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나는 소리

조기 매장과 대응

2005년 여름, 모노크롬Monochrom이라는 한 ‘예능 기술 철학 연구회(한때회원들 자신의 실제 혈액을 첨가해 블랙 푸딩을 만들어 먹기도 했던 오스트리아전위 단체)‘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시민을 대상으로 섬뜩한 광고를 내걸었다. 광고는 생매장을 체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중략)
이 광고는 허풍으로 끝나지 않았다. 단체 회원들은 화물 트럭으로 10톤에 달하는 흙더미를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한 미술관 옆으로 실어 나른다음, 흙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었다.  - P13

모노크롬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생매장에 대한 공포는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에 해당합니다. 산 채로 땅속에 묻히는 장면을 생각하기만 해도 오싹한 전율이 느껴지고 심장은 빨리 뛰지요. 고대의 여러 문서에서도 사망 선고가 내려지고 나서 소생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화장대에 뉘인 다음에야 의식이 돌아와 끔찍하게도 산 채로 화장되어야만 했던 사례를 담은 문건도 다수 존재합니다."⁷

7 모노크롬 홈페이지 www.monochrom.at/experiences/alive.htm - P14

생매장 공포증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시점은 18세기에서 19세기이며, 특히 19세기에 크게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였다. 과학의 새로운 분야로 부상한 통계학과 빅토리아 시대의 살육 열풍(대도시를 중심으로 비정상적이고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난무한 시대), 판매 부수 증대를 겨냥한 각 신문사의 선정적 보도, 정확한 사망 진단의 어려움, 에드거 A. 포Edgar Allen Poe의 단편 「섣부른 장례식 The PrematureBurial」 등 당시 사회에 부유하던 여러 요소가 한꺼번에 뭉쳐져 유럽과 미국의 무지한 대중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당시 가족 납골당에 안치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통상적 장례방식을 고수하던 이들에게는 매장과 연계된 다음의 통계 수치가 큰 설득력을발휘하지 못했을 법하다. 성직자였던 J. G. 우슬리. Ouseley는 1895년 간행물 <탄생과 죽음 Earth to Earth Burial>에서 잉글랜드 및 웨일스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 중 적어도 2,700명이 "매년 생매장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는 가장 끔찍한 형태의 고통이다."라고 기술했다. - P15

 볼룸은 1천 명 중 1명은 완전히 사망하지 않은 상태로 매장된다고 추정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일각에서는 바이에른 주 이민자 하트만Franz Hartmann이 생매장에 대한 미국 대중의 공포심 조장에 가담했다. 유럽과 더불어 19세기의 미국 신문들은 하나같이 생매장당한 사람들의 여러 ‘실화‘로 넘쳐났다. - P14

때 이르게 매장된 임신부가 관 속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식의 기담이난무하던 시기에 무덤에서 사람 목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 역시 생매장과 관련된 여러 일화에 흔히 등장하는 소재였다. 또 당시 신문에 소개된수많은 섬뜩한 기사에 따르면, 발굴된 사체에서는 거의 하나같이 살아나가려 발버둥친 처절한 몸부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 P17

다행히 대처 방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 전반을 뒤덮은 소름끼치는 조기 매장 관련 소식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이 자신은 땅속 1.8미터 아래서 깨어나는 일이 없도록 아예 유언장에 별도 지령을 써넣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유언장에는 사망한 지 6일이 지나기 전 혹은 주요 동맥이 절단되기 전까지는 매장할 수 없다는 조항이 흔히 명기되었다. - P18

이처럼 유언장에 사후 처리와 관련한 구체적 지시 사항을 남긴 이는 불워 리튼에 그치지 않는다.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후에 의사들이 자신의 시신을 절단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1915년 8월 3일판 <타임스>의 부고란에는 베이스워터 Bayswater에 거주하는 에밀리 해리엇Emily Harriet이 한쪽 귀에서 반대 귀까지 자신의 목을 베어 가른 다음 사망을 확인하도록 하는 대가로 스탠리 보스필드Stanle Bousfild 박사에게 20파운드(현재 기준으로 4,000달러 상당)를 지급했다는 기사가 소개되었다. - P18

어쨌거나 더욱 독창적인 방안이 계속해서 등장했으며, 조기 매장된 이들이 관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었다. 일례로 1868년 뉴저지 주 뉴어크 출신의 프란츠 베스터 Franz Vester는 ‘매장 케이스burialcase‘를 고안해냈다. 이 기묘한 고안물에는 사다리가 장착되어 조기 매장의 희생자가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종을 함께 넣어무덤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종을 흔들어 도움을 요청할 수있게 했다. - P19

한편 1893년 프로이센 출신 아달베르트 키아트코프스키AdalbertKwiatkowski는 다소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장치를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장치는 시신을 일종의 허리 벨트로 둘러싼 다음, 지상으로 연결된 튜브를 관통하는 실을 벨트에 부착하는 시스템이다. - P20

한 세기가 지난 다음에도 발명가들은 여전히 비상 장치가 장착된 관을꾸준히 계발하고 있어 21세기형 생매장 공포증에 힘을 싣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시계공이자 금세공 기술자, 모조석 브랜드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파브리치오 카셀리 Fabrizio Caselli는 조기 매장과 관련한 여러 보도를 접하고 크게 동요되어 일명 ‘구명 관bara salvavita 이라고 불리는 장치를 발명해 특허를 얻었다. - P20

망인(亡人)의 쉼터

독일에서는 거의 백 년 전에 소수의 조기 매장 반대 운동가들이 기발한 장치를 갖춘 관에 그치지 않고 규모가 좀더 큰 대비책을 강구한 바 있다. 이들은 ‘시체 대기 안치소(독일어로는 Leichenhausers)‘라는 공간을 마련하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생매장‘을 방지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이운동가들은 사망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확실한 표시가 바로 사체의부패라고 간주하고, 사체가 부패하기 전까지는 매장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 P21

. 그러나 실제로 시체 대기 안치소를 처음 시도한 사람은내과의이자 자선가로 활동했던 크리스토프 빌헬름 후펠란트Christoph Wilhelm Hufeland이다. 그는 1791년에 자신의 고향 독일 바이마르에 최초의 시체 대기 안치소를 건립했다. 이 공간에는 고인을 위한 침대 여덟 개가 갖춰진망자의 방이 있었고, 경비는 창문을 통해 시신의 부패 여부를 관찰했다.
부엌에는 항상 불을 피워 물이 끓을 때 발생하는 수증기가 지하 관을 통해 망자의 방으로 유입되어 방을 덥힐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난방 조치는안락한 환경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신의 부패를 촉진하려는 절차였다. - P21

1795년에서 1828년 사이에 ‘시체 대기 안치소‘는 독일 전역으로 번져나갔으며, 이전보다 더욱 정교한 구조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후기의 시체 대기 안치소에서는 흔히 남성과 여성의 공간이 분리되는데, 망자들의예절과 사생활까지 존중해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1808년 뮌헨에 세워진 시체 대기 안치소는 부자와 빈민의 방을 따로 구분하여 죽은 후에도 사회 계층 간 구분이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당시의 모든 시체 대기 안치소는 전염병이나 재난으로 사망한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으며, 부엌과 열탕 욕조 및 소생 기구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안치소 내에 거주하는 문지기까지 두었다. 일단 시체 대기 안치소로 이송된 시신에는 종을 달고 손과 발에 전선을 부착하여 문지기가 되살아난 사체의 호출에 즉각 응할 수 있게 했다. 홀로 외롭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부패의 시작을 알리는 악취나 섬뜩하게 울리는 방울소리를 기다려야 하는 문지기의 고충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 P22

‘관 속에서난 휴대전화를 꺼주세요.‘

런던 조기 매장 예방 협회는 윌리엄 팁이 진행했던 대다수 캠페인과마찬가지로 오래가지 못했다. 20세기로 접어든 전환기에 꽤 많은 이목을끌었던 런던 조기 매장 예방 협회는 의학 지식의 진보와 함께 1910년경에 걷잡을 수 없는 쇠퇴기로 접어들었고, 사람들의 관심이 끊기자 1936년 해체되었다. 이때는 이미 텝이 사망한 지 18년, 볼룸이 사망한 지 34년째 되는 시점이었다. - P24

오늘날 인터넷 검색 엔진에 생매장 공포증이라는 말을 입력하면, 검색결과로 웹사이트 1만 4천여 개가 나타난다. 소정의 수수료를 받기는 하지만 이중 다수의 웹사이트에서 생매장 공포증 극복을 위한 지원과 어드바이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터넷 광고를 통해 만나볼 수 있는 처방으로는최면 요법에서부터 다소 애매하게 들리는 에너지 심리학 해법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 P25

그러나 약 1미터 아래 땅속에 묻힌 상태에서 휴대전화의 안테나 신호가 잡히는지 시험해본 사람은 아직 없거니와 적어도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무덤에 묻힌사람에게서 전화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는 제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조기 매장이 행해져 온 점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며, 2장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사망 진단 과정이 허점투성이일 경우(심지어 현재까지도) 조기 매장의 가능성은 더 커진다. 그러나 18, 19세기 무렵 뚜렷한근거 없이 떠돌던 예측처럼 생매장이 실제로 그렇게 자주 행해졌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 P26

필사적으로 탈출을 기도한 생매장의 희생자가 자신의 손가락과 팔을 물어뜯어 놓은 듯 보이는 부분도 때에 따라서는 쥐나 기타 해충의 소행으로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1859년 폰 로제Von Rosser 박사가 시도한 한 실험에서는 관 속에 살아 있는 쥐 여러 마리를 넣고 관을 땅속에 묻었다. 이들후 관을 꺼냈을 때 일부 쥐는 다른 쥐의 살점을 먹으며 생존했으며, 또다른 쥐 무리는 관을 갉아먹고 지상으로 탈출했다.¹⁵

15 폰 로제 박사가 자신의 연구 결과를 묶어 1858년에 발행한 연구집 Sach‘s Medizinische Jahrbucher, - P26

. 1846년도 과학상Prix Manni 수상자 유진 부쉬EugeneBouchut는 1850년경 프랑스 전 지역 시장과 서기관들에게 서신을 보내 당시 사회에 떠돌던 생매장 관련 일화에 대한 검증을 요청했으나 사실로 확인된 일화는 단 한 건도 없었다.  - P27

(전략), 독일의 생리학자 에른스트 헤벤슈트라이트Ernst Hebenstreit의 연구 결과가 어느 정도 안도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헤벤슈트라이트의 1862년도 추정 수치를 보면 일반적으로 인간은 밀폐된 관 속에서 60분을 버티기가 어렵다고 한다.¹⁸ 앞서 소개된 폰 로제 박사는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유리 덮개로 밀폐된 관 속에 개 한 마리를 넣어두고 관찰했다. 실험 대상이었던 개가 3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자 로제 박사는 인간과 개의 체면적을 고려했을 때 헤벤슈트라이트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동의했다. - P28

생매장에 대한 공포는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에 해당합니다.
산채로 땅속에 묻히는 장면을 생각하기만 해도
오싹한 전율이 느껴지고 심장은 빨리 뛰지요.
고대의 여러 문서에서도 사망 선고가 내려지고 나서
소생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화장대에 뉘인 다음에야 의식이 돌아와 끔찍하게도
산채로 화장되어야만 했던 사례를 담은 문건도
다수 존재합니다. - P29

3. 휴식을 방해하는 자
도굴과 이장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죽은 이라고 해서 반드시 평온히 쉴 수 있는 것만은 아니며 종종 무덤이 최후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각종 범죄 행위와 문화적 관습, 정치적 사건, 법정 판결, 그리고 흡혈귀와 관련된 온갖 미신 등으로 망자가 최후의 안식처에 머물지 못하고 묘지가 파헤쳐지거나 이장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후안 페론Juan Peron은두 번 도굴된 끝에 현재 세 번째 묘지에 안치되었으며,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17차례 이상 이장을 겪어야 했다. - P48

내쫓기는 유해

영국 성공회 측에서는 이장을 신청하는 유족들을 대상으로 사망자의 유해는 ‘교회 당국에서 보호 관리하며, 이 규정을 위배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²⁹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 측의 이러한 방침은 그다지 신뢰를 사지 못했다. 


29 2016년 12월 2일 관 (타임스), ‘아짐은 가능합니다.
Met Take Thur Dead Relatives)
"고인에게는 손대지 마세요(Move House. But Thou Shalt - P48

때때로 이장은 망자를 위해서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필요에 따라 진행되기도 한다. 대개 묘지는 고가의 부지에 마련되었는데,
훗날 해당 부지에서 개발이 진행될 경우 안타깝게도 유해는 처리하기 거추장스러운 대상으로 전락했다. 일례로 1860년대 미들랜드 철도MidlandRailway는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 묘지를 가로질러 건설되었는데,
이처럼 통근 수단의 개척과 함께 유해 수천 구가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줘야 했다. 개중에는 갓 매장된 시신도 여러 구 있었다. - P49

2002년 CTRL(영국 고속철도) 당국은 세인트 판크라스에 건립될 예정인 유로스타 터미널 공사 현장을 신속히 정리하기 위해 불도저 여러 대로 해당 부지와 유해들을 갈아엎었다. 당시 고고학자들은 유해 발굴을 위해 단 3주 동안만 현장 출입이 허락된 상태였다. CTRL 측은 특별 의회법에 따라 묘지 해체 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는데, 당시 영국 문화재단에서는 모든 유해가 정중히 예를 갖추어 이장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해당 특별법에서 제외되었다고 주장한바 있다. - P50

죽은 자를 노리는 손길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를 보면 소년 제리 크런처 JerryCruncher가 어느 날 아버지에게 "도굴꾼이 뭐죠?"라고 묻자 아버지는 "장사치란다."라고 대답한다. 의문이 가시지 않은 소년이 "그럼 뭘 파는 거예요?"라고 되묻자 잠시 생각에 잠긴 크런처 씨는 "과학적으로 필요한 물건을 팔아."라고 말한다.³⁰ - P52

수많은 영국인과 미국인이 생매장을 두려워한 18~19세기에 일각에서는 상반되는 성격의 공포가 존재했다. 즉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시신이 도굴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번졌다. 당시에는 의료 과학의 진보와 더불어 실험에 필요한 시신의 지속적인 공급이 절실했다. - P53

의학적 연구를 위해 시체를 도굴하는 행위는 이전부터 자행되었다. 우선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1319년 이탈리아 몬디노에서 의학도 4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시체를 도굴하여 해부용 시신이 필요한의과 대학으로 이송한 혐의를 받았다.³¹ 중세 이탈리아에서는 의료 과학발전을 위한 해부용으로만 시신을 활용한 것은 아니다. 


31 해부의 역사에 관해서는 중세 후기의 장례와 사체의 처리(Death and the Human Body in the Later Middle Ages)엘리자베스 브라운 저와 인체 해부, 고군분투의 현장(Human Dissection: Its Drama and Struggle) A M. 라섹저를 참조 - P53

영국에서는 1565년 엘리자베스 1세가 교수형 당한 죄수의 시신 4구를의료 조합, 즉 내외과 의사 협회에 해부용으로 매년 기증하기로 했고, 훗날 1663년 찰스 2세는 기증 시신의 수를 6구로 늘렸다. 그러나 의료 과학의 발전을 꾀하기에는 시신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런던의 의대생이 200여 명에 달했으며, 한 세기가 지난 1823년경에는 그 수가 1천여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 P54

따라서 18세기 말 무렵에는 송장 거래가 꽤 수지맞는 사업으로 여겨졌다. 이론으로 익힌 기술을 실제 인체에 적용해보아야 하는 의료 관계자들은 묘지 도굴범들과 손잡는 수밖에 없었고, 시신 한 구당 현재 가치로 1,800~3,200달러까지 지급했다. 이처럼 불법 시신 거래가 성행하는데도 당시 정부는 이를 확실히 제지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17~18세기영국 법은 시신 약탈에 대한 처벌을 징역형으로만 국한하고, 때때로 범인을 식민지로 추방하는 데 그쳤다. - P54

또 최근까지만 해도 "시신에 대한 유일한 합법적 소유자는 대지뿐이다."라는 법령에 따라묘지 도굴범이라 해도 수의나 장신구 절도라는 명목으로 기소될 뿐 시신자체를 도굴한 행위는 고발 사유가 아니었다. - P54

갓 매장된 시신을 서로 차지하려는 갱단들이 묘지 주변에서 혈투를 벌일 때면 한밤중에라도 격렬히 치고받는소리가 들려왔다. 또 해부학자가 평상시 거래 노선을 벗어나 갱단을 통해서 시신을 확보하기라도 하면, 시체 도굴자가 이에 불만을 품고 해부실에난입해 시신을 도저히 연구에 이용할 수 없는 상태로 난도질해 망가뜨리기도 했다. - P55

시체 도굴자의 생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조슈아 네이플스JoshuaNapels는 1812년에 발표한 저서 『어느 도굴꾼의 일기 Diary of a resurrectionist』통해 시체 도굴자들이 겪어야 했던 직업적 고충을 소개했다. 우선 도굴자는 도굴에 앞서 시신이 완전히 매장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고, 도굴 현장이 적발될까 전전긍긍해야 했음은 물론자신들의 수고를 한입에 삼켜버리는 갱단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야간 범죄가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분노에 사로잡힌 군중이 어떠한 처벌을 내릴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 P55

따라서 묘지 도굴범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직업에 대한 철저한 기밀 유지였던 한편 시민들은 이들의 소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당시에는 관에 못질이 두 줄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매장된 희생자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방지함과 동시에 시신 약탈자에 의한 도굴을 예방하려는 조치였다. 그런가 하면 일부에서는 금속재 관을 고안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관은 1781년부터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 P56

.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브리지먼이 최신형 관을 발명한 그해 때마침 영국에서는 시신 약탈자를 다룬 소설류가 큰 인기몰이를 하며 독자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시신 약탈자에 대한 불안 심리는 메리 셸리 Mary Shelley가 1818년에 발표한 작품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을 통해 잘 드러난다. 작품 속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대담한 실험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납골당과 자칭 ‘불온한 묘터‘에서 사체의 여러 부위를 거둬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57

부유층은 나름의 기발한 고안물을 활용하여 도굴에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었으나 빈민층은 시신 약탈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취약한 대상이었다. 따라서 빈민들은 종종 힘을 모아 묘지에 초소를 세우거나 돈을 거두어 묘지 내에 체계적으로 램프를 여러 개 배치해 시신 약탈자가 어둠을틈타고 쉽게 도굴하지 못하게 했다(오늘날 주차장에 가로등과 CCTV를 설치해 자동차 도난을 방지하는 방식에 비유할 수 있겠다). - P57

스코틀랜드 지방 부유층은 일명 ‘안전한 죽음mortsate‘이라는 쇠 격자나틀을 사용했는데 이 장치는 관 위쪽 지상의 콘크리트에 세우거나 관과 함께 땅속에 묻었으며, 이중 몇 개는 오늘날까지 에든버러 프란체스코 수도회 교회 묘지에 남아 있다. - P58

이러한 공간을 제공하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소정의 비용을 받았고, 그나마 그 금액을 감당할 여유가 있는 유족은 가족이 해부 실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할 수있었다. 에든버러에서 북쪽으로 55마일 거리인 파이프 주 크레일Crail. Fife지방에는 이러한 형태의 시체 보관소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두꺼운 담과 흉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시체 도굴자들을 물리칠 최후의 방패막이라도 되는 양, 흡사 미니어처 요새처럼 보이기도 한다. - P58

‘해골수프‘ 사건

당시 하층민들 사이에는 정부와 의료 관계자들이 모의하여 부족한 해부 실험용 시신을 ‘자신들의 시신‘으로 충당하려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이러한 불안 심리가 만연한 가운데 영국 전역에 산재한 구빈원에서는 주기적으로 폭동이 일어났다. - P59

애버딘과 인버레스크, 헤리퍼드, 그리니치, 뎁포드 등지에서 연일 해부실험 반대 폭동이 일어났으나 의회에서는 1832년 해부법을 통과시켰다.
해부법 조항에는 구빈원에 있는 신원 미상 사체의 경우 48시간(종전 78시간)이 지나면 해부 실험용으로 기증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한편 구빈원 거주자는 본인의 시신을 해부용으로 이용하지 말도록 서면 요청할 수 있다는 예외 조건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윌리엄로버츠 William Roberts가 운동을 벌이기 전까지 이러한 조항을 전혀 알지 못했다. - P59

기증했다. 34 어쨌거나 로버츠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1832년에서1932년 사이 런던의 여러 의과 대학에서 해부용으로 사용한 시신 5만 7천여 구 가운데 구빈원 외에 다른 공급처에서 들여온 시신은 단 0.5%에지나지 않았다. 런던 빈민들은 ‘해골 수프‘의 재료로 전락하지 않았을지는몰라도 스스로 원했든 원치 않았든 죽은 후 시신으로 의료 과학 발전에 공현했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 P60

망자가 유명인이거나 부유층과 연고가 있을 경우라면 해당 시신의 살점과 유골까지도 상당한 돈벌이가 되었다.
알렉산더 T. 스튜어트Alexander T. Stewart는 미국에 최초의 백화점을 세우고1846년 노동자들을 위해 롱아일랜드에 그 유명한 전원도시 가든 시티Garden City‘를 설립한 인물로 유명하다. 1876년에 사망할 당시 그는 미국 최고 부자 중 하나였다. 그의 시신은 맨해튼 바워리가 세인트 마크 교회st.
Mark‘s-in-the-Bowery에 안치되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장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신이 도난당했고, 절도범들이 시신의 몸값을 요구했다 - P60

링컨의 유해는 유독 불안한 여정을 겪었다. 1865년 워싱턴에서 암살된후 방부 처리된 그의 시신은 일리노이에 안장되기 전까지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뉴욕, 올버니, 버펄로, 클리블랜드, 콜럼버스, 신시내티, 인디애나폴리스, 시카고를 비롯한 기타 여러 소도시로 약 2,700킬로미터를 떠돌며 국민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링컨의 부검 담당 의사 중 한 명이 공개한 산산이 부서진 링컨의 두개골 중 작은 조각 7개와 상처를 감쌌던붕대, 그리고 피 묻은 소매는 워싱턴 소재 국립 의료 박물관에 기증되어 위인의 자취로 보존되었다. - P61

페론의 경우와 같이 모든 유족이 거액의 몸값 요구를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78년에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이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스 묘지에 안치되었던 그의 유해가 도굴되었고, 도굴범들은 몸값으로 65만 달러를 요구했다. 채플린의 아내 우나0ona는, 만약 남편이 그 소식을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액수라고 빈정댈 것이라며 몸값 지급을 거부했다. 시신은 결국 11주가 지나고 나서 발견되었고, (후략). - P62

몸값 착취를 목적으로 무덤을 파헤치고 유해를 훔쳐내는 장면은 단순히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불쾌감을 유발하지만, 도굴 행위의 동기가이보다 악랄하고 불량한 경우라면 과연 어떠할 것인가? 2006년 9월 5일21세의 알렉산더 그런크Alexander Grunke와 그의 쌍둥이 동생 니콜라스Nicholas, 그리고 니콜라스의 단짝 더스틴 라드케Dustin Radke는 삽을 차에 싣고 위스콘신 주 카스빌에 있는 세인트 찰스 묘지로 향했다.
(중략)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이 일당 중 누구도 숨진 여성과 안면이 없었다. 단지 지역 신문 부고란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사진 속 여성에게 반해버린 니콜라스는 도굴을 결심하고콘돔까지 준비해 간 것이었다. 다행히 이 일당의 도굴 행위는 관 뚜껑에삽이 닿는 정도에서 그쳤다. - P63

정치적 음해와 망자의 수난

(전략) 그래서 베드로는 라망 후 곧바로 진행된 종교 재판의 결과에 따라 무덤 속에서 고이 잠들지 못하고 유해가 파헤쳐지기에 이르렀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드로는 나사로와 같이 무덤에서 부활하지 못했고, 유해 발굴역시 나사로의 그것과 달리 유쾌한 의식이 아니었다. 그의 유골은 종교재판 후 불태워졌다. - P64

(전략),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정치적 우위에서 밀려난시점과 맞물린다. 1658년 사망한 크롬웰은 한때 그가 몰아낸 귀족들과마찬가지로 방부 처리되어 국장을 거치고 선대 왕족들과 나란히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왕정복고가 일어난 후 1661년 크롬웰은 대역 죄인으로 매도되었고, 청교도 열풍이 영국 사회를 휘감았다.
마침내 크롬웰과 측근들의 시신이 발굴되어 런던 거리를 끌려 다니다가 범죄자들의 교수형이 집행되던 사형장에 다다랐다. - P65

(전략). 이러한 움직임은 해당농장을 폐쇄하게 하려던 시위대 내 과격파 동물 보호 운동가들이 2004년10월에 크리스의 장모인 글래디스 해먼드Gladys Hammond 여사의 유해를 도굴해 빼돌린 사건을 계기로 최악의 정점으로 치달았고, 마침내 반대 운동은 결실을 보았다. 10개월 후인 2005년 8월 마침내 크리스는 기니피그 농장 폐쇄를 발표했다. 그러나 2006년 5월 도굴범 일당 네 명이 체포되고 해먼드 여사의 유해 행방이 드러낸 다음에야 농장은 완전히 폐쇄되었다(도굴범들은 스태퍼드셔 케녹체이스 지역에 해먼드 여사의 유해를 묻어 두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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