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노시스의 전통에 의하면 인류에게 크라터(Kratér: 섞는 그릇), 즉 정신적 변환의 용기(容器)를 부여한 것은 바로 그 보다 높은 신이었다. 크라터는 여성원리로서 프로이트의 가부장적 세계에서는 자리잡을 데가 없었다. 물론 프로이트 혼자만이 그런 편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가톨릭 사상의 영역에서 신의 어머니와 그리스도의 신부가 성스러운 신방으로 받아들여져 적어도 그일부가 수용된 것은 수세기의 주저함 끝에 최근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다. - P367
연금술을 발견하기 전에 나는 동일한 주제의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우리집 옆에 어떤 다른 건물, 말하자면 다른 측면 회랑이나 낯선 부속건물이 서 있었다. - P367
드디어 내가 꿈속에서 그 다른 건물에 다다랐다. 거기서 나는잘 꾸며진 서재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주로 16~17세기 책들이있었다. 돼지가죽으로 제본된 큼직하고 두꺼운 2절판 책들이 벽을 따라 꽂혀 있었다. - P368
내가 잘 모르는 그 부속건물은 내 인격의 일부, 즉 나 자신의한 측면이었다. 그것은 내게 속해 있으나 내가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 P368
리하르트 빌헬름이 1928년에 내게 보내준, 중국 연금술에 속하는 ‘황금꽃의 비밀‘을 통해 나는 연금술의 본질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때 내 마음속에 연금술을 배워 알고자 하는열망이 일었다. 나는 뮌헨의 한 서적상에게 부탁해 그의 수중에들어오는 연금술책은 무엇이든지 내게 알려달라고 했다. - P370
나는 그 책을 거의 2년 동안이나 방치해두었다. 이따금 그림들을 들여다보고는 그때마다 ‘아이쿠,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그림이람! 사람들은 이 그림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거야!‘라고생각했다. 수그러나 그것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문헌을 철저하게 공부해보기로 결심했다. - P371
나는 곧 분석심리학이 연금술과 기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의 경험은 나의 경험이었고, 그들의 세계는 어떤 의미로는 나의 세계였다. 이것은 물론 나에게는 바람직한 발견이었다. - P372
확실히 의식의 심리학은 개인의 생활에서 이끌어낸 자료로도 충분히 해나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노이로제를 이해하려고하면 의식에 대한 인식보다 더 깊이 들어간 병력(病歷)이 필요하다. 그리고 치료과정에서 비상한 결단이 요구될 때 꿈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해석하려면 개인의 기억 이상의 것이 필요하게된다. - P373
나 자신도 그와 같은 꿈에 사로잡혀 있었고 열한 살 때부터 착수해온 ‘주요과업‘이 있었다. 나의 생애는 하나의 과제,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 P373
나만의 고유한 과학적 연구는 1903년의 연상실험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그것을 자연과학분야의 작업으로는 나의 첫 연구라고여긴다. 당시 나는 나만의 고유한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진단적 연상실험》 후에 정신의학저서 두 권이 나왔는데, 그것은《조발성치매의 심리학에 관하여》와 《정신병의 내용》이었다. - P374
나 자신의 무의식 이미지에 몰두하게 된 것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그 시기는 1913~1917년이었는데, 그후로는 환상의 흐름이 차츰 스러져갔다.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더이상 마법의 산 속에 잡혀 있지 않게 되자, 나는 그 모든 경험을 객관적으로 보고 거기에 관해 사색을 시작할 수 있었다. - P374
"내가 프로이트나 아들러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의 견해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내가 거기에 관해 숙고했을 때 유형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판단을 애초부터 결정하고 제약하는 것은 심리학적 유형이기 때문이었다. - P375
내가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을 낸 이래 줄곧 마음에 담아온주제는 리비도에 관한 이론이었다. 나는 리비도를 물리적 에너지의 정신적인 유사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것을 거의 양적인 개념이라고 여겼고 따라서 리비도에 관한 질적인 본질 규정을 모두 배격했다. - P376
물리학에서도 에너지와 그것의 여러 가지 표현, 즉 전기, 빛, 열 등에 관해 말한다.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심리학도 일차적으로 에너지를 취급한다. - P376
내가 심리학을 위해 이루려고 한 것은 자연과학영역의 일반적인 에너지론과 같은 그러한 통일성이었다. 나의 저서 《정신의 에너지에 대하여 (1928)》에서 내가 목표로 삼고 추구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 P377
예컨대 나는 인간의 본능을 에너지과정의 여러 표현으로 여기며, 열이나 빛들과 유사한 힘으로 본다. 현대 물리학자가 모든 힘을 이를테면 열에서만 끌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자 역시 모든 본능을 권력이나 성의 개념 따위로 분류할 수 없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초기에 범한 오류였다 - P377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에서는 단지 나 자신이 어떻게 무의식과 관련을 맺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만 밝혔을 뿐 무의식 그 자체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환상탐구에 몰두하면서 나는 무의식이 변환하기도 하고 변환을 야기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P377
나의 연구에서 본질적인 점은 일찍부터 세계관의 문제에 간여하고, 심리학과 종교적 문제의 대결을 다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심리학과 종교(1940)》에서 처음으로 그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그 뒤에 《파라셀시카(1942)》에서 다시 다루었다. - P378
내가 무위식의 상징표현이 기독교 또는 다른 종교오ㅓ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문제를 항상 생각해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기독교 복음에 문을 열어놓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서구인 정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 P378
기독교 관념과 분석심리학을 대면시키려고 시도하다가 나는 결국 심리적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라는문제에 이르게 되었다. 《심리학과 연금술》에서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연금술의 중심개념인 ‘라피스‘, 즉 돌 사이의 유사성을 제시할 수 있었다. - P379
녹색 금은 연금술사들이 인간뿐 아니라 무기물에도 존재한다고 여긴 생동하는 본성이다. 그것은 생명의 혼, 즉 ‘세계혼‘ 또는 ‘대우주의 아들‘, 전세계에 살아 있는 ‘안트로포스(Anthropos원래는 인간, 인류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좀더 근원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음-옮긴이)‘를 표현하고 있다. - P380
나는 아이온(1951)》에서 그리스도의 문제를 다시 다루었다. 그 책에서는 정신사적 유비(比)문제를 다루지 않고 그리스도 형상을 심리학과 대면하도록 했다. - P381
이러한 탐구를 하는 동안 역사적인 모습, 즉 인간 예수에 대한의문이 또한 제기되었다. 그 의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가 살던 시대의 집단적 심성은 그 당시 형성되었던 원형, 즉 안트로포스의 원초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거의알려지지 않은 한 유대인 예언자에게 집중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 P381
(전략). 그리하여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 재림의 가능성과 거기에대한 희망이 이미 활발하게 논의되고 환상을 보았다는 소문까지나돌고 있는데, 그것은 구원을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이 취한 형태는 과거에서는 비교할 만한 것을찾을 수 없고, ‘기술시대‘의 전형적인 아이의 모습을 보일 뿐이다. 미확인비행물체(UFO) 현상의 전세계적인 확산 같은 것이 바로 그렇다. - P382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지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 P219
환자들
취리히대학 정신병원인 부르크횔츨리에서의 수년간은 나의 수련기간이었다.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의 중심주제로 삼은 것은 ‘무엇이 정신병자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화급한 의문이었다. - P221
정신의학강의가 목표로 하는 것은 병든 인격에 관해 소위 추상화를 하고 진단과 증상의 기록, 통계로 만족하는 정도였다. 그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이른바 임상적 관점에서는 의사에게 중요한 것이 한 인간이요 한 개체로서의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 P221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트는 나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히스테리와 꿈의 심리학에 대한 기본적인 탐구를 그가 했기 때문이었다. - P222
그 무렵 깊은 인상을 남긴 한 가지 사례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사례는 ‘우울증‘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 입원하여 내가 근무하는 병동에 와 있던 젊은 부인에 관한 것이었다. - P222
처음에 나는 그 진단에 대해 감히 의심해보려 하지 않았다. 그당시 나는 아직 젊은 데다 신참이었으므로 다른 진단을 내릴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사례는 나에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 P222
연상검사를 통해 나는 그녀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비밀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녀가 우울증에 걸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요컨대 일종의 심인성 장애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치료법은 어떠했는가? 그때까지 그녀는 불면증 때문에 최면제 처방을 받고 있었다. 또한 자살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감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외 다른 치료는 시행되지 않았다. 그녀는 신체적으로는 건강한 편이었다. - P224
그럼에도 나는 결과가 아주 불확실한 치료법을 감행해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연상검사를 통해 알게 된 모든 사실을 그녀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P225
내가 동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이 사례에 대해 논의하면서 어떤 법적인 문제를 제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에게 있었다. - P225
1905년 나는 정신의학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했고, 같은 해 취리히대학병원 정신과 상급의사가 되었다. 4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다가 일이 너무 많아져 1909년에 사직해야만 했다. 해가 지날수록 개인병원 업무가 한층 늘어나는 바람에 나는 더이상 대학병원 일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13년까지 대학강사직은 유지했다. - P226
(전략). 이것이 나로 하여금 최면을 버리도록 한 체험들 중 하나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부인은 정말 완치되어 기뻐하면서 돌아간 것이다. 나는 늦어도 24시간 안에 그녀가 재발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상태를 알려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의 통증은 재발하지 않았다. 나는 의혹을 가지면서도 그녀가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해, 여름학기 첫 강의 때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바로 얼마 전에 다시 시작된 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 P228
드디어 나는 그녀의 통증이 정말로 신문에서 내 강의 공고를읽은 바로 그날, 그 시각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나의 추측을 입증해준 셈이었으나 나는 여전히 그 기적적인 치유라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 P228
사실상 그녀로 인해 나는 그 지방에서 마술사와 같은 명의로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곧 두루 퍼져나가 그녀 덕분에 나는 개인적으로 돌보는 환자들을 처음으로 얻게 된 셈이었다. - P229
처음에 나는 내 개인병원에서도 최면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최면술을 사용해도 암중모색으로 그칠 뿐이었기 때문에 곧 이 방법을 포기해버렸다. 우리는 개선이나 치료가 어느 정도 오래 지속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나는 그와 같이 불확실한 가운데 일하는 것에 대해 늘 저항을 느꼈다. - P230
1904~1905년에 나는 대학병원 정신과에 실험적 정신병리학실습실을 개설했다. 그곳에서 나는 몇 명의 학생을 데리고 그들과 함께 심리적 반응, 즉 연상에 대해 연구했다. 프란츠 리클린(Franz Riklin) 1세가 나의 공동연구자였다. - P230
이러한 연상에 관한 연구 덕분에 나는 그후 1909년에 클라크대학으로 초빙되었다. 그 대학에서 나의 연구에 관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나와는 별도로 프로이트도 초빙되었다. - P231
임상적 진단은 어떤 방향설정을 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환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점은 환자 ‘사연‘의 문제다. 그것이 인간적인 배경과 인간적인 고통을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사의 치료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 P236
(전략). 어느 날 저녁 늦게 병동을 지나가다가 나는 그 노부인이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동작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다시 한번 자문해보았다. "왜 저런 동작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고는늙은 수간호사에게 가서 환자가 이전부터 늘 저런 모양으로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요. 그런데 내 전임자는그녀가 이전에는 구두를 만들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환자의 낡은 병력기록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거기에 그녀가 구두를 수선하는 것 같은 동작을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후략). - P237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환자가 죽자 그녀의 오빠가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당신 누이동생은 왜 병이 들었죠?"라고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녀의 오빠는 자기 누이동생이 한 구두수선공을사랑했는데 그 사람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러자 그때 누이동생이 ‘돌아버렸다‘고 했다. 그 구두수선공 같은 동작은 연인과의 동일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 것이었다. - P238
그때 나는 이른바 ‘조발성치매‘의 심리적인 기원에 관해 처음으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후로 나는 모든 주의를 정신병에서 의미있는 관련성들을 찾는 데 돌리게 되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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