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본문에서 인용되거나 간접적으로 참조된 성경 구절은 기본적으로 개역개정 역본을 따른다. 그러나 조강현이 극을 이끌어나가는 초점자로 기능하는 구간에서는 개역개정 대신 공동번역 역본이 사용되었다. 각종 고유명사에 대한 표기법 차이 역시 위의 기준을따르나(가령 조강현의 내적 독백에서는 예레미야의 아버지가 ‘힐기야‘가 아닌 ‘힐키야‘로 칭해진다), 성경과 무관한 고유명사(텔레비전, 포클레인 등)의 경우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른다. 작중인물들의 나이 표기는 만 나이를 따른다.

#1

탕아
The prodigal


"요새 어쩌고 사냐?"
김 형이 그렇게 물었을 때, 우혁은 반가움과 반감을 동시에느꼈다. 가족에게도 변변한 충고를 듣지 못한 세월이 여러 해였고 그는 이제 서른넷이었다. 직업은 없었다. 아직 만회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돌아오지 못할 탕아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두려워졌다.
"말도 마세요, 대책 없죠."
"너 좆같이 사는 거 아니까 사정을 자세히 읊어보라고." - P11

"저번에 통화로 말한 게 다예요. 여기저기 다니다가 본가돌아온 지 세 달쯤 됐어요. 기운이 영 없어서 쉬고 있는데,
되는대로 일자리 구하고 개인 회생 알아보려고요. 은행 빚은다 합쳐서 얼마인지 기억이 잘 안 나긴 하는데. 일단 휴대폰명의부터 살린 다음, 새마을금고 가서 통장 새로 만들어야해요. 원래 계좌는 싹 압류 들어와서 묶였거든요."
"지금까지 연락은 어떻게 했어?"
"방에 누워만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말 걸어봤죠."
"아니, 자기 명의 휴대폰도 없는 놈이 연락을 어떻게 했냐고, 방법을 묻잖아." - P12

"엄마가 회선 뚫어줬죠, 뭐....... 소액결제깡 하지 말라고 선불폰으로......"
"나한테도 돈 빌리려고 나온 거 아니지? 준희가 너 이름 듣고 펄펄 뛰더라. 한 삼백 떼였다던데." - P13

"형이 그렇게 말하면 화날 것 같은데."
우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부모님 대하기 구스러운 것과별개로 제삼자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을 건 뭐란 말인가. 그것도 오래간만에 얼굴 한번 보자며 불러놓고. 게다가 그가이렇게 된 데에는 김 형의 지분이 상당했다. - P13

"그러니까 그 또라이 기질이라는 게…………. 됐다. 하던 이야기나 하자."
김형의 사정은 이랬다. 운영 중인 학원이 발 넓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탄 덕분에 한 명을 더 뽑아야 한다는거였다. 다만 일손이 달리는 분야가 다종다양한 까닭에, 무엇이든 시키면 할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하다고 했다.
"짧게 줄이면 총무 겸 조교 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거 아니에요?"
"야, 총무는 절대 아니지. 너한테 돈 만지는 일 시킬 생각없다." - P14

"과외 다 끊고 게임만 한 지 몇 년 됐죠. 국어 문항 납품이야 부업인데, 4문항 한 세트 작업해봐야 기껏 몇십 받아요. 노트북 전당포에 넘기고 통장까지 막힌 다음에는 일 자체를못 하는 중이고 사교육 판은 거의 모른다 봐야죠. 2, 3년만쉬고 와도 판세가 확 바뀌어 있는데……………."
"하여간 전임강사 시키려는 거 아니야. 조교 업무랑 행정처리 주로 하면서 겸사겸사 땜빵만 맡으면 돼. 강사랑 성향안 맞으니까 다른 학원 알아보겠습니다 하는 학생들 있잖아. 그런 애들 서넛 모아서 수업 진행하고, 그게 또 적성에 맞으면 타임 수 늘리고, 너도 제대로 된 회사 취직하긴 글러먹었는데 세후 이백오십 받으면서 시작하면 노난 거 아니냐." - P15

"어차피 데카르트든 플라톤이든 고등학생 상대로 떠들 정도로는 알고 있지 않냐. 인문논술이 수학 같은 과목도 아니고, 머리 잘 굴러가고 글 잘 쓰면 끝이지. 정 안 되면 뒷방에서 첨삭하고 잡무나 맡아."
"아버지가 접때 나더러 그러던데요. 눈빛이 다 죽은 게 귀신 같다고."
"아니야, 너 놀고먹느라 때깔이 괜찮아. 딕션도 멀쩡하고.
면도한 다음 피부 관리 가볍게 하고, 옷만 사람처럼 입으면돼. 도박도 끊었다면서." - P16

"지금부터 준비 시작해서, 내달 초에 시범강의 한번 해라.
일단 바로 삼십 보내줄 테니까 머리 자르고 옷 사입어 깔끔하게 너 나이가 얼마인데 그 이상한 반팔 후드 티에 청바지......."
"현금 아니면 못 받아요. 그냥 엄마 카드 쓸게요." - P17

(전략). 학계의 최신 견해니, 발산적 사고니 하는 말로 치장했지만 경쟁자를 견제하려는 속내가 뻔히 보였다. 한편 국어 실전 모의고사 출제 이력이 거슬리는지 국어 강사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나머지 한 명과 학부모 출신 상담실장이 뜨뜻미지근한 지지를 보내준 덕분에 낙하산은 무탈히 착륙했다. - P18

물론 시범강의는 10라운드짜리 경기의 첫 판에 불과했다. 직설적으로 대화가 오가진 않았으나 정체성을 확실히 하라는 요구가 살갗으로 느껴졌다. 경쟁자인지, 머슴인지. 학원장의 학교 후배라는 포지션마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 P18

무엇보다도 계약서를 잘못 썼다. 이백오십을 모두 월급으로 퉁친 탓에, 스페어로 맡은 수강생이 늘어나더라도 득 될게 없었던 것이다. 역할마저 애매모호한지라 강사들이 떠맡기는 잡무를 거절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김 형이 선심 쓰듯 성과급을 들먹이긴 했으나 속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진퇴양난이었다. - P19

우혁은 일단 준희에게 100만 원을 송금하면서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날려버릴 돈의 총액을 한껏 낮추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난 김에 다른 친구들에게도자잘한 빚을 갚았더니 딱 30만 원이 남았다. 운만 따르면 열배, 스무 배도 될 수 있는 금액이었다. - P20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다음 가까스로 출근했다. 사무실에는 서면 첨삭을 기다리는 논술 답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논제는 작년도 Y대학교 논술고사 기출 문항을 변형한 것으로, 세 개의 국어 제시문과 한 개의 영어 제시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P20

첨삭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프리셀 게임을 최고 난도로 시작했다. 30분이 걸려 한 판을 겨우 깼더니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 아니, 최 선생. 직장에서 게임을 하면 돼, 안
"돼?"
"프리셀인데요."
우혁은 심드렁하니 내뱉었다. 김 형은 상체를 그려 우혁의 목을 조르듯 끌어안더니 귓전에 속삭였다.
"프리셀이든 뭐든 카드 가지고 노는 꼴 한 번만 더 걸려봐가만 안 둬"
"다음 달 보너스 제대로 안 챙겨주면 바로 관두고 필리핀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 P21

김형은 점심시간마다 우혁을 끌고 다녔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일단은 여름방학 시즌인지라 점심시간을 끼고 오전타임에 강의하는 강사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우혁은 목요일 오후 타임 강의를 빼면 계속 사무실에 있었으므로,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기 편했다. 물론 특별 관리를 하겠다는 의도 역시 있을 것이다. - P22

"보너스 안 줄 거면 강사들 단도리나 쳐요. 내가 자기네 파이 먹으러 들어온 줄 아는 것 같아."
"페이가 비율제라서 그렇지, 뭐. 담당 학생 하나 줄면 이삼십이 턱턱 까이니까. 나도 계속 달래고는 있는데 어쩌겠냐."
"그냥 사정 오픈하지 그래요. 재활 훈련하러 온 거지 정규강의 가져갈 일 없다고. 난 오픈해도 괜찮은데." - P22

우혁은 마음에 담아뒀던 불만을 차례대로 털어놓았다. 논술을 맡은 박 선생은 초면에 그렇게나 시비를 걸어놓고 이제는 수업 연구 초안을 떠넘기다시피 한다는 것, 다른 강사들도 이것저것 시키는데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다 보니 일거리가 한없이 쌓인다는 것, 집에서 준비해 오는 것까지 합하면 근무 시간이 하루에 서너 시간쯤 되리라는 것. - P23

"잠 부족한 게 눈에 보여서 그런다. 어제는 월급도 들어갔고."
"어젯밤에 재발할 뻔한 건 사실인데, 참느라 못 잔 거예요,
참느라. 나도 노력 많이 해요."
김형은 상체를 슬쩍 뒤로 빼더니 우혁을 꼼꼼히 뜯어봤다. 의심스러운 피의자를 취조하는 형사 같았다. 그는 김형의 자세가 바로 잡히고서야 겨우 안심했다. - P24

"서울대 나온 양반이 하는 정신과인데, 가서 잠이 안 온다고하면 졸피뎀이랑 자낙스에 다른 거 몇 개 섞어서 줘 기다리는 시간만 빼면 처방전 받아서 나오는 데에 30초쯤 걸릴걸."
"진짜 자판기네."
김 형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병원에 얽힌 가십을 주절거렸다. (중략). 뒷소문에 따르면 입시 컨설턴트 몇몇과 친하게 지내면서, ‘공부 잘하는 약‘을 찾아다니는 학부모들을 병원으로 끌어들인다고도 했다. - P25

여기는 병원과 약국이 학원만큼이나 많은 이상한 동네였다. 하나의 외계 행성이었다. 역삼중학교에서 시작되어 휘문고등학교로 끝나는 선분을 지름 삼는 원이 지층과 맨틀을이루고, 그 안쪽 은마니 래미안 대치팰리스니 하는 아파트에서 쏟아지는 인간들의 에너지가 내핵과 같은 열기로 끓어오르는 곳. - P25

"그러면 생명이라는 것도 사실은 종류가 다른 게 맞죠? 국어에서 100점을 맞아도 수학은 9등급일 수 있는 것처럼, 어느 관점에서는 살아 있지만 달리 보면 아예 속에서부터 죽어있을 수 있다거나 하는……………."
"그것까지도 너무 당연한 소리지." - P27

 2415번 초록색 지선 버스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정지한 자동차들의 패턴은 심리 치료용 만다라 그림을 연상시켰다. 으스러지듯 꺾여 올라간 자동차 보닛이 곧시작될 공연을 예고하듯 번쩍거렸고,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창 파편들 역시 햇빛을 이리저리 난반사함으로써 조명을 더했다.
"야, 아까 그 소리가 이거였구나. 난리 났다."
"난리 났네요."
김형이 헛웃음 섞인 감탄을 터뜨리자 우혁도 따라 했다.
"이게 다 얼마짜리 사고나 기본이 아우디에 벤츠, 제네시스……………. 저기 마세라티도 있네."
"여기 스쿨존 아니에요? 일부러 갖다 박아도 이러긴 어렵겠다." - P28

학원가 한복판에 펼쳐진 다중 추돌 사고 현장은 잘못 편집된 영화의 한 대목처럼 맥락이 결여되어 있었다. 하늘에서거대한 손이 내려와 망가진 자동차들을 집어 올리고 교통 흐름을 복구하더라도 그러려니 할 듯했다. - P29

하여간 이 지긋지긋한 감각. 지긋지긋하도록 반가운 감각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한 심호흡은 언제부터인가 헐떡임으로 변해 있었다. 어깨를 떨던 우혁은 단단한 게 발치를 건드리는 것을 깨닫고 아래를 보았다. 뜯겨 나온 전조등덩어리가 참수당한 머리통처럼 나동그라져 있었다. 이것마저 반가웠다. - P30

"먼저 가서 아무거나 시켜줘요. 화장실 좀 다녀오게..."
우혁은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학원 빌딩으로 뛰어 들어갔다. 막 입구에서 나오던 학생들이 흠칫 놀라 물러섰고, 숨길마음도 없는 듯 종알거렸다. 저 사람 웃는 거 이상하지 않아? 못 들은 척 비상계단 문을 열고 있으려니 진득한 시선이 등줄기를 쿡쿡 찔러댔다. - P31

우혁은 계곡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정했다.
그제야 몸의 떨림이 멎으며 현실이 전류처럼 등줄기를 휩쓸었다. 이곳이 서울의 중심부이자,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학원가이자 자신의 일터라는 현실. 김 형은 중국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중이고, 아까 마주쳤던 학생들은 형의 학원에다녔고, 사무실로 돌아가면 첨삭을 기다리는 논술 답지들이 있을 터였다. 주제가 뭐였더라? 자기실현적 예언? 이 모든 우연이 공교롭게만 느껴졌으며 이래서야 멀쩡히 살기 어렵겠다는 건조한 판단마저 미래를 견인하는 듯했다. 흔적을 치운 뒤 손을 씻고 있으려니 눈알이 뜨뜻해졌다 - P33

광양 옥룡면에는 호남정맥 제일봉인 백운산이 있으며 거기에서 뻗어 나오는 물줄기 중 가장 길고 굵은 것은 광양만에까지 닿는다. (중략). 즉 땅도 물도 인간의 소유가 아니지만 계곡은 아케이드형 상가에 딸린 캠핑장처럼 쓰인다. - P33

 물밑 바위틈에 어색하게 끼어든 수박도, 찌그러진 사이다 캔도, 고기 굽는 연기도, 소란스러운 웃음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나면 여기에는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을까. - P34

30분가량 걸어 도착한 계곡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지금여기의 바윗돌과 저 위의 구름이, 땅과 물과 하늘이 하나로 접붙어 내달렸다. 계곡 전체가 발을 구르며 허공을 향해 서서 가고 있었다. - P34

열다섯 살의 소년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로 상류를향해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가 워낙 거센 탓에 우비를 걸쳤는데도 바짓단 밑으로 물이 줄줄 샜다. 가끔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텅 빈계곡은 매구간이 새롭게 느껴졌으며 모든 잎사귀와 뿌리줄기들은 눈가에 제각기 다른 빛을 남겼다. - P35

우혁은 아직도,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최후의 한 발짝을내디뎠는지 헤아려보곤 했다.
그 동작은 건방진 장난일 수 있었다. 괜히 아무 아파트에나 들어가서 낯선 집의 벨을 누른 후 층계참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듯이, 왼발을 불쑥 내밀었다가 되돌림으로써 일상의 견고함을 재확인하려던 것일지도 몰랐다.  - P36

(전략).
이내 물줄기가 피를 닦아내며 눈앞을 밝혀주었다. 굵기가동전만 한 나뭇가지가 보였다. 한쪽 끝은 바위틈에, 다른 쪽끝은 우혁의 시야 한쪽 가장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물줄기가계속 쏟아져 내려왔지만 이상하게도 시야는 같은 자리에 고정된 느낌이었다. 운 좋게 널찍한 바위에 떨어진 걸까?  - P37

 긴 머리카락을 등줄기까지 길러 묶은 소년이었다. 눈 밑이 깊숙이 들어간 데다 뺨도 홀쭉한 탓에 해를 등지고 서면 얼굴에 그림자가 강하게 지는 타입이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눈동자만큼은 선명한 빛을 발했다. 티셔츠와 반바지는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고 한쪽 손에 들린 손도끼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마른 몸에, 키는 170센티미터도 되지 않을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다부진 느낌이었다.  - P38

"야, 도망칠 필요 없으니 가만있어. 몇 가지만 묻고 보내줄거야."
소년은 호구조사라도 하듯 우혁의 신상명세를 거듭 물었다. 나이는 몇 살인지, 여기에 사는지 잠깐 놀러 왔는지, 놀러왔다면 친척 집이 근처에 있는지, 근처에 있다면 어디인지, 서울로 올라가는 건 언제인지, 어쩌다가 계곡물에 휘말렸는지, 혹시 삶에 고민이 많았는지, 죽으려 했는데 괜히 살아남았다 싶어서 후회되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 계획인지. - P39

"다시 볼 생각 말아. 네가 얼씬거리고 있으면 가까이도 안갈 테니."
"여기 근처에 살아? 아니면 산에서?"
"네가 알 문제 아니야."
"나는 아까…………… 죽었다가 살아난 게 맞지?"
"알아서 생각해."
"고마워." - P40

 소년은 짧게 침묵하더니고개를 홱 돌려 우혁을 바라보았다.
"너 이거 확실히 알아둬. 이번에는 변덕 한번 부려준 거야. 내가 먹고 자는 곳에서 어린놈이 죽으면 재수 없어서. 다음에는 일부러 와서 나자빠져도 도울 일 없어." - P40

"만약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넌 정말로 죽어. 약속해."
산을 완전히 내려왔을 때 소년은 그렇게 말했고 우혁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대체로 지켜졌다. 그는 마을 푯돌 앞에 목숨값을 바친 후 그대로 물러났고, 지금까지 어디 있었느냐며 호들갑을 떠는 가족들 앞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 P41

충족되지 않는 갈망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이따금소년을 향한 고마움이 기우뚱하며 원망으로 변하려 했다. 염치 있는 인간이 되려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 P42

도박중독자라서?
사실은 도박이 아니라 스릴에 중독되어 있어서?
죽음을 경험한 후 되살아나서?
평생 갈 경험을 남들과 나눌 수 없어서?
소년이 말하기를, 남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우혁은 죽으리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허다했기 때문에 다시 죽는 상황쯤은 큰일도 아닌 듯 느껴졌다.  - P43

"그런데 너 게이는 아니지?"
김형은 그가 게이는 아니니까 괜찮다고 믿으려는 것처럼,
혹은 차라리 커밍아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것처럼 물었다. (중략). 우혁은 자신이 신입생 시절 철학 동아리와 퀴어 동아리 중에서 고민했음을 알려줄까 고민했다. 당시는 김 형에게 도박을 배우기 전이었으므로, 소년을 떠올리며 자위하는 것이 성애적 충동 때문이라 믿을 수 있었다. - P43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게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사안은아니죠, 아무래도."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며칠이 지나 김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인사말도 없이 본론이 시작됐다.
"아까 자는데 꿈에 네가 나오더라."
"나와서 뭐 했는데요?"
"날 전기톱으로 토막 내서 죽였어. 아무 이유도 없이, 얌전히 있다가 그냥"
"그런 거 안 해요. 할 생각 전혀 없어요." - P44

"형, 진짜 솔직히 말해서, 나한테 전기톱이 있어서 누군가를 잘라야 한다면...... 내 왼쪽 다리를 자르고 싶어요. 쓸려 내려갔을 때 그 부분은 심하게 다치지 않았던 것 같거든...... 그래서, 그것만 한 번 더 잘라내면 완전히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다른 사람한테는 정말 아무 관심도 없어."
중얼거림은 대답으로 시작되었지만 정신 차려보니 혼잣말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혁은 후회했다. - P45

"다 식는다. 밥이나 먹어라."
점심 메뉴는 평범했고 뉴스는 대체로 나빴다. 타국의 전쟁과, 한국이 참전할 수도 있는 전쟁과 정치적 내전에 휘말린 대국(大國)들의 소식이 죽 이어지더니 비극의 규모가 확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비극이었다. 가계 부채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고도 했고 어느 역 앞에서 칼부림 사건이 났다고도 했다. - P46

부활을 위해 산 제물을 바치려는 사이비 종교 이야기였다. 제목은 ‘교주를 죽여라. 새천년파라 불리는 집단이었는데, 생수를 1000만 원에 팔아먹거나 교주를 위해 환락궁을차리는 부류와 비교하면 행태가 묘했다. 상업화된 음악 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익스트림 메탈 뮤지션이라고나  할까. - P47

방송 화면에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따온 구절이 나타나더니 새천년파 출신 폭로자와의 인터뷰가 뒤이었다. 새천년파는 그들의 교주가 재림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에 구원이 한정 없이 미뤄지는 중이라고 믿었다. - P47

우혁은 PD들의 기획력에 내심 감탄했고,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탐사 보도 방송을 상상했다. 그러자 김이 확 새서 밥이나 먹기로 했다. 주인장도 방송 내용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채널을 되돌렸다. 마뜩잖은 식사를 마친 후, 우혁은 학원 교무실 한구석의 간이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 P48

방송사 홈페이지에서 <교주를 죽여라>를 잠깐 보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온라인 카지노 사이트를찾아 들어갔다. 기분 나쁜 일과 그냥 나쁜 일이 있다면, 차라리 후자를 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돈을 걸고 잃는 일에조차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점심으로 최고급 스테이크를 만끽한 사람이 저녁의 콘비프 통조림에 만족하겠느냔 말이다 - P49

우혁은 엉뚱한 생각에 실실 웃었다.
그는 신비 체험을 한 것치고는 강경한 유물론자이자 실증주의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부활을 겪어본 사람에게 세간의 이야기들은 엉터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 P50

 그는 곧장 교무실로 들어가는 대신 학원 복도를 멍하니 배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묵상이 길어지기도 전에 불청객이 불쑥 나타났다. 경찰복을 차려입은 2인조가 유리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욕하며 문을 열었다.
"여기 강사분 되십니까?"
"강사는 아니고 강사 비슷한 건데요."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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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말썽인 두 천재_벨 부등식의 간단한 수학 해석


다음 이야기는 사례로 든 꾸민 이야기임을 먼저 밝힌다.
100여 년 전, 어느 명문대학교 물리학과에 초빙된 두 명의 교수가있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가 교수직을 맡고 있어 그 명성이 대단했다. 엄격한 두 교수는 제도를 하나 만들었는데, 모든 학생은 9시 정각에 주어진 강의실에 모여 시험을 치러야 한다. 시험지에는 하나의 논제가 쓰여 있는데 답은 ㅇ 또는 X로만 할 수 있다. (후략). - P225

수정된 제도가 시행된 이후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만약 두 학생의 시험지가 다르면, 그들의 답은 어떨 때는 같고 어떨 때는 다르다. 그러나 같은 시험지라면, A, B, C와 상관없이 답은 항상 반대였다. - P226

벨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교수님, 보십시오. 두 학생은 같은 시험지에 대해서는 항상 다른 답을 냈어요. 매일 시험 전에 A, B, C의 답안을 구별해서 약속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그중 어느 시험지를 가져 오든, 한 사람의 답은 ㅇ, 다른 한 사람은 X이죠. 이 방법은 너무 뻔해서 매일 전략에 변화를 준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변화시키든 그들은 8가지 전략에서 선택할 수 있죠.
예를 들면, 만약 첫 번째 학생의 답이 하나의 전략이라고 하면, 음,
000 전략, oxx 전략도 가능하고요. A, B, C 시험지의 답을 OXX, 다른 하나는 XOO라고 할 수 있어요. (후략). - P227

몇 시간 후에 기다리던 통계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벨의 얼굴색이좋지 않다. 아이슈타인이 그에게 물었다. "왜 그래? 결과가 도대체 어떻게 나온거야?" 벨은 기죽은 목소리로 "제가 통계를 냈는데 결과가1/4이네요 어떻게 이런 일이..." 아인슈타인도 매우 놀랐다. - P229

" 아인슈타인은씁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렇다네. 자네들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두 학생은 동시에 등 뒤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교수님,
우리의 비결은 바로 이겁니다." 아인슈타인은 물건을 받고 한번 훑어보았다. 그것은 같은 양자 자기선회 quantum spin 방향 검출기였다. 검출기에는 세 개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각 위치 사이의 편광각은 서로 다르다. 서로 간의 끼인각은 모두 정확히 120°이다. - P230

그중 한 명의 학생이 대답했다. "교수님의 짐작은 완전히 맞습니다. 저희는 교실에 다른 하나 ‘양자 얽힘 발생기 하나를 숨겨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 9시 1분으로 설정해놓았습니다. 그것이얽힌 양자를 방출하도록 말이죠. 그러고는 저희는 각자 좋은 검출기를 가져왔습니다. (후략)." - P230

우선 다시 말해두지만 이야기는 완전 허구다. 나는 단지 당신에게 보어부등식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 이 이야기를 꾸며냈다.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학생이 양자 자기선회 방향검출기를 휴대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양자얽힘 발생기를 교실에 몰래 설치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이것들은 나의 상상이다. - P231

‘보어부등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양자의 ‘원거리에서 일어나는 유령과 같은 작용 spooky action at a distance‘을 이해해야 한다. 두 개의 양자는 서로 ‘얽힘‘ 상태에 있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 P231

보어의 해석은 어떤 미지의 ‘원거리에서의 작용‘이라고 한다. 당신이 하나의 입자를 테스트한 후, 다른 하나는 바로 당신의 측량에 감지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자전방향(자기선회방향)을 결정한다. 이후에 이것을 유령 같은 원거리 작용이라고 부른다. - P232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런 해석에 만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거리에서의 작용‘이 그의 ‘어떤 신호도 광속을 초과하는 속도로 전송될 수 없다‘는 원칙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해석을 하나 내놓았다. 즉, ‘숨은 변수hidden variable‘의 해석이다. 이것은 두 개 입자가분리될 때, ‘자기선회방향 측정의 결과가 항상 반대가 되도록 하라와 같은 어떤 약속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아인슈타인과 보어, 그 누구도 서로를 설득하지 못한 채 모두 세상을 떠났다. - P232

2015년 네덜란드의 델프트 기술대학의 어느 교수는 한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거리가 서로 13킬로미터(두 학생이 시험장에서 1.3킬로미터 떨어진 것과 같다) 떨어진 두 개의 금강석색심을 생산하는 얽힘 양자를 이용하여 벨 실험을 했다. - P234

최근 한 차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뉴스는 바로 2016년 11월 30일에 완성한 ‘거대 벨실험‘이다. 거대 벨실험과 앞의 실험의 유일한 차이는 ‘수가 더 랜덤‘이라는 점이다. 이전의 벨 실험은 모두 컴퓨터를 이용한 임의 난수생성이었다. 표현이 과격한 사람은 이것은 진정한 난수가 아니라고 여긴다. 양자가 난수배열에서 규정이나 허점을찾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실험결과의 상황에 영향을 주었다. - P235

여기서 이야기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양자얽힘‘을 악용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천재가 나타나서 양자의 이런 효과를 국제사회에 가치있는 응용이 가능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더불어 이것은 어린이, 청소년 과학소설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어찌됐든 양자세계는 매우신비롭다는 것이다. - P236

신비로운 0.577_오일러 마스케로니 상수


문제: 한 마리 개미가 있다. 고무 고리 위의 어느 지점에 머물고 있는데 고무 고리의 초기 둘레는 1m이다. 개미가 1초에1cm의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하면 고무 고리는 1초 후에 1m씩 일정하게 둘레가 늘어난다. 다시 말하면 1초 후에 고무 고리의 둘레는 2m, 또 1초 후에는 3m로 변한다.

질문: 이 개미가 고무 고리를 한 바퀴 도는 것이 가능할까?
(이 개미는 처음 위치로 돌아올 수 있을까?) - P120

그러면 조화급수의 n항 합은 도대체 얼마인지 궁금할 것이다. 빨리 계산할 수는 없을까? - P123

조화급수의 전반부 n개 항의 합이 In(n)에 가까워진다면 결국 In(n)과같아질 수 있을까? 아니면 ‘임의의 작은‘과 ‘충분히 큰‘ 이 두 개의 표현을 빌려 이 충분히 클 때, 조화급수의 전반부 개 항의 합과 In(n)사이의 차이는 임의의 작은 값일까? 정답은 ‘아니다‘. - P123

(전략), 이 차잇값이 바로 본 절의 주제인 ‘오일러 마스케로니 상수이다. - P124

r=0.5772156649015328606065120900824024310421...

지금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이 값을 소수점 아래 100억 자리 이상까지 계산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순환하는 흔적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무리수일 가능성이 큰 거 같다. 수학자들도 보편적으로 무리수일거라고 예상했지만 지금까지 증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125

마지막으로 조화급수의 확장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앞에서 언급한 조화급수가 발산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급수에서 많은 항을 빼더라도 여전히 그 급수는 발산한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오일러가 모든 소수의 역수 합이 발산한다는 것도 증명했다는 것이다. - P125

유사한 것으로 소수 역수의 합과 Inn N 사이의 차이를 또 다른 상수로 이끌어낼 수 있는데 ‘메셀-메르텐스 상수 Meissel-Mertens constant‘이다. - P126

완벽한 입방체는 존재하는가?

지구상에 완벽한 입방체는 존재하는가? 여기서 완벽한 입방체는 정육면체가 아니고 특별한 성질을 가지는 입체도형이다. - P86

1719년 폴 하코 Paul Harko의 회계사는 세수 44, 117, 240을 발견했다. 세수 중에 두 수의 제곱 합을 구하면 결과는 여전히 완전제곱수이다.

44²+117²=125²
117²+240²=267²
240²+44²-244² - P87

이것은 오일러가 연구한 것이므로 후대 사람들이 이런종류의 수 조합을 ‘오일러 큐브 Buler Cuboid‘라고 불렀다. 오일러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니콜라스 손더슨 Nicholas Saunderson은 간단한 한 세트를 발견했는데 피타고라스 수의 매개변수 유도공식에 기인한 것이다. - P88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완전 의외의 결론으로 오일러와 손더슨 공식이 모든 오일러 큐브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오일러 큐브가 그물을 다 빠져나가버린 것 같다. 게다가 근원 오일러큐브(세수가 서로소인 것)도 많지 않다. 1000 이내에 5개 세트가 있을 뿐이다. 10000 이내에도 19개 세트이니 이것은 오일러큐브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 P88

다음은 이미 알려진 ‘근원 오일러 큐브‘의 성질이다.

• 반드시 한 변은 홀수, 2개의 변은 짝수이다.
• 적어도 두 변은 3으로 나누어떨어진다.
• 적어도 두 변은 4로 나누어떨어진다.
• 적어도 한 변은 11로 나누어떨어진다.
• 임의의 근원 오일러 큐브 (a, b, c)는 확장된 오일러 큐브 (ab, ac, bc)를 만든다. - P88

Let‘s play with MATH together

001. 오일러 또는 손더슨의 공식을 이용하여 근원 오일러 큐브를 하나찾아보자.

002 방정식 z²+y²=z³은 자연수 해를 가질까? 만약 가진다면, 매개변수해가 존재할까? (단, x, y, z는 서로소이다.) - P92

‘패리스-해링턴정리‘부터
‘불가증명성‘의 증명에 이르기까지


‘패리스해링턴정리 Paris-Harrington theorem‘의 주요 내용은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 즉, ‘불가증명성unprovability‘과 관련 있다. - P282

 여기서 간단히 복습을 해보자. 괴델의 제1종불완전성원리는 ‘어떤 페아노산을 포함하는 공리화가 가능한 이론은 모두 불완전하다‘는 것으로 여기서 불완전은 이 공리계 안에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282

(전략). 이 공리에 의해 ‘일계산술체계‘,
즉, ‘페아노 산술체계‘를 세울 수 있었고 그것은 대수영역에서 유클리드 공리와 같은 역할을 했다. - P283

페아노 산술체계에서 괴델의 제1종 불완전성정리를 말하자면, 분명히 증명될 수 없는 명제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괴델이 찾은 제1종불완전성 명제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연속체가설‘과 ‘선택‘라는것이다. 그것들은 페아노 산술체계에 따른 것이 아니고 집합론의 명제에 속하는 것이다. 이 2가지는 근본적으로 자연수와 상관없이 ZFC집합론공리를 이용하여 표현이 가능해진 것이다. - P283

패리스-해링턴정리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램지이론 Ramsey‘s theory에대한 간단한 이해가 필요하다. 램지이론은 바로 그래프이론에서 배열조합문제 중 하나로, 그중에서도 기본정리를 램지이론이라고 부른다. - P284

당신은 어쩌면 램지수가 굉장히 간단하다고 여길 수 있다. 기껏해야 컴퓨터를 이용해서 일일이 세기만 하면 된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이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예로, R(4,4)=18은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만약 17명이라면 어떤 조건하에서 어떤 4명은 서로 알거나 또는서로 모르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 P285

에어디쉬는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외계인이 지구에 떨어져 인류를 위협하며 R(5, 5)의 정확한 수를 요구하며 이 수를 내놓지 않으면 지구를 없애버리겠다고 한다. 그러면 지구의 모든 ‘계산력‘을 모아 답을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고 해볼만하다. - P285

이리하여 강한 유한 램지정리는 매개변수 3개 (i, j, k)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수학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0부터 n-1까지 n개의 자연수로 구성된 집합에서 각 i개 원소의 조합은 가지 색을 사용한다. 그가운데에서 고른 적어도 k개 원소의 부분집합은 그중 임의의 개원소의 색은 모두 같다는 결과를 낳는다. 게다가 당신이 고른 원소의개수는 최소 k개를 제외하고, 이 부분집합에서 가장 작은 자연수보다 크거나 같아야 한다. - P288

(전략).
이것이 바로 ‘강화된 유한 램지정리‘이다. 의미는 임의의 (i, j, k)조합에 대해, 최소 정수 R이 존재하기만 하면, 이 R개 정수 내에서 어떻게 색칠하든 상관없이 앞의 조건에 부합하는 하나의 부분집합을 찾을 수 있다. - P289

‘강화된 유한 램지정리‘에 대한 강의는 끝났다. ‘패리스-해링턴‘정리를 간단히 말하면 페아노 산술공리를 이용하여 ‘강화된 유한 램지정리‘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라는 것이다.
‘아, 어떻게 해야 할까?‘ 왠지 이런 반응을 나타냈을 것 같다. 이 정리는 배열조합 문제로 보이기 때문에 어떤 신비한 것도 없어 보이는데 왜 증명할 수 없을까?
- P289

1977년에 패리스와 해링턴 두 수학자는 "만약 페아노 산술체계를 이용하여 ‘강화된 유한 램지정리‘를 증명할 수 있다면, 페아노 산술체계는 바로 ‘일치‘라는 것도 증명할 수 있다."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페아노 산술체계가 일치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자신이 일치임을 보일 수 없고 그래서 모순이 생기는 것을 확인할 수있다. 그래서 페아노 산술공리체계에서 ‘강화된 유한 램지정리‘는 증명될 수 없다는 추론만 가능하다. - P290

(전략).
여기까지 내용에서 ‘페아노 산술체계는 자신의 일치성을 증명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러면 앞의 ‘이미 알려진 페아노 체계는 일치한다‘는 것은 무슨 근거로 말한 것인가?"라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P290

그렇다면 강화된 유한 램지정리가 증명될 수 없는 것이 되었는데도 왜 연속체가설처럼 쓰지 않고 ‘정리‘라고 부르는 걸까, 그것은 ‘가설‘ 아닌가?
이 문제는 앞의 문제와 좀 닮았는데 이미 증명되었다. 단지 페아노 산술체계보다 더 강한 ‘이계 논리체계‘를 사용한 증명이라는 것, 그리고 페아노 산술체계는 ‘일계 논리‘와 유사하게 삼계논리, 사계논리 등도 있다는 것이다 - P291

패리스해링턴 정리를 제외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수많은 증명되지 않는 명제를 발견했다. 또한 범위는 정수론, 위상기하학, 해석학, 측도이론 등의 영역 등에 이른다.
수학에서 ‘증명될 수 없는 명제‘는 하나의 보편적 현상이고,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증명과정도 패리스-해링턴정리와 매우 닮았다. - P292

은근히 평균이 아니다_
벤포드법칙부터 두 개의 편지봉투 역설까지


(전략). 당신은 그런 숫자들이 임의로 구성되었다거나, 서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어떻게 규칙이있을 수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938년 미국의 전기공정사 벤포드는 생활 속에서 만나는 이런 숫자들에 분포규칙이 있다는것을 발견한다. 이를 ‘벤포드법칙‘이라고 부른다. - P137

(전략). 그러나 벤포드는 이런 숫자에서 1로 시작하는 수가 30%에 이를 정도로 제일 많고, 이후 숫자들은 점점 감소하는데 9로시작하는 비율은 4.5%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좀 뜻밖이지 않은가? 이 숫자의 분포규칙은 이후에 ‘벤포드법칙‘이라고 부른다. - P138

나는 많은 해석을 보았는데 결국 주된 것은 2가지로 정리되었다.
(중략).
또 다른 하나의 요소는 사람들이 임의의 변량에 대해서 균등분포를 따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임의로 취한 통계숫자-하류의 길이라든지, 구역인구 등-가 매우 그럴 듯하게들리겠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균등분포라기보다는 정규분포이다. 하지만 사람의 직관은 항상 이런 변량들이 균등분포라고 먼저 생각된다는 것이다. - P139

[두 개의 편지봉투 역설]

당신에게 주어진 두 개의 편지봉투 봉투 안에는 실이 들어있는데 하나는 다른 하나에 들어있는 실 길이의 2배이다. 당신은 먼저 마음에 드는 봉투 하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실을 가져가면 된다. 그러나 봉투를 열기 전에 단 한 번! 봉투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당신은 항상 더 긴 실을 가지길 원한다. 바꾸는 게 좋을까? - P139

(전략).
이 결과만 본다면 내가 가진 실의 길이가 2이므로 무조건 봉투를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당신은 벌써 ‘아니다‘라고 대답했는가? 만약 봉투를 바꾼다 해도같은 계산방법으로 무조건 바꾸는 게 낫다. - P140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많은 해석이 있지만 이런 해석들은 너무 복잡하다. 사실 결론은 당신이 기댓값을 계산할 때 임의변량에 대해 범위를 구하는 것과 균등분포라고 가정하는, 자각하지못하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 P141

벤포드의 법칙은 균등분포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분포를 가질까? 또한 이런 상황은 왜 생기는 걸까? 왜 정규분포가 되지않는 걸까? - P142

위의 데이터에서 공식이 예언하는 수치는 매우 적중한다. 벤포드법칙은 ‘척도불변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즉 같은 지표도 다른 진법으로 나타낼 수 있다. - P144

1995년 오스트리아 심리학자이자 통계학자인 안톤 포먼 Anton Foreman은 설득력 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지능지수, 사람의 키 등의 정규분포 데이터는 벤포드의 법칙에 부합하지 않지만 두 개의 정규분포 데이터를 혼합하면 벤포드의 법칙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 P144

제일 어려운 해석은 수학물리와 관련된 상수이다. 나는 벤포드가 통계 낸 104개에 대한 분석을 보았는데 벤포드법칙에 절대 어울리지않았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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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혹하다

1

엄숙하다고 해야 할지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할지, 사토야마나미는 금방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감성을믿는다면 수상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어두컴컴하고 길쭉한방에서 벽을 등지고 서로 마주하듯 나란히 정좌한 남녀 열명은 표정으로만 봐서는 자신들의 행위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 P9

자, 하고 입을 연 사람은 상좌 한가운데 앉아 있는 남자다.
이름은 렌자키 시코. 물론 본명이 아니다. 팸플릿에는 어느밤 머리맡에 성인이 나타나 이름을 내려 주었다고 되어 있다. - P9

고개를 끄덕이는 렌자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실은 외부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교단의 수치니까요. 하지만 좋은 면만 보여서는 우리의본모습을 알릴 수 없겠죠.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중요한 건 잘못을 회개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 자정 작용이 있다는 점을 오늘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P10

렌자키가 등을 쭉 폈다. 표정도 한결 엄숙해졌다.
"오늘 이렇게 모이시라고 한 것은 중대한 문제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회‘가 똘똘 뭉쳐 있다고믿었습니다.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중 한명이 구아이회의 보호를 받으면서 마음속으로는 우리를 배반했어요." - P11

(전략).
렌자키가 말을 이었다.
"우리 목표는 마음의 정화입니다. 병이나 인간관계로 고통받는 사람들 중 다수가 자신의 마음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갖가지 더러움이 축적된 결과 재앙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더러움을 씻어 내고 행복해지자는 것이 우리 교단의 이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마음의 정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이 간부 중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교단이 아직 미숙하고 더 나아가 저 자신이 미숙하다는 뜻입니다." - P11

"설령 그렇게 괘씸한 자가 있다 해도 그건 그자가 타락한 것이지 결코 대사 때문은……………."
(중략).
제자의 물음에 렌자키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범인이라는 표현은 쓰지 맙시다. 우리는 가족이에요. 그자는 그저 마음을 충분히 정화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불쌍한 사람이지요." - P12

‘구아이회‘에는 열 명의 간부가 있고, 그들이 렌자키 휘하에서 모임을 운영해 나간다고 들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열 명이다. 모두들 놀란 표정으로 제5부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명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제5부장, 하고 렌자키가 운을 떼었다. 그 표정은 온화하고,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이곳은 혼을 정화하는 곳입니다. 정화라 함은 모든 일을고백하는 것이기도 해요. 숨기는 일이 있다면 부디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당신 안에 있는 검은 것들을 토해 내세요." - P13

제5부장은 바닥을 손으로 짚은 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공포와 놀라움의 기색이 가득했다.
어떻습니까, 하고 렌자키가 재차 물었다.
제5부장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히 느끼긴 했지만, 저는 아닙니다. 저는 대사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 P14

연기력 한번 대단하네, 하고 나미는 냉소적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건 렌자키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이있다는 걸 선전하려는 퍼포먼스겠지. 주간지에서 취재하러온다니까 부랴부랴 준비했을 거야. 제5부장의 박진감 넘치는 연기는 인정하지만, 이런 짓거리를 사실 그대로 기사화했다가는 독자에게 바보 취급을 당할 것이다. 아니, 그러기 전에 편집장에게 호통을 듣겠지. - P15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하고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다들 놀라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제5부장과 렌자키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모두가 배우라는 말인가. 설마 싶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편이 좋을 듯했다. - P15

렌자키가 말했다.
"죄를 인정합니까?"
그러나 제5부장은 등을 구부린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중략).
누구도 막을 틈이 없었다. 제5부장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지상 5층이었다. - P16

2

구사나기는 마미야의 설명만으로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질문한 끝에 겨우 내용을 파악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계장님, 이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P16

"내용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담당해야 할 사건이지사람이 죽은 데다, 자신이 죽였다고 자수한 사람까지 있으니 말이야. 5층 건물에서 떨어뜨렸다더군."
"기합으로…………… 말입니까?"
"기합이 아니라 염, 이라고 하나 봐. 염력, 할 때 염 말이야."
구사나기는 오른쪽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 P17

종교 법인 ‘구아이회‘의 신자 하나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고 경시청으로 신고가 들어온 것은 오늘 오전 10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 신자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사인은 뇌 좌상. 5층 창문에서 주차장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졌으니 애초에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했다. - P18

그런데 맨 먼저 입을 연 교조 렌자키 시코가 뜻밖의 말을 했다. 자신이 신자를 추락시켰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염력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도쿄 서쪽 변두리의 작은 경찰서가 우왕좌왕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 P19

이런 종류의 단체에는 탈퇴한 신자가 자신이 속았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일이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구아이회‘는 여태까지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듯했다. 지역 주민과 다툼이 일어난 사례도 없었다. 이번 사건이 교단으로서는 처음 있는 불상사인 셈이다. - P19

구사나기가 맞은편에 앉자 남자는 그때껏 감고 있던 눈을뜨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경시청 수사 1과의 구사나기입니다.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후지오카에게 건네받은 자료에 따르면 본명은 이시모토가즈오 직업은 ‘구아이회 교조‘였다.
"렌자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예전 이름은 버렸으니까요."
남자가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렌자키 씨, 당신이 한 일을 가능한 한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그러니까, 간부 회의 중에 사건이 일어났다고요?" - P21

내부 조사를 한 결과 거액의 돈이 사용처가 불분명한 채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리 담당자인 제5부장 나카가미 마사카즈가 의심스러워 그에게서 진실을 듣고자 했다. 그 방법은 렌자키가 나카가미의 마음에 염을 보내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 P21

(전략).
"물론입니다. 아니, 그런 적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매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번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저를 찾아오거든요. 그런 분들의 마음에 염을 보내서 마음을 정화하고 번민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저의 책무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 의식을 행하다가......."
"의식이 아니라 송념이라고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염을보낸다는 뜻입니다."
렌자키가 송구스러운 듯이 말했다. - P23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구사나기가 물었다.
"제게 그 송념이라는 것을 한번 해 보세요."
그 말에 렌자키가 눈을 번쩍 떴다.
"여기서 말입니까?"
"네. 안 되겠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렌자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해보죠." - P24

"별다른 느낌이 없는데요."
"그럴 겁니다. 염을 보내고서 알았습니다. 당신은 제게 구원을 바라지 않아요. 다만 저를 시험할 뿐이죠. 그런 사람에게는 염이 통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강한 사람입니다."
그러고서 렌자키는 빙긋이 웃었다. - P25

3

"그 일은 물리학과 관계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유가와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채 흥미가 일지 않는다는듯이 말하고는 책상 위에 놓인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 P25

"무슨 수로 체포하겠어, 상대방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있는걸. 그가 한 일이라고는 양손을 상대방에게 향한 채 눈을 감은 것뿐이야. 그걸로는 살인죄를 적용하기는커녕 구류할 근거조차 없단 말이지. 결국 그대로 돌려보내고 말았어."
"목격자라고 해 봐야 신자들뿐이잖아. 정말로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을까? 교조를 지키자고 다들 입을 맞춘 거 아니야?" - P26

구사나기를 안내한 사람은 마지마라는 초로의 남자였다.
‘제1부장‘이라는 직함으로 보아 렌자키의 수제자인 듯하다.
"대사가 금방 석방되어 안심입니다. 자수하겠다고 하셨을때 저희는 말렸습니다. 대사가 염을 보낸 결과라고는 하나, 제5부장이 창에서 뛰어내린 것은 마음의 고통에서 해방되기위해서였지요. 다시 말해서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자살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대사는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나머지 힘을 통제하지 못했으니 자신이 죽인 것과 다름없다는거예요. 정말이지 훌륭한 분입니다. 만일 대사가 이대로 감옥에라도 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경찰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 주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P27

마지마를 포함해서 사건 발생 당시 방에 함께 있었던 간부 9명을 모두 만나 보았지만, 그들의 진술에 모순점이나 미심쩍은 부분은 없었다. 피해자가 날뛰던 모습에 관해서는 각자의 표현이 조금씩 달랐지만, 그 점은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볼수 있었다.
사건에 대해서는 그들도 놀란 눈치였다. - P28

"이런 일이 벌어져 면목이 없습니다. 저는 어려운 내용은잘 모르지만, 대사가 자수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돌아와서 안심입니다."
부인이 알아듣기 힘들 만큼 조그만 소리로 말하면서 버릇처럼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거렸다. - P29

(전략).
"그 증언을 그대로 믿는 거야? 그런 식이면 자네들에게 잡힐 범인이 하나도 없겠군."
"얘기를 끝까지 들어 봐. 사건 현장에는 신자가 아닌 사람도 있었어. 그들에게도 얘기를 들어봤단 말이야."
"신자가 아닌 사람이 있었어?"
"그래. 주간지 취재 기자랑 사진 기자. 우연히 취재하러 와있었던 모양이야." - P29

기자는 『주간 트라이』의 사토야마 나미라고 했다. 나이는서른 전후, 보이시한 헤어스타일에 화장기가 없는 여자였다.
(중략).
"우리 잡지사 편집부로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었거든요. 최근 들어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구아이‘라는 종교 단체를 아느냐고요. 자신의 가족이 줄줄이 신자가 되어 재산을 갖다 바치는 바람에 결국 가정이 붕괴되고 말았다는 거예요. 수소문해 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수상쩍은 얘기가 들리더라고요. (후략)." - P30

사토야마 나미에 따르면 처음에는 취재를 거절당했다고한다. 송념의 자리에는 신자만이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얼마 후, ‘구아이회‘ 쪽에서 먼저, 신자들이 수행하는 모습이라면 취재하러 와도 좋다고 연락을 했다. 렌자키가 염을 보내는 장면을 볼 수 없다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들여다보기나 하자 싶어서 사진 기자와 함께찾아갔다. 그런데 도량에는 신자가 거의 없었다. - P31

"진짜더라고요. 렌자키 시코가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는데, 제5부장이 비명을 지르면서 날뛰기 시작했어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확실해요. 렌자키 시코는 단 위에 앉은채 엉덩이조차 들지 않았어요. 그러니 제5부장을 창에서 떠밀기란 불가능한 일이죠."
헤어지면서 사토야마 나미는 이번 사건을 최신호에서 상세히 다룰 예정이니 기대해 달라고 사뭇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사진 기자에게도 얘기를 들어봤지만 대체로 내용이 일치하더군. 그때 찍은 사진도 봤는데, 취재 기자의 말이 거짓이나 과장은 아닌 것 같았어." - P32

구사나기는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만, 그 교조인가 뭔가하는사람 말이야, 운이 좋긴 했어."
"무슨뜻이지?"
"그렇잖아. 방금 우리도 말했다시피, 그 자리에 신자들만있었다면 경찰이 그 얘기를 믿었겠어? 사실은 누군가 밀어서 떨어뜨린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게 보통이지. 그랬다면 그 교단에 대한 평판에도 흠집이 났을 거야. 자칫 억울하게 체포되었을지도 모르고." - P33

4

같은 방인데도 한가운데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영 달랐다. 혼자라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그때는 간부 열명이 양쪽 벽을 등지고 마주 앉아 있었다.
사토야마 나미는 ‘구아이회‘ 본부를 다시 찾았다. 목적은물론 취재를 보충하는 것이다. - P34

나미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거슬리시는 내용이라도…………?"
아닙니다, 하며 렌자키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그렇게 글을 잘 쓰시는지, 감탄했습니다. 현장감이 넘치더군요. 다만, 앞으로는 제 예전 이름을 거론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경력에 관해서도 저희 구아이회 팸플릿에 적혀 있는 내용 외에는 기재하지 마시고요."
"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 P35

나미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해산한다고요?"
"생각은 그런데, 제자들이 울며불며 말리더군요. 아직 자신들의 마음을 정화하지 못했으니 저의 염이 필요하다고 하는데는 반박할 말이 없었어요. 경찰에 출두해도 결국 돌려보내고, 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렌자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큰 힘을 가진 자의 고뇌가 느껴졌다. 나미는 그 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 P36

렌자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신성한 행위를 취조실 같은 곳에서 할 수는 없지요. 게다가 상대는 단지 재미 삼아 그런 말을 했을 뿐이고요. 거절하기도 뭐해서 시늉만 해 보였습니다. 형사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불만스러워하더군요."
"저는 재미 삼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힘을 느끼고싶다는 순수한 마음이에요. 결과적으로 저 자신도 뭔가 변할지 모르죠. 부탁드립니다." - P37

나미가 시키는 대로 하자 렌자키는 진지한 표정으로 양손을 그녀 쪽으로 향한 뒤 눈을 감았다. 그런데 몇 초 뒤 그가 다시 눈을 뜨고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번뇌가 많으신가 봅니다. 거짓과 비밀도 상당히 많이 품었고요."
"아......, 다 알아내셨군요."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공기 정화기는 깨끗한 공기를 공급하지만 대신 내부에 있는 필터가 점점 더러워지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마음의 필터에 더러움이 쌓입니다. 그걸 조금씩 깨끗이 하는 것이 우리 교단의 목표입니다." - P38

"느 느꼈어요. 분명히 느꼈습니다. 뭐랄까, 몸이 조금 따뜻해지면서......."
렌자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을 느낀 겁니다. 당신의 마음은 비록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정화되었습니다."
다음 순간, 형언하기 힘든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 P39

5

마미야가 주간지를 읽어 보고 싶다고 해서 주간지를 들고그의 자리로 갔다. 어제 발매된 『주간 트라이』이다. (중략).
"렌자키 시코를 꽤나 치켜세웠군. 마치 초능력자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야."
"이 소재를 당분간 우려먹을 속셈인 거죠." - P39

"쳇, 나오든지 말든지. 그건 그런데 말이지."
마미야가 기사에 게재된 사진을 가리켰다.
"용케 사진을 찍었단 말이야. 이 사진으로 봐서는 아무도피해자에게 손을 대지 않은 게 확실하잖아. 스스로 창에서 뛰어내렸다고 볼 수밖에 없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마미야의 말대로였다. 사진에서 나카가미 마사카즈는 무언가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고개를 돌린 채 양손으로는 몸을보호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창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진 기자 다나카에게 진술을 들을 때도 봤던 사진이다. - P40

마미야가 자리에 앉은 채로 구사나기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혹시 주간지도 한통속이라는 얘긴가? 아니면 교단이 선전을 목적으로 사건을 일으켰다는 거야? 일부러 신자를 자살하게끔 해서 말이야." - P41

"아닙니다. 그건 괜찮은데, 긴히 할 얘기라는 게 뭡니까?"
그러자 후지오카는 네, 하며 구사나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실은 밀고가 있었습니다."
"밀고요?"
"네. 과거에 ‘구아이회‘ 신자였다는 남자한테 전화가 걸려왔어요. 그 사람 말에 따르면 교단의 돈을 착복한 사람은 나카가미가 아니라 다른 간부들이라는 거예요. 물론 경리 담당이었던 나카가미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으니 얼마간 떡고물이야 얻어먹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이용당했을 뿐이고 주범은 따로 있다더군요." - P42

"그런데 밀고자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답니까?"
"나카가미 본인에게 들었대요. 나카가미가 마지마나 모리야에게 불만이 많았는지, 그 두 사람을 거드는 일이 어리석게 느껴진다는 말을 흘리고 다녔답니다."
"그랬으면 그런 사실을 렌자키 교조에게 털어놓으면 되지않았을까요?" - P43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나와 또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주간 트라이』에 실린 기사는 보셨습니까?"
종업원이 물러간 후 후지오카가 물었다.
"네, 봤습니다. 증언한 내용 그대로더군요."
"그런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기사에 따르면 렌자키는 횡령에 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다만 배신에 관해 나카가미를 꾸짖었을 뿐이고요." - P44

"렌자키가 말한 배신이란 횡령이 아니라 ‘수호의 광명‘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말하는 거였어요. 그와 같은 배신은 용서할 수 없다는 걸 다른 간부와 신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말하자면 본보기로 그런 일을 벌인 게 아닐까요? 하지만 나카가미가 ‘수호의 광명‘에 가려고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교단의 이미지가 실추될 테니 나카가미에게 횡령죄를 덮어씌운 거죠. 어떻습니까, 제 추리가?"
구사나기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P45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경찰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요. 애초에 그 사건을 살인 사건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으니 말이죠."
"바로 그 점 때문에 의논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다시 뵙자고 한 겁니다. 구사나기 씨는 이런 종류의 사건에 강하시잖아요.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요?" - P45

6


오늘 다섯 번째 상담자는 예순이 넘은 남자였다. 신청서에는 자영업자라고 적혀 있었다. 명품을 걸친 건 아니지만 차림새가 그런대로 괜찮았다. 모은 돈이 꽤 있을 거라고 마지마는짐작했다.
남자를 ‘정화의 방으로 안내했다. 창은 열려 있는 상태고,
방 한가운데에 방석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정좌하고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에 대사가 오실 겁니다." - P46

"얼굴을 드시지요."
렌자키가 상좌에 앉고 나서 말했다.
"번민이 상당히 깊어 보이는군요."
네, 하고 남자가 대답했다.
"도무지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남들의 권유로 주식에 손을 대기도 하고 장사도 해 보았지만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요.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얼마 남지 않은 퇴직금마저 몽땅 날릴 판이어서 답답한 나머지 이렇게 상담을 청하러 왔습니다." - P47

"바로 그 점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만 부당하게 고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실은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다거나 하는 좋은 일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현재의 괴로운 상황 탓으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 상태를 우리는 마음에 더러움이 쌓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더러움 때문에 지금의 사태가 벌어진것입니다. 먼저 그 더러움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마지마는 렌자키의 여전한 말솜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얼마간 좋은 일도 있었을 거라고 찔러봐서 만일 상대가 대뜸 수긍할 경우에는 그런 탓에 방심한 나머지 마음에 더러움이 쌓였다고 할 것이다. - P48

"그럴 겁니다. 마음의 더러움이 아주 조금이나마 정화된거예요. 이걸 계속하다 보면 반드시 옛날처럼 좋은 일들이 일어날겁니다."
남자가 눈을 빛내며 다다미에 이마가 닿을 만큼 머리를 조아렸다.
한건 했네, 하고 마지마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입회금과수행료를 합해 120만 엔 이 남자에게는 좀 더 우려낼 수 있을 듯하다. ‘구아이의 별‘ 무늬가 새겨진 50만 엔짜리 항아리도 권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P49

모리야는 자신의 잔에 위스키를 콸콸 따랐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나카가미가 죽었을 때는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끝나나보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보니 끝나기는커녕 전부 렌자키가 말한 대로 됐어요."
"정말 대단한 친구야."
마지마가 감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던데 그 친구는 오히려 반색하는 거야. 이렇게 효과적인 선전은 없을 거라면서 말이지. 그 친구를 적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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