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실 사람들은 피터 키팅을 좋아했다. 키팅은 그들에게 마치 거기 오랫동안 근무했던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어느 집단에 들어가든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법을 알았다. 부드럽고 밝은 태도로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곳 분위기에 쉽게 젖어들었다. - P112

"피터, 나갈 때 이걸 제퍼스 양에게 주게. 내 스크랩북에 정리해두라고 해."
키팅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잡지를 공중으로 높이 던졌다가멋지게 받으며 입술을 오므리고 소리 없는 휘파람을 불었다. - P113

"잠깐." 키팅이 그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잠깐! 다른 방법이 있어. 내가 대신 마무리해줄게."
"응?"
"내가 야근을 하겠다고. 내가 대신 해주겠다고 걱정 마. 아무도 모를 테니까." - P114

"오, 이런, 피터!" 데이비스가 혹해서 한숨지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들통 나면 난 해고야. 자넨 아직 신입이라 이런 일을 못해."
"아무도 모를거라니까."
"피터, 난 쫓겨나면 안 돼. 안 된다고, 곧 일레인과 결혼할텐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
"아무 일 없을 거야." - P115

9시 30분에 그는 작업을 끝내 데이비스의 탁자에 똑바로올려놓고 사무실을 나섰다. (중략). 오늘 밤 그는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 P115

키팅은 일 년 전 보스턴에서 캐서린을 만났다. 캐서린은 홀어머니와 함께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캐서린은 못생기고 따분한 여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 P116

캐서린의 어머니는 작달막하고 온화한 여인으로 교사로 재직하다가 작년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캐서린은 뉴욕에 있는 삼촌 집에서 살게 되었다. 키팅은 캐서린이 보내온 편지에 즉시 답장을 보내주기도 하고, 몇 달씩 침묵을 지키기도했다. - P117

키팅은 캐서린을 향해 달려가며 그녀에게 간다고 미리 연락할 걸 그랬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 P118

"모자 이리 줘요. 그 의자 조심하고, 그리 튼튼하지 못하거든요. 거실에 더 좋은 의자들이 있어요. 들어와요." 캐서린이말했다.
거실은 수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있고 놀라울만큼 세련된 취향으로 꾸며져 있었다. - P119

"당신은 별로 안 변했네요. 좀 마른 것 같지만 그게 더 잘어울려요. 피터, 당신은 쉰 살이 되면 정말 매력적일 거예요."
캐서린이 말했다.
"그건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암시적으로."
"왜요? 오, 내가 지금의 당신은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오, 당신은 매력적이에요."
"내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 P120

"늘 아무 문제도 없었고 사실 그게 제일 이상하지. ·아무튼, 그동안 있었던 일을 너한테 얘기해주고 싶어. 중요한 거니까."
"피터, 나 정말 듣고 싶어요."
"알다시피 난 프랭컨 앤드 헤이어에서 일하는데……. 참,
넌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조차 모르지!" - P123

"그런 내가 경멸스럽지 않아?"
"아뇨. 당신이 원했던 거잖아요."
"그래, 내가 원했던 거지. 사실 그리 나쁘지도 않아. 뉴욕최고의 굉장한 회사니까. 나는 일을 잘 해내고 있고 프랭컨도날 무척 마음에 들어 하고 있어. 난 선두로 나아가고 있어. 결국에는 거기서 내가 원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야.
사실 오늘만 해도 어떤 친구 일을 대신 해줬는데 그는 자신이곧 쓸모없는 존재가 되리란 것도 모르고・・・・・・. 케이티 !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 P125

"삼촌 직업이 뭔데?"
"오, 아주 많은 일들을 해요. 너무 많아서 나도 다는 몰라요. 그 중 한 가지가 예술사를 가르치는 거예요. 삼촌은 교수라고 할 수 있어요." - P126

"일단 만나보면 알아요. 오, 삼촌도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하세요. 내가 당신 얘기를 했거든요. 삼촌은 당신을 T자(T-square: 건축 설계 때 쓰는 T 모양의 긴 자-옮긴이) 로미오‘ 라고불러요."
"오, 그래? 그렇단 말이지?" - P128

"우리 삼촌요."
"그래, 삼촌 이름이 뭐라고?" 키팅이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즈워스 투히요. 왜요?"
키팅은 손에 힘이 쭉 빠졌다. 그는 캐서린을 빤히 보았다. - P128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 널 통해서는・・・・・・・ 케이티, 넌 나라는 인간을 몰라. 난 사람들을 이용해먹는 인간이야. 난 너까지 이용하긴 싫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 너만은."
"날 어떻게 이용해요? 무슨 일인데요? 왜 그래요?"
"난 엘즈워스 투히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있다는 거야." 키팅이 거칠게 웃었다. "삼촌이 건축에 대해 좀안다고? 이 바보! 그는 건축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야. 아직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 (후략)." - P129

"그렇게 하기 싫으니까! 내 일, 내 직업, 나의 출세 방식은추하고 혐오스러우니까! 너에겐 그 더러운 때를 묻히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진정으로 가진 건 너뿐이야. 케이티, 넌 개입하지 마!"
"무엇에 개입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도 몰라!"
캐서린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일어서서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 P130

"오늘 일 끝나면 내 방으로 와." 헨리 캐머런이 말했다.
"예." 로크가 대답했다.
캐머런은 홱 돌아서서 제도실을 나갔다. 그게 한 달 동안그가 로크에게 건넨 가장 긴 말이었다. - P131

"심상치가 않아요." 젊은 제도사 루미스가 늙은 동료 심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노인네가 저 친구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아요. 하긴 그럴 만도 하죠. 저 친구, 오래 못가겠어요."
심슨은 늙고 무력했다. 그는 캐머런이 세 층짜리 사무실을 갖고 있을 때부터 버텨온 인물로 도무지 건축을 이해할 줄 몰랐다. - P132

로크가 이 셋방을 선택한 것은 주당 2달러 50센트에꼭대기 층 전체를 차지한 큰 방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창고로 썼던 이 방에는 천장이 없고 드러난 지붕 들보들사이로 물이 샜다. 하지만 두 벽에 창들이 줄지어 길게 나 있었다. - P132

"자넨 해고야." 캐머런이 말했다.
로크는 긴 방 중간쯤에서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두 팔은아래로 늘어뜨리고 한쪽 어깨를 올린 채 서 있었다.
"제가요?" 그가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 P133

"자네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야. 자네가 원하는 길을 가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로크, 소용없는 짓이네. 빨리 포기하는 게좋아."
(중략).
"어차피 이루지도 못할 이상을 위해 자네의 재능을 낭비하는 건 쓸모없는 짓이네. 사람들은 자네가 그 이상을 이루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을 걸세. (중략). 로크, 자네 재능을 팔게. 지금 당장 좀 늦긴 했지만 자넨 충분한 재능이 있어. 자네가 가진 재능이면 다른 데서 좋은 조건으로 데려갈 걸세. 그 재능을 그 사람들의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말일세. (후략)." - P134

"이보게, 자넨 절대 날 찾아와선 안 되는 거였어. 내가 자넬여기 붙잡아두는 건 죄악이야. 누군가 자네에게 여길 떠나라고 경고해야만 해. 난 자네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될 거야. 자네의 이상을 꺾지 않을 거야. 자네에게 상식을 가르쳐주지 않을거야. 오히려 자네 등을 떠밀 거야. 자네가 지금 가고 있는 길로 더 몰아붙일 거라고. 난 자네가 지금의 모습 그대로 남아모르겠어? 한있도록, 아니 더 심각해지도록 만들 거야. ……………(후략)." - P135

"로크, 노력해보게. 한 번만이라도 이성적으로 행동해봐.
(중략). 그들은 오찬 연설에서는 나를 비웃을지 몰라도나한테서 훔칠 건 다 훔치고 있고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는것도 알고 있어. 가이 프랭컨에게 소개장을 써주겠네. (중략). 처음엔 마음에 안 들겠지만 차차 적응이 될 거야.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내가 그리로 보내준 걸 고마워하게 될 걸세." - P136

"(전략). 자넨 자신의 일을 사랑해, 맙소사, 일을 사랑한다고! 그건 저주야. 모든 사람이 볼수 있는 이마에 찍힌 낙인이란 말일세. (후략)." - P136

로크는 벌떡 일어나 책상 위로 떨어지는 빛의 가두리를 등지고 섰다. "만일 제가 말년에 지금의 선생님처럼 된다면 전과분한 영광으로 생각할 겁니다."
"앉아!" 캐머런이 호통을 쳤다. "난 시위는 싫어하니까!"
로크는 자신이 서 있는 걸 보고 놀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어선 줄 몰랐습니다." - P137

"그래!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해야겠어. 자네가 들어야 하니까. 자네 앞날이 어떨지 알아야 하니까. 자넨 자신의 손을 보며 박살을 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거야. 자네가 기회만 주었다면 그 손이 해낼 수 있었던 일들이 많았는데 이제 그런기회는 다 물 건너간 것에 대해 그 손이 비웃는 것 같아서 말이야, (후략)." - P138

"그걸로는 부족한가?" 캐머런이 물었다. "좋아. 어느 날 자넨 정말이지 멋진 설계도를 그려내게 될 거야. 그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그런 설계도를 그려냈다는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근사한 설계도, 자넨 분명 그걸 해낼 거야. (후략)." - P140

"(전략). 누구든 그 설계도를 보자마자 돈을 대겠다고 달려들것이라고 굳게 믿고서 말이야. (중략). 건축주가 자네의 진심을 알면 그 건물을 짓게 해줄 것이기에 배를 갈라 속을 보여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까지 들 거야. 하지만건축주는 이렇게 대답할 거야. 정말 유감이지만 방금 가이프랭컨에게 건축을 맡겼다고. (후략)." - P140

"집으로 돌아가게. 요새 일을 너무 많이 했어. 힘든 하루가기다리고 있고." 캐머런은 시골 저택 설계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실력 좀 보려고 시킨 건데 아주 훌륭해. 하지만 당장 공사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진 못해. 다시 그려야해. 내일 내 의견을 말해주지." - P141

5

키팅은 프랭컨 앤드 헤이어에 몸담은 지 일 년 만에 가이프랭컨의 황태자라는 쑥덕거림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일개 제도사에 불과했지만 프랭컨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았다. - P142

키팅은 제도실에서는 팀 데이비스에게 집중했다. 도면 작업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껍데기에 불과했고 그의 건축가경력의 첫 단계를 이루는 알맹이는 팀 데이비스였다. - P143

데이비스는 자신의 일을 거의 전부 키팅에게 맡겼다. 처음에는 밤일만 은밀히 맡기다가 나중에는 낮일까지 공공연히맡겼다. 물론 데이비스는 그런 사실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 P143

처음에는 데이비스가 일을 맡아 와서 키팅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했으나, 나중에는 제도실장이 데이비스의 일을 아예 키팅에게 직접 가져왔다. - P143

데이비스는 그해 봄에 일레인과 결혼한 후 지각이 잦아졌다. 그는 키팅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피터, 자네 노인네랑 친하니까 가끔 내 말 좀 잘해줘, 응? 그래야 내가 실수를 좀 해도 눈감아줄 거 아냐. 젠장, 지금 같은 때 일이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정말 싫다!" - P144

(후략).
그 후로 키팅은 데이비스 생각이 날 때마다 훈훈한 쾌감을느꼈다. 그는 한 인간의 인생행로에 영향을 미쳤다. 한 길에서다른 길로 억지로 밀어냈다. 이제 그에게 팀 데이비스는 그저한 인간, 하나의 살아 있는 육체와 정신, 하나의 의식적인 정신에 지나지 않았다. - P145

키팅은 어머니에게 의무적으로 매주 한통씩 편지를 썼는데 그의 편지는 짤막하고 공손했다. 반면 키팅 부인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길고 자세하며 조언이 가득해서 아들이 끝까지 읽는 경우가 드물었다. - P146

"던롭 부인과의 점심식사 자리는 못 마련했지만 모레 모슨전시회에 함께 가기로 했어요. 이제 어쩌죠?" 키팅이 말했다.
그는 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소파 가장자리에 머리를얹고 있었다. 맨발이었고 가이 프랭컨의 헐렁한 연두색 파자마를 걸치고 있었다. - P147

스텐겔은 사귀기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지난 2년간 키팅은 그와 친해지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번번이 그의 얼음 같은 안경에 부딪혀 좌절했다. 키팅에 대한 스텐겔의 평은 제도실내에서 쑥덕거림으로만 돌았고, 스텐겔의 말을 인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런 사실을 감히 입에 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스텐겔만 그걸 당당히 말했다. - P149

스텐젤이 프랭컨 앤드 헤이어를 떠나 자기 사무실을 열고처음으로 따낸 일이 던롭의 집임을 알게 된 가이 프랭컨은 책상에 자를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러댔다.
"개자식! 망할 놈! 은혜도 모르는 놈."
"뭘 바라셨어요?" 키팅이 프랭컨의 책상 앞에 놓인 낮은 안락의자에 널브러져 앉아서 말했다. "그게 인생이죠." - P153

"클로드 스텐겔요. 부인께선 그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없겠지만 누군가 그를 발굴할 용기를 낸다면 들으시게 될 겁니다. 사실 일은 그가 다 하죠. 무대 뒤의 진짜 천재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서명은 프랭컨이 하고 공도 그가 다 챙기죠. 어디서든 그런 식입니다."
"하지만 왜 스텐젤 씨는 그걸 참고만 있는 거죠?" - P152

"그가 뭘 어쩌겠습니까? 아무도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데 세상 사람들이 어떤지 아십니까? 다져진 길로만 다니려고하죠. 같은 물건이라도 상표 하나만 보고 세 배는 비싼 값을치르죠. 용기, 던롭 부인, 그들은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략)." - P152

"당신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보기 드물 정도로 친절한 사람이에요. 당신이 나와 스텐겔 씨의 만남을 주선해줘도 회사에서 곤란한 입장이 되지 않는 게 확실한가요? 너무 무리한 부탁이라 입을 떼기도 어려웠는데 화도 안 내고 선뜻 응해줘서정말 고마워요. 당신은 이기심이라곤 없는 사람이에요. 당신의 입장에선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 P153

스텐겔이 프랭컨 앤드 헤이어를 떠나 자기 사무실을 열고처음으로 따낸 일이 던롭의 집임을 알게 된 가이 프랭컨은 책상에 자를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러댔다.
"개자식! 망할 놈! 은혜도 모르는 놈."
"뭘 바라셨어요?" 키팅이 프랭컨의 책상 앞에 놓인 낮은 안락의자에 널브러져 앉아서 말했다. "그게 인생이죠." - P153

프랭컨은 조용하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조촐한 축하연을 열어주며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몇년 안에 결실이 있을 거야, 피터. 다 자넨 착한 청년이고 난 자네가 좋아. 자넬 확실하게 밀어줄 거야. 이미 밀어주고 있지 않나? 자넨 성공할 거야, 피터. ...... 몇 년안에......."
키팅은 냉담하게 대꾸했다. "가이, 넥타이가 비뚤어졌어요.
그리고 조끼에 브랜디를 다 흘리고 있잖아요……………." - P154

. 하지만 키팅은 집이 땅 위에 우뚝 서는 모습이 아니라 땅 아래로 꺼지는 모습만 떠올랐다. 그것이 땅속 구덩이로, 자신의 마음속 구덩이로, 쓸데없이 데이비스와 스텐겔만 달그락거리고 있는 빈 공간으로 보였다.  - P155

키팅은 작업이 끝나자 불안한 눈빛으로 도면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집이라는 평을 받을까, 아니면그 반대일까? 그 두 가지 평이 다 맞는 듯했다. 그는 확신이 없었다. 확신을 얻어야 했다. - P156

그날 밤 로크의 집으로 찾아간 키팅은 첫 작품의 평면도들과 입면도를, 투시도를 펼쳐놓았다. 로크는 양팔을 넓게 벌려탁자 양쪽 가장자리를 꽉 잡고 서서 말없이 한참이나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 P156

"하워드, 날 좀 도와주면 좋겠어. 조금만 내 첫 작품이고회사에서의 내 위상에 큰 영향을 미칠 텐데 확신이 없어. 어떻게 생각해? 하워드, 날 좀 도와주겠나?" - P157

키팅은 도면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그곳을 나서며 로크에게 고마움의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갈 때는 상처받고 화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사흘을 매달려 로크의 스케치를 토대로 한 새 평면도들과 훨씬 단순해진 입면도를 그려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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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피터, 내 조언을 원한다면 말해주지. 나한테 물은 것 자체가 실수야. 그런 건 다른 사람에게 물어선 안 되지. 자신의 일에 관한 문제니까.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거야?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살 수 있지?"
"하워드, 자네가 감탄스러운 게 바로 그거야. 항상 알고 있다는 거." - P66

"어머니, 하워드와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요." 키팅은 그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키팅 부인은 아들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키팅이 어머니를 따라갔다. - P67

"아, 젠장, 자네의 미친 이상들은 나도 알아. 하지만 난 지금 내 상황에 대한 실제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이상은 잠시 접어두고......"
"내 조언을 원치 않는군." 로크가 말했다.
"아니, 원해! 그러니까 지금 묻고 있잖아!"
하지만 키팅은 관객이 하나라도 있는 한 로크와 단둘일 때와 같을 수가 없었다. - P68

키팅이 쏘아붙였다. "난 건축 일을 하고 싶은 거야. 그것에 대해 떠들고 싶은 게 아니고! 파리 미술학교는 커다란 명예를 주지. 자기들이 건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배관공 출신 어중이떠중이들 위에 설 수 있게 해주고. 그런데 한편으론 프랭컨과 함께 일할 기회가 주어졌어. 가이 프랭컨 자신이 스카우트를 제안했지!" - P69

"저어......." 키팅은 어머니를 지켜보며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제가 만약 미술학교에 간다면..…………."
"좋아. 미술학교에 가거라. 거긴 멋진 곳이지. 바다 건너에 있지만 말이다. 물론 네가 파리로 떠나면 프랭컨 씨는 다른 사람을 뽑겠지. 다들 그것에 대해 얘기할 거고. 프랭컨 씨가 해마다 스탠턴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을 뽑아간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너 말고 다른 학생이 뽑히면 모양새가 어떨까? 하기야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사람들이 뭐라고 ・・・・・・ 뭐라고 말할까요?" - P70

"어머니, 제가 프랭컨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이길 원하세요?"
"피터, 난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 네 마음대로 하렴."
키팅은 자신이 진짜로 어머니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어머니였고 그 사실은 모든 이에게 자동적으로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에 자신이 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은 당연히 사랑이리라 생각했다. 그는 어머니의 판단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 P71

"예, 물론 그렇죠, 어머니....... 하지만예, 그건 저도 알지만......하워드?"
그건 도와달라는 애원이었다. - P71

"피터, 그 두 가지 기회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아. 덜 나쁜 쪽을 선택해. 파리 미술학교에 가서 뭘 배우겠어? 르네상스 궁전이나 오페레타의 배경들에 대해서나 더 배우겠지. 그런 것들은 이미 자네가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걸 죽여버릴 거야. 자넨 이따금 제법 일을 잘해. 정말로 배우고 싶으면 일을 선택해, 프랭컨은 개자식에다 멍청이지만 그래도 거기 가면 건축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럼 그만큼 빨리 독립적으로 일할 준비를 할 수 있을 거야." - P72

"로크 군도 가끔 옳은 소리를 하는구나. 말하는 건 무식한트럭 운전수 같아도." 키팅 부인이 말했다. - P72

"하워드, 자넨 이제 어쩔 작정이야?"
"나?"
"내가 너무 생각 없이 굴었어. 계속 내 문제만 갖고 요란을떨었으니, 어머니 날 위해 그러는 거지만 어머니 때문에 돌겠어.
그 얘긴 집어치우고, 이제부터 어쩔 작정이야?"
"뉴욕으로 갈 거야."
"오, 멋진데, 일자리 구하러?" - P73

"이봐, 하워드, 자넬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아서그러는 거라면,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게. 프랭컨 씨와 일하게되면 연줄이……….."
"피터,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 이미 결정났으니까."
"그 사람은 뭐라는데?"
"누구?"
"캐머런." - P74

자기 방에서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지던 키팅은 문득뉴욕으로 전보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종일 한 번도 떠오르지 않던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절박하고 다급해져서 지금 당장 전보를 보내고 싶었다. - P75

3

피터 키팅은 뉴욕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뉴욕 사람들은 아주 근사하게 잘 차려입고 있었다.
그는 프랭컨 앤드 헤이어 사무실과 출근 첫날이 기다리고있는 5번가의 건물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 P77

‘프랭컨 앤드 헤이어 건축사무소‘
프랭컨 앤드 헤이어 건축사무소의 응접실은 멋지고 분위기 있는 식민지풍 저택의 무도실 같았다. - P78

고 인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누렇게 뜬 뺨과 이상하게 생긴 코, 움푹 들어간 턱에 난 사마귀, 탁자 모서리에 짓눌린 배가 보였다. 키팅은 그런 모습들이 좋았다. 그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는 더 잘 해낼 수 있었다.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피터 키팅에게는 동료가 필요했다. - P80

"노인네 것 치고는 꽤 괜찮군요." 키팅이 감탄하며 말했다.
"누구요?" 청년이 물었다.
"그야 프랭컨이죠." 키팅이 말했다.
"프랭컨은 무슨." 청년이 차분하게 말했다. "8년 동안 개집 하나 설계한 적 없는데." 그러고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어깨너머 유리문을 가리켰다. "저분이에요."
"뭐라고요?" 키팅이 돌아보며 물었다.
"저분이라고요. 스텐겔. 저분이 다 한 거예요." - P81

그는 키는 작고 받은 어찌나 긴지 발목까지 내려오는 것 같았다. 긴 소매 속에서 밧줄처럼 흔들리는 말에는 크고 효율적인 손이 달려 있었다. - P82

가이 프랭컨의 방은 반짝반짝 광을 낸 것 같았다. 아니, 광을 낸 게 아니라 니스칠을 해놓은 것 같았다. 아니, 니스칠이아니라 거울을 녹여 들이부은 것 같았다. - P82

가이 프랭컨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프랭컨의 얼굴은 누렇고 뺨이 늘어져 있었다. - P83

"오, 스텐겔." 그 이름을 말하는 프랭컨의 어조가 키팅의마음속 사진기에 찰칵 찍혀 나중에 써먹을 수 있도록 저장되었다. - P85

 프랭컨은 자조적으로 콧등을 찌푸렸다. "그런 만찬에선식사가 끝난 후 가벼운 연설을 하게 되지만 노골적이고 저속한 장사 얘긴 쏙 빼고 부동산업자의 사회적인 의무라든가 유능하고 인정받는 건축가를 선택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한 엄선된 의견 몇 가지만을 얘기하지. 마음에 남는 멋진 슬로건 같은 것들 말일세." - P85

프랭컨은 키팅에게 그 슬로건을 다시 말하게 한 다음 앞에놓인 여러 색깔의 새 연필들 중 하나를 골라 메모지에 적었다. 바늘처럼 날카롭게 깎인 그 연필들은 전혀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준비되어 있었다.
프랭컨이 메모지를 옆으로 밀어놓고 한숨짓더니 매끄러운 곱슬머리를 어루만지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좋아, 그걸 봐줘야겠지." - P86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된다면, 4층과 5층 사이의 카르투슈(cartouche: 두루마리 모양의 테두리 장식-옮긴이)들이 이런 인상적인 건물에는 너무 소박한 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돌림띠장식이 훨씬 더 어울릴 듯합니다."
"바로 그거야. 나도 그 점을 지적하고 싶었어. 돌림띠 장식하지만…………… 하지만, 이보게, 그럼 창호가 축소된다는 뜻인데, 안 그런가?" - P87

 그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토론을 벌일 때 쓰던어조에 망설임을 살짝 넣어서 말했다. "하지만 창문은 건물 정면의 위엄보단 덜 중요하죠." - P87

키팅이 천천히 대답했다. "전, 꼭 필요한 수정을 하는 것이스텐겔 씨가 설계한 대로 무조건 통과시키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키팅은 프랭컨이 말없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걸 보고,
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있는데 두 손은 힘없이 늘어져 있는걸 보고, 자신이 끔찍한 모험을 걸었고 결국 승리했음을 알 수있었다. - P88

"아, 키팅, 그런데 말일세, 내가 제안 하나 해도 될까? 우리끼리 얘기고 악의 없이 하는 말인데, 그 회색 작업 가운에는 푸른색보다 진홍색 넥타이가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자넨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맞습니다." 키팅이 선선히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내일은 진홍색 넥타이를 보시게 될 겁니다." - P89

다나 빌딩은 헨리 캐머런이 설계한 작품이었다.
1880년대에 뉴욕 건축가들은 업계 이인자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일인자 자리를 탐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인자자리는 헨리 캐머런의 것이었다. - P91

일단 그에게 건축을 맡기면 고객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 P91

그의 건물들은 처음에는 그저 조금 달랐을 뿐 사람들을 기겁하게 하지는 않았다. 이따금 깜짝 놀랄 만한 실험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고 헨리 캐머런과 입씨름을 벌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 P92

당시 서른아홉 살이었던 그는 땅딸막하고 꾀죄죄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잠도 끼니도 거르고 미친 듯 일에 매달렸다. 술은 거의 안 마셨지만 마셨다 하면 폭음을 했고, 고객들에게 상스러운 욕을 해댔으며, 상대가 앙심을 품으면 그걸 비웃고일부러 부채질하기까지 했다. - P93

헨리 캐머런은 콜럼버스 박람회장 건설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으며 그 박람회에 대해 인쇄 불가능한, 하지만 숙녀들과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 입으로는 옮길 수 있는 욕들을 해댔다. 그의 욕들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졌다. - P94

그가 오랜 세월 고군분투하며 달려와 드디어 목표에 다다른 순간, 이제야 비로소 그가 추구해온 진실을 구현하려는 순간, 마지막 장벽이 갑자기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이었다. - P94

하지만 고전주의에 탐닉하여 별안간 이천 년 전으로 돌아가 버린 나라에서는 그가 설 자리가 없었다. - P95

이에 대항해 헨리 캐머런이 제시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신념밖에 없었다. 인용할 사람도, 거창하게 할 말도 없었다. 그는단지 건물의 형태는 그 기능에 따라야 한다고, 건물의 구조가아름다움의 열쇠라고, 새로운 건축 방식은 새로운 형태를 요구한다고, 자신은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건물을 짓겠노라고만 말했다. - P95

사람들은 열정을 싫어한다.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열정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헨리 캐머런의 실수는 자신의 일을 사랑한 것이었다. - P95

캐머런은 사람들을 대할 줄 몰랐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원래 건축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자신의 인생에도 관심이 없는 인물이니까. 그는 설명이란 걸 할 줄 몰랐고 명령만 내릴 줄 알았다. 그는 사람들의 호감을 산 적이 없었으며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없었다. - P96

하워드 로크는 계단을 오르며 층계참마다 멈춰 서서 창문너머로 다나 빌딩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그는 헨리 캐머런의 사무실이 있는 6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 P97

"캐머런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로크가 말했다.
"그래요?" 노인이 도전도, 악의도, 의미도 없는 목소리로말했다. "무슨 일로요?"
"일자리 문제로요."
"무슨 일자리?"
"설계요." - P98

"캐머런 씨, 밖에 일자리를 구하러 온 친구가 있습니다."
그러자 전혀 나이 들지 않은 강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뭐야, 순 얼간이 같으니라고! 내쫓아버려.. ・잠깐! 들여보내!" - P98

"아니, 나를 보러 온 건가, 아니면 그림을 보러 왔나?" 이윽고 캐머런이 물었다.
로크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둘 다입니다." 로크가 말했다.
그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로크 앞에서 존재감을 잃었지만 캐머런은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길 속에서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 P100

"원하는 게 뭔가?" 캐머런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선생님 밑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로크가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밑에서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래?" 캐머런은 자신이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은 말에 대답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가 뭔데? 더 크고 훌륭한 데선 자넬 안 받아주나?" - P100

"처음 시작하는 겁니다."
"그럼 뭘 했나?"
"스탠턴에서 3학년까지 다녔습니다."
"응? 게을러서 졸업장도 못따신 분이신가?"
"퇴학당했습니다."
"대단해!" 캐머런은 주먹으로 책상을 쾅 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 P102

로크는 시키는 대로 했다. 캐머런이 굵은 손가락들로 설계도 뭉치를 두드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자넨 이것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나? 사실 이것들은 끔찍하네.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지. 죄악이야. 이보게." 그는 도면 하나를 로크의 얼굴에 들이댔다.

캐머런이 갑자기 말을 뚝 끊더니 설계도들을 옆으로 밀어놓고 그 위에 주먹을 얹으며 물었다.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한 게 언젠가?"
"열 살 때입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어. 자넨거짓말을 하고 있어." - P103

"(전략). 난 자넬 보고싶지 않아. 자네가 싫어. 자네 면상이 싫어. 자넨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자처럼 생겼어. 아주 건방지고 지나치게 자신만만해. 20년 전이었다면 아주 기쁜 마음으로 자네 면상에 주먹을 날렸을 거야. 내일 9시 정각까지 출근해."
"예." 로크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주급은 15달러야. 그것밖에 못 줘." - P105

4

"투히." 가이 프랭컨이 말했다. "엘즈워스 투히 참 괜찮은친구야, 안 그런가? 이걸 읽어보게, 피터." - P107

키팅은 기사를 다 읽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와!" 그가 경외감에 차서 말했다.
프랭컨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훌륭하지, 응? 다른 사람도 아닌 투히의 찬사를 받다니.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유명인사가 될 거야. 내 말 명심해. 유명인사가 될 거라고. (후략)." - P109

"사장님, 예술가를 해석하는 게 비평가의 일입니다. 예술가 자신도 그 해석을 통해 자신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깨달을 수있고요. 특히 씨는 사장님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의미에대해 얘기한 것일 뿐입니다."
"오." 프랭컨이 모호하게 말했다. "오, 그렇게 생각하나?" - P110

프랭컨은 미소 가득한 얼굴로 기사를 다시 읽었다. 키팅은 그가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 P110

키팅은 푹신한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의첫 달은 성공적이었다. 그 자신은 말로나 행동으로나 아무런암시도 한 적이 없는데도 가이 프랭컨이 무슨 일이든 키팅을 올려 보내는 걸 좋아한다는 인식이 사무실 전체에 퍼졌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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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언어를 풍부하게 해 주는
순우리말

순우리말은 우리말 중에서 한자어나 외래어가 아닌 고유어만을 이르는 말입니다. 실제로 많이 쓰이기도 하고 알아 두면 좋은 순우리말을 예문으로 알아보시죠. - P206

너나들이 <명사>
서로 너니 나니 하고 부르며 허물없이 말을 건넴. 또는 그런 사이.

도르리 <명사>
여러 사람이 음식을 차례로 돌려 가며 내어 함께 먹음. 또는 그런 일.

온새미로 <부사>
가르거나 쪼개지 않고 생긴 그대로.
(중략)
토렴 <명사>
밥이나 국수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며 데움.

불콰하다 <형용사>
얼굴빛이 술기운을 띠거나 혈기가 좋아 불그레하다.

대두리 <명사>
(1) 큰 다툼이나 야단.
(2) 일이 심각해진 국면

데면데면하다 <형용사>
(1)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친밀감이 없이 예사롭다.
(2) 성질이 꼼꼼하지 않아 행동이 신중하거나 조심스럽지 아니하다. - P209

주전부리 <명사>
때를 가리지 않고 군음식을 자꾸 먹음. 또는 그런 입버릇.
*어감이 약한 말은 ‘조잔부리‘입니다.

곰삭다 <동사>
(1) 옷 따위가 오래되어서 올이 삭고 질이 약해지다.
(2) 젓갈 따위가 오래되어서 푹 삭다.
(3) 두 사람의 사이가 스스럼없이 가까워지다.

(예) 철수는 어느덧 영희와 매우 곰삭은 사이가 되었다.

남사스럽다 <형용사>
남에게 놀림과 비웃음을 받을 듯하다.
* ‘남우세스럽다‘도 같은 뜻입니다. - P211

허우룩하다 <형용사>
마음이 텅 빈 것같이 허전하고 서운하다.

으깍 <명사>
서로 의견이 달라서 생기는 불화.

아랑곳하다 <동사>
일에 나서서 참견하거나 관심을 두다.

(중략).

미쁘다 <형용사>
믿음성이 있다. - P213

끌밋하다 <형용사>
(1) 모양이나 차림새 따위가 매우 깨끗하고 훤칠하다.
(2) 손끝이 여물다.

동뜨다 <형용사>
(1)다른 것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2) 평상시와는 다르다.
(예) 한밤중의 거리는 대낮과는 너무나 동뜬 분위기이다.
(3) 기간(동안) 길다(뜨다).
(예) 나는 기차 시간과 약속 시간이 동뜰까 봐 노심초사했다.

걸쩍대다 <동사>
활달하고 시원스럽게 행동하다.

너스레 <명사>
수다스럽게 떠벌려 늘어놓는 말이나 짓.
두남두다 <동사>
(1) 잘못을 두둔하다.
(2) 애착을 가지고 돌보다.
(예) 비록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지만 어찌 두남두지 않을 수있겠는가?

(중략).

오달지다 <형용사>
(1) 마음에 흡족하게 흐뭇하다.
(2) 허술한 데가 없이 알차다. - P215

가직하다 <형용사>
거리가 조금 가깝다.

그느르다 <동사>
(1) 돌보고 보살펴 주다.
(2) 흠이나 잘못을 덮어 주다.

도두보다 <동사>
실상보다 좋게 보다.

데데하다 <형용사>
변변하지 못하여 보잘것없다.

파리하다 <형용사>
몸이 마르고 낯빛이나 살색이 핏기가 전혀 없다.

(중략).

결곡하다<형용사>
얼굴 생김새나 마음씨가 깨끗하고 여무져서 빈틈이 없다. - P217

갈마보다 <동사>
양쪽을 번갈아 보다.


듬쑥하다 <형용사>
(1) 사람됨이 가볍지 아니하고 속이 깊다.
*유의어: 듬직하다.
(2) 옷, 그릇 따위가 조금 큰 듯하면서 꼭 맞다.
(예) 형이 입던 옷이 나에게 듬쑥하게 맞았다. - P218

몽치다 <동사>
(1) 괴로움, 슬픔, 울화 따위가 마음속에 맺히다.
(2) 한데 합쳐서 한 덩어리가 되다.
(예) 근육이 몽치다.
(3) 여럿이 굳게 단결하다.
(예) 기획조정실의 4개 부서가 똘똘 몽쳐서 경영 위기 극복에 앞장섰다. - P219

기껍다 <형용사>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쁘다.

바투 <부사>
(1) 시간이나 길이가 아주 짧게.
(2) 두 대상이나 물체의 사이가 썩 가깝게.
(예) 어머니는 아들에게 바투 다가가 두 손을 꼭 잡았다.

(중략).

벋나다 <동사>
(1) 끝이 바깥쪽으로 나다.
(2) 못된 길로 나가다.
(예) 김 선생님은 학생들이 벋나지 않도록 늘 신경을 많이 쓰신다.

윤슬 <명사>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 P221

젠체하다 <동사>
잘난 체하다.
*유의어: 거드럭거리다, 거들먹거리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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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피터 키팅



1

하워드 로크는 웃었다.
그는 알몸으로 절벽 끝에 서 있었다. 저 먼 아래에 호수가펼쳐져 있었다. 고요한 수면 위로 하늘을 향해 솟구치다가 멎은 화강암이 보였다. 물은 움직이지 않고 돌이 흐르는 듯했다. - P25

그는 하늘을 등진 채 몸을 뒤로 젖히고 있었다. 길고 곧은선들과 각들로 이루어진 몸이었고, 굴곡들은 평면들로 이어졌다. - P25

그는 아침에 있었던 일과 앞으로 닥칠 일들을 웃음으로 날려버렸다.
그는 앞날이 험난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질문들에 응해야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계획도 세워야 했다. - P26

‘이 화강암은 나를 위해 여기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드릴과 다이너마이트, 내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쪼개지고, 깨지고, 연마되어 새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 손이 형체를 부여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 P27

그는 낡은 데님 바지와 단추가 거의 다 떨어져 나간 반팔셔츠를 입고 샌들을 신었다. 그러고는 바위들 사이로 난 좁은길을 힘차게 내려가 초록 비탈을 지나 도로에 이르렀다.
그는 느긋하고 노련한 자세로 빠르게 걸었다. 햇살 아래서긴 도로를 걸어 내려갔다. - P27

스탠턴 시는 쓰레기장에서 시작되었다. 잿빛 쓰레기 더미가 풀밭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 P28

하워드 로크가 지나가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어떤 이들은 그가 지나간 뒤에도 불쑥 솟구치는 분노로 계속 노려봤다. - P28

로크는 키팅 부인을 보지도 못한 채 포치를 걸어갔다. 키팅부인이 그를 불러 세웠다.
"로크 군!"
"예?"
"로크 군, 정말 안됐어." 키팅 부인은 조신하게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말이야."
"무슨 일요?" 로크가 물었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거.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로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키팅 부인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 P30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은 다 자초한 것이지. 물론 이제 로크 군은 건축가란 직업을 포기해야만 하겠지, 안그래? 하지만 젊으니까 돈벌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 사무원으로 취직하건 장사를 하건 뭘 하건." - P30

"비서 말이, 학장님이 로크 군을 당장 만나고 싶다고, 연락받는 즉시 와달래."
"고맙습니다."
"이제 와서 무슨 일로 찾으실까?"
"모르죠."
로크는 "모르죠."라고 대답했다. 키팅 부인은 그 말이 "난전혀 관심이 없어요." 라는 뜻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P31

벽에 반짝이는 회반죽을 칠해서 밝은 느낌을 주었다. 키팅부인은 로크가 진짜로 이 방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원래 구비된 최소한의 가구 외에는 그림 한 점, 페넌트 하나 없었으며, 기분을 살려주는 인간적인 손길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로크는 자신의 옷가지와 도면들밖에 가져다놓지 않았는데, 옷들은 너무 적었고 도면은 너무 많았다. - P33

스케치 하나에 로크의 시선이 멈추었다. 계속 만족스럽지못하던 스케치였다. 학교 과제와는 별도로 스스로 연습 삼아한 설계로, 사실 그는 길을 걷다가 눈에 띄는 터를 발견하면 걸음을 멈추고 그 터에 세워져야 할 건물에 대해 생각했고, 그걸 스케치에 담는 경우가 많았다. - P34

로크는 화장실에서 나와 키팅 부인이 미처 상황을 파악할 사이도 없이 계단으로 향했다.
"로크 군!" 키팅 부인이 로크의 옷을 가리키며 헐떡거렸다.
"그 차림으로 가려는 건 아니지?"
"왜요?"
"학장님 만나러 가는 건데!" - P35

스탠턴 공대는 언덕 위에 우뚝 서 있었고, 총안(crenel: 총을쏘기 위해 성벽에 뚫어놓은 구멍-옮긴이)을 낸 담장이 마치 언덕 아래 펼쳐진 도시의 왕관처럼 보였다. 캠퍼스는 중앙에 고딕 대성당을 접목시켜서 마치 중세의 성채처럼 보였다. - P36

안으로 들어가니 고해소 같은 조각 장식이 된 책상 뒤에서 학장의 희미한 형체가 헤엄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학장은 땅딸막하고 살집 좋은 남자로 꼿꼿한 위엄이 퍼져가는 살을 막아내고 있었다.
"아, 그래, 로크, 어서 앉게." 학장이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로크는 자리에 앉았다. 학장은 깍지 낀 손을 배에 대고 로크의 애원을 기다렸다. 하지만 로크는 애원하지 않았다. 학장은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 P37

"알다시피 그게 문제였어. 난 지금 건축설계에 대한 자네의 태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네. 자넨 건축설계를 너무 등한시해왔어. 그런데도 공학 쪽 성적은 뛰어났지. 물론 미래 건축에서 구조공학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만, 그렇다고 극단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왜 건축의, 이른바 예술적이고 영감적인 측면을 등한시하고 무미건조하고 기술적이며 수학적인 과목들에만 집중하려는 건가? 자넨 토목 엔지니어가 아니라 건축가가 되려고 공부하는 걸세." - P38

학장은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꿈틀거렸다. 로크가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로크의 시선이 그에게 정중히 박혀있었다. 학장은 로크가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사실 그의 태도는 매우 바람직하고 정중한데도 왠지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38

"우린 자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네. 자넨 다른 과목들의성적은 아주 우수하니까. 하지만 이런 걸 제출하다니!" 학장은 앞에 펼쳐져 있는 종이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올해 마지막 과제로 르네상스 양식 빌라를 설계하라고 했더니 이걸제출했어. 이보게, 이건 정말이지 너무 지나쳐!" - P39

그 종이에는 유리와 콘크리트 건물의 설계도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귀퉁이에 날카롭고 각진 글씨로 ‘하워드 로크‘ 라고 서명되어 있었다.
"자넨 이러고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나?"
"아닙니다." - P40

"학장님께서 절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왜 제가 복교를 원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로크가 물었다.
"응?"
"전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더 배울 것이 없으니까요."
"정말 이해할 수 없군." 학장이 완고하게 말했다. - P41

"정 그러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건축가가 되고 싶지 고고학자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따라서 르네상스 빌라를 설계할 이유가 없습니다. 르네상스 빌라 같은 건 어차피 짓지도 않을 건데 왜 설계법을 배워야 합니까?" - P41

한 시간 전만 해도 학장은 로크와의 면담이 최대한 차분히 진행되길 바랐었다. 하지만 이제는 로크가 감정을 좀 표현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럼 장차 만일 건축가가 된다면 정말로 그런 식으로 건물을 짓겠다는 뜻인가?"
"예." - P42

"보십시오." 로크가 창문을 가리키며 차분하게 말했다. "캠퍼스와 시내가 보이십니까? 저 아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길을 걸어 다니는지 보이십니까? 전 저 사람들이 건축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들의 조상들의 건축에 대한 생각까지 고려해야 하는겁니까?"
"그건 우리의 신성한 전통이니까." - P43

로크가 벌떡 일어나서 책상 위의 긴자를 집어서 사진 쪽으로 걸어갔다. "이게 왜 형편없는 작품인지 말씀드릴까요?"
"그건 파르테논일세!" 학장이 말했다.
"예, 빌어먹을 파르테논이죠!"
로크는 자로 액자 유리를 두드렸다. - P44

"맙소사, 앉게. 그게 낫겠어. 미안하지만 그 자좀 내려놓겠나?……………. 고맙네.. 내 말 잘 듣게. 건축에서 현대적인 기술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네. 우린 과거의아름다움을 현대의 필요에 적용시키는 법을 배워야 하지. 과거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라네. 건축에선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발명된 것이 없네. 모름지기 창조란 개개인이 다른 모든 사람과 힘을 합치고 다수의 기준들에 종속되어 이루는 느리고 점진적이고 익명적이고 집단적인 과정이지." 학장이 말했다. - P46

"자네 몇살인가?" 학장이 물었다.
"스물두 살입니다." 로크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군." 학장이 안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도 나이가 들면 생각이 바뀔 걸세." 학장은 미소를보내며 말을 이었다. (후략). - P47

"헨리 캐머런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응? 자네 친구라도 되나?"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건물들을 봤습니다."
"자네, 그 건물들을 보고...………..? - P47

학장은 로크의 과거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로크의 부친은 오하이오 어딘가에서 연철공으로 일하다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로크의 입학 서류에는 가까운 친척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로크는 그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무관심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했다. "전 친척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있는지도 모르죠. 모르겠습니다." - P48

학장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보게, 로크. 자넨 고학으로 어렵게 공부해왔네. 그리고 이제 일 년만 있으면 졸업이네. 자네같은 처지의 학생이라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게 건축가라는직업의 현실적인 측면이라네. 건축가란 그 자체로 끝이 아닐세. 거대한 사회적 전체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지. 협동은 우리현대 사회, 특히 건축업의 핵심어네. 자네, 고객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예." 로크가 대답했다. - P49

"글쎄요, 전 고객에게 최고로 편안하고, 최고로 합리적이며, 최고로 아름다운 집을 지어주기를 열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객에게 제가 지닌 최고의 것을 팔고 그 최고의 것에대해 가르쳐줘야 하죠. 하지만 전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전 누군가에게 봉사하기 위해 건축을 할 의사는 없으니까요. 전 건축을 하기 위해 고객을 가질 작정입니다." - P50

자네와 얘기해보길 잘했네." 학장이 별안간 지나치게 큰소리로 선언했다. "양심의 가책을 덜게 됐으니까. 아침에 회의에서 나온 의견대로 자넨 건축업에 맞지 않네. 자넬 구제해보려고 애썼네만, 이제 나도 이사회의 결정에 동의하네. 자네같은 친구는 기를 살려줘선 안 돼. 위험한 인물이니까."
"누구에게요?" 로크가 물었다.
하지만 학장은 이제 면담이 끝났다는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크는 학장실을 나섰다. - P51

캠퍼스 건물 벽돌 벽의 잿빛 석회석 돌림띠에 늦은 오후의 이울기 직전의 햇살이 비치고 있는 광경을 본 것이다. 그 순간 로크는 사람들에 대해, 학장에 대해, 학장의 행동 뒤에 숨겨진 원칙에 대해 까맣게 잊었다. - P52

로크는 커다란 종이를 떠올렸고, 그 종이 위로 하늘의 빛을 강의실 안으로 온전히 끌어들일 길쭉한 유리창들이 달린 잿빛 석회석 벽이 솟았다. 그리고 종이 귀퉁이에는 ‘하워드로크‘라는 날카롭고 각진 서명이 새겨졌다. - P52

2

(전략).
가이 프랭컨은 과장된 동작으로 오른팔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가이 프랭컨이 언제든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쾌활하고 으스대는 태도였다. 대강당이박수갈채와 환호성으로 생기를 되찾았다. - P54

가이 프랭컨은 자신의 타이밍과 동작들을 분명하게 의식하며 연단에서 내려왔다. 그는 중키에 유감스럽게도 뚱뚱해질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육중하지는 않았다. - P55

강당 안에는 몸뚱이들과 얼굴들이 빽빽이 들어차서 한번흘낏 봐서는 어떤 얼굴이 어떤 몸의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마치 팔들과 어깨, 가슴들과 배들이 뒤섞인 흐늘흐늘 흔들리는 젤리 같았다. - P55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당연시하는,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것을 당연시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의 태도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는 스탠턴의 스타이자 학생회장이며 육상부 주장이고 가장 중요한 사교클럽 회원이자 교내 인기투표 1위의 주인공 피터 키팅이었다. - P56

피터 키팅은 청중이 자신의 졸업식을 보러왔다고 생각하며강당의 수용 인원이 몇 명쯤 될까 추정해보았다. 청중은 그의 우수한 성적을 알고 있었고, 오늘 그의 기록을 깰 적수는 없었다. 아, 물론 슐링커가 있었다. - P56

머리가 좀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다. 그건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순순히 그 느낌에 이끌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연단으로 올라갔다. 그는 늘씬하고 탄탄한 몸으로 연단에 서서 쏟아지는 박수갈채와 환호성에 파묻혔다. - P57

스탠턴 대학 총장이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스탠턴은 자넬 자랑스러워하게 될 걸세." 학장도 그와 악수하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 영광스러운미래 ・・ 영광스러운 미래. 영광스러운 미래......." 피터킨 교수는 악수를 하면서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 P58

그동안 내내 키팅의 눈은 가이 프랭컨이 자신과 악수하는모습을, 귀는 "이미 말했다시피, 아직 문은 열려 있네. 물론 젊은 자넨 장학금을 받았으니 결정을 내려야 하고이에게 파리 미술학교 졸업장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자네가 우리 회사에 와준다면 무척 기쁘겠고......" 라고 말하는 프랭컨의 그윽한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 P59

그러다 문득 하워드 로크를 떠올렸다. 키팅은 퍼뜩 떠오른 그 이름이 날카롭고 짜릿한 기쁨을 주는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 기쁨의 이유가 생각났는데 아침에 하워드로크가 퇴학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키팅은 조용히 자신을 질책하며 그 일에 대해 유감스러워하려는 결연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로크의 퇴학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은밀한 만족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건은 로크를 위험한 적수로 여긴 자신이 바보였음을 확실하게 입증했다. - P59

 그는 로크가 자신에게 아주 잘해주었다는 걸 상기했다.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도와주고.......아니, 문제에 부딪친 게 아니라 그게 설계도든 뭐든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던 것뿐이다. 빌어먹을! 로크가 어떻게 엉킨 실타래 풀듯 실 하나를 쓱 잡아당겨 설계도를 풀 수 있단 말인가. ・・・・・・ 또, 그럴 수 있다 한들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결국어떻게 되었나? 이제 그는 끝났다.‘ - P60

키팅은 슐링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슐링커가 그의 가장 소중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눈은 따뜻하게 빛났는데, 사실 키팅의 눈은 그 누구를 볼 때도 그렇게 빛났다. - P61

어머니는 아들을 건축가의 길로 밀어 넣었는데 언제,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키팅 자신도 몰랐다. 키팅은 몇 년동안 어린 시절의 꿈을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그리고 이제 그 기억을 떠올리자 마음이 아파지는 것도우스웠다. ‘그래, 오늘 밤은 그걸 기억하는, 그리고 영원히 잊는 밤이다‘ - P62

건축가는 화려한 성공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일단 정상에오르면 다시 실패할 수 있을까? 문득 헨리 캐머런이 떠올랐다. 20년 전 마천루들을 지었지만 지금은 어느 부둣가의 초라한 사무실에서 술에 빠져 사는 늙은이. 키팅은 몸서리를 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 P62

집에 가까이 가자 포치 계단에 하워드 로크가 앉아 있는 게보였다. 로크는 뒤로 비스듬히 기대어 양 팔꿈치로 몸을 받치고 긴 다리를 쭉 뻗고서 앉아 있었다. 포치 기둥들을 타고 뻗어 올라간 나팔꽃 덩굴이 집과 길모퉁이 가로등 불빛 사이의 커튼처럼 보였다. - P63

"이봐, 하워드, 자네 일 말이야,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21]......."
로크가 고개를 홱 젖히고 그를 올려다봤다.
"신경 쓸 것 없어." 로크가 말했다.
"저어....하워드, 자네와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자네에게조언을 구하고 싶어. 앉아도 될까?" - P64

키팅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솔직한 마음을 꺼내 보였다.
"사실 난 종종 자네가 미쳤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난 자네가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걸, 건축에 대해서 말이야, 알지. 자넨 저 멍청이들이 죽었다 깨나도 모르는 것들을 알고 있어. 그리고 자넨 건축에 대해 저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뜨거운 애정을 품고 있지." - P65

"글쎄, 내가 자네한테 왜 이런 얘길 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하워드, 사실 이런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난 학장님보다는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어. 결국 학장님 의견에 따르겠지만 내겐 자네 의견이 더 큰 의미가 있어.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자네한테 왜 이런 소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로크는 키팅을 향해 돌아앉아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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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예전보다 위상이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과학자는 10위 안에 들어가는 청소년 희망 직업이자 유망 직종으로 인식되고있다. - P6

정리하면 대중은 과학자를 이렇게 생각한다.

뭘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하는 별난 사람들

이것은 중세 사람들이 연금술사나 마법사에 대해 갖고있던 이미지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 P7

한국 사회에서는 대학교 입학을 인생의 가장 큰 관문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를 통과하기 위한 입시전략이 수없이 논의된다. 하지만 과학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대학 입학 과정이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보일 만큼 큰 난관을 거쳐야 한다. - P8

 특히 한국과 같이 근대 과학 발전을 이끌어 오기보다는 주변부에서 구경꾼으로 있었던 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나는 이렇게 과학자가 어떤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사회와 경제에 상당히 중요한 일을하는 사람‘ 혹은 ‘미래 전망이 좋아 보이므로 우리 자식이 가졌으면 하는 직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후략). - P9

끝으로 이 책을 쓰면서 도움을 주신 분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중략). 이러한 ‘걸어보지 않은 길‘에 대한 이야기를 책의 원고를 읽고 의견을 주어 보완하는 데 도움을 준 박대인, 안준용, SJ, 이수민 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책의 기획과정과편집과정에서 많은 애를 쓴 도서출판 이김 편집부가 아니었으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2018년 8월
남궁석 - P10

CHAPTER 00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략). 과학자라는 직업에 관심이 있는 사회인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직업 과학자가 아니거나 직업 과학자로서의 훈련 과정에 들어서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 중에 ‘위인혹은 괴짜 같이 사회 전반에 퍼진 상투적 이미지가 아닌 과학자에 대한 현실적 이해를 가진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듯하다. - P12

과학자의 꿈과 현실


‘과학자‘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 P12

상상한 대로 실험 테이블에 시약병과 실험 기기들이 놓여 있긴 하다.¹ 그러나 왜인지 보통 회사 사무실과 다르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1 연구에 따라 흔히 상상하는 ‘실험실‘ 없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이용해 연구를 수행하는 곳도 많다. - P13

예상과는 달리 이렇게 연구실에서 일하는 과학자의 겉모습은 일반적인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과 다르지 않다. - P13

.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당신은과학자가 뭘 하는지 모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간단히 파악될 일이었다면 이 책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책에서는 "21세기 과학자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 P14

과학자가 진짜로 하는 일: 세상의 지식 발굴


(전략).

과학은 삼라만상에 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획득하는 일이며, 좁은 의미로 국한한다면 물질세계를 연구하는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학자(scientist)란, 현재까지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식을 발굴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P15

우리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치면서 여러 과학교과를 통해 과학지식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과학지식을 배우는 것은 과학자가 하는 일과 동일하지 않다.  - P15

즉, 과학연구의 본질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미지의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이며, 연구의 중요성은 이렇게 획득된 새로운 지식의 양과 직접적으로 비례하여평가된다. - P16

과학자와 공학자

한편 과학자와 공학자(engineer)의 관계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기 위해 과학의 정의를 확인한 것처럼, 공학자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도 일단 학문분야로서 공학(engineering)의 정의를 이해해야 한다.⁴ 

4 engineer라는 단어에는 ‘manipulate‘, 즉 ‘조작하다‘로 번역할 수 있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engineering은 학문의 하나인 공학을 의미한다. - P16

자연계에 현재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는것이 과학의 핵심이라면 공학은 새롭게 찾아낸 지식을 응용하여 세상에 없는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P17

현대 사회에서는 한 명의 연구자가 과학자인 동시에 공학자로서 존재하는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과학과 공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론(scientific methods)‘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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