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은 자에 대한 응징

가장 빈번히 거론되는 대중문화의 소재이자 흔히 떠올리는 시체 발굴의 중심 대상은 아마도 뱀파이어일 것이다. 
(중략)
사실 드라큘라 백작이 동유럽권을 배경으로 탄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8세기 초 세르비아와 왈라키아 일부 지역이 오스트리아에 합병되면서 해당 지역에 새롭게 파견된 담당 관리들은, 유해를 발굴해 예리한 나무 말뚝으로 찔러보는 기괴하고도 거북살스러운 지역 관습을 접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 P66

 이처럼 섬뜩한 일련의 의식에 겁을 집어먹은 담당 관리는 상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혹여 착오가 발생한다고 해도 본인의 책임 사항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고 날뛴 저 폭도들을 탓해야할 일입니다."³⁶

36 뱀파이어와 매장, 그리고 죽음: 민속과 생활 (Vampires, Burial and Death: Folklore and Reality), 폴 바버 저, pp.309 - P68

실제로 특이한 환경 조건이 한 가지만 존재하더라도 부패는 지체될 수있다. 사체의 부패 정도는 공기, 습도, 온도, 미생물과 곤충의 존재 여부에 따라 달라질 뿐만 아니라 매장되는 장소의 온도가 매우 낮은 경우 등 기타 변수도 작용한다. - P68

플로고요히츠의 사례 역시 이 경우에 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겹의 목판과 함석으로 제작된 관을 점토에 묻거나 시신을 석회로 덮어두면(생석회와 달리) 시신의 영구 보존이 가능하다. 플로고요히츠의 피부가 생장하는 듯 보이는 현상 역시 뱀파이어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매도될 필요는 없었다. - P68

키실로바 주민들이 ‘생존‘의 징표로 오인한 또 다른 현상 중 시신의 손톱이 자라나고 ‘새살‘이 돋는 듯한 모습 역시 탈수로 유발되는 수축 때문에 느껴지는 환상에 불과하다. 정상적 부패 과정의 일부로 피부 상피가 분리되면 아래쪽의 불그스름한 속살이 드러난다.  - P69

플로고요히츠가 뱀파이어로 탈바꿈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또 다른 증거로 간주된 발기 현상은 박테리아가 발생시키는 가스가 활성화됨에 따라 성기가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 P69

그러나 이러한 사례가 18세기 유럽 슬라브족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다. 뱀파이어 발굴과 관련된 내용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시기는 20세기 직전으로, 뉴욕과 고작 240킬로미터 떨어진 로드아일랜드 엑서터 Exeter 지역이 그 배경이다. - P70

이후 엑서터에서 일어난 일은 170여 년 전 키실로바 마을에서 벌어진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체스트넛 힐 Chestnut Hill 묘지 지하 납골당에 머시가 잠시 매장된 후(묘터의 땅이 너무 얼어 있어서 그녀를 묻어두기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조지 브라운은 몇몇 지인을 대동하고 묘지로 찾아가 딸의 유해를 발굴했다. 당시, 냉동고처럼 얼어붙은납골당 내부 조건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부패의 흔적을 찾아볼 수없을 정도로 멀쩡한 머시의 시신은 뱀파이어에 관한 소문을 사실로 증명하는 듯했다. - P70

유럽 이주민들 사이에 전해오는 설에 따르면 머시처럼사후에 심장이나 간에서 혈액이 발견되면 해당 장기를 태워 환자(본 사례의 경우 에드윈)에게 먹임으로써 뱀파이어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따르면 에드윈은 목숨을 부지했어야 하지만, 이 청년은누이의 유골을 태워 마셨는데도 두 달 만에 사망했고 묘지에서 자행된 이같은 만행은 모두 헛된 소동인 듯했다. - P71

진상 파악

. 근대에 들어 시신은 장례 후 수년이 지나 흔하게 발굴되기도 한다. 대개 관 속에 안치된 이가 묘석에 기재된 실제 사망자인지 확인하기위함이다.
인간은 본래부터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를 그냥 내버려두지 못한다. 고인이 된 영웅이나 정치가, 범법자 혹은 성인이라면 으레 사망의 경위나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발굴되어 엑스레이, DNA 검사, CAT 스캔 및 각종 독극물 검사가 잇따르는 이른바 ‘CSI 조사‘를 거치게 된다. - P71

 미국 대통령도 이런 첨단 조사를 피하지 못했다. 취임한 지 16개월 만에 집무실에서 사망한 제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는 독극물 테스트를 위해 1991년 시신이 발굴되었다. 조사 결과 거친 풍파를 이겨낸 준비된 장군‘이라 불리던 그의 사망 원인은 단순한 위장 질환으로 판명되었다.

2004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착수된 메디치가 Medici 49인의 유해 발굴작업은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야심차게 진행되었다. 각국 고생물병리학자와 인류학자, 고고학자, 사학자들이 산 로렌초 교회 묘지로 몰려들어 발굴작업에 참여했다. 발굴단은 당시의 생활상과 사인 규명을 위해 대공 8인을 비롯한 시신 여러 구를 대상으로 다양한 첨단 수사를 진행했다. - P72

어린 아이의 유해 8구가 발견됨에 따라 작업은 난항을 겪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 관 속에 있는 시신과 묘석에 새겨진 인명이 일치하지않았다. 마치 수세기 동안 휴식을 취하던 중 무료해진 시신들이 걸어 나와 돌아다니다가 서로 자리를 바꾸기라도 한 듯했다. - P72

1998년 이탈리아 파도바 Padova에서는 수세기 동안 성 누가 St. Luke로 알려진 인물을 검증하기 위해 해당 시신을 발굴했다.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를통해 채취된 39개 서열은 현대 그리스 및 시리아인과 비교 조사했다(성서에는 누가가 본래 시리아 안디옥Antioch 출신이라 기록되어 있다). 조사 결과 파도바에서 발굴된 시신은 실제로 시리아인의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전설적 무법자 제시 제임스Jesse James의 무덤만큼이나 의문에 가려진 경우도 드물다. 남북 전쟁 당시 연합군 소속으로 활동한 제시와 그의남동생 프랭크는 결탁하여 ‘제임스-영거 James-Younger‘라는 이름으로 악명을 떨치며 미주리, 미네소타, 테네시 주 등지에서 16년 동안 은행털이와열차 절도를 일삼았다.

사후에 그의 유해는 미주리 주키니 Kearney에 있는 가족 농장으로 반환되었고, 사체의 절도나 훼손을 우려하여 앞뜰에 매장되었다. 이후 1902년에 제시의 유해는 키니의 마운트올리벳Mount Olivet 가족 묘지로 옮겨져 재매장되었는데, 생전에 악명 높았던 그에게 사후의 평화로운 휴식이 허락되지 않는 듯했다.
재매장되고 나서 약 50년이 지난 1951년, 텍사스 그랜베리Granbury에서 사망한 103세 노인의 신원 확인을 위해 호출된 보안관 오런 C. 베이커Oran C. Baker는 이 사체가 제시 제임스의 것이라는 데 대해 조금의 의심도품지 않았다.

 제임스의 친족들과 유해의 DNA 조사 결과가 99퍼센트 일치함에 따라 발굴된 유해가 전설적 악당의 것임은 거의 확실시된다. 한편 텍사스 출신이었던 프랭크 돌턴의 유해는 2000년에 발굴되었는데, 시신의 팔이 한쪽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생전에 돌턴의 양팔이모두 성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묘석에 적힌 이름의 주인공과 발굴된사체가 다를 가능성이 크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위장하려 한 사람이 정작 저승에서는 외팔이 사기꾼에게 당한 꼴이 되어버렸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예기치 않게 공개되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유해 발굴을 통해서 알아내고자 한 진실이 반드시 드러난다거나 항상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유해가 보존되지만은 않는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 P74

7
지상에서 우주까지

추모의 다각화


예를 들면 유해를 우주로 쏘아 올리는가 하면, 인공 산호초로 에워싸기도 하고, 망자가 응원하던 축구팀을 대표하는 색으로 맞춤 제작한 관에 시신을 안치하는 등 오늘날 장례식은 실로 다채롭게 진행되고 있다. 성가조차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우니 Abide with Me>와 <나 같은죄인 살리신mazing Grace> 등의 기존 인기곡이 빌보드 차트 40위에 드는 곡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추세이다. - P161

한때 중국에서는 파격적인 분위기의 장례식이 시도된 바 있다. 2006년8월 중국 장쑤 성에서는 장례식에 스트립쇼 공연단을 보낸 혐의로 5명이 체포되었다. 장례식 참가자들은 영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에로틱한 공연의 관객으로 대우받았고, 이러한 분위기는 마치 남성들의 술자리(총각파티)를 연상케 했다.  - P162

 물론 지역 주민들은 불만스러워했는데, 그들은 장례식 참석 인원과 고인의 명예는 비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슬아슬한 옷차림과 풍만한 가슴을 뽐내는 젊은 여성 공연단을 투입하는것보다 장례식 규모를 부풀릴 효과적인 방법이 또 있을까?

엄숙히 슬퍼해야 할 때

 19세기 영국 사회에서는 요크 공작과 같은 왕족은 물론 남편이나 부친 등 친족에 이르기까지 대상의 신분 계층을 막론하고 무척 진지한 태도로 애도의 예를 갖추었다. <월간 여성Ladies Monthly》과 같은 패션 잡지는 애도 기간에 바람직한복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애도 의식이 진정한 예술로 승화된 시점은 이로부터 수년 후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부터이다.

일례로 1860년대 후반, 영국에서 과부는 사실상 사회와 단절된 존재였다. 남편의 사후 첫해 동안 이들은 어떠한 초청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과부들은 또한 꼬박 일 년 하루 동안 깊은 애도에 임해야 하고 반사광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검은색 크레이프만 착용할 수 있었다. - P163

 패니 더글러스 부인Fanny Douglas은 1890년에 발행된 숙녀의 복장 규범서 Gentlewoman‘s Book of Dress」에서 마침내 외출을 허락받은 과부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심각한 어조로 기술했다. "거리의 오물이 묻는 것을 피하도록 치마를 들어 올릴 때는 주름 장식이 달린 검은색 페티코트와 무늬 없는 검은색 스타킹을 살짝 드러내어 남편을 잃은 슬픔이 자신의 가장 은밀한 성역에까지 침투했음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양산을 펼치는 것은 지극히 경박한 행위로,
과부에게는 상복 소맷자락으로 햇빛을 가리는 것조차 사치가 아닐 수 없다." - P163

일 년간의 애도를 마친 과부들은 이제 약식 애도 단계로 들어가며, 이때부터는 검은색 크레이프 대신 비단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렇게 12개월이 지나면 자주색이나 연한 자주색 옷을 입는 것이 허락되었다. 또1850년대 아닐린 염료가 개발되면서부터는 보라색이나 청자색, 엷은 자색, 체꽃색, 엷은 자줏빛 의상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약식 애도 기간에는 특정 보석류를 착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일반적으로 진주와 자수정 등을 지닐 수 있었으나 가장 인기를 끈 것은 흑옥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이 사망한 지 25주년이 되는 1887년에 마침내 상복을 벗고 은 장신구를 착용한 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애도 규범을 완화하는 데 동의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과도한 애도의 형식이 막을 내리고, 애도를 대표하는 색으로 검은색 대신 은색이 성행하기시작했다. - P164

빅토리아 시대에는 장례를 치르고 나면 으레 ‘애도 카드‘를 발송하여 망자의 죽음을 주변에 알렸다. 처음에는 고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는 의미로 주변에 카드를 나눠주었으나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서는 카드 발송이 장례 절차로 굳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다소 과장되고 지루할 만큼 길던 영국식 애도 풍습도 차츰 사라졌다. 74만 5천 명이라는 유례없이 많은 전사자를 낸전쟁이 끝나자 영국 정부는 기존의 빅토리아 시대 상복 대신 검은색 완장을 착용하도록 장려했고, (후략)

그렇더라도 여전히 일부 문화권에서는 애도 의식에 관해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하기도 한다. 그리스 정교회 중심의 사회에서 과부들은 2년동안 검은색 옷만 입어야 한다. 힌두교에서는 애도 기간에 흰색 복장을 입는 것만 허락되고, 과부는 평생 사별한 남편을 기리며 살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과부는 한 달에 한 번씩 머리카락을 잘라야 함은 물론 장신구를 착용하지 못하며, 결혼 피로연과 같은 축제에 참석할 수 없다. - P166

그런가 하면 힌두교의 사티sati 제도는 무척이나 잔인한 애도 풍습으로 손꼽힌다. 힌두교 사회에서 과부가 된 기혼 여성은 남편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입증하는 의미로 장례 당일에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되어야 했다(자의든 타의든 간에). - P166

그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1987년 9월에 사망한 루프 칸와르Roop Kanwar에 관한것으로, 당시 18세였던 그녀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다고 전해진다. 혼인한 지 8개월째에 접어들던 어느 날 남편이 맹장 파열로 사망하자 칸와르 부인은 결혼 당시 착용했던 예식 사리를 두른 채 남편을 화장하기 위해 쌓아놓은 장작더미로 기어 올라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시동생에게 점화할 것을 재촉했다. - P167

머리카락의 소장 가치

엄격한 규범과 크레이프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빅토리아 시대를 풍미한 애도 의식은 여전히 21세기 영미권 사회에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유족들은 고인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내어 유품으로 소중히 간직함으로써 떠나간 이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두고자 했다.  - P168

고인의 머리카락으로 장신구를 제작하고자 모발을 땋고 가공하는 작업의 수요가 급증하자 헤어 아티스트라는 직종이 생기기에 이르렀고,
이들의 기술은 높이 평가되었다. 거금을 들여 헤어 아티스트의 손을 빌릴 수 없는 사람들은 알렉사나 스파이트Alexanna Speight의 안내서 모발의 취급Lock of Hair (1891) 등을 참고해 스스로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경우에는 결과물의 완성도를 장담할 수 없었다. - P168

오늘날에도 브로치나 팔찌, 목걸이 등에 고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넣어 봉한 다음 평소에 지니고 다닐 수 있다. - P168

코네티컷 주 웨스트포트에 거주하는 존 레지니코프John Reznikoff는 가장 왕성히 활동하며 높은 수익을 올리는 수집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백여 점이 넘는 다양한 머리카락을 소장하고 있다.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e, 나폴레옹, 웰링턴 공작 Duke ofWellington, 에이브러햄 링컨(거래가 75만 달러), 헨리 포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군대식 헤어스타일이었을 당시)의 머리카락이 모두 그의 소장품이다.
최근 레지니코프는 고인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매입해 논란에 휩싸였다. 머리카락의 주인은 바로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으로 당시 3,000달러에 매매되어 현재 레지니코프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 - P169

손톱이나 혈액을 대상으로 성행한 중세 시대의 유물 거래가 다소 역겹거나 끔찍하게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오늘날의 유물 거래도 과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봄 직하다.

다이아몬드, 여성의 로망

 그러나 실제로 미국과 스위스의 한 업체가 각기 고인을 화장하고 나서 남은재를 이용하여 다이아몬드로 변모시키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리고 최대2만 2,000달러에 달하는 거금을 들여 연간 수백 점에 달하는 ‘인간 다이아몬드 diamond geezers‘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 P170

한편, 스위스업체 알고르단자Algordanza 측은 자사의 다이아몬드 제품은 철저하게 자연소재로 제작되며 일절 첨가물이 더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업체가 발표한 바로는 다이아몬드의 색은 고인이 생전에 섭취한 음식물에 따라자연적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인이 채식주의자였다면 다이아몬드는 옅은 푸른색을 띤다. - P171

오브제, 예술과의 접목

목걸이나 반지 등에 고인의 유해를 넣어 다니는 데 그치지 않고 유해 자체를 빛나는 보석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크리스털은 영원히 Crystal Eternity‘
라는 한 업체는 인체를 태워서 나온 재와 액체 상태로 녹인 유리를 혼합한 유리 기념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유리 제품은 제각기 독특한 디자인을 자랑하면서 오래도록 고인을 기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P172

이즈음에서 더 실제적인 유물의 예를 들어보자. 1967년에 프리스비(원반 던지기 놀이에 쓰이는 플라스틱 원반, 고유 상표명)로 특허를 획득한 에드헤드릭 Ed Headrick은 친구와 친족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프리스비에자신의 모습을 찍어 넣었다. - P172

그런가 하면 친환경적 기념품도 있다. 1998년에 사망한 칼턴 글렌 파머 Carleton Glen Palmer는 자신의 유골이 환경 보호와 관련된 분야에 사용되기를 희망했다. 당시 열성적인 환경 운동가이기도 했던 파머의 사위 돈브롤리 Don Brawley는 ‘리프 베리어 개발 그룹‘이라는 업체를 운영했는데, 이곳에서는 친환경 소재의 콘크리트 볼을 해저에 가라앉혀서 파괴된 산호초를 대체하게 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 P173

그러나 화장이 반드시 가장 친환경적인 시신 처리 방식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물론 화장을 택하면 토양과 지하수 오염의 우려가 있는 유독방부 처리 용액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고 산이나 바다에 유골을 뿌릴 필요도 없으며, 묘지 정돈에 사용되는 제초제나 휘발유를 연료로 하는 잔디 다듬는 기계를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 P173

화려한 최후

 억만장자들은 2,500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우주여행을 하기도 하는데, 단 995달러면 자신의 유골을 우주로쏘아 보낼 수 있다. 실례로 텍사스 주 휴스턴에 있는 셀레스틱스 사Celestics Inc에서는 추모 우주 비행 편을 제공한다. 1~7그램 정도의 유골을 립스틱 용기 크기의 개별 캡슐에 넣은 다음 인공위성에 부착된 추모 우주선에 실어 우주로 보내는 원리이다.

그런가 하면 그중에는 LSD 주창론의 권위자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의 유골도 있었다. 그 역시 《워싱턴 포스트》의 표현처럼 ‘처음이자 마지막, 그러나 혁신적 여행‘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들의 유골을 담은 캡슐이 5년간 지구를 선회하다가 대기권으로 재진입하면 유골은 2차 소각의 순간을 맞이한다. - P176

아무리 아끼던 사람이라지만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장례 비용이 다소 부담스럽다면 더 저렴한 방법도 있다. 에식스에 있는 ‘폭죽 천국 Heavens.
Above Fireworks‘이라는 업체는 1,470~2,950달러 선에서 유골을 넣은 폭죽을 제작해준다. 이렇게 맞춤 제작된 폭죽이 터질 때 업체에서 서비스로 고인이 선호하던 곡을 배경 음악으로 틀어주기도 한다. 베스트셀러 3부작 소설 『다크머티리얼즈Dark Materials』 (인기 판타지 영화 <황금 나침반>의 원작)의 저자 필립 풀먼Philip Pullman 역시 폭죽을 통해 양아버지를 기리고자 했다. - P177

 2002년 5월 세스너Cessna 사의 경비행기 한 대가 시애틀 매리너스Seattle Mariners 구단의 홈구장인 세이프코필드 상공을 선회하다 비행기에 탑재된 컨테이너 틈으로 회색 가루를 살포하자 야구장에 온 관중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 P178

관계자들의 과장된 반응에 놀란 조종사는 자신은 단지 유골 살포를 위해 고용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사실이 밝혀지자 미 연방항공국 소속 데이브 밀러 Dave Miller는 "유골 살포 위치를 경솔하게 택한 경우"라고 무덤덤하게 언급했다."⁷² - P178

차별화된 나만의 공간

뉴캐슬 지역에 거주하는 레슬리 맥기네스Lesley McGuiness는 30대에 요절한 남편을 기리며 생전에 그가 가장 아낀 축구팀의 셔츠 모양과 색상을 본떠 묘석을 제작했다. 이 묘석은 가업을 이어받아 조셉 리치먼드 앤드 선Joseph Richmondand Son 사에서 근무하던 사이먼 리처드Simon Richard가 제작한 것으로, 화강암재질에 뉴캐슬 유나이티드Newcastle United 팀을 대표하는 검은색과 흰색이칠해졌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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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와 나쁨의 미덕에 관하여
마크 T. 코너드


지금은 현존재의 희극이 아직 스스로를 ‘의식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아직 비극의 시대에, 도덕과 종교의 시대에 살고 있다.¹ - 니체 - P87

그럼 이제 또 다른 악동, 철학계의 악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뭐라고? 여러분은 철학계에 악동이 없다고 생각했는가?). 그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철학적으로-더없이 못된 사람이었다. 또 시건방진 말만 내뱉는 철학적 비행 소년이기도 했다. 그는 권위에 대들었고,
훼방꾼이었다. 그리고 사탄의 졸개라?말도 마시라, 그는 『안티크리스트』라는 제목의 책까지 썼다! 그는 모든 것을,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이상을 혐오하는 듯 보였다.  - P88

희극의 탄생: 가상 대 실재

(중략)
니체의 초기 저작에는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쇼펜하우어는 재미라고는 한 톨도 없는 사람이었다. - P89

첫 번째 저서인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가상과 실재, 의지와 표상을 구분하는 쇼펜하우어의 이원론적 관점을 뚜렷이 채택하지만, 흥미롭게도 ‘의지‘라는 말을 의인화하여 의식적인 행위자처럼 취급하며
‘근원적인 일자‘⁴라고 일컫는다. 예술과 미에 대한 연구를 가리키는 ‘미학aesthetics‘ 이라는 말은 감각적 자질 또는 사물의 외양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아이스테티코스 aisthetikos‘에서 파생되었다. - P90

우리가 아는 세계, 일상적인 세계,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단지 가상에 불과하며, ‘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 자리 잡은 실재부단하고, 맹목적이고, 강력하고, 궁극적으로 목적이 없고,
따라서 충족되지 못하며 고통받는 의지는 너무나 끔찍하기에 그 중심을 들여다보는 일, 존재의 진짜 본질을 이해하는 일은 진이 빠지는 일이다.  - P91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일단 진리를 보고 그것을 인식하게 된인간은 이제 어디서나 존재의 공포와 부조리를 보게 된다."⁷
니체에 따르면, 예술이, 오로지 예술만이 우리의 유일한 은총이다. - P92

『비극의 탄생』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존재의 공포와 부조리를 다룬방식에 대한 책이다. 예술, 특히 아티카 비극*을 통해 그들은 공포스러운 진리를 극복하고 구원을 찾을 수 있었다. 니체에 따르면 이는 혼돈스럽고 무의미한 존재와 대면하는 건전하고 정직한 방법이다. 하지만 불건전하고 부정직한 방법도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아테네를 포함하는 아티카 지방의 시인들이 쓴 비극 니체는 아티카비극이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을 조화시켰다고 말한다. - P92

소크라테스는 세계의 진정한 특성을 인식하고 혼돈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 대신, 사유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세계를 뜯어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계속해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론적 낙천주의자의 원형이다. 이론적 낙천주의자는 사물의 본성을 규명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지식과 인식에 만병통치약의 힘을 부여하며, 오류를 악덕 그 자체로 생각하는 사람이다.¹⁰ - P93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건, 나라 없는 도시인 스프링필드에서는 리사가 소크라테스, 즉 이론적 낙천주의자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리사는 자신을 둘러싼 혼돈스럽고 부조리한 세계와 충돌하면서도, 이성이세계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뜯어고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고집스럽게 믿는다. 그는 동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앞장선다. 번스 사장의 탐욕과 호머의 무식을 치료하려 한다. 또 바트에게 덕성을 가르쳐서 그의 성품을 고치려 든다. 말도 할 줄 모르는 매기에게 플래시카드로 ‘credenza‘* 같은 단어를 가르치려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식기 진열장 - P94

하지만 정말 그렇다 할지라도-우리가 리사를 이런 식으로 보는 게옳다고 할지라도, 반항아에 훼방꾼이고 방귀쟁이인 데다 주일학교 교사와 베이비시터의 악몽인 바트를 우리가 존경해야 한다는 뜻이 되는건 아니다. - P95

예술로서의-아니 최소한 만화영화로서의-삶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경험 저편, ‘이‘ 세계의 저편에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을까? 왜 애초에 가상과 실재 사이의 구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을까? 니체의 말에 따르면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언어의 구조때문이다. - P95

우리는 "번개가 번쩍인다"라고 말하지만, 여기에 실제로 번개와 번쩍임이라는 두 가지 것이 존재할까?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물을 파악하고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인 듯하다. 경험한 것을 표현하려면주어인 ‘번개‘와 동사인 ‘번쩍이다‘를 사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우리는 그만 깜빡 속아 활동의 배후에 그 활동의 실제 원인이 되는 어떤 안정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 P96

니체의 말에 따르면 언어 속에 화석화된 활동하는 자와 활동 사이의 구분은 가상과 실재가 분리되는 시발점이며, 이는 플라톤의 형상/개별자 이원론, 쇼펜하우어의 의지/표상 구분, 기독교의 천상과 지상,
신과 인간의 분리 등으로 변형된다. 니체는 "우리가 문법을 여전히 믿고 있기 때문에 신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 아닌가 염려된다"라고 말한다.¹³ - P97

니체의 이상

다시 말하자면, 초기 저작에서 니체는 세계가 가상과 실재, 의지와 표상으로 분리된다고 보았지만, 곧 혼돈을 가리고 있는 무엇은 없으며행위 뒤에는 아무런 존재도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관점을 부인하게된다. 여기에 그의 입장 변화가 낳은 정말로 흥미로운 결과가 있다. 우리가 단지 근원적 의지에서 파생된 현상, 예술적 투영, 진정한 예술가이자 관객인 근원적 일자를 위한 예술작품에 불과하다는 초기의 관점과 반대로, 이제 우리는 의지인 동시에 현상이 된다. 아니,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 된다.

 니체는 예술과 삶의 구분을 없앴다. 그 결과 현존재는 미적 현상으로서, 예술적 노력으로서 정당화되거나 구원받으므로, 니체는 세계의 정당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개인적 정당화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 P99

하지만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 P99

이러한 니체의 이상은 위버멘슈Ubermensch, 혹은 초인이라는 인물상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삶으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이 매우 어려운 기획을 성취한 사람, 스스로를 창조한 존재다. 네하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스스로의 자아를 창조한다는 관념, 혹은 결국 이와 같은 의미인 위버멘슈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¹⁹ - P100

물론 악동이 되는 건 재미있지만, 어쩌면 그것 말고도...

니체에 따르면 그들의 공통적 경향은지금 여기에 대한, 즉 흐름에 대한 부인으로서 허구적인 피안, 초월적인 무엇을 상정하여 스스로를 위안하려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플라톤은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개별자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 너머에 영원하고 변치 않는 형상의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신과 천국과 영혼을 인간과 지상과 육체의 반대편에 선 다른 무엇으로 상정한다. - P101

이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니체에 따르면 몇 가지 대단히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문제가 있다. 첫째로, 무한한 가치를 띤 세계를 상정하면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은 가능한 일체의 가치를 박탈당하고 만다.  - P101

둘째로, 이런 식의 생각은 개인적인 위안에만 그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피안을 믿는 이들은 남들에게도, 아니 실제로 대개의 경우 온세계에 이 믿음을 강요하고자 했다. - P102

이런 유형의 가치 평가는 단순히 자신들을 구분하고자신들과 닮지 않은 부류를 규정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뿐이다.
니체는 이런 유형의 가치 평가를 ‘주인 도덕‘이라고 지칭하며, 이 최초의 ‘주인들‘ 혹은 ‘귀족들‘을 가차없이 묘사한다. 실로 그들은 강하고 건강하고 능동적이었지만, 또한 교양이 없고 자기성찰이 결여되어있고 폭력적이기도 했다. 

 그들은 맞서서 자신을 지킬 만큼 강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들 내면에는 귀족들을 향한 깊은 증오와응어리진 원한이 쌓였다. 이 응어리진 분노가 바로 ‘노예 도덕‘의 기원이다. - P103

니체는 이 사람들이 실제로 말 그대로 노예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약하고 병든 유형의 사람들, 원한에서 도덕이 샘솟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이 약자들, ‘노예‘들은 무엇보다도자신이 강해지기를, 건강해지기를, 능동적이 되기를, 획득하고 정복하고 지배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귀족처럼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럴수 없기 때문에 강하고 건강한 이들에게 복수를 가한다. - P104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무리 짓는 동물들이 가장순수한 덕의 광영으로 빛날 때, 예외적인 인간은 악으로 폄하될 수밖에 없다."²⁵
노예 도덕이 승리를 거두었음은 물론이다. 약자들은 약함, 순종, 연민 등이 미덕이고 힘, 능동, 활력 등은 악덕이라고 우둔한 귀족들을 설득시킬 수 있었다. 니체에 따르면 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재앙이었다. - P105

 그 결과로 우리는 무가치하고 평가절하된 현존재와 더불어 남겨졌으며, 여기에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과 가치를 부여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해졌다.
바로 이것이 니체의 ‘악동‘ 페르소나의 뿌리이자, 그가 전통과 도덕에 반항한 이유다. 또 나약한 우리 대다수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대부분의 것들이 실은 삶을 부정하고 중상하는 위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가 가차 없이 이를 매도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선악의 저편‘으로 가라고, ‘노예의 도덕‘을 넘어서라고, (후략) - P106

바르는 초인인가?
좋다. 니체는 철학계의 악동이고, 바트는 스프링필드의 악동이다. 확실히 바트는 권위에 반항하며 전통적 도덕을 부정했다(혹은, 실제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 P106

오히려 니체의 이상은 예술가, 자신을 극복하고 자신을 창조하는개인, 새로운 가치를 빚어내는 사람, 자기 삶을 가지고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에 더 가깝다. 바트를 이런 식으로 묘사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 P107

바트의 모든 정체성은 권위에 대한 반항과 거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권위가 사라지면 바트는 자기 정체성을 잃는다. 더는 자기가 누군지도 뭔지도 모르게 된다. 흥미롭게도 리사는 바트에게마음씨 좋은 발매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보라는 현명한 제안을 한다. - P110

사실 바트는 니체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가 딛고 선 위태로운 자리를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 P110

하지만 우리는 다른 세계, 피안을 저버리면서 허무주의로 빠져들 위험이 크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허무주의는 진짜세계라는 것이 그야말로 부재하기 때문에 모든 믿음, 무엇이 진짜라는일체의 생각 자체가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관점일 것이다."³⁰ 계속해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한 해석이 붕괴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해석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제 현존재에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마치 모든 게 헛된 것처럼 보인다.³¹ - P111

 바트 새파란 바지를 입은 이 소년은 실은 이런 허무주의적 위험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덕을 (거의) 갖추지 못했고, 창조적 정신도 없다. 그는 현존재의 혼돈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에 형태를 부여하고 그것으로아름다운 무엇을 빚어내지는 못한다. 그가 혼돈을 수용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일종의 체념적 정서가 깔려 있다. - P112

스스로를 의식하게 된 희극

 하지만 좀더 희망적인 어조로 글을 끝맺어보자. 비록 바트가 우리의 니체적 영웅이 아니며 허무주의적 퇴보의 본보기일지는 몰라도, «심슨 가족이라는 작품 전체는 더 나은 무엇을 보여준다. 현대의 삶과 세계는 고대 그리스 못지않게 혼돈스럽고 부조리하며,
니체의 말대로 고대 그리스 희극이 "부조리의 구토로부터의 예술적 해방"³²이었다면, 어쩌면 «심슨 가족»도 우리에게 그런 기능을 해줄 수있을지 모른다. - P113

5_바트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와 나쁨의 미덕에 관하여

1Friedrich Nietzsche, The Gay Science, trans. Walter Kaufmann (New York:Vintage, 1974), section 1, p. 74(한국어판은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안성찬·홍사현옮김,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유고, 책세상, 2005, 「즐거운 학문). - P414

4 Friedrich Nietzsche, The Birth of Tragedy, trans. Walter Kaufmann (NewYork: Vintage, 1967), section 4, p. 45김,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2005, 비극의 탄생]

7, section 7, p. 60.

13 Friedrich Nietzsche, Twilight of the Idols, "Reason in Philosophy," from ThePortable Nietzsche, section 5, p.483.

19 Alexander Nehamas, Nietzsche: Life as Literature, p. 174.

25 Friedrich Nietzsche, Ecce Homo, "Why I Am a Destiny" (New York: Vintage,
1967), section 5, p. 330.

30 The Will to Power, section 15, p. 14.
31, section 55, p. 35.

32 The Birth of Tragedy, section 7, p. 60.

12 스프링필드의 위선

제이슨 홀트

종교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도 그를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이 쇼는 이를테면 실존주의 문학이 철학적인 식으로 ‘철학적‘인것을 의도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괜찮다. 작가나 프로듀서의 의도와상관없이 «심슨 가족》은 철학자를 위한 펄떡이는 먹잇감을, 많은 경우 구체적인 사례의 형태로 풍성하게 제공한다. - P258

물론 이것은 벅찬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답을 제시하려는 것이아니고 하물며 «심슨 가족»에 호소해서 해결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실존주의자들이 그러했듯이, 설령 객관적인 도덕이 부재하더라도 우리가 유의미한 방식으로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지적할 수 있다. - P259

내가 말하고 싶은 주제는 위선hypocrisy이다. «심슨 가족》이 이 도덕적 악덕의 여러 중요한 특징을 예시해줄 뿐만 아니라, 위선에 대한 철학자들의 어떤 말들이 거짓임을 폭로해주기 때문이다.  - P260

가치의 진술이란 세상이 어떠한지가 아니라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을 진술하지 않고 행동을 지시한다. 내가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고 말한 다음 고양이가 매트 위에 없거나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나는 위선자가 아니라 거짓말쟁이거나 재담꾼이거나 기억력이 굉장히 나쁘거나 그 밖의 인지 장애가 있는 것이다.  - P261

내 목표는 «심슨 가족을 활용해 위선의 중요한 특징들을 보여주고 위선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나아가 이러한 상대적인 소홀함을 바로잡는 것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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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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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그는 각별한 존재였다. 그 사람만큼 이상한 인물은 어지간해선 찾기 힘들다.
그날, 그는 말을 건넨 그녀한테 이렇게 물었다.
"죽고 싶은 계절 없어요?"
첫 대면 상대한테 이런 뜬금없는 첫마디를 날리는 사람은 그 말고는 없을 것이다. - P13

봄잠은 새벽을 모른다고 했다.
자취생활을 하는 사이케테이 리코가 자명종의 충고를 무시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연히 리코가 일어난 시각은 정오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 P14

단정한 남학생 교복 차림인 걸 보니 신입생인가. 리코와 마찬가지로 지각임에 틀림없다.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걸 보아하니, 섬세한 겉모습하고는 다르게 의외로 담이센 녀석일 수도 있다. 뭐, 그건 상관없다. 주목할 대상은 남학생이 걸어가는 장소였다.
특이하게도 남학생은 인도가 아닌 다리 난간을 걸어가고 있었다.
폭이라 해봐야 20센티미터도 안 되는 난간 위를 아무렇지도않게 걸어간다. 발놀림에서 망설이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 P15

남학생은 리코를 한 번 슬쩍 보더니, 자기 주위로 시선을 천천히 돌려본다. 둘러봐도 참새들밖에 안 보일 텐데.
"자네 말이야, 소년. 나는 너한테 묻고 있어. 지금 이 장소에자네랑 나 말고 또 누가 있지? 아니면 내가 참새한테 말을 거는 기인으로 보이나?" - P16

이윽고 정말로 시시하다는 듯이 말했다.
"죽고 싶은 계절 없어요?"
리코는 몸을 오싹 떨었다.
"제 입장에서는 그게 봄이다, 얘기는 그뿐이에요."
겉모습대로의 담백한 어조였다. - P18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던 리코의 눈앞으로, 갑자기 남학생이 사뿐히 착지했다.
그 순간, 남학생이 대검을 자루에서 뽑듯 팔을 가로로 후렸다. 리코의 앞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렸고, 정신이 들고 보니 자전거가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성가신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곧바로 남학생이 난간을 강타한다. 금속이 휘는 듯한 소리가리코의 귓전을 때린다. 바로 앞에는 하얗고 단정한 얼굴이 있었으며, 그 두 눈은 리코를 멸시하듯이 내려다보고 있다. - P19

리코는 자전거를 힘차게 일으켜, 그대로 끌면서 남학생 바로옆을 따른다.
"나는 2학년, 사이케테이 리코야. 가까워진 기념으로 이 금화 초콜릿을 선물로 줄게. 금화를 다섯 개 모으면 빠짐없이 뜨거운 키스를 선물해주지. 참고로 지금 막 생각한 기획이야."
남학생은 초콜릿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리코는 개의치 않고말을 이었다. - P21

"뭐, 어느 쪽으로든 내 지적 호기심은 대부분 채워지겠지. 이것만은 책임을 가지고 말할 수 있거든?"
방긋 웃어 보이고 남학생의 얼굴을 슬쩍 엿본다. 남학생의미간은 한눈에도 불쾌감이 각인되어 있었다.
교문을 지나자 5교시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내에 울려퍼졌다.
"이런, 종이 울렸잖아. 서둘러야겠군." 리코는 그리 말하고남학생의 허리를 탁 친다.  - P22

그가 여섯 살이었을 때, 부모님들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부모님을 대신하여 그의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은 여덟 살 연상이었던 누나였다.
이른 나이에 부모님을 떠나보낸 남매였으나, 부모님이 남긴유산과 보험금 덕분에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았던 것은 다행이었다. - P23

당연히 HR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리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엔마 사나는 황급히 리코를 쫓아가 뒷덜미를 잡는다.
"리코!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어딜 가려고? 몇 번이나 전화한 줄 알아? ‘기인‘ 소리를 듣고 다니는 네 비상식적인 행동에는 이미 면역이 되었지만, 그래도 한마디라도 하고 가면 어디가 덧나?" - P25

사나는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쉰다. 두 사람만 남은 교실에는 한숨의 메아리도 잘 퍼진다.
"......자신을 인간이라고 주장할 거면 적어도 몸단장에도 신경을 좀 쓰라니까. 너도 여고생이잖아?"
몸단장만 놓고 보면 사나가 압도적으로 깔끔하다. 교복에는다림선이 확실하게 들어가 있고 넥타이에서는 주름을 찾아볼수 없었으며, 와이셔츠도 깔끔했다. 앞머리는 다소 길었지만 머리카락 끝을 꼼꼼히 빗어 놓아서 청결함을 잃지 않았다. - P26

사나의 목소리는 어이없다 못해 자연히 거칠어졌다.
"보나마나 오늘은 길어진 머리가 거추장스러워서 때마침 근처에 있던 그 충전기 코드로 묶은 거다. 그런 거 같은데……??
"굵기하고 길이가 딱 맞더라고, 이거."
"알게 뭐야! 내 놔!"
재능을 썩힌다는 것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P27

리코가 그렇게 표표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사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다.
"뭐가 갇혀 있어주지.‘ 야. 감옥 안에서 가지가지 난리쳐 놓고도 그런 말을 해?"
"나는 내 미학에 순종하고 있어. 아니, 노예라 해도 과언이아니지."
리코는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면서 사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 P29

"지금 나는 완전히 소풍 전날의 어린애처럼 두근거리고 있어."
리코가 말하는 ‘귀엽다‘는 말은, 호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재미있다‘거나 ‘흥미가 깊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서 리코는 ‘재미있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 남자를 보러 가려고?"
"글쎄. 저쪽이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감수하고 갈생각은 있어." - P30

리코는 전혀 주눅 든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
미안하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으니까.
사이케테이 리코의 최대 흥미거리는 ‘인간‘이자 ‘인간고찰‘ 이며, 사이케테이 리코에게 그 이외의 모든 사항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 P31

 여학생의 리본 타이를 보니 아마 두 사람은 2학년 선배일 것이다.
"이름을 모른다고? 너는 언제나 그렇다니까!"
남자 선배의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날카로운 박력에 유이를 포함한 주위의 신입생들이 깜짝 놀랐다.
"어이가 없네. 너 진짜 고양이 맞지? 왜 그렇게 생각 없이 행동해?" - P32

아무래도 말다툼을 벌이고는 있긴 해도 사이는 나쁘지 않은것 같다. 유이는 휴우 가슴을 쓸어내리고 가방을 가지러 교실로 이동한다.
"이름도 모르면서 어떻게 목표인물을 찾아낼 건데?"
"얼굴은 알고 있지."
"지금 수업 끝났잖아? 집에 가버렸으면 어쩌려고?"
"걱정 마. 방법은 분명히 있으니까." - P33

"뭔 소리야, 스마트하고 손쉬운 방법이라니까."
유이가 복도를 나오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신입생 제군들, 긴급사태다! 내 옆에 있는 엔마 사나가지금부터 홀딱 벗을 거란다!"

발랄한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1학년 복도에서 메아리친다. - P33

여자 선배는 주위로부터의 시선들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입에서 여유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 모처럼 모였으니 너희들에게 하나 질문 좀 하자. 나는 2학년인 사이케테이 리코라고 하는데, 사실 어떤 신입생 남학생을 찾고 있어, 특징은, 글쎄∙∙∙∙∙∙. 이 엔마 사나하고 똑같은 정도로 키가 커. 그리고 오늘 지각을 했고, 오후 좀 넘어서라는 어처구니없는 시간에 등교했음에도 주눅 든 기색도 안보이던 녀석이야. 참고로 상당히 까칠하기도 해. 우리 사나하고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까칠할까? 뭐, 그건 나중 문제고 누구 짐작이 가는 사람 있나?" - P34

갑자기 누군가가 "혹시 카미우치 얘기…………?"라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 P34

흥미 본위로 그를 알아보려 하는 거라면, 어느 쪽한테나 행복한 결과는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유이는 알고 있었다.
"너한테 폐가 가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아니면 신부님 앞에서 맹세라도 할까?"
"아, 저는 상관없지만요, 그, 그 애가………. 그 애는 좀 ‘섬세한 부분이 있어서・・・・・・ 가능하면 그대로 놔두고 싶어요......."
여자 선배는 실험체를 관찰하듯 유이의 전신을 위아래로 스윽 훑어보면서 "흐음" 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나는 이런 동아리의 부장을 하고 있어." - P36

"인간관계에 있어 연애만큼 농밀한 관계는 없지. 연애는 인생의 축소판이야. 그리고 작은 우주......, 라고 하는 건 좀 지나칠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멀리 있지는 않다는 게 내 생각이야. 다시 말해 연애에 대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라고생각한다다는 거지."
여자 선배는 논리정연하게 말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간다. 솔직히 유이에게는 좀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매우 즐거운 모습으로 말하는 선배의 모습은 보는 이쪽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 P37

선배들이 각자 자기소개를 한다. 여자 선배는 방금 말했던 사이케테이 리코라는 이름이며, 통칭 ‘변연부‘의 부장이라는 직함이 붙어 있다.
"사이케테이라고 부르기 힘들면 편하게 리코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계속해서 키가 큰 선배가 엔마 사나라고 자신을 소개하였으며, 본인은 ‘변연부‘와 무관한 ‘검도부‘ 사람이고 지금은 어쩔수 없이 따라왔을 뿐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이케테이 리코 선배와 엔마 사나 선배. 유이는 잊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이름을 외운다.

괴담이라도 들려주듯 오빠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간다.
"그중에서도 요주의 대상은 ‘스트레인지 사이키델리코‘ 라는 별명을 가진 부장, ‘기인‘ 사이케테이 리코하고 ‘염라대왕‘으로 불리며 사이케테이의 친구인 엔마 사나, 이 두 사람들이야.
이 두 사람하고는 절대로 어울리면 안 돼. 적대시당하는 그날로 학교는 더 이상 못 가게 될 거야."
악몽이라도 떠올리는 듯 오빠는 어깨를 움츠렸다. - P41

오빠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고 유이는 곧바로 후회감에 빠졌다. 어째서 여기까지 오기 전에 생각을 못했을까. 하지만 한숨을 쉰들 벌써 늦은 일이다. 이미 유이는 선배들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었으니까.
다만, 반대로 안심이 되는 부분도 있다. 오빠의 말만 들었을때는 사이케테이 리코와 엔마 사나는 아주 무서운 사람들일거라 상상했다. - P42

정신이 들고 보니 리코 선배가 책상에 턱을 괴고 편안한 표정으로 유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얘기가 좀 길어질 거 같은데요..."
"바라던 바야. 어떤 사사로운 얘기라도 괜찮아.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얘기를 들려주길 바라."
유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제가 그 애하고, 아, 으음, 카미우치 유우진군하고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겨울이었어요." 옛날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말한다. - P44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엔마 선배가 돌아와 있었고, 유이와 눈이 마주치자 "자." 하며 홍차를 던져 건넨다. 홍차를 받은 유이가 안절부절 못하고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라고 깊게 고개를 조아리자, "괜찮아."라고 엔마 선배는 눈을 가늘이며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수고했어. 상으로 금화 초콜릿을 주지."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리코에게 "너는 좀 미안한 줄 알아!" 하며 불쾌하게 노려보면서도 홍차를 제대로 건네는 엔마 선배는, 겉모습과 태도에비해 훨씬 친절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 P45

"-카미우치 군이 초등학교 2층 교실에서 뛰어내렸어요."
엔마 선배는 "......이것 참." 하며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와 함께 앞머리를 흔들었다.
그 옆에서는 턱에 흰 손가락 끝을 댄 리코 선배가 눈을 가늘이고 매우 즐거운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P46

"그는 나한테 ‘봄은 죽고 싶어지는 계절‘ 이라고 했는데, 자네는 뭐 아는 바 없나?"
"완전 미친놈이네."
얘기를 들을수록 미간의 주름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 수 있었다. 또 여느 때처럼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 P47

"......그러니까 다섯 번이라는 얘기는." 손목으로 턱을받친 채로 침묵하고 있던 리코는 고개를 들더니, 천천히 입을열었다.
올해도 벌써?"
눈썹을 내리깐 유이가 꼬박 고개를 끄덕인다.
"입학한 지 사흘 만에……………"
곁눈질로 리코를 보아하니, 입술이 말랐는지 빨간 혀를 살짝내밀어 핥고 있다. 쭉 가늘어진 눈이 유이를 응시하고 있다. - P48

"무리할 것 없어.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둬도 되거든?"
지킴이 역할인 사나는 제쳐놓고, 유이가 ‘스트레인지 사이키 델리코‘라고 불리는 괴인 리코하고 교류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 P49

"......카미우치 군은 놀란 표정의 남자애 귓전에 대고 말했어요. ‘똑바로 봐‘, 그렇게 말하고 카미우치 군은 남자애를 내팽개치더니 가볍게 철책을 뛰어넘어 정원으로 뛰어내렸어요. 그러자 나뭇가지가 연이어 꺾이는 소리가 들렸고, 근처에서 분위기를 살피던 같은 반 애들이 비명을 질렀고......."
태풍이라도 맞은 듯이 정원의 소나무 몇 그루가 꺾여 있었던건, 그 때문이었던가 하며 이유를 깨닫는다. - P50

"-이제야 알겠군. 내가 신입생들에게 그에 대해 물어봤을 때 다들 쭈뼛쭈뼛하는 태도를 보였던 이유를 말이야."
진정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리코는 유이에게 미소를 지었다.
"헌데 하나 물어보겠는데, 그의 자살미수 방법은 전부 ‘투신‘이었지 않나?" - P51

작은 몸으로 간곡히 호소하는 유이의 필사적인 모습에서, 카미우치 유우진에 대한 깊은 마음이 느껴진다.
"카미우치 군은 저를 구해줬어요! 지금 제가 있는 것도 그 애덕분이에요! 카미우치 군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지금 갚아주고 싶어요! 제발 힘이 되어주세요! 부탁이에요!" - P52

"얘기를 들어봤기 때문에 더더욱 간단하지 않을 일임을 아는거야. 걔는 이제까지 다섯 번이나 자살미수를 반복했잖아? 모종의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이제까지 몇 번이고 받았겠지. 그리고 어른들이 몇 번이고 걔를 구하려고 했을 거고. 그중에는임상심리사와 같은 전문가들도 있었겠지. 하지만 결과는 어땠4?"
"그건......." 사나는 입을 다문다. "그런 거야." 리코는 살짝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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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나는 소리

조기 매장과 대응

2005년 여름, 모노크롬Monochrom이라는 한 ‘예능 기술 철학 연구회(한때회원들 자신의 실제 혈액을 첨가해 블랙 푸딩을 만들어 먹기도 했던 오스트리아전위 단체)‘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시민을 대상으로 섬뜩한 광고를 내걸었다. 광고는 생매장을 체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중략)
이 광고는 허풍으로 끝나지 않았다. 단체 회원들은 화물 트럭으로 10톤에 달하는 흙더미를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한 미술관 옆으로 실어 나른다음, 흙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었다.  - P13

모노크롬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생매장에 대한 공포는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에 해당합니다. 산 채로 땅속에 묻히는 장면을 생각하기만 해도 오싹한 전율이 느껴지고 심장은 빨리 뛰지요. 고대의 여러 문서에서도 사망 선고가 내려지고 나서 소생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화장대에 뉘인 다음에야 의식이 돌아와 끔찍하게도 산 채로 화장되어야만 했던 사례를 담은 문건도 다수 존재합니다."⁷

7 모노크롬 홈페이지 www.monochrom.at/experiences/alive.htm - P14

생매장 공포증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시점은 18세기에서 19세기이며, 특히 19세기에 크게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였다. 과학의 새로운 분야로 부상한 통계학과 빅토리아 시대의 살육 열풍(대도시를 중심으로 비정상적이고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난무한 시대), 판매 부수 증대를 겨냥한 각 신문사의 선정적 보도, 정확한 사망 진단의 어려움, 에드거 A. 포Edgar Allen Poe의 단편 「섣부른 장례식 The PrematureBurial」 등 당시 사회에 부유하던 여러 요소가 한꺼번에 뭉쳐져 유럽과 미국의 무지한 대중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당시 가족 납골당에 안치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통상적 장례방식을 고수하던 이들에게는 매장과 연계된 다음의 통계 수치가 큰 설득력을발휘하지 못했을 법하다. 성직자였던 J. G. 우슬리. Ouseley는 1895년 간행물 <탄생과 죽음 Earth to Earth Burial>에서 잉글랜드 및 웨일스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 중 적어도 2,700명이 "매년 생매장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는 가장 끔찍한 형태의 고통이다."라고 기술했다. - P15

 볼룸은 1천 명 중 1명은 완전히 사망하지 않은 상태로 매장된다고 추정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일각에서는 바이에른 주 이민자 하트만Franz Hartmann이 생매장에 대한 미국 대중의 공포심 조장에 가담했다. 유럽과 더불어 19세기의 미국 신문들은 하나같이 생매장당한 사람들의 여러 ‘실화‘로 넘쳐났다. - P14

때 이르게 매장된 임신부가 관 속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식의 기담이난무하던 시기에 무덤에서 사람 목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 역시 생매장과 관련된 여러 일화에 흔히 등장하는 소재였다. 또 당시 신문에 소개된수많은 섬뜩한 기사에 따르면, 발굴된 사체에서는 거의 하나같이 살아나가려 발버둥친 처절한 몸부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 P17

다행히 대처 방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 전반을 뒤덮은 소름끼치는 조기 매장 관련 소식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이 자신은 땅속 1.8미터 아래서 깨어나는 일이 없도록 아예 유언장에 별도 지령을 써넣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유언장에는 사망한 지 6일이 지나기 전 혹은 주요 동맥이 절단되기 전까지는 매장할 수 없다는 조항이 흔히 명기되었다. - P18

이처럼 유언장에 사후 처리와 관련한 구체적 지시 사항을 남긴 이는 불워 리튼에 그치지 않는다.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후에 의사들이 자신의 시신을 절단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1915년 8월 3일판 <타임스>의 부고란에는 베이스워터 Bayswater에 거주하는 에밀리 해리엇Emily Harriet이 한쪽 귀에서 반대 귀까지 자신의 목을 베어 가른 다음 사망을 확인하도록 하는 대가로 스탠리 보스필드Stanle Bousfild 박사에게 20파운드(현재 기준으로 4,000달러 상당)를 지급했다는 기사가 소개되었다. - P18

어쨌거나 더욱 독창적인 방안이 계속해서 등장했으며, 조기 매장된 이들이 관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었다. 일례로 1868년 뉴저지 주 뉴어크 출신의 프란츠 베스터 Franz Vester는 ‘매장 케이스burialcase‘를 고안해냈다. 이 기묘한 고안물에는 사다리가 장착되어 조기 매장의 희생자가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종을 함께 넣어무덤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종을 흔들어 도움을 요청할 수있게 했다. - P19

한편 1893년 프로이센 출신 아달베르트 키아트코프스키AdalbertKwiatkowski는 다소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장치를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장치는 시신을 일종의 허리 벨트로 둘러싼 다음, 지상으로 연결된 튜브를 관통하는 실을 벨트에 부착하는 시스템이다. - P20

한 세기가 지난 다음에도 발명가들은 여전히 비상 장치가 장착된 관을꾸준히 계발하고 있어 21세기형 생매장 공포증에 힘을 싣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시계공이자 금세공 기술자, 모조석 브랜드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파브리치오 카셀리 Fabrizio Caselli는 조기 매장과 관련한 여러 보도를 접하고 크게 동요되어 일명 ‘구명 관bara salvavita 이라고 불리는 장치를 발명해 특허를 얻었다. - P20

망인(亡人)의 쉼터

독일에서는 거의 백 년 전에 소수의 조기 매장 반대 운동가들이 기발한 장치를 갖춘 관에 그치지 않고 규모가 좀더 큰 대비책을 강구한 바 있다. 이들은 ‘시체 대기 안치소(독일어로는 Leichenhausers)‘라는 공간을 마련하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생매장‘을 방지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이운동가들은 사망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확실한 표시가 바로 사체의부패라고 간주하고, 사체가 부패하기 전까지는 매장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 P21

. 그러나 실제로 시체 대기 안치소를 처음 시도한 사람은내과의이자 자선가로 활동했던 크리스토프 빌헬름 후펠란트Christoph Wilhelm Hufeland이다. 그는 1791년에 자신의 고향 독일 바이마르에 최초의 시체 대기 안치소를 건립했다. 이 공간에는 고인을 위한 침대 여덟 개가 갖춰진망자의 방이 있었고, 경비는 창문을 통해 시신의 부패 여부를 관찰했다.
부엌에는 항상 불을 피워 물이 끓을 때 발생하는 수증기가 지하 관을 통해 망자의 방으로 유입되어 방을 덥힐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난방 조치는안락한 환경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신의 부패를 촉진하려는 절차였다. - P21

1795년에서 1828년 사이에 ‘시체 대기 안치소‘는 독일 전역으로 번져나갔으며, 이전보다 더욱 정교한 구조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후기의 시체 대기 안치소에서는 흔히 남성과 여성의 공간이 분리되는데, 망자들의예절과 사생활까지 존중해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1808년 뮌헨에 세워진 시체 대기 안치소는 부자와 빈민의 방을 따로 구분하여 죽은 후에도 사회 계층 간 구분이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당시의 모든 시체 대기 안치소는 전염병이나 재난으로 사망한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으며, 부엌과 열탕 욕조 및 소생 기구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안치소 내에 거주하는 문지기까지 두었다. 일단 시체 대기 안치소로 이송된 시신에는 종을 달고 손과 발에 전선을 부착하여 문지기가 되살아난 사체의 호출에 즉각 응할 수 있게 했다. 홀로 외롭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부패의 시작을 알리는 악취나 섬뜩하게 울리는 방울소리를 기다려야 하는 문지기의 고충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 P22

‘관 속에서난 휴대전화를 꺼주세요.‘

런던 조기 매장 예방 협회는 윌리엄 팁이 진행했던 대다수 캠페인과마찬가지로 오래가지 못했다. 20세기로 접어든 전환기에 꽤 많은 이목을끌었던 런던 조기 매장 예방 협회는 의학 지식의 진보와 함께 1910년경에 걷잡을 수 없는 쇠퇴기로 접어들었고, 사람들의 관심이 끊기자 1936년 해체되었다. 이때는 이미 텝이 사망한 지 18년, 볼룸이 사망한 지 34년째 되는 시점이었다. - P24

오늘날 인터넷 검색 엔진에 생매장 공포증이라는 말을 입력하면, 검색결과로 웹사이트 1만 4천여 개가 나타난다. 소정의 수수료를 받기는 하지만 이중 다수의 웹사이트에서 생매장 공포증 극복을 위한 지원과 어드바이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터넷 광고를 통해 만나볼 수 있는 처방으로는최면 요법에서부터 다소 애매하게 들리는 에너지 심리학 해법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 P25

그러나 약 1미터 아래 땅속에 묻힌 상태에서 휴대전화의 안테나 신호가 잡히는지 시험해본 사람은 아직 없거니와 적어도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무덤에 묻힌사람에게서 전화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는 제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조기 매장이 행해져 온 점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며, 2장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사망 진단 과정이 허점투성이일 경우(심지어 현재까지도) 조기 매장의 가능성은 더 커진다. 그러나 18, 19세기 무렵 뚜렷한근거 없이 떠돌던 예측처럼 생매장이 실제로 그렇게 자주 행해졌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 P26

필사적으로 탈출을 기도한 생매장의 희생자가 자신의 손가락과 팔을 물어뜯어 놓은 듯 보이는 부분도 때에 따라서는 쥐나 기타 해충의 소행으로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1859년 폰 로제Von Rosser 박사가 시도한 한 실험에서는 관 속에 살아 있는 쥐 여러 마리를 넣고 관을 땅속에 묻었다. 이들후 관을 꺼냈을 때 일부 쥐는 다른 쥐의 살점을 먹으며 생존했으며, 또다른 쥐 무리는 관을 갉아먹고 지상으로 탈출했다.¹⁵

15 폰 로제 박사가 자신의 연구 결과를 묶어 1858년에 발행한 연구집 Sach‘s Medizinische Jahrbucher, - P26

. 1846년도 과학상Prix Manni 수상자 유진 부쉬EugeneBouchut는 1850년경 프랑스 전 지역 시장과 서기관들에게 서신을 보내 당시 사회에 떠돌던 생매장 관련 일화에 대한 검증을 요청했으나 사실로 확인된 일화는 단 한 건도 없었다.  - P27

(전략), 독일의 생리학자 에른스트 헤벤슈트라이트Ernst Hebenstreit의 연구 결과가 어느 정도 안도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헤벤슈트라이트의 1862년도 추정 수치를 보면 일반적으로 인간은 밀폐된 관 속에서 60분을 버티기가 어렵다고 한다.¹⁸ 앞서 소개된 폰 로제 박사는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유리 덮개로 밀폐된 관 속에 개 한 마리를 넣어두고 관찰했다. 실험 대상이었던 개가 3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자 로제 박사는 인간과 개의 체면적을 고려했을 때 헤벤슈트라이트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동의했다. - P28

생매장에 대한 공포는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에 해당합니다.
산채로 땅속에 묻히는 장면을 생각하기만 해도
오싹한 전율이 느껴지고 심장은 빨리 뛰지요.
고대의 여러 문서에서도 사망 선고가 내려지고 나서
소생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화장대에 뉘인 다음에야 의식이 돌아와 끔찍하게도
산채로 화장되어야만 했던 사례를 담은 문건도
다수 존재합니다. - P29

3. 휴식을 방해하는 자
도굴과 이장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죽은 이라고 해서 반드시 평온히 쉴 수 있는 것만은 아니며 종종 무덤이 최후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각종 범죄 행위와 문화적 관습, 정치적 사건, 법정 판결, 그리고 흡혈귀와 관련된 온갖 미신 등으로 망자가 최후의 안식처에 머물지 못하고 묘지가 파헤쳐지거나 이장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후안 페론Juan Peron은두 번 도굴된 끝에 현재 세 번째 묘지에 안치되었으며,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17차례 이상 이장을 겪어야 했다. - P48

내쫓기는 유해

영국 성공회 측에서는 이장을 신청하는 유족들을 대상으로 사망자의 유해는 ‘교회 당국에서 보호 관리하며, 이 규정을 위배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²⁹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 측의 이러한 방침은 그다지 신뢰를 사지 못했다. 


29 2016년 12월 2일 관 (타임스), ‘아짐은 가능합니다.
Met Take Thur Dead Relatives)
"고인에게는 손대지 마세요(Move House. But Thou Shalt - P48

때때로 이장은 망자를 위해서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필요에 따라 진행되기도 한다. 대개 묘지는 고가의 부지에 마련되었는데,
훗날 해당 부지에서 개발이 진행될 경우 안타깝게도 유해는 처리하기 거추장스러운 대상으로 전락했다. 일례로 1860년대 미들랜드 철도MidlandRailway는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 묘지를 가로질러 건설되었는데,
이처럼 통근 수단의 개척과 함께 유해 수천 구가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줘야 했다. 개중에는 갓 매장된 시신도 여러 구 있었다. - P49

2002년 CTRL(영국 고속철도) 당국은 세인트 판크라스에 건립될 예정인 유로스타 터미널 공사 현장을 신속히 정리하기 위해 불도저 여러 대로 해당 부지와 유해들을 갈아엎었다. 당시 고고학자들은 유해 발굴을 위해 단 3주 동안만 현장 출입이 허락된 상태였다. CTRL 측은 특별 의회법에 따라 묘지 해체 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는데, 당시 영국 문화재단에서는 모든 유해가 정중히 예를 갖추어 이장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해당 특별법에서 제외되었다고 주장한바 있다. - P50

죽은 자를 노리는 손길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를 보면 소년 제리 크런처 JerryCruncher가 어느 날 아버지에게 "도굴꾼이 뭐죠?"라고 묻자 아버지는 "장사치란다."라고 대답한다. 의문이 가시지 않은 소년이 "그럼 뭘 파는 거예요?"라고 되묻자 잠시 생각에 잠긴 크런처 씨는 "과학적으로 필요한 물건을 팔아."라고 말한다.³⁰ - P52

수많은 영국인과 미국인이 생매장을 두려워한 18~19세기에 일각에서는 상반되는 성격의 공포가 존재했다. 즉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시신이 도굴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번졌다. 당시에는 의료 과학의 진보와 더불어 실험에 필요한 시신의 지속적인 공급이 절실했다. - P53

의학적 연구를 위해 시체를 도굴하는 행위는 이전부터 자행되었다. 우선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1319년 이탈리아 몬디노에서 의학도 4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시체를 도굴하여 해부용 시신이 필요한의과 대학으로 이송한 혐의를 받았다.³¹ 중세 이탈리아에서는 의료 과학발전을 위한 해부용으로만 시신을 활용한 것은 아니다. 


31 해부의 역사에 관해서는 중세 후기의 장례와 사체의 처리(Death and the Human Body in the Later Middle Ages)엘리자베스 브라운 저와 인체 해부, 고군분투의 현장(Human Dissection: Its Drama and Struggle) A M. 라섹저를 참조 - P53

영국에서는 1565년 엘리자베스 1세가 교수형 당한 죄수의 시신 4구를의료 조합, 즉 내외과 의사 협회에 해부용으로 매년 기증하기로 했고, 훗날 1663년 찰스 2세는 기증 시신의 수를 6구로 늘렸다. 그러나 의료 과학의 발전을 꾀하기에는 시신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런던의 의대생이 200여 명에 달했으며, 한 세기가 지난 1823년경에는 그 수가 1천여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 P54

따라서 18세기 말 무렵에는 송장 거래가 꽤 수지맞는 사업으로 여겨졌다. 이론으로 익힌 기술을 실제 인체에 적용해보아야 하는 의료 관계자들은 묘지 도굴범들과 손잡는 수밖에 없었고, 시신 한 구당 현재 가치로 1,800~3,200달러까지 지급했다. 이처럼 불법 시신 거래가 성행하는데도 당시 정부는 이를 확실히 제지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17~18세기영국 법은 시신 약탈에 대한 처벌을 징역형으로만 국한하고, 때때로 범인을 식민지로 추방하는 데 그쳤다. - P54

또 최근까지만 해도 "시신에 대한 유일한 합법적 소유자는 대지뿐이다."라는 법령에 따라묘지 도굴범이라 해도 수의나 장신구 절도라는 명목으로 기소될 뿐 시신자체를 도굴한 행위는 고발 사유가 아니었다. - P54

갓 매장된 시신을 서로 차지하려는 갱단들이 묘지 주변에서 혈투를 벌일 때면 한밤중에라도 격렬히 치고받는소리가 들려왔다. 또 해부학자가 평상시 거래 노선을 벗어나 갱단을 통해서 시신을 확보하기라도 하면, 시체 도굴자가 이에 불만을 품고 해부실에난입해 시신을 도저히 연구에 이용할 수 없는 상태로 난도질해 망가뜨리기도 했다. - P55

시체 도굴자의 생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조슈아 네이플스JoshuaNapels는 1812년에 발표한 저서 『어느 도굴꾼의 일기 Diary of a resurrectionist』통해 시체 도굴자들이 겪어야 했던 직업적 고충을 소개했다. 우선 도굴자는 도굴에 앞서 시신이 완전히 매장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고, 도굴 현장이 적발될까 전전긍긍해야 했음은 물론자신들의 수고를 한입에 삼켜버리는 갱단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야간 범죄가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분노에 사로잡힌 군중이 어떠한 처벌을 내릴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 P55

따라서 묘지 도굴범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직업에 대한 철저한 기밀 유지였던 한편 시민들은 이들의 소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당시에는 관에 못질이 두 줄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매장된 희생자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방지함과 동시에 시신 약탈자에 의한 도굴을 예방하려는 조치였다. 그런가 하면 일부에서는 금속재 관을 고안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관은 1781년부터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 P56

.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브리지먼이 최신형 관을 발명한 그해 때마침 영국에서는 시신 약탈자를 다룬 소설류가 큰 인기몰이를 하며 독자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시신 약탈자에 대한 불안 심리는 메리 셸리 Mary Shelley가 1818년에 발표한 작품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을 통해 잘 드러난다. 작품 속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대담한 실험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납골당과 자칭 ‘불온한 묘터‘에서 사체의 여러 부위를 거둬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57

부유층은 나름의 기발한 고안물을 활용하여 도굴에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었으나 빈민층은 시신 약탈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취약한 대상이었다. 따라서 빈민들은 종종 힘을 모아 묘지에 초소를 세우거나 돈을 거두어 묘지 내에 체계적으로 램프를 여러 개 배치해 시신 약탈자가 어둠을틈타고 쉽게 도굴하지 못하게 했다(오늘날 주차장에 가로등과 CCTV를 설치해 자동차 도난을 방지하는 방식에 비유할 수 있겠다). - P57

스코틀랜드 지방 부유층은 일명 ‘안전한 죽음mortsate‘이라는 쇠 격자나틀을 사용했는데 이 장치는 관 위쪽 지상의 콘크리트에 세우거나 관과 함께 땅속에 묻었으며, 이중 몇 개는 오늘날까지 에든버러 프란체스코 수도회 교회 묘지에 남아 있다. - P58

이러한 공간을 제공하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소정의 비용을 받았고, 그나마 그 금액을 감당할 여유가 있는 유족은 가족이 해부 실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할 수있었다. 에든버러에서 북쪽으로 55마일 거리인 파이프 주 크레일Crail. Fife지방에는 이러한 형태의 시체 보관소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두꺼운 담과 흉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시체 도굴자들을 물리칠 최후의 방패막이라도 되는 양, 흡사 미니어처 요새처럼 보이기도 한다. - P58

‘해골수프‘ 사건

당시 하층민들 사이에는 정부와 의료 관계자들이 모의하여 부족한 해부 실험용 시신을 ‘자신들의 시신‘으로 충당하려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이러한 불안 심리가 만연한 가운데 영국 전역에 산재한 구빈원에서는 주기적으로 폭동이 일어났다. - P59

애버딘과 인버레스크, 헤리퍼드, 그리니치, 뎁포드 등지에서 연일 해부실험 반대 폭동이 일어났으나 의회에서는 1832년 해부법을 통과시켰다.
해부법 조항에는 구빈원에 있는 신원 미상 사체의 경우 48시간(종전 78시간)이 지나면 해부 실험용으로 기증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한편 구빈원 거주자는 본인의 시신을 해부용으로 이용하지 말도록 서면 요청할 수 있다는 예외 조건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윌리엄로버츠 William Roberts가 운동을 벌이기 전까지 이러한 조항을 전혀 알지 못했다. - P59

기증했다. 34 어쨌거나 로버츠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1832년에서1932년 사이 런던의 여러 의과 대학에서 해부용으로 사용한 시신 5만 7천여 구 가운데 구빈원 외에 다른 공급처에서 들여온 시신은 단 0.5%에지나지 않았다. 런던 빈민들은 ‘해골 수프‘의 재료로 전락하지 않았을지는몰라도 스스로 원했든 원치 않았든 죽은 후 시신으로 의료 과학 발전에 공현했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 P60

망자가 유명인이거나 부유층과 연고가 있을 경우라면 해당 시신의 살점과 유골까지도 상당한 돈벌이가 되었다.
알렉산더 T. 스튜어트Alexander T. Stewart는 미국에 최초의 백화점을 세우고1846년 노동자들을 위해 롱아일랜드에 그 유명한 전원도시 가든 시티Garden City‘를 설립한 인물로 유명하다. 1876년에 사망할 당시 그는 미국 최고 부자 중 하나였다. 그의 시신은 맨해튼 바워리가 세인트 마크 교회st.
Mark‘s-in-the-Bowery에 안치되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장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신이 도난당했고, 절도범들이 시신의 몸값을 요구했다 - P60

링컨의 유해는 유독 불안한 여정을 겪었다. 1865년 워싱턴에서 암살된후 방부 처리된 그의 시신은 일리노이에 안장되기 전까지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뉴욕, 올버니, 버펄로, 클리블랜드, 콜럼버스, 신시내티, 인디애나폴리스, 시카고를 비롯한 기타 여러 소도시로 약 2,700킬로미터를 떠돌며 국민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링컨의 부검 담당 의사 중 한 명이 공개한 산산이 부서진 링컨의 두개골 중 작은 조각 7개와 상처를 감쌌던붕대, 그리고 피 묻은 소매는 워싱턴 소재 국립 의료 박물관에 기증되어 위인의 자취로 보존되었다. - P61

페론의 경우와 같이 모든 유족이 거액의 몸값 요구를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78년에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이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스 묘지에 안치되었던 그의 유해가 도굴되었고, 도굴범들은 몸값으로 65만 달러를 요구했다. 채플린의 아내 우나0ona는, 만약 남편이 그 소식을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액수라고 빈정댈 것이라며 몸값 지급을 거부했다. 시신은 결국 11주가 지나고 나서 발견되었고, (후략). - P62

몸값 착취를 목적으로 무덤을 파헤치고 유해를 훔쳐내는 장면은 단순히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불쾌감을 유발하지만, 도굴 행위의 동기가이보다 악랄하고 불량한 경우라면 과연 어떠할 것인가? 2006년 9월 5일21세의 알렉산더 그런크Alexander Grunke와 그의 쌍둥이 동생 니콜라스Nicholas, 그리고 니콜라스의 단짝 더스틴 라드케Dustin Radke는 삽을 차에 싣고 위스콘신 주 카스빌에 있는 세인트 찰스 묘지로 향했다.
(중략)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이 일당 중 누구도 숨진 여성과 안면이 없었다. 단지 지역 신문 부고란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사진 속 여성에게 반해버린 니콜라스는 도굴을 결심하고콘돔까지 준비해 간 것이었다. 다행히 이 일당의 도굴 행위는 관 뚜껑에삽이 닿는 정도에서 그쳤다. - P63

정치적 음해와 망자의 수난

(전략) 그래서 베드로는 라망 후 곧바로 진행된 종교 재판의 결과에 따라 무덤 속에서 고이 잠들지 못하고 유해가 파헤쳐지기에 이르렀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드로는 나사로와 같이 무덤에서 부활하지 못했고, 유해 발굴역시 나사로의 그것과 달리 유쾌한 의식이 아니었다. 그의 유골은 종교재판 후 불태워졌다. - P64

(전략),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정치적 우위에서 밀려난시점과 맞물린다. 1658년 사망한 크롬웰은 한때 그가 몰아낸 귀족들과마찬가지로 방부 처리되어 국장을 거치고 선대 왕족들과 나란히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왕정복고가 일어난 후 1661년 크롬웰은 대역 죄인으로 매도되었고, 청교도 열풍이 영국 사회를 휘감았다.
마침내 크롬웰과 측근들의 시신이 발굴되어 런던 거리를 끌려 다니다가 범죄자들의 교수형이 집행되던 사형장에 다다랐다. - P65

(전략). 이러한 움직임은 해당농장을 폐쇄하게 하려던 시위대 내 과격파 동물 보호 운동가들이 2004년10월에 크리스의 장모인 글래디스 해먼드Gladys Hammond 여사의 유해를 도굴해 빼돌린 사건을 계기로 최악의 정점으로 치달았고, 마침내 반대 운동은 결실을 보았다. 10개월 후인 2005년 8월 마침내 크리스는 기니피그 농장 폐쇄를 발표했다. 그러나 2006년 5월 도굴범 일당 네 명이 체포되고 해먼드 여사의 유해 행방이 드러낸 다음에야 농장은 완전히 폐쇄되었다(도굴범들은 스태퍼드셔 케녹체이스 지역에 해먼드 여사의 유해를 묻어 두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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