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한 챕터만 읽고 잘 생각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궁금해진다. ‘가만있자, 케빈이 로런에게 남긴 쪽지를 미셸이 발견하면 어쩌나? 틀림없이 오해할 텐데! 그랬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려고 한 페이지만 더 읽기로 한다. 한 페이지가 세 페이지가 되고, 열 페이지가 된다. 순식간에 피곤이 날아간다. - P22
그런데 도대체 왜 소설을 계속 읽었을까? ‘난 의지가 박약한가 봐. 계획대로 한두 페이지만 읽고 딱 내려놓는 게 그렇게 어렵나?‘ 자책하기 전에 알아둘 것이 있다. 우리 뇌는 잘 만든 스토리를 도저히 마다하지 못한다. 당신은 소설을 계속 읽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정한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적 반응이자, 본능에 따른 행동이었다. - P23
스토리와 뇌는 왜 나란히 진화했으며, 스토리가 우리에게 그리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우리 뇌가 스토리 속에서 본능적으로 무엇을 찾고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아보면서 스토리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 P24
소설책을 읽느라 밤을 꼴딱 새운다는 것은 누가 봐도 먹고 사는 데 도움이 안되는 행동 아닌가. 그래도 지금 당신은 밤새 생명을 부지하기라도 했지, 옛날 석기시대에는 밤을 무사히 보낸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 P24
아닌 게 아니라 그럴 만한 굉장한 이유가 있다. 스토리는세계 최초의 가상 현실이었다. 우리는 스토리 덕분에 현실을 잠시 떠나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늘 가장 두려워하는 미지의 세계와 예상 밖의 사건에 대비할 수 있었다. 호시탐탐하는 맹수와 약탈자들의 습격을 막아낼 꾀를 생각해 내는 데 그보다 좋은방법이 있을까? - P25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보편적 특징이라는 점만 생각해 보아도, 스토리라는 것이 그저 흐린 주말 오후나 잠들기 전 밤에 시간 때우기 좋은 놀잇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 P25
도대체 왜, 옥스퍼드 영어사전처럼 권위 있는 사전조차 스토리를 가공 또는실제 인물과 사건에 관해 재미있게 들려주는 말로 정의하는걸까? 그 답은 간단하다. 스토리가 일으키는 감정, 즉 그 달콤하리만큼 유혹적인 쾌감을 스토리의 목적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 P26
스토리가 재미있는 이유는 음식이 맛있고 섹스가 기분 좋은 이유와 똑같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 P26
그러나 스토리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도 음식과 섹스 못지않게 지대하고 운명적이며 생물적이다. 알고 보면 우리가 재미있는 스토리에 빠질 때 느끼는 쾌감, 밤새도록 책을 붙잡게만드는 그 쾌감은 헛된 것도, 무의미한 것도 아니요, 그저 쾌락을 위한 쾌락도 아니다. - P27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 대니얼 길버트의 말을 빌리면, "감정은 중요하다는 말로는부족하다. 중요하다는 개념 자체가 곧 감정이다."¹ 삶 속에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이성적 결정을 전혀 내리지 못한다. 인간의 생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 - P28
1 D. Gilbert, Stumbling on Happiness (New York: Vintage, 2007), 76. - P442
못 믿겠는가? 동네 영화관에 가서 공포영화를 하나 보라. 사력을 다해 도망가는 불쌍한 사람을 괴물이 덮치려는 순간, 고개를 뒤로 돌려 관객들을 보자. 갓설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같은 모습을 목격할 가능성이 높다. "관객들이 자리에서 몸을 비비꼰다. 팔꿈치를 몸에 붙이고 무릎을 들어 올린다. 몸을 동그렇게 말아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려는 자세다." - P29
여기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물리적 환경에서의 생존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서의 생존도 아우르는 개념이다. 통념과 달리, 집단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는 음식, 공기, 물에 대한 욕구와 다를 바 없는 생물적 욕구다. - P30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기발한 발명으로 세상을 뒤집어놓는 천재라 해도 자기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다. - P30
그리하여 스토리의 목적은 단순히 물리적 세계의 신비를이해하는 것을 넘어 더 복잡한 사회적 환경을 해독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훨씬 더 까다로운 일이었다. 물리적 세계는 눈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 이를테면 ‘사자가 아무리 순해 보여도 쓰다듬으면 안 된다‘ 같은 금기야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은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 P31
그도 그럴 것이, 그 비밀은 아직까지 국가안보국 요원이나 페이스북 직원들도 들여다보지 못하는 장소에 고이 감춰져있으니, 그곳은 바로 사람들의 머릿속이다. 사람들이 믿는 것은 무엇이며, 왜 그런 믿음을 갖고 있을까? - P31
길리언 플린의 소설 《나를 찾아줘》의 첫 페이지에서도 남편 닉은 아내의 마음을도통 알 수 없다며 이렇게 속으로 묻는다. "에이미, 무슨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점쟁이를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이어지는 닉의 말마따나, "아내의뇌를 실타래처럼 풀어내 샅샅이 훑으면서 생각들을 붙잡아 파악해 보려고 해야 할까? 그럴 수야 없을 것이다. - P32
우리의 본능적 반응을 끌어내는 것도 그것이요,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고자 하는 작가가통달해야 할 것도 그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스토리란 무엇인가? - P33
우선, 스토리가 ‘재미있게‘ 만든 것이라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정의부터 폐기하자 영 잘못 짚은 정의다. 그럼 음식은 오로지 맛있게 만든 것인가. 게다가 사전 정의가 대개 그렇지만 막연하기 짝이 없다. - P33
그렇다면 스토리를 재미있게 만드는 요인은 대체 뭘까? 아름다운 문체도, 극적인 사건도 아니라면 무엇이 독자를 혹하게할까? - P34
한마디로 말해서 스토리란,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가운데어려운 목표를 추구하는 누군가가 영향을 받는 과정, 그리고결과적으로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이다. - P34
‘어려운 목표‘는 간단히 생각하면 이른바 ‘스토리 문제storyproblem‘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스토리는 점점 고조되는 한 가지 문제를 주인공이 불가피하게 마주하고 풀어 나가는 과정이 중심이다. 쉽다면 문제라고도 할 수 없고, 스토리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피상적인 문제여서도 안 된다. - P35
스토리란 결국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수많은 소설이 그 점을 간과하는 탓에 실패한다. 우리가 스토리를 찾는 이유는 그저 흘러가는 사건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고심하고, 주인공의 눈으로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 P36
그러나 작가들이 골치 아플 수밖에 없는 게, 스토리에 반응하는 행동이야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아무 생각 없이 할 수있지만, 독자의 뇌를 장악하는 스토리를 ‘쓰는‘ 능력은 처음부터 타고나지 않는다. - P36
애초에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쓰는 능력이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알아보는 능력처럼 우리 뇌에 단단히 새겨진 본능이었다면, 우리는 모두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 P36
이미 짐작했겠지만, 스토리 쓰는 일은 꽤 어렵다. 그건 맞다. 하지만 결코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다. 수많은작가가 첫걸음도떼기 전에 좌절하는 이유가 있다. - P37
문제는, 글 잘 쓰는 법을 배우려다가 스토리를 완전히 놓쳐 버린다는 것.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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