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본문에서 인용되거나 간접적으로 참조된 성경 구절은 기본적으로 개역개정 역본을 따른다. 그러나 조강현이 극을 이끌어나가는 초점자로 기능하는 구간에서는 개역개정 대신 공동번역 역본이 사용되었다. 각종 고유명사에 대한 표기법 차이 역시 위의 기준을따르나(가령 조강현의 내적 독백에서는 예레미야의 아버지가 ‘힐기야‘가 아닌 ‘힐키야‘로 칭해진다), 성경과 무관한 고유명사(텔레비전, 포클레인 등)의 경우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른다. 작중인물들의 나이 표기는 만 나이를 따른다.
#1
탕아 The prodigal
"요새 어쩌고 사냐?" 김 형이 그렇게 물었을 때, 우혁은 반가움과 반감을 동시에느꼈다. 가족에게도 변변한 충고를 듣지 못한 세월이 여러 해였고 그는 이제 서른넷이었다. 직업은 없었다. 아직 만회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돌아오지 못할 탕아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두려워졌다. "말도 마세요, 대책 없죠." "너 좆같이 사는 거 아니까 사정을 자세히 읊어보라고." - P11
"저번에 통화로 말한 게 다예요. 여기저기 다니다가 본가돌아온 지 세 달쯤 됐어요. 기운이 영 없어서 쉬고 있는데, 되는대로 일자리 구하고 개인 회생 알아보려고요. 은행 빚은다 합쳐서 얼마인지 기억이 잘 안 나긴 하는데. 일단 휴대폰명의부터 살린 다음, 새마을금고 가서 통장 새로 만들어야해요. 원래 계좌는 싹 압류 들어와서 묶였거든요." "지금까지 연락은 어떻게 했어?" "방에 누워만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말 걸어봤죠." "아니, 자기 명의 휴대폰도 없는 놈이 연락을 어떻게 했냐고, 방법을 묻잖아." - P12
"엄마가 회선 뚫어줬죠, 뭐....... 소액결제깡 하지 말라고 선불폰으로......" "나한테도 돈 빌리려고 나온 거 아니지? 준희가 너 이름 듣고 펄펄 뛰더라. 한 삼백 떼였다던데." - P13
"형이 그렇게 말하면 화날 것 같은데." 우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부모님 대하기 구스러운 것과별개로 제삼자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을 건 뭐란 말인가. 그것도 오래간만에 얼굴 한번 보자며 불러놓고. 게다가 그가이렇게 된 데에는 김 형의 지분이 상당했다. - P13
"그러니까 그 또라이 기질이라는 게…………. 됐다. 하던 이야기나 하자." 김형의 사정은 이랬다. 운영 중인 학원이 발 넓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탄 덕분에 한 명을 더 뽑아야 한다는거였다. 다만 일손이 달리는 분야가 다종다양한 까닭에, 무엇이든 시키면 할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하다고 했다. "짧게 줄이면 총무 겸 조교 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거 아니에요?" "야, 총무는 절대 아니지. 너한테 돈 만지는 일 시킬 생각없다." - P14
"과외 다 끊고 게임만 한 지 몇 년 됐죠. 국어 문항 납품이야 부업인데, 4문항 한 세트 작업해봐야 기껏 몇십 받아요. 노트북 전당포에 넘기고 통장까지 막힌 다음에는 일 자체를못 하는 중이고 사교육 판은 거의 모른다 봐야죠. 2, 3년만쉬고 와도 판세가 확 바뀌어 있는데……………." "하여간 전임강사 시키려는 거 아니야. 조교 업무랑 행정처리 주로 하면서 겸사겸사 땜빵만 맡으면 돼. 강사랑 성향안 맞으니까 다른 학원 알아보겠습니다 하는 학생들 있잖아. 그런 애들 서넛 모아서 수업 진행하고, 그게 또 적성에 맞으면 타임 수 늘리고, 너도 제대로 된 회사 취직하긴 글러먹었는데 세후 이백오십 받으면서 시작하면 노난 거 아니냐." - P15
"어차피 데카르트든 플라톤이든 고등학생 상대로 떠들 정도로는 알고 있지 않냐. 인문논술이 수학 같은 과목도 아니고, 머리 잘 굴러가고 글 잘 쓰면 끝이지. 정 안 되면 뒷방에서 첨삭하고 잡무나 맡아." "아버지가 접때 나더러 그러던데요. 눈빛이 다 죽은 게 귀신 같다고." "아니야, 너 놀고먹느라 때깔이 괜찮아. 딕션도 멀쩡하고. 면도한 다음 피부 관리 가볍게 하고, 옷만 사람처럼 입으면돼. 도박도 끊었다면서." - P16
"지금부터 준비 시작해서, 내달 초에 시범강의 한번 해라. 일단 바로 삼십 보내줄 테니까 머리 자르고 옷 사입어 깔끔하게 너 나이가 얼마인데 그 이상한 반팔 후드 티에 청바지......." "현금 아니면 못 받아요. 그냥 엄마 카드 쓸게요." - P17
(전략). 학계의 최신 견해니, 발산적 사고니 하는 말로 치장했지만 경쟁자를 견제하려는 속내가 뻔히 보였다. 한편 국어 실전 모의고사 출제 이력이 거슬리는지 국어 강사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나머지 한 명과 학부모 출신 상담실장이 뜨뜻미지근한 지지를 보내준 덕분에 낙하산은 무탈히 착륙했다. - P18
물론 시범강의는 10라운드짜리 경기의 첫 판에 불과했다. 직설적으로 대화가 오가진 않았으나 정체성을 확실히 하라는 요구가 살갗으로 느껴졌다. 경쟁자인지, 머슴인지. 학원장의 학교 후배라는 포지션마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 P18
무엇보다도 계약서를 잘못 썼다. 이백오십을 모두 월급으로 퉁친 탓에, 스페어로 맡은 수강생이 늘어나더라도 득 될게 없었던 것이다. 역할마저 애매모호한지라 강사들이 떠맡기는 잡무를 거절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김 형이 선심 쓰듯 성과급을 들먹이긴 했으나 속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진퇴양난이었다. - P19
우혁은 일단 준희에게 100만 원을 송금하면서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날려버릴 돈의 총액을 한껏 낮추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난 김에 다른 친구들에게도자잘한 빚을 갚았더니 딱 30만 원이 남았다. 운만 따르면 열배, 스무 배도 될 수 있는 금액이었다. - P20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다음 가까스로 출근했다. 사무실에는 서면 첨삭을 기다리는 논술 답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논제는 작년도 Y대학교 논술고사 기출 문항을 변형한 것으로, 세 개의 국어 제시문과 한 개의 영어 제시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P20
첨삭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프리셀 게임을 최고 난도로 시작했다. 30분이 걸려 한 판을 겨우 깼더니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 아니, 최 선생. 직장에서 게임을 하면 돼, 안 "돼?" "프리셀인데요." 우혁은 심드렁하니 내뱉었다. 김 형은 상체를 그려 우혁의 목을 조르듯 끌어안더니 귓전에 속삭였다. "프리셀이든 뭐든 카드 가지고 노는 꼴 한 번만 더 걸려봐가만 안 둬" "다음 달 보너스 제대로 안 챙겨주면 바로 관두고 필리핀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 P21
김형은 점심시간마다 우혁을 끌고 다녔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일단은 여름방학 시즌인지라 점심시간을 끼고 오전타임에 강의하는 강사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우혁은 목요일 오후 타임 강의를 빼면 계속 사무실에 있었으므로,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기 편했다. 물론 특별 관리를 하겠다는 의도 역시 있을 것이다. - P22
"보너스 안 줄 거면 강사들 단도리나 쳐요. 내가 자기네 파이 먹으러 들어온 줄 아는 것 같아." "페이가 비율제라서 그렇지, 뭐. 담당 학생 하나 줄면 이삼십이 턱턱 까이니까. 나도 계속 달래고는 있는데 어쩌겠냐." "그냥 사정 오픈하지 그래요. 재활 훈련하러 온 거지 정규강의 가져갈 일 없다고. 난 오픈해도 괜찮은데." - P22
우혁은 마음에 담아뒀던 불만을 차례대로 털어놓았다. 논술을 맡은 박 선생은 초면에 그렇게나 시비를 걸어놓고 이제는 수업 연구 초안을 떠넘기다시피 한다는 것, 다른 강사들도 이것저것 시키는데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다 보니 일거리가 한없이 쌓인다는 것, 집에서 준비해 오는 것까지 합하면 근무 시간이 하루에 서너 시간쯤 되리라는 것. - P23
"잠 부족한 게 눈에 보여서 그런다. 어제는 월급도 들어갔고." "어젯밤에 재발할 뻔한 건 사실인데, 참느라 못 잔 거예요, 참느라. 나도 노력 많이 해요." 김형은 상체를 슬쩍 뒤로 빼더니 우혁을 꼼꼼히 뜯어봤다. 의심스러운 피의자를 취조하는 형사 같았다. 그는 김형의 자세가 바로 잡히고서야 겨우 안심했다. - P24
"서울대 나온 양반이 하는 정신과인데, 가서 잠이 안 온다고하면 졸피뎀이랑 자낙스에 다른 거 몇 개 섞어서 줘 기다리는 시간만 빼면 처방전 받아서 나오는 데에 30초쯤 걸릴걸." "진짜 자판기네." 김 형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병원에 얽힌 가십을 주절거렸다. (중략). 뒷소문에 따르면 입시 컨설턴트 몇몇과 친하게 지내면서, ‘공부 잘하는 약‘을 찾아다니는 학부모들을 병원으로 끌어들인다고도 했다. - P25
여기는 병원과 약국이 학원만큼이나 많은 이상한 동네였다. 하나의 외계 행성이었다. 역삼중학교에서 시작되어 휘문고등학교로 끝나는 선분을 지름 삼는 원이 지층과 맨틀을이루고, 그 안쪽 은마니 래미안 대치팰리스니 하는 아파트에서 쏟아지는 인간들의 에너지가 내핵과 같은 열기로 끓어오르는 곳. - P25
"그러면 생명이라는 것도 사실은 종류가 다른 게 맞죠? 국어에서 100점을 맞아도 수학은 9등급일 수 있는 것처럼, 어느 관점에서는 살아 있지만 달리 보면 아예 속에서부터 죽어있을 수 있다거나 하는……………." "그것까지도 너무 당연한 소리지." - P27
2415번 초록색 지선 버스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정지한 자동차들의 패턴은 심리 치료용 만다라 그림을 연상시켰다. 으스러지듯 꺾여 올라간 자동차 보닛이 곧시작될 공연을 예고하듯 번쩍거렸고,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창 파편들 역시 햇빛을 이리저리 난반사함으로써 조명을 더했다. "야, 아까 그 소리가 이거였구나. 난리 났다." "난리 났네요." 김형이 헛웃음 섞인 감탄을 터뜨리자 우혁도 따라 했다. "이게 다 얼마짜리 사고나 기본이 아우디에 벤츠, 제네시스……………. 저기 마세라티도 있네." "여기 스쿨존 아니에요? 일부러 갖다 박아도 이러긴 어렵겠다." - P28
학원가 한복판에 펼쳐진 다중 추돌 사고 현장은 잘못 편집된 영화의 한 대목처럼 맥락이 결여되어 있었다. 하늘에서거대한 손이 내려와 망가진 자동차들을 집어 올리고 교통 흐름을 복구하더라도 그러려니 할 듯했다. - P29
하여간 이 지긋지긋한 감각. 지긋지긋하도록 반가운 감각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한 심호흡은 언제부터인가 헐떡임으로 변해 있었다. 어깨를 떨던 우혁은 단단한 게 발치를 건드리는 것을 깨닫고 아래를 보았다. 뜯겨 나온 전조등덩어리가 참수당한 머리통처럼 나동그라져 있었다. 이것마저 반가웠다. - P30
"먼저 가서 아무거나 시켜줘요. 화장실 좀 다녀오게..." 우혁은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학원 빌딩으로 뛰어 들어갔다. 막 입구에서 나오던 학생들이 흠칫 놀라 물러섰고, 숨길마음도 없는 듯 종알거렸다. 저 사람 웃는 거 이상하지 않아? 못 들은 척 비상계단 문을 열고 있으려니 진득한 시선이 등줄기를 쿡쿡 찔러댔다. - P31
우혁은 계곡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정했다. 그제야 몸의 떨림이 멎으며 현실이 전류처럼 등줄기를 휩쓸었다. 이곳이 서울의 중심부이자,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학원가이자 자신의 일터라는 현실. 김 형은 중국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중이고, 아까 마주쳤던 학생들은 형의 학원에다녔고, 사무실로 돌아가면 첨삭을 기다리는 논술 답지들이 있을 터였다. 주제가 뭐였더라? 자기실현적 예언? 이 모든 우연이 공교롭게만 느껴졌으며 이래서야 멀쩡히 살기 어렵겠다는 건조한 판단마저 미래를 견인하는 듯했다. 흔적을 치운 뒤 손을 씻고 있으려니 눈알이 뜨뜻해졌다 - P33
광양 옥룡면에는 호남정맥 제일봉인 백운산이 있으며 거기에서 뻗어 나오는 물줄기 중 가장 길고 굵은 것은 광양만에까지 닿는다. (중략). 즉 땅도 물도 인간의 소유가 아니지만 계곡은 아케이드형 상가에 딸린 캠핑장처럼 쓰인다. - P33
물밑 바위틈에 어색하게 끼어든 수박도, 찌그러진 사이다 캔도, 고기 굽는 연기도, 소란스러운 웃음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나면 여기에는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을까. - P34
30분가량 걸어 도착한 계곡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지금여기의 바윗돌과 저 위의 구름이, 땅과 물과 하늘이 하나로 접붙어 내달렸다. 계곡 전체가 발을 구르며 허공을 향해 서서 가고 있었다. - P34
열다섯 살의 소년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로 상류를향해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가 워낙 거센 탓에 우비를 걸쳤는데도 바짓단 밑으로 물이 줄줄 샜다. 가끔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텅 빈계곡은 매구간이 새롭게 느껴졌으며 모든 잎사귀와 뿌리줄기들은 눈가에 제각기 다른 빛을 남겼다. - P35
우혁은 아직도,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최후의 한 발짝을내디뎠는지 헤아려보곤 했다. 그 동작은 건방진 장난일 수 있었다. 괜히 아무 아파트에나 들어가서 낯선 집의 벨을 누른 후 층계참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듯이, 왼발을 불쑥 내밀었다가 되돌림으로써 일상의 견고함을 재확인하려던 것일지도 몰랐다. - P36
(전략). 이내 물줄기가 피를 닦아내며 눈앞을 밝혀주었다. 굵기가동전만 한 나뭇가지가 보였다. 한쪽 끝은 바위틈에, 다른 쪽끝은 우혁의 시야 한쪽 가장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물줄기가계속 쏟아져 내려왔지만 이상하게도 시야는 같은 자리에 고정된 느낌이었다. 운 좋게 널찍한 바위에 떨어진 걸까? - P37
긴 머리카락을 등줄기까지 길러 묶은 소년이었다. 눈 밑이 깊숙이 들어간 데다 뺨도 홀쭉한 탓에 해를 등지고 서면 얼굴에 그림자가 강하게 지는 타입이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눈동자만큼은 선명한 빛을 발했다. 티셔츠와 반바지는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고 한쪽 손에 들린 손도끼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마른 몸에, 키는 170센티미터도 되지 않을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다부진 느낌이었다. - P38
"야, 도망칠 필요 없으니 가만있어. 몇 가지만 묻고 보내줄거야." 소년은 호구조사라도 하듯 우혁의 신상명세를 거듭 물었다. 나이는 몇 살인지, 여기에 사는지 잠깐 놀러 왔는지, 놀러왔다면 친척 집이 근처에 있는지, 근처에 있다면 어디인지, 서울로 올라가는 건 언제인지, 어쩌다가 계곡물에 휘말렸는지, 혹시 삶에 고민이 많았는지, 죽으려 했는데 괜히 살아남았다 싶어서 후회되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 계획인지. - P39
"다시 볼 생각 말아. 네가 얼씬거리고 있으면 가까이도 안갈 테니." "여기 근처에 살아? 아니면 산에서?" "네가 알 문제 아니야." "나는 아까…………… 죽었다가 살아난 게 맞지?" "알아서 생각해." "고마워." - P40
소년은 짧게 침묵하더니고개를 홱 돌려 우혁을 바라보았다. "너 이거 확실히 알아둬. 이번에는 변덕 한번 부려준 거야. 내가 먹고 자는 곳에서 어린놈이 죽으면 재수 없어서. 다음에는 일부러 와서 나자빠져도 도울 일 없어." - P40
"만약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넌 정말로 죽어. 약속해." 산을 완전히 내려왔을 때 소년은 그렇게 말했고 우혁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대체로 지켜졌다. 그는 마을 푯돌 앞에 목숨값을 바친 후 그대로 물러났고, 지금까지 어디 있었느냐며 호들갑을 떠는 가족들 앞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 P41
충족되지 않는 갈망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이따금소년을 향한 고마움이 기우뚱하며 원망으로 변하려 했다. 염치 있는 인간이 되려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 P42
도박중독자라서? 사실은 도박이 아니라 스릴에 중독되어 있어서? 죽음을 경험한 후 되살아나서? 평생 갈 경험을 남들과 나눌 수 없어서? 소년이 말하기를, 남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우혁은 죽으리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허다했기 때문에 다시 죽는 상황쯤은 큰일도 아닌 듯 느껴졌다. - P43
"그런데 너 게이는 아니지?" 김형은 그가 게이는 아니니까 괜찮다고 믿으려는 것처럼, 혹은 차라리 커밍아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것처럼 물었다. (중략). 우혁은 자신이 신입생 시절 철학 동아리와 퀴어 동아리 중에서 고민했음을 알려줄까 고민했다. 당시는 김 형에게 도박을 배우기 전이었으므로, 소년을 떠올리며 자위하는 것이 성애적 충동 때문이라 믿을 수 있었다. - P43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게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사안은아니죠, 아무래도."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며칠이 지나 김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인사말도 없이 본론이 시작됐다. "아까 자는데 꿈에 네가 나오더라." "나와서 뭐 했는데요?" "날 전기톱으로 토막 내서 죽였어. 아무 이유도 없이, 얌전히 있다가 그냥" "그런 거 안 해요. 할 생각 전혀 없어요." - P44
"형, 진짜 솔직히 말해서, 나한테 전기톱이 있어서 누군가를 잘라야 한다면...... 내 왼쪽 다리를 자르고 싶어요. 쓸려 내려갔을 때 그 부분은 심하게 다치지 않았던 것 같거든...... 그래서, 그것만 한 번 더 잘라내면 완전히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다른 사람한테는 정말 아무 관심도 없어." 중얼거림은 대답으로 시작되었지만 정신 차려보니 혼잣말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혁은 후회했다. - P45
"다 식는다. 밥이나 먹어라." 점심 메뉴는 평범했고 뉴스는 대체로 나빴다. 타국의 전쟁과, 한국이 참전할 수도 있는 전쟁과 정치적 내전에 휘말린 대국(大國)들의 소식이 죽 이어지더니 비극의 규모가 확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비극이었다. 가계 부채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고도 했고 어느 역 앞에서 칼부림 사건이 났다고도 했다. - P46
부활을 위해 산 제물을 바치려는 사이비 종교 이야기였다. 제목은 ‘교주를 죽여라. 새천년파라 불리는 집단이었는데, 생수를 1000만 원에 팔아먹거나 교주를 위해 환락궁을차리는 부류와 비교하면 행태가 묘했다. 상업화된 음악 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익스트림 메탈 뮤지션이라고나 할까. - P47
방송 화면에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따온 구절이 나타나더니 새천년파 출신 폭로자와의 인터뷰가 뒤이었다. 새천년파는 그들의 교주가 재림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에 구원이 한정 없이 미뤄지는 중이라고 믿었다. - P47
우혁은 PD들의 기획력에 내심 감탄했고,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탐사 보도 방송을 상상했다. 그러자 김이 확 새서 밥이나 먹기로 했다. 주인장도 방송 내용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채널을 되돌렸다. 마뜩잖은 식사를 마친 후, 우혁은 학원 교무실 한구석의 간이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 P48
방송사 홈페이지에서 <교주를 죽여라>를 잠깐 보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온라인 카지노 사이트를찾아 들어갔다. 기분 나쁜 일과 그냥 나쁜 일이 있다면, 차라리 후자를 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돈을 걸고 잃는 일에조차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점심으로 최고급 스테이크를 만끽한 사람이 저녁의 콘비프 통조림에 만족하겠느냔 말이다 - P49
우혁은 엉뚱한 생각에 실실 웃었다. 그는 신비 체험을 한 것치고는 강경한 유물론자이자 실증주의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부활을 겪어본 사람에게 세간의 이야기들은 엉터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 P50
그는 곧장 교무실로 들어가는 대신 학원 복도를 멍하니 배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묵상이 길어지기도 전에 불청객이 불쑥 나타났다. 경찰복을 차려입은 2인조가 유리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욕하며 문을 열었다. "여기 강사분 되십니까?" "강사는 아니고 강사 비슷한 건데요."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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