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에서도 그는 각별한 존재였다. 그 사람만큼 이상한 인물은 어지간해선 찾기 힘들다.
그날, 그는 말을 건넨 그녀한테 이렇게 물었다.
"죽고 싶은 계절 없어요?"
첫 대면 상대한테 이런 뜬금없는 첫마디를 날리는 사람은 그 말고는 없을 것이다. - P13

봄잠은 새벽을 모른다고 했다.
자취생활을 하는 사이케테이 리코가 자명종의 충고를 무시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연히 리코가 일어난 시각은 정오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 P14

단정한 남학생 교복 차림인 걸 보니 신입생인가. 리코와 마찬가지로 지각임에 틀림없다.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걸 보아하니, 섬세한 겉모습하고는 다르게 의외로 담이센 녀석일 수도 있다. 뭐, 그건 상관없다. 주목할 대상은 남학생이 걸어가는 장소였다.
특이하게도 남학생은 인도가 아닌 다리 난간을 걸어가고 있었다.
폭이라 해봐야 20센티미터도 안 되는 난간 위를 아무렇지도않게 걸어간다. 발놀림에서 망설이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 P15

남학생은 리코를 한 번 슬쩍 보더니, 자기 주위로 시선을 천천히 돌려본다. 둘러봐도 참새들밖에 안 보일 텐데.
"자네 말이야, 소년. 나는 너한테 묻고 있어. 지금 이 장소에자네랑 나 말고 또 누가 있지? 아니면 내가 참새한테 말을 거는 기인으로 보이나?" - P16

이윽고 정말로 시시하다는 듯이 말했다.
"죽고 싶은 계절 없어요?"
리코는 몸을 오싹 떨었다.
"제 입장에서는 그게 봄이다, 얘기는 그뿐이에요."
겉모습대로의 담백한 어조였다. - P18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던 리코의 눈앞으로, 갑자기 남학생이 사뿐히 착지했다.
그 순간, 남학생이 대검을 자루에서 뽑듯 팔을 가로로 후렸다. 리코의 앞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렸고, 정신이 들고 보니 자전거가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성가신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곧바로 남학생이 난간을 강타한다. 금속이 휘는 듯한 소리가리코의 귓전을 때린다. 바로 앞에는 하얗고 단정한 얼굴이 있었으며, 그 두 눈은 리코를 멸시하듯이 내려다보고 있다. - P19

리코는 자전거를 힘차게 일으켜, 그대로 끌면서 남학생 바로옆을 따른다.
"나는 2학년, 사이케테이 리코야. 가까워진 기념으로 이 금화 초콜릿을 선물로 줄게. 금화를 다섯 개 모으면 빠짐없이 뜨거운 키스를 선물해주지. 참고로 지금 막 생각한 기획이야."
남학생은 초콜릿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리코는 개의치 않고말을 이었다. - P21

"뭐, 어느 쪽으로든 내 지적 호기심은 대부분 채워지겠지. 이것만은 책임을 가지고 말할 수 있거든?"
방긋 웃어 보이고 남학생의 얼굴을 슬쩍 엿본다. 남학생의미간은 한눈에도 불쾌감이 각인되어 있었다.
교문을 지나자 5교시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내에 울려퍼졌다.
"이런, 종이 울렸잖아. 서둘러야겠군." 리코는 그리 말하고남학생의 허리를 탁 친다.  - P22

그가 여섯 살이었을 때, 부모님들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부모님을 대신하여 그의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은 여덟 살 연상이었던 누나였다.
이른 나이에 부모님을 떠나보낸 남매였으나, 부모님이 남긴유산과 보험금 덕분에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았던 것은 다행이었다. - P23

당연히 HR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리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엔마 사나는 황급히 리코를 쫓아가 뒷덜미를 잡는다.
"리코!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어딜 가려고? 몇 번이나 전화한 줄 알아? ‘기인‘ 소리를 듣고 다니는 네 비상식적인 행동에는 이미 면역이 되었지만, 그래도 한마디라도 하고 가면 어디가 덧나?" - P25

사나는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쉰다. 두 사람만 남은 교실에는 한숨의 메아리도 잘 퍼진다.
"......자신을 인간이라고 주장할 거면 적어도 몸단장에도 신경을 좀 쓰라니까. 너도 여고생이잖아?"
몸단장만 놓고 보면 사나가 압도적으로 깔끔하다. 교복에는다림선이 확실하게 들어가 있고 넥타이에서는 주름을 찾아볼수 없었으며, 와이셔츠도 깔끔했다. 앞머리는 다소 길었지만 머리카락 끝을 꼼꼼히 빗어 놓아서 청결함을 잃지 않았다. - P26

사나의 목소리는 어이없다 못해 자연히 거칠어졌다.
"보나마나 오늘은 길어진 머리가 거추장스러워서 때마침 근처에 있던 그 충전기 코드로 묶은 거다. 그런 거 같은데……??
"굵기하고 길이가 딱 맞더라고, 이거."
"알게 뭐야! 내 놔!"
재능을 썩힌다는 것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P27

리코가 그렇게 표표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사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다.
"뭐가 갇혀 있어주지.‘ 야. 감옥 안에서 가지가지 난리쳐 놓고도 그런 말을 해?"
"나는 내 미학에 순종하고 있어. 아니, 노예라 해도 과언이아니지."
리코는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면서 사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 P29

"지금 나는 완전히 소풍 전날의 어린애처럼 두근거리고 있어."
리코가 말하는 ‘귀엽다‘는 말은, 호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재미있다‘거나 ‘흥미가 깊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서 리코는 ‘재미있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 남자를 보러 가려고?"
"글쎄. 저쪽이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감수하고 갈생각은 있어." - P30

리코는 전혀 주눅 든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
미안하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으니까.
사이케테이 리코의 최대 흥미거리는 ‘인간‘이자 ‘인간고찰‘ 이며, 사이케테이 리코에게 그 이외의 모든 사항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 P31

 여학생의 리본 타이를 보니 아마 두 사람은 2학년 선배일 것이다.
"이름을 모른다고? 너는 언제나 그렇다니까!"
남자 선배의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날카로운 박력에 유이를 포함한 주위의 신입생들이 깜짝 놀랐다.
"어이가 없네. 너 진짜 고양이 맞지? 왜 그렇게 생각 없이 행동해?" - P32

아무래도 말다툼을 벌이고는 있긴 해도 사이는 나쁘지 않은것 같다. 유이는 휴우 가슴을 쓸어내리고 가방을 가지러 교실로 이동한다.
"이름도 모르면서 어떻게 목표인물을 찾아낼 건데?"
"얼굴은 알고 있지."
"지금 수업 끝났잖아? 집에 가버렸으면 어쩌려고?"
"걱정 마. 방법은 분명히 있으니까." - P33

"뭔 소리야, 스마트하고 손쉬운 방법이라니까."
유이가 복도를 나오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신입생 제군들, 긴급사태다! 내 옆에 있는 엔마 사나가지금부터 홀딱 벗을 거란다!"

발랄한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1학년 복도에서 메아리친다. - P33

여자 선배는 주위로부터의 시선들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입에서 여유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 모처럼 모였으니 너희들에게 하나 질문 좀 하자. 나는 2학년인 사이케테이 리코라고 하는데, 사실 어떤 신입생 남학생을 찾고 있어, 특징은, 글쎄∙∙∙∙∙∙. 이 엔마 사나하고 똑같은 정도로 키가 커. 그리고 오늘 지각을 했고, 오후 좀 넘어서라는 어처구니없는 시간에 등교했음에도 주눅 든 기색도 안보이던 녀석이야. 참고로 상당히 까칠하기도 해. 우리 사나하고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까칠할까? 뭐, 그건 나중 문제고 누구 짐작이 가는 사람 있나?" - P34

갑자기 누군가가 "혹시 카미우치 얘기…………?"라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 P34

흥미 본위로 그를 알아보려 하는 거라면, 어느 쪽한테나 행복한 결과는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유이는 알고 있었다.
"너한테 폐가 가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아니면 신부님 앞에서 맹세라도 할까?"
"아, 저는 상관없지만요, 그, 그 애가………. 그 애는 좀 ‘섬세한 부분이 있어서・・・・・・ 가능하면 그대로 놔두고 싶어요......."
여자 선배는 실험체를 관찰하듯 유이의 전신을 위아래로 스윽 훑어보면서 "흐음" 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나는 이런 동아리의 부장을 하고 있어." - P36

"인간관계에 있어 연애만큼 농밀한 관계는 없지. 연애는 인생의 축소판이야. 그리고 작은 우주......, 라고 하는 건 좀 지나칠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멀리 있지는 않다는 게 내 생각이야. 다시 말해 연애에 대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라고생각한다다는 거지."
여자 선배는 논리정연하게 말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간다. 솔직히 유이에게는 좀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매우 즐거운 모습으로 말하는 선배의 모습은 보는 이쪽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 P37

선배들이 각자 자기소개를 한다. 여자 선배는 방금 말했던 사이케테이 리코라는 이름이며, 통칭 ‘변연부‘의 부장이라는 직함이 붙어 있다.
"사이케테이라고 부르기 힘들면 편하게 리코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계속해서 키가 큰 선배가 엔마 사나라고 자신을 소개하였으며, 본인은 ‘변연부‘와 무관한 ‘검도부‘ 사람이고 지금은 어쩔수 없이 따라왔을 뿐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이케테이 리코 선배와 엔마 사나 선배. 유이는 잊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이름을 외운다.

괴담이라도 들려주듯 오빠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간다.
"그중에서도 요주의 대상은 ‘스트레인지 사이키델리코‘ 라는 별명을 가진 부장, ‘기인‘ 사이케테이 리코하고 ‘염라대왕‘으로 불리며 사이케테이의 친구인 엔마 사나, 이 두 사람들이야.
이 두 사람하고는 절대로 어울리면 안 돼. 적대시당하는 그날로 학교는 더 이상 못 가게 될 거야."
악몽이라도 떠올리는 듯 오빠는 어깨를 움츠렸다. - P41

오빠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고 유이는 곧바로 후회감에 빠졌다. 어째서 여기까지 오기 전에 생각을 못했을까. 하지만 한숨을 쉰들 벌써 늦은 일이다. 이미 유이는 선배들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었으니까.
다만, 반대로 안심이 되는 부분도 있다. 오빠의 말만 들었을때는 사이케테이 리코와 엔마 사나는 아주 무서운 사람들일거라 상상했다. - P42

정신이 들고 보니 리코 선배가 책상에 턱을 괴고 편안한 표정으로 유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얘기가 좀 길어질 거 같은데요..."
"바라던 바야. 어떤 사사로운 얘기라도 괜찮아.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얘기를 들려주길 바라."
유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제가 그 애하고, 아, 으음, 카미우치 유우진군하고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겨울이었어요." 옛날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말한다. - P44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엔마 선배가 돌아와 있었고, 유이와 눈이 마주치자 "자." 하며 홍차를 던져 건넨다. 홍차를 받은 유이가 안절부절 못하고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라고 깊게 고개를 조아리자, "괜찮아."라고 엔마 선배는 눈을 가늘이며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수고했어. 상으로 금화 초콜릿을 주지."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리코에게 "너는 좀 미안한 줄 알아!" 하며 불쾌하게 노려보면서도 홍차를 제대로 건네는 엔마 선배는, 겉모습과 태도에비해 훨씬 친절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 P45

"-카미우치 군이 초등학교 2층 교실에서 뛰어내렸어요."
엔마 선배는 "......이것 참." 하며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와 함께 앞머리를 흔들었다.
그 옆에서는 턱에 흰 손가락 끝을 댄 리코 선배가 눈을 가늘이고 매우 즐거운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P46

"그는 나한테 ‘봄은 죽고 싶어지는 계절‘ 이라고 했는데, 자네는 뭐 아는 바 없나?"
"완전 미친놈이네."
얘기를 들을수록 미간의 주름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 수 있었다. 또 여느 때처럼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 P47

"......그러니까 다섯 번이라는 얘기는." 손목으로 턱을받친 채로 침묵하고 있던 리코는 고개를 들더니, 천천히 입을열었다.
올해도 벌써?"
눈썹을 내리깐 유이가 꼬박 고개를 끄덕인다.
"입학한 지 사흘 만에……………"
곁눈질로 리코를 보아하니, 입술이 말랐는지 빨간 혀를 살짝내밀어 핥고 있다. 쭉 가늘어진 눈이 유이를 응시하고 있다. - P48

"무리할 것 없어.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둬도 되거든?"
지킴이 역할인 사나는 제쳐놓고, 유이가 ‘스트레인지 사이키 델리코‘라고 불리는 괴인 리코하고 교류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 P49

"......카미우치 군은 놀란 표정의 남자애 귓전에 대고 말했어요. ‘똑바로 봐‘, 그렇게 말하고 카미우치 군은 남자애를 내팽개치더니 가볍게 철책을 뛰어넘어 정원으로 뛰어내렸어요. 그러자 나뭇가지가 연이어 꺾이는 소리가 들렸고, 근처에서 분위기를 살피던 같은 반 애들이 비명을 질렀고......."
태풍이라도 맞은 듯이 정원의 소나무 몇 그루가 꺾여 있었던건, 그 때문이었던가 하며 이유를 깨닫는다. - P50

"-이제야 알겠군. 내가 신입생들에게 그에 대해 물어봤을 때 다들 쭈뼛쭈뼛하는 태도를 보였던 이유를 말이야."
진정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리코는 유이에게 미소를 지었다.
"헌데 하나 물어보겠는데, 그의 자살미수 방법은 전부 ‘투신‘이었지 않나?" - P51

작은 몸으로 간곡히 호소하는 유이의 필사적인 모습에서, 카미우치 유우진에 대한 깊은 마음이 느껴진다.
"카미우치 군은 저를 구해줬어요! 지금 제가 있는 것도 그 애덕분이에요! 카미우치 군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지금 갚아주고 싶어요! 제발 힘이 되어주세요! 부탁이에요!" - P52

"얘기를 들어봤기 때문에 더더욱 간단하지 않을 일임을 아는거야. 걔는 이제까지 다섯 번이나 자살미수를 반복했잖아? 모종의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이제까지 몇 번이고 받았겠지. 그리고 어른들이 몇 번이고 걔를 구하려고 했을 거고. 그중에는임상심리사와 같은 전문가들도 있었겠지. 하지만 결과는 어땠4?"
"그건......." 사나는 입을 다문다. "그런 거야." 리코는 살짝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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