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건에서 내가 특히 주목한 것 중의 하나는 범인이 흉기로 문진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문진은 히다카 구니히코의 작업실에 원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히다카의 집을 방문한 당시에는 히다카 구니히코를 살해할 의사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 P87
하지만 여기서 히다카의 문단속에 관한 것이 문제로 떠오른다. 제1발견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집 현관 및 히다카 구니히코의 작업실 문은 잠겨 있었다. - P88
감식과에서 지문을 조사한 결과로는 현관문 손잡이에서는히다카 부부의 지문밖에 검출되지 않았다. 장갑을 낀 흔적도 천 따위로 닦아낸 흔적도 없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현관문이 잠겨 있었던 것은 히다카 리에가 집을 나설 때 잠가둔 그대로였다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 P88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추리가 실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범인이 그날 히다카가에 두 번 왔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본래의 목적을 위해 현관문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범인은 일단 히다카가를 떠난 뒤에 (정확하게는 떠난 척한 뒤에 다시 두 번째로 찾아왔다. 그때 그 인물은 모종의 결의를 가슴에 품고 이번에는 창문을 통해 침입한 것이다. 모종의 결의란 말할것도 없이 살의를 의미한다. 그 살의가 싹튼 원인은 그 전의 첫 번째 방문 때에 생겼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 P89
다음으로 노노구치 오사무 이 인물에 대해 생각할 때, 다소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예전 직장의 선배이며 나의 씁쓸한과거를 알고 있는 이들 중의 한 사람이다. - P90
노노구치 오사무는 오시마와 함께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에 히다카가로 향했다. 도착한 것은 정각 8시경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히다카 리에에게 연락. 그녀가 올 때까지 가까운 찻집 ‘램프‘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8시 40분경, 히다카가로 돌아가자히다카 리에가 막 도착하는 참이었다. 둘이서 집 안으로 들어갔고 사체를 발견했다. - P91
당일 점심에 히다카 구니히코는 아내와 쇼핑하던 중에 햄버거를 먹었고, 소화 상태를 통해 추정한 사망시각은 오후 5시부터 6시, 아무리 늦더라도 7시 이후일 수는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역시 노노구치 오사무의 알리바이는 완벽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건가. - P92
노노구치 오사무가 이번 사건에 대해 수기를 쓰고 있다는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만일 그가 범인이라면 사건의 세세한 부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런 글쓰기는 결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수기를 읽는 사이에 그런 생각이 완전히 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 P92
하지만 이윽고 나는 그의 수기에 감춰진 몇 가지 함정을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다. 게다가 재미있는 일은 그 이외에는 범인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황 증거까지도 그의 손으로 직접 쓴 기록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 P93
현재 장벽이 되고 있는 것은 그의 알리바이다. 하지만 그것도 따져보면 그 혼자서 주장하는 것뿐인 알리바이라고 할 수있다. 6시쯤에 걸려온 전화가 정말로 히다카 구니히코에게서 걸려온 것인지 어떤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 P93
"문제는 증거로군." 상사는 그렇게 말했다. - P94
나아가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동기였다. 히다카 구니히코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노노구치 오사무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보를 수집해 살펴봤지만, 노노구치 오사무가 히다카를 살해할 이유는 눈에 띄지 않았다. - P94
"노노구치 선생님은 사실은 교사라는 직업을 좋아하지 않는거야. 학생 일로 골머리를 썩이거나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저런 식으로 매사를 쿨하게 처리해버리는 거라고." 그녀에 의하면 노노구치 선생은 한시바삐 교사직을 그만두고 작가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교사들끼리의 술자리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것은 집에서 원고를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P95
"교사와 학생의 관계라는 건 착각 위에 성립되는 거야. 교사는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다고 착각하고 학생은 뭔가를 배우고있다고 착각하지. 그리고 중요한 건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행복하다는 거야. 진실을 알아봤자 좋을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거든. 우리가 하는 일은 말하자면 교육 놀이에 지나지 않아." 어떤 체험을 바탕으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나는 알지 못한다. - P96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뭘까." 찻잔을 그 앞에 내려놓으며물어보았다. 그때 내 손이 떨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가가 형사도 내 손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찻잔에는 손을 대지 않고 똑바로 내얼굴을 보았다. "실은 말씀드리기 힘든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 P100
"선생님 댁을…... 이 집을 수색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가가 형사는 괴로운 듯 그렇게 말했다. - P100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방을 뒤져봤자 아무것도 안 나와." "그러면 좋겠지만・・・・・ 분명 뭔가 나올 거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잠깐, 그건 혹시 이런 얘기인가? 자네는 히다카를 살해한 범인이 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증거가 이 집 안에 있다...." 가가 형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 P101
"영장은 가져왔습니다." "수색 영장이라는 건가?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을 보여주기 전에 이유를 말해줄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 "왜 선생님을 의심했느냐, 라는 건가요?" - P102
"물론 그렇습니다만, 우리로서는 선생님의 그 증언의 근거가 전화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전화라면 정말로 그 사람이 걸어왔는지 어떤지 알 수 없으니까요." "아니, 그 목소리는 히다카였어. 틀림없어." "하지만 그걸 증명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 이외의 어느 누구도 그 전화를 받은 게 아니니까요." "전화라는 건 원래 그런 거잖아? 허 참, 이건 뭐, 믿어달라는말밖에는 더 할 말이 없군." - P103
"그렇지. 하지만 그걸로는 증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로군. 전혀 다른 사람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마치 히다카에게서 걸려온 전화인 것처럼 내가 연극을 했다. 자네는 그런 말을 하고싶은 거지?" 그러자 가가 형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고 나서말했다. "그럴 가능성을 부정할 만한 이유가 없었어요." - P104
가가 형사는 말했다. "그런데 재떨이에는 꽁초가 한 개뿐이었어요." "응?" "단 한 개뿐이었습니다. 히다카 씨의 작업실 재떨이에는 꾹꾹 눌러 끈 담배꽁초 하나가 있었을 뿐이에요. 후지오 미야코씨가 돌아간 게 5시 넘어서였고, 그 뒤에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면 당연히 담배꽁초가 더 많았어야겠지요. 게다가 그 단 한 개의 담배꽁초는 집필을 하면서가 아니라 노노구치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동안에 피웠던 것이죠. 그걸 선생님의 수기에서 알아냈어요." - P105
"그러니까." 그가 말을 이어갔다. 히다카 씨는 혼자 남은 뒤부터 살해될 때까지 단 한 개비의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이점에 대해 리에 부인에게 물어봤더니, 예를들어 30분이라도 집필 작업을 했다면 최소한 두세 대는 피웠을 거라는 대답이었어요. 게다가 일을 시작할 때는 특히 담배를 많이 피우는 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 개비도 피우지 않았어요. 자,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까요?" - P106
"히다카 씨는 낮에 쇼핑을 갔던 길에 네 갑을 사왔어요. 책상 위에는 열네 개비가 남은 담뱃갑 하나, 그리고 서랍에는 새 담배 세 갑이 있었습니다." - P106
"다시 담배 얘기로 돌아가면, 히다카 씨는 후지오 미야코와얘기할 때는 한 개비도 피우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이미 알고있습니다. 리에 부인에 의하면, 이전에 후지오 미야코가 담배연기에 불쾌한 얼굴을 보인 적이 있어서 되도록 이야기를 좋게 풀어나가기 위해서도 앞으로 후지오 미야코 앞에서는 담배를 삼가는 게 좋겠다고 히다카 씨 본인이 말했다더군요." - P107
"선생님이 히다카 씨 집에서 나오던 때의 일을 선생님 스스로는 지난번 수기에 다음과 같이 쓰셨어요. ‘안녕히, 라는 인사와 함께 그녀는 내가 다음 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배웅해주었다. 여기서 ‘그녀‘라는 건 리에 부인입니다." - P109
"그럴까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선생님이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쓴 것으로 보이거든요. 즉 그런 식으로 수기를 써서 사실은 히다카 씨 집의 대문을 나서지 않고 정원 쪽으로 돌아 들어갔다는 것을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하고요." - P109
"좋아, 알겠어. 뭐, 그것도 괜찮겠지. 어떤식으로 추리하든그건 자네 마음이야. 근데 어차피 얘기를 듣는 김에 그 뒤의 시나리오도 좀 듣고 싶군. 정원 창문 밑으로 숨어든 나는 그 뒤에 어떻게 한 거야? 창문으로 넘어가서 느닷없이 히다카를 내리쳤나?" "그랬습니까?" 가가 형사는 내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질문한 건 나야." - P110
"그건 그렇지만 누군가 전화를 해주지 않으면 이 전화기는 울릴 수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고 나는 손뼉을 따악 쳤다. "아하, 알겠어, 자네는 이렇게 말하려는 거군. 그때 나는 휴대전화를 몰래 갖고 있었다. 그리고 오시마 군의 눈을 피해 이 집에전화를 걸었다. 그렇지?" "그런 방법으로도 이 전화기를 울리는 건 가능하겠군요." 그가 말했다. "근데 그건 안 돼. 나는 휴대전화도 없고, 어디서 빌릴 데도 없어. 게다가………… 만일 그런 트럭을 썼다면 간단히 조사해볼수 있잖아? 전화국에 기록이 남아 있을 테니까." - P111
"네, 조사했습니다." 가가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서, 결과는?" "6시 13분에 여기선생님 댁으로 발신한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 P112
그리고 가가 형사는 다시 덧붙였다. "이런 일은 선생님의 수기에는 없었어요. 마치 오시마 씨가 집에 오기로 오래전부터 약속한 것처럼 적혀 있었죠." - P115
가가 형사는 어느새 나를 ‘선생님‘이 아니라 ‘당신‘이라고했지만, 그런 것이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게 이 자리에 더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 P116
그는 말했다. "그건 히다카가에 있던 본래의 전화 쪽이에요. 만일 히다카 씨가 정말 이 집으로 전화를 했다면 재발신 버튼을 눌렀을 때 당연히 이곳으로 연결이 됐겠지요." - P117
"반론은 안 하십니까?" 의외라는 듯이 그가 물었다. - P117
"원고에 대한 이야기가 없군." 나는 말했다. "히다카의 컴퓨터에 들어 있던 『얼음의 문 연재물 말이야. 지금 자네의 추리가 맞는다면, 그는 언제 그 원고를 썼지?" - P118
"또 하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내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 원고는 당신이 썼다는 것이죠. 그날 당신은 원고가들어 있는 플로피디스크를 히다카 씨의 집에 가져갔고,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급하게 히다카 씨의 컴퓨터에 입력했던 거예요." - P118
"그 원고를 소메이 출판사의 야마베 씨라는 분에게 보여줬어요. 야마베 씨의 의견은 이건 명백히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히다카씨의 글과는 문체가 미묘하게 다르고 행을 바꾸는 방식 같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다른 점이 눈에 띈다고 했어요." - P119
"자네가 찾는 것이 발견된다면 나를 체포하겠군." "그렇습니다. 유감스럽지만." "그 전에 ・・・・・…." 나는 물었다. "자수하는 것도 가능할까?" 가가 형사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 뒤에 그는 딱 한 번 고개를 저었다. - P120
"언제부터 나를 의심했지?" 나는 가가 형사에게 물었다. 첫날 밤부터, 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첫날 밤부터? 내가 뭔가 또 다른 실수를 했나?" "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P121
"게다가 선생님은 다음 날 다시 한번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이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였죠. 그때 확신했어요. 선생님은 사건이 일어난 시각을 알고 싶은 게 아니라 경찰이 사망 추정 시각을 몇 시쯤으로 생각하는지, 그것을 알고싶은 것이라고." - P121
"아니, 나는 자살 같은 건 안 해."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상하게도 극히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가가형사 역시 자연스러운 웃음을보여주었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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