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인구
19세기의 시작과 함께 우리가 믿을 수 있는 통계를 가지게 된 때부터(최초의진정한 인구조사는 1801년 영국에서 있었다) 중국과 유럽이 각각 인류 전체의약 4분의 1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그러한 비율을 과거에 유추하여 적용할 때 그 유효성이 사전에 보장되지는 않는다. - P44
이렇게 계산한 인구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단기적으로는 급격한 감소를겪기도 하지만, 이것을 무시하면 1300년부터 1800년까지 대체로 장기적인 증가세를 보인다. 출발점인 1300-1350년의 추정치로 가장 낮은 값(2억5,000만 명)을 잡고 도착점으로 가장 높은 값(1780년의 13억8,000만 명)을 잡는다면 증가율은 400퍼센트 이상이 된다. 물론 이것을 믿을 필요는 없다. - P45
서구의 역사가들 중에 이 점에 대해서 놀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제시한 수치들을 확인해주는 많은 간접적 표시들을 알고 있다(새로운 토지의 개척, 이주, 황무지 개간, 토지 개선, 도시화………). 그렇지만그들이 이것들로부터 끌어낸 결론이나 설명은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현상을 오직 유럽에 한정된 것으로 보는 반면, 많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인구가 늘어난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P46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수치들
우리는 가장 잘 알려진 유럽과 중국에 관한 수치를 이용하여 세계 인구를추산하는 방법을 통계학자들로부터 빌려왔다. 그들은 이 방식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정작 통계학자들 자신은 다른 방법을 취했다. 그들은 연산과정을 잘게 나누고 세계의 다섯 "부분" 각각의 인구를 차례로 계산했다. - P46
17세기 중반 아프리카에는 확실히 활력 넘치는 사람들이 살았다. 이 대륙은 16세기 중반 이후 아메리카 대륙을 향한 흑인 노예무역이 늘었으나 그에따른 인구 유출을 감당해냈으며, 여기에 더해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그리고 20세기까지 계속될 이슬람 국가로의 유출도 감당했다. - P48
그렇지만 유럽인이 블랙 아프리카 지방의 점령을 계속 고집하지 않은 것은 해안지역에서부터 "악성 질병 때문에 막혔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속적인또는 계속적인 고열, "이질, 결핵, 수종", 게다가 수많은 기생충들 때문에 유럽인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렀다.²³ - P48
23. Père Jean-Baptiste Labat, Nouvelle Relation de l‘Afrique occidentale, 1728, V, pp. 331이하. - P760
흑인 노예무역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흔히 믿는 정도로 대규모는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노예무역에는 수송능력의 문제 때문에도 이미 한계가 있었다. 비교를 위해서 본다면 1769-1774년 사이 아일랜드의 이민은 모두 4만4,000명, 그러므로 1년에 8,000명 이하에 불과했다.²⁴ - P49
24. 이 시기에는 이민이 대단히 많이 이루어졌다. 다음을 참조하라. Michel Devèze, L‘Europeet le monde à la fin du XVIIIe siècle, 1970, p. 331, 주 586. - P760
아시아에 대해서 제시한 수치들 역시 과도하지만, 여기에서의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은 편이다. 카 손더스²⁷는 만주족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6년이 지난 1650년경의 중국 인구를 7,000만 명으로 잡은 윌콕스의 견해가틀렸다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그 두배(1억5,000만 명)로 올려잡았다. 중국사에서 전환기인 이때는 모든 것이 논쟁과 재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예컨대 인정은 혹시 유럽의 일반적인 징세단위인 가구, feux]와 같은것이 아닐까?). - P50
27. World Population, Past Growth and Present Trends, 1937, pp. 38-41.
큰 해일과도 같은 중국의 놀라운 인구 증가는 1680년 이전, 또는 타이완을 재정복한 1683년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은 시베리아, 몽골, 투르키스탄, 티베트 등 넓은 내륙지역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와 같이 자체의경계 속에 갇혀 있던 중국은 극도로 집약적인 (내부) 식민화의 포로였다. - P50
아시아의 인구로 되돌아가보자. 일반적으로 아시아의 인구는 중국 인구의 2-3배로 추정된다. 3배보다는 2배에 가까울 것이다. 인도의 인구가 중국인구와 같다고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의 여지가 있는 자료들로부터1522년 데칸 지방의 인구에 대해서 추산한 결과(3,000만 명)를 따르자면 인도 전체의 인구는 1억 명에 달할지도 모른다.³²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공식적인" 인구 수치보다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말인데 이것을 믿을 필요는 없다. - P52
32. W. H, Moreland, India at the Death of Akbar, 1920, pp. 16-22. - P720
그렇다고 하더라도 1797년에 처음 이루어진 프랑스인에 의한 인구 추산³⁵은 인도의 인구를 1억 5,500만 명으로 추정한 반면, 1780년부터 중국이 공식적으로 공표한 인구는 2억7,500만 명이었다. 킹즐리 데이비스의 통계연구 역시 인도 인구가 낮은 수준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지만,³⁶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의견이 옳다고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다. - P52
35. A.E., Indes Or., 18, f° 257. 36. The Population of India and Pakistan, 1951, pp. 24-26. - P52
여하튼 중국의 2-3배로 가정한 아시아의 인구는 1680년에 2억4,000만 명또는 3억6,000만 명, 1790년에 6억 명 또는 9억 명이 될 것이다. 특히 17세기중반경에 대해서는 가장 낮은 수치를 선호한다는 점을 다시 밝혀두자. - P52
세기별 인구 변화
각각의 대륙별로 나누어서 수행한 공간상의 확인 작업과는 별도로, 이번에는 세기별로 시간의 경사를 좇는 더 어려운 확인 작업을 해야 한다. 파울 몸베르트가 이에 대해서 최초의 모형을 제시했다.³⁷ 1650-1850년의 유럽에관한 모형이었다. 그가 삼은 지침은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이다. 첫째, 가장 최후의 수치가 가장 덜 의심스럽다. 둘째, 가장 최근 시기로부터 가장 오랜시기로 거슬러올라갈 때에는 이들 사이에 대개 그러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인구 증가의 경사도, 즉 증가율을 가정한다. - P53
37. The Population of India and Pakistan, 1951, pp, pp. 533-545. - P760
이전의 불충분한 설명들
가장 처음에 제시했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세계 인구의 전반적 상승이 그것이다. 유럽만이 아니라 중국의 인구 역시 논의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현저하게 증가했다면 이전의 설명들을 수정해야만 한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서유럽의 인구 증가의 원인에 대해서 고집스럽게도 도시의 사망률 감소(실제로는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³⁹ 위생과 의학의 발달, 천연두의 후퇴, 상수도 시설의 확대, 유아 사망률의 결정적인 하락, 여기에 첨가해서 사망률의 전반적인 하락, 그리고 결혼연령의 하락 등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요소가 매우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 P55
39. 「가제트 드 프랑스」에는 대단히 풍부한 정보가 들어 있다. 예를 들면 1762년에는 런던, 파리, 바르샤바, 코펜하겐 등지에서 출생보다 사망이 더 많았다. 코펜하겐의 경우를 보면, 출생이 2,289명인 데 비해 사망이 4,512명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 전체로 보면 출생과사망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 P370
그리고 유럽 외부에 대해서 보자면, 역시 의사도 없었고 위생수준도 특출할 것이 없었던 18세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앵글로색슨 계이든 스페인-포르투갈 게이든 인구가 증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를 들면, 1763년 이후 브라질의 수도가 된 리우 데 자네이루에는 황열병이 정기적으로 찾아오고 또다른 모든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러했듯이 매독이 일종의 풍토병처럼 창궐하여 환지를 "뱃속까지" 썩게 하지 않았던가?⁴² - P56
42. N. Sànchez-Albornoz, 앞의 책, p. 188. - P760
폴 발레리는 수학자들에게서 빌려온 표현으로 이 세계는 "유한하다"고 했고, 또 어떤 합리적인 경제학자는 "인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제2의 미시시피 유역도, 제2의 아르헨티나 같은 땅도 없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⁴⁵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빈 공간이 부족하지는 않다. 아직도 열대 밀림, 스텝 지역, 심지어 극지방이나 진짜 사막 같은 곳이 남아 있어서, 이곳에서 현대 과학이 놀라운 일들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⁴⁶ - P57
45, W. Röpke, Explication économique du monde moderne, 1940, p. 102. 46. Pierre Gourou, Terre de Bonne Espérance, 1982, 17 allÓ ELD - P761
기후의 리듬
(전략) 15-18세기의 세계는 80-90 퍼센트의 사람들이 땅으로부터 얻어내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거대한 농업세계였다. 수확의 리듬, 품질, 그 부족 등은 모든 물질생활을 좌우했다. 그 결과는 나이테에든 인간의 육신에든 깊은 상처처럼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 변화들 중에 일부가 도처에서 일시에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단지 가설적인 설명밖에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 그 가설들은 차례로 부정되었다. - P58
마찬가지로 루이 14세의 시대는, 데릭 쇼브의 표현을 빌리자면,⁴⁸ "소(小)빙하기(petit age glaciaire, little ice age)"였다. 이것은 태양왕(루이 14세)보다도훨씬 더 절대적인 지휘자로서, 유럽의 곡물 재배 지역에서나 아시아의 벼 재배 지역, 스텝 지역, 프로방스의 올리브 재배지, 그리고 눈과 얼음이 아주 늦게야 없어지고 가을이 너무 빨리 찾아와서 밀이 익을 시간이 거의 없어진 스칸디나비아 지역 모두에서 이 절대자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7세기 만에 가장 추운 시기였던 끔찍한 1690년대 또한 그러했다.⁴⁹ - P59
48, "Discussion post-glacial climatic Change", in: The Quaterly Journal of the RoyalMeteorological Society, 1949 4, p. 175. 49. Eino Jutikkala, "The Great Finnish Famine in 1696-1697", in: The ScandinavianEconomic History Review, III, 1955, I, pp. 51-52. - P761
이런 기후론적 설명이 일부분의 진리를 포함한다고 해도, 과도하게 단순화시키지는 말자. 기후는 대단히 복잡한 체계이며 그것이 식물, 동물, 사람에 미치는 영향은 장소에 따라, 문화에 따라, 계절에 따라 굴곡이 심하고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온대 유럽 지역에서는 "6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의 강우량과 밀의 낟알 수는 음의 상관관계가 있고, 3월20일부터 5월 10일 사이의 맑은 날의 비율과 밀의 낟알 수는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⁵⁰ - P59
50. B. H. Slicher van Bath, "Le climat et les récoltes au haut Moyen Age", in: Settimana.. de Spoleto, XIII, 1965, p. 402. - P761
오늘날에도 몬순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려져 있다. 이 바람이 조금만 늦게 불어와도 인도는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는다. 또 이 현상이 2-3년 연속되면 곧 기근이 닥쳐온다. 인간은 이가공할 만한 제약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만이 아니라1976년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이 겪은 가뭄의 재해라든가, 1964-1965년에 미국에서 풍향체계가 비정상적으로 바뀐 결과 로키 산맥 동부에서 겪게된 파국적인 가뭄의 재해를 생각해보라.⁵² - P60
52. Rhys Carpenter, Discontinuity in Greek Civilization, 1966, pp. 67-68. - P761
참조를 위한 척도
1979년 현재 지구상의 인구는 약 40억 명이다(이 중에 조사가 가능하여 잘 알려진 것은 약 10퍼센트 정도이다). - P60
도시, 군대, 함대
역사가들이 19세기 이전 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 여행을 할 때 만나는 도시와 군대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그야말로 한줌에 잡히는 소도시이고 작은 군대이다. 15세기에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⁵⁵ 상류와 하류로 가는 수상 운송업의 교차로이고 또 육상의 대로들의 교차점이었던 쾰른도 인구가 고작 2만명에 불과했다. 이때 독일의 농촌 인구와 도시 인구의 비율이 이미 10 대 1에이르렀고, 비록 도시 인구가 우리 눈에는 아주 적어 보여도 이미 인구과밀로 인한 도시의 긴장이 뚜렷하게 고조되어 있던 시기인데도 말이다. - P61
55. Heinrich Bechtel, Wirtschaftsgeschichte Deutschlands vom 16. bis 18. Jahrhundert, II, 1952, pp. 25-26; Hermann Kellenbenz, "Der Aufstieg Kölns zur mittelalterlichenHandelsmetropole", in: Jahrbuch des kölnichen Geschichtsvereins, 1967, pp. 1-30. - P761
16세기 초에 이탈리아를 놓고 싸우던 용병대들 역시 매우 작은 규모로서 대개 1만 명이나 2만 명 정도에 10-20문의 대포를 가진 정도였다. - P62
또한 영국 내전의 드라마에서 왕군이 처음으로 패배한 롱 마스턴 무어에서의 끔찍스럽고도 결정적인 전투(1644년 7월 2일)* 역시 사실은 소규모군사력 간의 충돌이어서 왕당파가 1만5,000명, 의회파가 2만7,000명에 불과했다
* 롱 마스턴 무어(Long Marston Moor) 전투, 즉 영국 내란(해석에 따라 영국 청교도 혁명)의와중에 국왕군이 최초로 패배한 전투를 가리킨다. 크롬웰, 페어팩스 등이 이끄는 의회군과레슬리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이 루퍼트 지휘하의 국왕군을 무찔렸다. 국왕군은 전사자3,000-4,000명의 손실을 입은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혔고 대포 등의 무기를 빼앗겼다. 이후에 크롬웰이 의회파의 지휘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 P64
이렇게 보면 어떤 역사적 업적들은 비록 그 수치가 오늘날의 기준으로는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스페인의 지사들이 세비야, 카디스(훗날에는 리스본), 말라가, 바르셀로나 같은주요 "통제소"로부터 유럽의 바다와 육지를 가로질러 갤리선, 함대, 테르시오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 그러하다.
** Tercio: 16세기 말에 만들어진 스페인의 보병 엘리트 부대. - P64
일찍이 인구과잉이 된 프랑스
이상과 같은 비교작업을 계속해보면, 다른 중요한 설명들을 더 찾아볼 수있다. 1600년경의 세계 인구가 오늘날 인구의 8분의 1이라고 하고 오늘날의국경선을 기준으로 본) 프랑스의 인구가 2,000만 명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두번째 가정은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가능성이 있다. 이때 영국 인구는많아야 500만 명을 넘지 못했다.⁶⁹ - P66
69. Karl Julius Beloch, 앞의 논문, p. 786. - P761
16-17세기에 상당한 정도의 스페인 이민이 수행되었고, 더 이후의 시기에는 아메리카의 "섬들로 갔다. 또 우연한 기회에 종교적 이유로 망명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1540년에(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처음 시작되어 1752-1753년에 랑그도크 지방에서 피비린내 나는 탄압 끝에 최후의 대규모 이주가 일어나기 전까지 망명이 계속된 결과, 프랑스는 심각한 인구 출혈을 겪어야 했다.⁷¹ - P67
71. H. Luthy, H, I, p. 26. - P761
역사 연구의 결과로 얼마 전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프랑스인의 이베리아국가로의 이민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알게 되었다.⁷² 그것은 통계적 계산과 여행자들이 끊임없이 제공하는 기록에 의해서 입증되었다.⁷³ - P68
72. G. Nadal et E. Giralt, La Population catalane de 1553 à 1717, 1960. 73. Barthélémy Joly, Voyage en Espagne, 1603-1604, p.p. L. Barreau-Dihigo, 1909, p. 13. 카탈루냐의 피게라스의 장인들은 모두 "오트 오베르뉴 출신의 프랑스인들이다." - P761
18세기에 출산을 고의로 통제(피임)하기 시작하는 것-어쩌면 이미 이전부터 그래왔으나 이 시기에 확실하게 퍼졌는지도 모른다-은 따라서 이미수 세기 전부터 인구과잉에 시달려온 나라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P68
인구밀도와 문명의 발달수준
지구의 육지 표면적이 1억5,000만 제곱킬로미터이고 인구가 40억 명이므로현재 지구상의 평균 인구밀도는 1제곱킬로미터당 26.7명이 된다. 같은 계산을 1300-1800년의 시기에 대해서 해보면 1제곱킬로미터당 최저 2.3명, 최고6.6명이 된다. 다음으로 1979년 현재 가장 인구가 밀집된 지역들(1제곱킬로미터당 200명 이상인 곳)만을 계산하면 이곳은 오늘날 조밀한 문명(civilisationdense)의 핵심 지역이 되는데, 누차에 걸친 계산 결과를 보면 이런 곳은 모두1,1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바로 이 좁은 띠 속에 거의 30억 명의 사람, 전체 인구의 70퍼센트가 모여 있다. - P69
사람들이 거주하는 세계, 즉 외쿠메네가 사람들이 살지 않는곳보다 부조리할 정도로 작아서 비대칭을 이룬다는 이 이미지는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어서, 때로는 소홀함으로 인하여, 또는 끊임없는 역사의 힘의 연쇄가 이미 그런 방향으로 결정해버려서 인간은 지구의 10분의 9를 비워두고 있다. - P69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몇몇 지점에 연속적으로 몰려드는 방식으로"⁸⁰ 인구가 누적되었다. 얼핏 보면 과거에는 인구밀도가 낮았으므로 1400-1800년 사이에 문명을 이룰 정도로 진짜 조밀한 인구집단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 쉽다. - P70
80. P. Vidal de la Blache, 앞의 책, pp. 10-11. - P762
우리는 유럽인의 정복이 아메리카 대륙에 충격을 가하기 전인 1500년경전 세계의 문명, 발달한 문화, 그리고 원시문화의 위치를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 당시의 문서, 이후 시기의 기록, 과거와 현재의 민속학자들의 연구 등을 통해서 우리는 정확한 지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문화의 경계가 수 세기가 지나도록 거의 변하지않기 때문이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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