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우리 모두는 이미 목요일 날 법정에 출두해야 한다는 통지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목요일이 왔지만 우리가 증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 P203

홈즈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좀더 밝은 얼굴로 말했다.
「이번 수사 경험 자체가 나한테는 귀중한 것이었으니까요. 내 수사 파일에 이보다 더 흥미로운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사건은 단순하긴 했지만 몇 가지 대단히 교훈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지요」 - P204

「그럴 겁니다. 어디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해 보기로 하지요. 보통 사람들에게 많은 사실을 알려주면, 사람들은 결과를 예측해 낼 수 있습니다. 즉 많은 사실을 머릿속에 입력하면 그걸 가지고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떤 결과를 말해 주었을 때, 그러한결과에 이르게 된 전 단계들을 마음속으로 더듬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러한 능력이 바로 내가 말하는 역추리, 또는 분석적 사고라는 것이지요」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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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우리 모두는 이미 목요일 날 법정에 출두해야 한다는 통지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목요일이 왔지만 우리가 증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 P203

홈즈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좀더 밝은 얼굴로 말했다.
「이번 수사 경험 자체가 나한테는 귀중한 것이었으니까요. 내 수사 파일에 이보다 더 흥미로운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사건은 단순하긴 했지만 몇 가지 대단히 교훈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지요」 - P204

「그럴 겁니다. 어디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해 보기로 하지요. 보통 사람들에게 많은 사실을 알려주면, 사람들은 결과를 예측해 낼 수 있습니다. 즉 많은 사실을 머릿속에 입력하면 그걸 가지고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떤 결과를 말해 주었을 때, 그러한결과에 이르게 된 전 단계들을 마음속으로 더듬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러한 능력이 바로 내가 말하는 역추리, 또는 분석적 사고라는 것이지요」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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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르게 해주의 두 손이 가볍게 들렸다. 가늘게 눈을뜨자 거리의 흰 가로등 빛이 마치 무대 위 조명처럼 느껴졌다. 해주는 성큼 발을 내디뎠다.  - P68

그날 해주는 얻고 잃은 것이 하나씩 있었다. 얻은 것은 노래하는 아경과 자유롭게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잃은게 있다면 그날 어딘가에 부딪쳐 골절이 된 엄지발가락 때문에 한동안 무용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 P69

공연 시작 시간보다 다소 늦게 도착한 해주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스툴 의자나 긴 벤치 의자에 앉은 채로 빽빽이 들어차있었다. - P70

얼굴이 달아오른 해주가 뒤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계좌번호 알려줘."
어쩔까 하고 순간 망설인 해주였지만, 지금 자존심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해주는 계좌번호를 적어 톡으로 보냈다.
"보냈어." - P72

더듬더듬 찾아간 미술관에서 해주는 한 할아버지의 얼굴모습이 세대별로 연대기처럼 그려진 그림들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 P75

아빠의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낸 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당장 시급한 월세를 생각하면 아빠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만 그도 잠시뿐, 해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P75

어렸을 적 춤을 처음 가르쳐준 건 아빠였다. - P76

아빠가 전에 없이 크게 화를 낸 건 그렇게 어렵게 해온 무용을 포기하겠다고 했을 때였다. 대학에서 현대 무용을 전공한 해주가 그 길을 포기하고 스트리트 댄서로 춤을 추며 살고 싶다고 했던 바로 그때 - P77

아빠가 실망 어린 눈초리로 해주를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내쉬었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대신."
"네
"대신?"
"아빠는 너 못 본다."
어쩌면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해주는 펜을 내려놓았다. - P80

(전략). 당장 행사나 백댄서 일자리가 있는지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려보고 안 되면 알바 자리라도 급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어 나가려는데 휴대전화 액정에뜬 은행 입금 메시지가 해주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입금액: 1,000,000원입금자 : 권아경‘ - P81

단 하루의 전시


초록색 나뭇잎들 사이로 간간이 붉은색 단풍이 엿보이기시작한 가을이었다. 언제든 그만둘 마음으로 출근하는 거야그대로였지만, 호수는 어느덧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른 부암동의 정취와 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공기만은 좋다고 생각했다. - P82

"나 같은 노인도 여기 취직하자마자 진작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게 벌써 이 년이 넘었어. 잘 버텨봐, 호수 청년."
방황하던 호수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했는지 할머니가눈을 찡긋했다.
"・・・・・・고맙습니다."
호수가 쑥스러워하자 할머니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냐, 아냐. 나도 항상 밝은 호수 청년 덕에 기분이 좋아.
아 이렇게 산밖에 없는 동네에 호수가 생겼잖아." - P83

"혹시 작가님은 어떤 분이세요?"
무슨 질문이든 하지 못할 대답이란 없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오 실장이 금세 얼굴을 붉히며 허공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 그야..... 회사 차원에서 관련 있다는 것만 알고 나도뭐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해. 아니, 그게 궁금해?" - P85

"아, 그래? 다행이네. 이상하다 하는 사람은 없고?"
"네. 아직까진 특별히 없어요."
오 실장이 안심한 표정을 짓는 사이 미술관 출입구로 한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관람객이려니 했는데 일행이 모여 있는 쪽으로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검은 볼캡을 깊이 눌러쓰고 오버사이즈 후드 집업과 오버사이즈 팬츠를 매치해 입은차림이었다. - P86

"아, 원래는 안 그래요. 오늘은 해주 님 사연으로 완성된 작품이 조금 특별하게 하루만 전시되는 거라서요."
"맞아요. 그래서 오늘 꼭 작품을 보셔야 합니다."
앞서 걷던 호수가 뒤돌아보며 다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전시관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 P87

"전 오래 가족과 떨어져 지냈어요. 가족들은 제가 미술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부모님은 인생을 잘 살아가는 방법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세요. 저도 그렇게 살아가길 바라시고요. 하지만 그런 부모님의 기대로부터 저를 얼마나 잘라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 도움이나 지원 없이 스스로 고립되었다고 느낄 만큼요. 그것 때문에 부모님과 사이가 벌어진 건 속상한 일이긴 하죠......." 말끝을 흐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다미가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일만 있는 건 또 아니니까요. 나름 좋은 점도 있고." - P89

발밑에 빗물이 차고 빗줄기가 얼굴을 때리는 와중에도 움직임 없이 서 있던 호수가 빗속으로 발걸음을 떼자 어깨 위로 빗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 P92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니까요

전시실에 들어간 해주는 당황한 낯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작품이라고 보일 만한 건 없었고 빈 액자만이 벽면에 걸려 있었다. - P93

성미가 강퍅하기만 했던 아빠가 몇 년 새 헐렁해진 바지만큼이나 힘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꿈속에서만 가끔 어른거렸던 아빠였다. 가끔 떠올리고도 바로 솟구치는 원망으로 북북 지워버리곤 하던 아빠가 정작 앞에 나타나자 해주는 복잡한 심경으로 인해 일말의 반가움조차 표현하기가 어색해졌다.
"아빠는 웃는 표정 짓기 힘들어하잖아." - P95

해주는 갑작스럽게 관심을 보이는 아빠가 의아하고 부담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어떤 춤을 추는지 보고나 싶었어. 너무 과격한동작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는 건 아닌지 아빠도 내심 걱정되었으니까. 네가 엄지발가락 골절된 게 무용 때문이 아니었다는 걸 아빠가 모르는 줄 알았니?" - P97

아빠에게 춤을 계속해보라는 얘기를 들을 줄도, 들을 마음도 없었던 해주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꾹 참았다. 단지 그 말만으로 아빠와 과거에 겪었던 상처와 불화가 말끔히 해소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P98

"그런가. 사고 이후로는 아예 음악을 듣지 않아서 잘 몰라. 그냥 좋았어."
휴대폰 속 플레이리스트를 손으로 넘겨보던 해주가 그중한 곡을 골라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 P100

해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중년에게는 어울릴법하지 않은 어딘가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아빠의 동작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 P101

"아빠. 진짜 웃는 아빠 같다."
"내가 웃는 모습이 보여?"
"응, 조금."
해주는 아빠의 환한 웃음을 선명하게 마주 보았다.
"나는 아빠가 늘 화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어."
"웃는 아빠입니다, 오늘은." - P105

"그건 어디서 난거야?" 하고 아빠에게 묻는 순간이었다.
"선해주."
별안간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해주야." - P103

"맞아 미술관에서 너의 사연을 어떻게 작품으로 표현할지고민하다 내게 연락을 준 거래. 아버님과의 어떤 연결고리를찾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을 알려드렸어. 만나 뵈면 좋을 것 같다고 내가 제안하기도 했고. 허락도 없이 미안해." - P104

아빠는 그저 해주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해주는 아빠의 얼굴 구석구석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 얼굴 너머로아빠가 웃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 P106

미술관을 나와 아경과 함께 걷는 내내 해주의 마음에 못내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돈 보내준 거 봤어. 바로 갚을게. 고마워."
돈 때문에 아경 야속하게 만들었을 걸 생각하자 해주는미안해졌다. - P106

해주는 아이 버스킹하던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때를 떠올렸다. 간밤의 들뜬 기운과 개운한 땀이 온통 해주를 뒤덮고 있던 그때, 아경은 해주에게 늘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 P108

"사랑해."
아경이 나지막이 해주의 말을 따라 하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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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01

내 나이 열다섯이던 해에 나는 간염에 걸렸다. 나의 병은 그해 가을에 시작되어 다음 해 봄에 끝났다. 묵은해의 날이 점점더 추워지고 어두워질수록 나의 몸은 자꾸만 약해져갔다. - P6

나의 첫 바깥나들이는 블루멘 가에서 반호프 가까지 가는것이었다. 세기 전환기에 지어진 블루멘 가의 어느 육중한 건물 3층에 우리 집이 있었다. - P6

바로 그때 그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의 손길은 조금 거칠었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는 어두컴컴한 현관을 지나 안마당으로 나를 이끌었다. 건물 위쪽의 창문과 창문들 사이로 팽팽하게 잡아맨 빨랫줄에는 빨래들이 널려 있었다. 마당에는 목재가 쌓여 있었다. - P7

(전략).
그날 어머니는 의사를 불러왔고, 의사는 간염이라는 진단을내렸다. 그 후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만약에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그 여자 집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 P8

02

반호프 가의 그 건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 건물이 언제, 왜 헐렸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서 살았다.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것은 70년대 혹은 80년대에 지은듯한 5층짜리 건물로 지붕 밑에 다락방이 하나 있고 돌출창이나 발코니 없이 매끈하게 밝은색으로 회칠이 되어 있다. - P9

나는 이미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건물을 알고 있었다. 그건물은 옆으로 늘어서 있는 다른 건물들을 압도했다. - P10

나이를 먹은 뒤에는 꿈속에서 수시로 그 건물을 보았다. 언제나 비슷한 꿈들이었다. 그것은 단 한 가지 꿈과 테마가 변형된 것들이었다. - P10

우선은 분명히 어느 도시의 건물들틈에 서 있어야 할 게 넓은 들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만 이상할 따름이다. 다음 순간 나는 그 건물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이제 나는 더욱더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그 건물을 보았던 장소가 기억나는 순간 나는 차를 돌려 그 건물을 향해 돌아간다. - P11

나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 건물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P12

03

나는 그 여자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 P13

건물 안에는 석고 세공품도 거울도 폭이 좁은 양탄자도 없었다. 건물 정면의 화려함과는 다른, 계단실이 원래 간직했을 법한 소박한 아름다움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계단의빨간 페인트는 사람들의 잦은 발길 때문에 가운데 부분만 일렬로 벗겨졌고, 계단을 따라 어깨 높이로 붙어 있던 초록색 문양의 리놀늄도 닳아 없어졌으며, 난간의 살이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끈이 묶여 있었다. 어디선가 세제 냄새가 났다. - P13

그 집에는 화장대와 테이블, 의자 네 개 안락의자 그리고 석탄 난로를 갖춘 작고 비좁은 거실도 하나 있었다. 거실은 겨울에도 전혀 불을 때지 않았으며 여름에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 P14

04

"잠깐 기다려" 내가 일어나서 가려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
"나도 나가야 해. 같이 좀 걷자."
나는 현관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부엌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 P16

그녀는 나의 시선을 느꼈다. 나머지 스타킹을 잡으려다 말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려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빛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놀란 눈빛이었을까, 무언가를 묻는 듯했을까, 다 안다는 표정이었을까, 나무라는 눈빛이었을까. - P17

몇 년 뒤 나는 내가 단순히 그녀의 몸매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몸놀림 때문에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 P18

비록 내가 지금에 와서는 그것을 깨닫고 이렇게 이야기까지하지만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도 무엇이 나를 그토록 흥분시키는지에 대해 생각만 하면 늘 다시금 흥분되었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나는 그 우연한 조우를 다시 기억 속으로 불러들였다. - P19

05

일주일 뒤 나는 다시 그녀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일주일 내내 나는 그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나를 만족시키고 나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 P20

바깥세상, 즉 마당이나 정원 또는 길거리에서 보내는 자유 시간의 세계는 아주 희미한 소리가 되어 병실로 들어올 뿐이다. 병실 안에는 환자가 읽고 있는 이야기와 형상들의 세계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 P20

그런데 환자의 병이 나으면 이 모든 것은 끝나고 만다. 하지만 병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된 상태라면, 병실은 외부 세계에 대해 방수 처리되고 이제 병이 거의 나아 전혀 열이 나지 않는 환자라 하더라도 미로 속에서 헤맨다. - P21

그 당시 슈미츠 부인을 찾아가려는 용기가 어디에서 솟아났는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그동안 받아온 도덕 교육에 스스로가 반항을 한 것일까? 음탕한 눈길이 욕망을 실제로 채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쁘고, 적극적인 상상이 상상을 직접 행동으로옮기는 것이나 다름없다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P22

나는 당시 그렇게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하면서 나의 음탕한생각을 기이한 도덕적 계산으로 정당화시키고 양심의 가책을 침묵시켰다. - P22

06

그녀는 집에 없었다. 건물의 현관문이 조금 열려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계단을 올라가 초인종을 누른 후 기다렸다. 나는 초인종을 다시 한 번 눌렀다. 집 안의 문들은 열려 있었다. - P24

슈미츠 부인이었다. 한 손에는 석탄 양동이를 다른 손에는조개탄 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제복 차림이었다. 재킷과치마로 된 제복이었다. 그녀가 전차의 차장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층계참에 다다를 때까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 P25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집에서도 지하실에서 석탄을 날라온 적이 있었고 또 그때마다 별문제가 없었다. 물론 우리 집에서는 석탄이 그렇게 높이 쌓여 있지는 않았다. - P26

석탄 산더미가 진정되고 나서야 나는 석탄 더미에서 빠져나와 두 번째 양동이를 채웠다. 그러고는 빗자루를 하나 찾아내 지하실 입구까지 굴러가 있는 석탄 조각들을 판자 칸막이 안으로 쓸어 넣고 문을 잠근 다음 양동이 두 개를 들고 위로 올라왔다. - P26

나는 머뭇거리다가 스웨터와 셔츠를 벗고 다시 엉거주춤 서있었다. 물은 금방 차올라 욕조가 거의 가득 찼다.
"신발 신고 바지까지 입은 채로 목욕을 할 거니? 쳐다보지않을게, 꼬마야."
하지만 내가 수도꼭지를 잠그고 팬티까지 다 벗고 났을 때, 그녀는 나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 P27

"샴푸로 머리도 감아 큰 타월을 금방 갖다 줄 테니까."
그녀는 옷장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는 부엌에서 나갔다.
나는 몸을 씻었다. 욕조의 물은 더러워졌다. 나는 물을 새로 받으며 쏟아지는 물줄기로 머리와 얼굴을 깨끗하게 헹구었다.
나는 그대로 누운 채 목욕물 데우는 난로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 P28

나는 두려웠다. 서로의 몸을 더듬는 것이, 키스가, 그리고 내가 혹시 그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내가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 P29

07


그날 밤 나는 그녀에게 흠뻑 빠졌다. 나는 깊이 잠들지 못했고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녀를 어루만지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베개나 침대보를 움켜잡고 있음을 깨닫곤 했다. 격렬한 키스 때문인지 입술이 아팠다. - P30

그녀가 나와 함께 잤다는 사실에 대한 대가를 치르느라 그녀에게 흠뻑 빠진 것일까? - P30

마찬가지로, 그때까지는 나의 마음속에 아무런 이름도 갖고있지 않던 그 여자 역시 그날 오후에 내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다음 날부터 다시 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 P31

"왜 그렇게 늦었니? 엄마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버지의 목소리는 걱정스럽기보다는 화난 듯이 들렸다. - P32

아주 어렸을 적에 형과 나는 늘 치고받고 싸웠으며 그 후로는 말로 싸움을 벌였다. 나보다 세 살 위인 형은 이 두 가지 면에서 언제나 나를 앞섰다. 언젠가부터 나는 형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형의 공격적인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 형은 기껏해야 불평을 늘어놓는 것으로 그쳤다. - P33

나는 가끔 그의 가족인 우리가 그에겐 가축과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 P34

아버지는 나를 건너보았다.
"저 내일부터 다시 학교에 나갈래요.‘ 너 네 입으로 그렇게말했지, 그렇지 않니?"
"그래요."
아버지에겐, 내가 어머니가 아닌 그에게 그것을 물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또 내가 다시 학교에 나가야 할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고 우물쭈물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띈 것 같았다. - P35

08

다음 며칠 동안 그 여자는 새벽 근무조였다. 그녀는 낮 열두시에 집에 돌아왔고, 나는 그녀의 집 앞 층계참에서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날마다 마지막 수업을 빼먹었다. - P36

나는 차라리 샤워를 생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저분한 것을 끔찍하게 싫어해 아침마다 샤워를 했다. - P36

"이름이 뭐예요?"
나는 7일인가 8일 째 되는 날에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중략).
그녀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이름이 뭐냐고요!"
"그건 왜 알려고 그러니?" - P38

"내 이름은 미하엘 베르크예요."
"미하엘, 미하엘, 미하엘." 그녀는 내 이름을 음미했다. "내꼬마의 이름은 미하엘이고, 대학생......."
"고등학생이에요."
"・・・・・・고등학생이고, 나이는, 열일곱 살?"
나는 그녀가 내게 덧붙여준 두 살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 P39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제대로나눈 대화였다.
"고등학교 1학년. 병이 나서 지난 몇 달 동안 공부를 거의 못했어요. 1학년을 마치려면 앞으로 멍청할 정도로 공부만 해야할 거예요. 난 지금 이 시간에 학교에 있어야 해요."
나는 그녀에게 내가 수업을 빼먹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 P40

 그녀는 이불을 홱 젖혔다. "당장 내 침대에서 나가그리고 공부를 하지 않으려면 다시는 찾아오지마. 네가 하는공부가 멍청하다고? 멍청하다고? 차표를 팔고 개찰하는 일이어떤 건지 알기나 하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벌거벗은 채로 부엌에 서서 갑자기차장이 되었다.  - P40

"미안해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게요.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앞으로 6주 뒤면 1학년이 끝나거든요. 한번 해볼게요. 하지만 당신을 다시 못 보게 된다면 해낼 수 없을 거예요. 나는......."
나는 처음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녀의 말이 분명 맞았다. - P41

09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왜 이리 슬픈 걸까? 잃어버린 행복때문일까? 나는 그 후로 몇 주 동안 행복했다. - P42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보인다. 나는 돌아가신 어느 부유한 친척 아저씨가 유품으로 남겨 나한테까지돌아온 우아한 양복 몇 벌을 입고 다녔다. - P43

바로 이것이 나를 슬프게 했을까? 당시 나의 가슴을 가득채웠던, 생에서 결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끌어냈던 그 열의와신념 때문인가? 지금도 나는 가끔 아이들과 십대들의 얼굴에서 그 당시의 나에게서와 똑같은 열의와 신념을 발견한다. - P44

"꼬마야, 넌 정말 별걸 다 알려고 드는구나?"
장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녀와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릴 생각은 아니었다.  - P45

그런 생각과 제안이 내게 전혀 수치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게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어머니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나는 독방을 얻으려고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 P46

지금의 내가 서른여섯 살 난 여자를 본다면 나는 그 여자를 젊다고 여길 것이다. - P46

책 읽어주는 일 때문이었다. 우리의 첫 대화가 있던 날 한나는 내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키케로의 연설문 그리고 물고기와 바다를 상대로 한 노인의 싸움에 대한 헤밍웨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P48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전반 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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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어떤 경우를 거쳐 태어난것일까? - P151

공준5 두 직선이 한 직선과 만날 때, 같은 쪽에 있는 내각의 합이 2직각보다 작으면 이들 두 직선을 연장할 때 2직각보다 작은 내각을 이루는 쪽에서 반드시 만난다. - P151

이 유클리드의 다섯 번째 공준을 알기 쉽게 바꾸어 표현한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플레이 페어(1748~1819)가 말한 다음의 평행선 공리이다.


[평행선 공리] 평면 위에서 주어진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주어진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하나밖에 없다. - P152

또, 다음의 공리도 유클리드의 제5번째 공준을 바꿔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동일 평면상에 있어서 그 사이의 거리가 항상 일정한 두 직선이 존재한다.
2. 닮음이지만, 합동이 아닌 한쌍의 삼각형이 존재한다.
3. 사각형에서, 세 개의 내각이 직각이라면 네 번째 내각도 직각이다.
4. 내각의 합이 2직각인 적어도 한개의 삼각형이 존재한다. - P153

한편, 유클리드 이후 2000년간이나 수학자들은 다른 공리와 공준을 사용하여 유클리드의 제5번째 공준을 증명하려고 노력해왔지만, 여기에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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