여자가 앞에서 있었다.
(중략).
"그냥 앉아 계세요. 무리하지 마시고요."
여자가 말했다.
가미오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말해 유즈키는 천천히 다시 앉았다.
"다카토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 P162

유즈키는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다카토 료코다.
"라이브에 가셨나요?"
"네."
"그래요? 나는 벌써 몇 년째 그 사람 연주를 듣지 않았어요. 아니,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그 시점에서 이미 배우자로서 실격이었을지도 모르죠." - P163

다카토 료코는 냉철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기다리겠습니다. 아내니까요. 당신은 다카토의 아내가 아니잖아요."
억양 없는 목소리가 유즈키의 배 속으로 묵직하게가라앉았다. - P165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잇몸이 부어 있었고 통증도 느껴졌다. 그때 찾은 곳이 출근길에 있는 ‘다카토 덴탈클리닉‘이었다. 진료를 두 번 받았더니 상태가 나아져 그 뒤로는 가지 않았다.
"본업은 치과의사시군요." - P167

하지만 뒤이어 도모야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아내와는 따로 산다고 했다.
"앞으로의 인생을 설계해나가는 데 있어 아내와의견 차이가 있었어요. 아내는 내가 재즈에서 손을 떼기를 원했지만 난 그럴 수 없었죠." - P169

"나는 내 페이스대로 치과의사를 하며 재즈를 즐기고 싶었지만 그런 어중간한 태도로는 젊은 의사들이나치위생사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따로 나가 차린 게 지금 병원이고요. 하지만 그걸 계기로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죠. 그러다 따로 먹고 자게 됐고 결국 별거하게 됐습니다."
도모야는 남의 일처럼 가벼운 말투로 말하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커피를 마셨다. - P169

"계속.. 지금처럼 사시는 건가요?"
"네?"
"혼인 상태는 유지하면서 별거하는 생활을 앞으로도 계속하실 건가요?" - P170

"아, 이혼할 예정이 있느냐는 뜻이라면, 지금으로서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네요. 아내와 아직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어서요. 앞으로의 일은 모르지만, 불확실한 얘기를 함부로 입에 담을 수는 없죠." - P171

하지만 사귀고 나서 1년쯤 지나자 상황이 달라지기시작했다. 도모야는 아내와 이혼 협의를 시작했다고했다. 지금 이대로는 양쪽 모두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 각자의 인생을 사는 길을 긍정적으로 모색하자고했다고.
‘이혼하고 나서 당신과의 미래를 생각해도 될까?‘ - P173

"방금 전에 피아니스트분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무슨일이 생기면 알려달라고 번호를 남겼었거든요."
스마트폰을 꼭 쥐며 유즈키는 신에게 마지막 기도를올렸다. 제발, 제발, 기적이 일어났기를…………….
하지만 이어진 말은 ‘유감스럽게도‘이었다.
"다카토 씨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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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특수부대에 특수방위원으로 배속된 이쿠와 테즈카의 훈련기간은 1개월 반 정도 연장되어, 오쿠타마에 확보되어 있는 훈련장에서 각종 사격이나 야영 등을 주로 한 훈련이 기다리고있다.
도서관 공방이라고 하면 주로 시가전일 텐데 웬 야영. 대장인 겐다에게 물어보자 명쾌하게 "폼나잖아!"하고 대답했다. - P84

칸토 도서대의 도서특수부대는 올해 들어온 이쿠와 테즈카를 포함해 총 50명 가량, 칸토 전역을 아우르기에는 소규모이지만 특수부대가 총출동할 만한 사태가 그리 자주 일어나도 곤란하니까 이 규모로 충분하다면 어떤 의미로는 옳은 일이다. - P85

"히노의 악몽이 재래할 때를 대비해서다."
"히노의 악몽?"
그렇게 말한 순간 도조가 눈을 부릅떴다. "너, 강의..."라고 말하다가 험악한 한숨.
"들었을 리가 없지." - P86

"테즈카, 설명해줘라."
도조가 지명하자 이쿠는 얼굴을 찌푸렸다. 테즈카에게 설명을들을 바엔 차라리 도조에게 야단맞으면서 설명을 듣는 편이 낫다. 그러나 도조는 이쿠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분하다면 동기에게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도록 해." - P87

막힘없는 설명에 주위 대원들이 오오 하고 감탄했다.
"너는 그대로 교편도 잡을 수 있겠군."
도조의 이 말은 최대급 칭찬이다. 그 말을 듣고 테즈카는 "과찬이십니다"하고 경례했다.
"하지만 이 정도도 모르는 사람이 도서특수부대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저 개인적으로는 믿어지지 않습니다만." - P88

"아까 한 말은 취소다."
도조의 갑작스런 말을 듣고 테즈카가 눈을 깜박였다.
"너는 우수한 학생이지만 가르치기엔 아직 멀었어. 카사하라는 카사하라 나름대로 너와는 다르게 선발된 이유가 있어. 네잣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 P88

이쿠가 몰아붙이자 테즈카는 무시하며 사격 순열에 섰다.
너희들 정말이지 서로 안 맞는구나, 주위 선배대원들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지만 이쿠 나름대로는 자기 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P90

"아무래도 안 되겠어, 카사하라 씨."
이쿠가 쏜 과녁을 쌍안경으로 확인하면서 그렇게 말한 사람은 코마키였다.
(중략).
시력을 묻기에 2.0이라고 대답하자 코마키가 혀를 내둘렀다.
"나보다 좋잖아. 그럼 과녁은 보이겠네. 방아쇠 당길 때 제대로 가압을 못 줬나?" - P90

"훈련시간을 늘려주세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적성에 안 맞는 방면을 훈련하기 위해 탄환을 쓸 만큼 부대예산은 윤택하지 않아. 적재적소는 궁핍한 군대의 기본이지. 카사하라 씨를 저격수로 키우기보다도 테즈카 일사를 키우는 편이 싸고, 전원이 저격수가 될 필요도 없어." - P91

코마키가 그렇게 말하며 이쿠의 머리를 살짝 두드렸다.
"카사하라 씨는 카사하라씨의 적성을 살리도록 해. 테즈카일사와 경쟁해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속셈을 완전히 꿰뚫어 보는 통에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지만, - P91

테즈카가 카사하라 이쿠라는 여자대원을 알게 된 것은 교육기칸도 종반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이미 젠다에게서 도서특수부대로 가도록 은밀하게 지시를 받고 있었는데 신입대원 가운데 한 사람 더 선발될지도 모른다는특수방위원의 후보로 들었던 이름이 카사하라 이쿠였다. - P92

그러나 이런 녀석이 태스크포스의 선발후보라니, 이 녀석과테즈카가 동등한 평가를 받았다는 뜻인데-어째서 나랑 이녀석이 동급이냔 말이다. - P92

뿐만 아니라 경비실습 중에 실수를 저질러서 경상이라고는 해도 도조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한다. 그러니 카사하라의 선발은 취소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올해 특수방위원 선발은 두 명이 되었다.
사령실 앞에서 처음 마주친 카사하라는 같은 신입대원이니까 친근감이라도 솟았는지 처음부터 마음 편하게 말을 걸어왔는데 이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 P93

무슨 소리, 상대가 대장이라는 사실도 잊고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을 텐데. 어째서 우리들이 너와 동시에 그 녀석을 뽑았는지."
수습할 틈도 없이 표정이 굳었다. 감각적으로는 조롱에 가까웠다.
"제 잣대로 재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니까요."
의무적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상관 앞에서는 굳이 스스로를 ‘자신‘이라고 칭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 P94

"너만큼 우수한 녀석은 드물지만, 우수한 녀석 특유의 나쁜버릇도 고스란히 남은 모양이군. 자기 수준에 이르지 못한 녀석을 떨쳐내고 나면 네 옆에는 몇 명이나 남지?"
테즈카의 귀에 그 말은 상투적인 말로만 들렸다. 무능한 다수보다 유능한 소수가 도덕성도 높고 전력에도 도움이 된다. - P94

겐다가 쓰게 웃었다. 전형적이로군, 중얼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걸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뭐 한 명밖에 없는 동기니까 조금은 허물없이 대해보는 게어때?" - P95

이쿠의 라이플 사격이 그럭저럭 자리를 잡을 무렵, 그제야 이쿠는 테즈카보다 나은 적성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중략).
강하 훈련에서 자세를 확보하는 요령은 뒤를 향해 뛰어내릴때에 힘껏 뛰어내리는 것이었는데, 원래부터 야생 원숭이였던 이쿠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과목이었다. 어릴 적에는 몸에 안전장치도 매지 않고 밧줄 하나만 묶고서 오빠들과 비슷한 놀이를하며 지냈다.
처음부터 힘껏 뛰어내려 자세를 확보한 이쿠를 보고 지상에서 커다란 동요가 일었다. 착지한 뒤에 말을 들어보니 거꾸로 매달리게 되리라고 다들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 P96

"뭔가 꾸미고 계시는군요."
이쿠가 의심스럽다는 말투로 중얼거리자 도조도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쿠는 그 의아하다는 표정에 대고 대답했다.
"도조 교관님이 평범하게 저를 칭찬하시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번엔 어떤 꼬투리로 야단치실 셈이세요?" - P97

그 뒤의 훈련에서도 테즈카의 강하는 눈에 띄게 나아지지는 않았고 매번마다 합격 수준을 그럭저럭 유지한 채로 헬기 훈련일을 맞았다.
칸토 일대에 한 대뿐이라는 수송용 헬기인 UH60JA가 칸토도서대에 배치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울트라C⁵가 있었던 듯하다. 숱한 가설 중에서도 가장 그럴듯한 것은 방위시설청에서 받는 보조금을 현물지급으로 받아내었다는 설이다.



5) 울트라C: 원래는 체조 용어로 최고 난도인 C보다 더 어렵다는 의미. - P98

그 좁은 곳에서 이쿠가 문득 옆을 보자 테즈카가 험악한 얼굴로 슬링 로프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쩐지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것은 생각 탓만은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높은 곳을 꺼려하는 듯하다는 사실은 지금껏 해온훈련에서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 P99

"도서대원에게 이 훈련이 필요한 의미는 뭡니까?"
무사시노 제1도서관에서 네리마 구립도서관까지 나침반 이동해야만 하는 사태라도 발생하는 건가 하고 말하고 싶다.
"폼나잖아!"
아니나 다를까, 명쾌하게 대답하는 겐다를 보고 대원들이 폭소했다. 겐다가 덧붙였다.
"그 이상 설명이 듣고 싶다면 도조가 대답하도록 하지." - P100

폼 때문에 사흘에 걸쳐 오쿠타마를 헤매야 하는 것도 기운이빠지는데 도조의 설명을 들어봐야 무슨 소용일까.
"물어봐야만 훈련의 의의를 파악할 수 있다는 시점에서 이미 머리가 나쁜 거야."
노골적으로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린 사람은 옆자리에 앉은 테즈카였다. - P100

겐다가 "맞다, 맞아"하고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또한 근교 임업 관계자에게서 곰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다수 보고되고 있으니 조심하도록."
"아니 잠깐, 어떻게 조심하라고요!" - P101

"뭐 혼슈니까 곰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반달곰이다. 기본적으로는 소심한 성격이니까 이 정도 숫자로 행동하면 그쪽이 먼저 피할 거야. 만일 격투를 하게 된다 해도 1대1로 이길 만한짐승이 아니니까."
"곰을 상대로 싸운다는 선택 가능성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범상치 않은데요! 게다가 곰한테 이길 수 있는 인류라니 도서대에서는 겐다 대장 정도밖에." - P102

도조도 까다로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 뭐랄까, 대장도 말했다시피 여러 명이 행동하면 마주칠 일은 별로 없어. 등산객이 습격받은 적도 거의 없으니까 오히려 화제가 되는 거고, 내가 아는 한 장거리 행군에서 실제로 곰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
안심시켜주려고 느릿느릿 이야기하는 듯하니-고마워해야 할까. 이거. - P103

당연한 일이지만 신입대원은 둘이 같이 도조가 감독하는 부대에 들어가 장거리 행군에 나섰다. 새벽녘에 두 부대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출발했다.
곰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어, 이것이 현실이었다. 중장비로 여름 산, 심지어 길도 없는 산을 헤치며 나아가는 행군이다. - P104

"시골에서 자랐으니까요. 도조 교관님은 도시에서 자라셨나요?"
"자란 곳은 계속 도쿄였지. 도서대에 들어간 뒤에는 연수 때문에 칸토구내를 다소 돌아다녔지만."
헤에, 맞장구를 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P105

테즈카는 소리내어 불평하지는 않았지만 표정만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이쿠도 테즈카의 손을 빌리고 싶지는 않아서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쿠의 등 뒤에 선 도조에게는 테즈카의 얼굴만이 보였다.
"부활동에서는 자기만 기준을 달성하면 합격하는 게 아니야.
알고 있겠지." - P105

같은 설교 두 번 시키지 마라. 카사하라."
과연 교육대 때부터 같이 있었던 만큼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잘 파악하고 있다. 이쿠가 투덜투덜 등짐을 내리려 하자 도조가 등 뒤에서 삽을 꺼내어 이쿠에게 건네었다. - P106

쉴 틈도 없이 텐트 설치를 개시했다. 이쿠는 여자라서 1인용이다. 설치를 마치자 이미 해는 저물어 휴대식량으로 저녁식사를 마쳤다.
"카사하라 볼일 보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지 말아주세요~!"
라고. 시집도 안 간 아가씨가 태평하게 외치다니. - P107

이상한 꿈을 꿨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테즈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우와아 하고 상당히 대놓고 초조한 목소리로 외치다니, 저 우등생이 당황하는 모습이라니 거 참 보기 좋다.
(중샤4).
"나왔다!" - P107

ㆍ임업 관계자에게서 곰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다수 보고되고 있으니 조심하도록.
"곰이냐?!"
뛰어들어온 덩치를 후려갈겼다.  - P108

"아하하하하. 그게 뭐야! 카사하라 너, 곰, 곰을 때렸다고?!"
"웃을 일이 아냐!"
이쿠는 웃으며 나뒹구는 시바사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시바사키는 더욱더 심하게 융단 위를 뒹굴었다.
"믿어지지 않아,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보통 곰을 때리니?! 여자애가?!" - P108

"짚뭉치라고 해도 너, ‘곰이냐?‘라고 외치고서 때렸다며? 너나름대로는 곰이라고 인식하고서 때렸다는 말이잖아. 이야, 굉장해, 여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몰라."
(중략).
"아니, 아니, 그럴 수밖에 없지, 웃을 수밖에 없다니까." - P109

-2주일 전쯤에 관장님이 입원했어."
"어, 정말?! 드디어?!"
시바사키가 말하는 관장님이란 도서기지 부속 무사시노 제1도서관장이다. 궤양이니 폴립이니 언제나 건강 상태가 아슬아슬해서 식후에 대량의 약을 삼키는 모습은 일종의 명물이었다. 시바사키의 말에 따르면 긴급 입원해서 위를 잘라냈다고 한다. - P110

아무튼 이번 일은 도서관에 있어서는 그다지 환영할 만한 인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관장님이 얼른 복귀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 P111

"교육위원회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다는 식이지. 추천도서를 넣으라는 둥, 바람직하지 않은 도서는 빼라는 둥. 교육위원회뿐만 아니라 아무튼 권위 있는 곳의 요청을 거역할 수가 없나보더라." - P111

오쿠타마에서 돌아온 뒤 첫 출근 때 이미 도서대 안에는 ‘곰도 때려잡는 카사하라‘의 이름이 널리 퍼져 있었다. 어찌 보면 어떤 의미로는 당연한 일이다. 집중훈련에 동행한 대원들이 앞을 다투어 말을 퍼뜨린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시바사키 역시 소문의 확산에 상당히 공헌하고 있었다. - P112

도조의 험악한 말투는 주객전도에 가까웠지만 이는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도조가 성을 낸다.
"나도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맘대로 미리 폭로 해보라고! 다음 신입대원이 들어올 때까지 원한을 품는단 말이다!"
아무래도 해본 적이 있나보다.
"올해는 여자도 있으니까 그만두자고 내가 몇 번이나 중지를 요청했는지 알아?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나름대로 힌트도 줬더니만!" - P113

코마키는 매우 상식적으로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하지만 도조는 들이닥친 풀뭉치에게 "곰이다!"고 외치며 달려들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몹시 즐거워한 젠다가 신입대원 배속 때의 영구연례행사로 삼았다고 하니, 거슬러 올라가면 도조의 탓이라는 이쿠의 주장은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 - P114

"먼저 서고에 들어가 있어. 빨리 왔거든."
"그럼 서고 출납부터 시작할까."
도조가 그렇게 말하며 이쿠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는 한 번밖에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뒤에 모르는 부분이있으면 테즈카에게 물어."
말하자면 테즈카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다면 단번에 기억하라는 뜻이고, 또한 테즈카는 단번에 기억하리라고 믿고 있다는 뜻, (후략). - P114

서고에서 합류했을 때, 테즈카가 ‘곰 사냥‘ 건으로 뭔가 놀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즈카는 먼저 코마키에게서 서고의 배치를 배워두었던 참이라 이쿠는 도조에게서 배웠다. - P115

"기본적으로는 안쪽 1번 서가에서 일본 10진 분류법에 따라 격납되어 있다. 1번부터 4번 서가가 총류, 그 가운데 1번 반까지가 010도서관학, 거기서부터 2번 첫 단까지가 020도서·서지학, 그 다음이 030은 뛰어넘고 040.."
노도처럼 시작된 설명에 이쿠는 서둘러 도서수첩을 바지주머니에서 꺼냈다. - P115

"저기, 2번 첫 단째에서 030을 뛰어넘고 040이 된다니 왜 그런가요?"
"030은 백과사전이니까. 판이 크고 중량이 있으니까 제일 아랫단에 배치되어 있어."
메모를 적는 이쿠의 속도를 기다리다가 도조가 문득 물었다.
"보기 힘들지 않나?" - P116

"하지만 도서수첩은 반드시 휴대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꼭 갖고 다니고, 분류 일람도 부록으로 실려 있으니까요."
"잘 생각했군."
일단 칭찬 비슷하게 말한 직후에 "뭐 볼 시간이 있다면 말이지만"하고 덧붙여 이쿠의 불안감을 부추긴다. - P116

결과적으로 메모를 뒤적거릴 틈은 거의 없었다.
열람실 카운터 단말기에서 발신되는 요청서는 알람과 함께 서고 단말기에서 장표인쇄되어 나왔다.
장표를 한 장씩 들고 책을 찾아야 하는데 한 건 출납에 10분을 들일 수는 없다. 이용자의 불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5분. 베테랑이 보면 그래도 늦다. - P117

도조 이하 네 명밖에 서고에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 분류를파악하지 못한 이쿠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2차 구분까지는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가는 분야도 있지만 3차 구분에서는 완전히 두 손을 들어 해당 분야를 처음부터 훑어볼 수밖에 없다. - P117

서가 배치를 표시해둔 서가번호를 분류기호와 관련지어 파악할 수 있다면 검색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만 현재의 이쿠에게는 영문 모를 번호에 지나지 않았다.
"미안, 테즈카, 756은 몇 번 서가?!"
"공예 30번대! 너 적당히 좀 해, 공예는 좀 전에도 물었잖아?!" - P118

그런데다 서고로 돌아오는 책의 체크와 배가, 전산처리는 완전히 멈추어 있었다.
"이세권."
코마키가 서적용 엘리베이터 옆에 놓아두었던 책을 집어들었다. 책등을 모두에게 보인다. 이쿠가 찾아서 열람실로 올려보낸 책이었다.
"취소 반납되었어."
코마키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이쿠는 야단을 맞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이용자가 기다리지 못하고 출고를 취소했던 것이다. - P119

"테즈카!"
도조가 강하게 말하자 테즈카의 목소리가 숨을 삼킨 듯이 멈추었다. 코마키가 뒤를 잇는다.
"말이 심하다. 옳다고 해서 무슨 말을 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
테즈카가 불만스러운 듯 입을 다물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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