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졌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생활하는 것일까? 옷은 어떻게 입고, 화장실에는 어떻게 가고, 목욕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나는 부엌으로 그의 아내를 따라가 그가 어떻게 옷을 갈아입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식사할 때랑 비슷해요. 늘 두는 장소에 제가 남편의 옷을 갖다둡니다. 그러면 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갈아입어요. 하지만 뭔가 방해를 받아 맥이 끊기면 완전히 아무것도 못하게 되죠. (후략)" - P40
"그래요. 그이는 노래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어요. 학교에서해마다 그림을 전시할 정도로요." 나는 그 그림들을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림을 그린 시간순으로 걸려 있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모두 생생한 느낌이 살아 있는 사실적인 그림이었다. 게다가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생생함도 사실성도 구체성도 떨어져갔다. 훨씬더 추상적으로 변해간 것이다. 아니 기하학적이고 입체파적이기까지했다. - P41
그녀는 "어머나, 의사 선생님. 그림 볼 줄 모르시네요! 선생님은 ‘예술적인 발전‘을 보지 못하시나요? 처음에는 사실주의였다가 나중에는 거기서 벗어나 추상적인 비구상 그림으로 발전했잖아요." 하고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차마가련한 P부인에게 그런말은 할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은 분명 사실주의에서 비구상으로, 다시 추상으로 바뀌어갔지만, 발전한 것은 화가 자신이 아니라 그의 병세였다. - P41
그렇지만 부인이 한 말에도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병세와 그의 창작력이 투쟁하는 모습도 어느 정도는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그 둘 사이의 융합도 보였다. - P42
우리는 커다란 음악실로 돌아왔다. 뵈젠도르퍼가 한가운데 있었고 P선생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지막 남은 과자를 먹고 있었다. (중략) "저로서는 어디가 잘못된 건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좋은 점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훌륭한 음악가이고 음악은 선생님의 삶 그 자체입니다. 만약 제가 처방을 내린다면, 음악 속에 파묻혀서 생활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음악이 선생님 생활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지내시라고 말입니다." - P42
그는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대신 음악에 맞춰행동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동작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면의 음악이 멈추면 그는 당황해서 행동을 딱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그의 아내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학생이 얌전히 앉아 있으면 누가누군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미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학생이 몸을 움직이면 "너 칼이구나.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 하며 금방누군지 알아맞히곤 했다는 것이다. - P43
뒷 이야기
(전략). 선생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보는‘ 능력즉 관계를 짓는 능력이었다(그의 판단력은 그 밖의 영역에서는 정상적이며 동시에 빠르기까지 했다). 시각정보의 부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까? - P44
. 시각의 기본틀 즉 시각정보의 처리나 통합 능력에 생긴 결함을 원인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 매크래는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추상적 경향‘을 거론한 골드슈타인은 공공연하게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추상적 태도라는 것은 ‘범주화‘를 인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P선생의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 P44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신경학이나 심리학은 모든 것을 다 말하지만, ‘판단‘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단력의 결함(P선생처럼 특수한 영역의 장애도, 그리고 더 일반적인 장애인 코르사코프 증후군 즉 이마엽 증후군의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정체성의 문제>와 <예, 신부님, 예, 간호사님> 참조)이야말로 수많은 신경심리학적 장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 P44
그러나 철학적인(예를 들면 칸트적인) 의미에서나 혹은 경험론적·진화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 중에서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물의 경우 아니 인간의 경우라도 ‘추상적 경향 없이 살수는 있지만, 판단 능력이 없다면 당장 사멸하고 말 것이다. 판단은 고등한 생활이나 정신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임에도, 고전적인(계량적인) 신경학에서는 무시되거나 잘못 해석되어왔다. - P45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 P45
나로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P선생의 예후를 계속 관찰해 더 실제적인 병리학적 연구를 진행하지못한 일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로 남았다. - P46
P선생과 같은 이상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를 대할 때면 우리는그러한 경우가 ‘독특하고 유례없는 경우가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 그래서 우연히 1956년에 나온 《브레인》지를 읽다가 P선생과 이상할 정도로 똑같은 사례를 발견했을 때, 아주 큰 흥미로움과 반가움을 느꼈다. 아니 일종의 안도감까지 느껴졌다. 이 학술지에 실린 사례는 신경정신학적으로나 현상학적으로나 P선생과 비슷한 아니 거의 똑같은 증세를 보인 환자에 관한 것이었다. - P46
*이 책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시각인식불능증에 관한 문헌, 특히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병에 대한 사례 보고는 얼마든지 많다. 특히, 최근에 이와 같은 시각인식불능증 환자에 대한 지극히 상세한 연구(1979년)를 발표한 앤드루 커테츠 박사를 만날 수 있어서 나는 무척 기뻤다. 커테츠 박사가 해준 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었다. 얼굴인식불능증세가 점점 심해진 어떤 농부는 결국 자기가 기르던 소나 말의 얼굴까지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사박물관의 안내원이었던 또다른 환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유인원의 입체모형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P의 경우나 매크래와 트롤의 환자 경우와 같이 상대가 특히 살아 있는 생물체일 경우에 터무니없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 P47
(전략)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P선생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기도 했지만, 매크래의 환자는 자기 아내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아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각적으로 눈에 잘 띄는 뭔가 특징적인 것이 필요했다. 그것도 눈에 확 띄는 뭔가가. 예컨대 커다란 모자 같은 것‘ 말이다. - P49
침대에서 떨어진 남자
오래전에 내가 의대생이었을 때, 한 간호사가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해서 내게 아주 기묘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새로 환자가 입원했어요. 오늘 아침에요. 젊은 남자인데, 사람. 도 좋고 아주 멀쩡해 보였어요. 그래요. 몇 분 전에 낮잠에서 깨기 전까지만 해도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흥분해 있는 것이 아주 이상해요. 전혀 딴 사람 같아요. 어찌 된 영문인지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에 퍼질러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침대로 올라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예요. 얼른 오셔서 제발 무슨 일인지 좀 알아봐주세요." - P104
"전 오늘 아침에 몇 가지 검사를 받으려고 병원에 왔습니다.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신경과 의사들이 내 왼쪽 다리가 둔한 것 같다며 나더러 입원하라고 했어요. 그래요, 의사들은 내 다리가 ‘둔하다‘고했어요. 하루 종일 기분도 좋았고 저녁에는 잠까지 곤하게 잤어요. 그런데 침대에서 몸을 좀 뒤척거렸더니 ‘누군가의 발‘이 있는 거예요. 잘린 다리 말이에요.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어찌나 놀랐는지 구역질까지나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어요.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전략)" - P106
"이렇게 소름끼치고 무시무시한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이건 방금 죽은 시체에서 나온 거예요!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에요! 소름끼쳐요! 이놈이 나한테 달라붙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양손으로 있는 힘껏 다리를 움켜쥐고 몸에서 떼어내려고 애쓰다가 안 되자 이번에는 미친 듯이 때려댔다. "진정하세요. 진정하라고요! 다리를 그렇게 때려대면 안돼요." "왜 안되죠?" "당신 다리니까요. 당신 다리라는걸 모르는 거예요?" - P107
내 표정을 보고 그는 내가 아주 진지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이게 내 다리라고요? 설마 내가 내 다리도 못 알아본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래요. 자기 다리는 누구나 다 알아보죠. 자기 다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죠. 놀리고 있는 건 바로 당신 아닌가요?" - P107
이번에는 나도 그만큼이나 당황해서 물었다. "뭐로 보이느냐고요?" 그는 내 말을 천천히 따라했다. "뭐로 보이는지 말해드리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어떻게 이런 것이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거죠? 어디서 굴러먹다온 녀석인지 모르겠다고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극도의 공포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 P108
뒷이야기
(전략)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밤에 잠에서 깰 때마다 침대 속에 털이 덥수룩하게 나 있는 사람의 다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도 죽어서 싸늘하게 식은다리라는 겁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합니다. 그래서 그는 성한 팔과 다리로 그것을 침대 밖으로 밀쳐냈고, 그러면 자기 몸도 함께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편마비 증상이 있는 팔다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환자의아주 흥미로운 예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다리는 침대 속에 그대로 있었냐‘고 묻자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기분 나쁘기 짝이 없는 그 낯선 다리에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었던 겁니다. - P109
2부
이 병을 치료하고 싶은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병이라는 것은 알지만병 덕분에 기분이 좋으니까 말입니다. 나는 그런 기분이 좋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좋아요.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그 덕분에 이십 년 동안 느끼지 못했던 원기를 느끼고 기운까지 팔팔하니말이에요. 우습지요. 이게 모두 큐피드 덕분이라니 말이에요. - P153
신경학에서는 ‘결손‘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결손‘은 어떠한 기능장애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신경학 용어이다. 기능은 정상 아니면 비정상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이다. - P155
그러면 결손의 반대 상태인 기능의 과잉이나 잉여의 경우는 어떨까? 신경학에는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러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기능이나 기능 체계는 기능하든지 기능하지 않든지 둘중 하나이다. 신경학적으로는 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 P155
해부학과 병리학에서도 비대와 기형, 기형종과 같은 말을 사용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생리학에는 그런말이 없다. 기형종이나 조증에 해당하는 과잉을 가리키는 말이 없는것이다. - P156
고전적인 ‘잭슨파 신경학에서는 과잉으로 인한 이러한 장애를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소위 ‘해방‘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기능의 과잉 혹은 팽창이 있지만 그런 것도 고려에 넣지 않는다. 휴링스 잭슨 자신은 분명히 ‘초양성‘ 정신 상태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언급은 오히려 이례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156
과잉을 고려하기 시작한 신경학자가 등장한 것은 지극히 최근의일이다. 루리야가 쓴 두 권의 임상기록은 그 점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산산히 부서진 세계의 남자》는 상실에 대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과잉에 대해 논했기 때문이다. - P156
나의 책 《깨어남》은 엘도파를 투여하기 전의 놀라운 결핍 상태(운동불능증, 무의지증, 무력증, 무반응증 등)와 엘도파 투여 후의 무서운 과잉 상태(운동과다증, 과다의지중, 과다수축 등) 사이의 균형을 잘 이룬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깨어남》에서는 기능을 가리키는 용어와 개념과는 별도로 새로운 용어와 개념이 나온다. 예를 들면 충동, 의지, 역동론, 에너지 등이다. - P157
루리야의 과다기억증 환자나 엘도파의 투여로 과도하게 고양되고 활기를 띤 내 환자에게서는 섬뜩할 정도로(광기에 가까울정도로) 증대된 쾌활함이 관찰된다. 이 지경에 이르면 단순한 과잉의 차원을 넘어선다. 증식이라거나 기질적 다산성의 문제인 것이다. - P157
기억상실증과 인식불능증의 병례에 접했을 때, 우리는 단지 어떤 기능이나 능력이 손상되었을 거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기억항진과 인식력항진 환자의 경우에는 기억력과 인식능력이 태어나면서부터 늘 활발하고 생산적이다. - P157
우리는 과잉의 병례와 마주침으로써 새롭고 중요한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인간의 정신생활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할 수 없다. 전통적인 신경학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분석하고 결함에 중점을 둔나머지, 실제 생활을 고려하지 않았다. 실생활이야말로 모든 대뇌 기능의 궁극적 표현이다. - P158
고양 상태란, 단순히 건강하고 충실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불안하고 도를 지나친 상태가 되기도한다. 이 때문에 기행과 추악한 행위를 초래하는 일도 있다. 지나치게 흥분한 환자는 통합과 억제를 잃은 상태, 어떤 종류의 ‘과잉‘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충동과 이미지와 의지에 압도되는 상태이며 생리적인 광폭성에 사로잡힌(혹은 내몰린) 상태인 것이다. - P158
겉보기에는 건강하지만 사실은 병에 걸린 상태라면 그것은 하나의 패러독스다. 이것은 스스로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여기며 멋진 기분으로 살아가다가 병의 싹이 숨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가공의 괴물이나 자연이 보여주는 속임수 혹은 재미있는 패러독스의 하나라 할 수 있다. - P159
전부터 나는 이러한 아이러니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한 바 있다. 《편두통》에서 나는 발작의 전조 혹은발작의 시작을 알리는 항진상태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조지 엘리엇을 예로 들어 ‘위험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는 것은 그녀에게 때때로발작의 전조였다고 썼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위험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는 표현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 표현이야말로 바로 지나치게 건강하다‘라는 말 속에 숨은 양면성과 역설을 나타내고 있다. - P159
이렇게 해서 환자는 ‘몸 상태가 좋은‘ 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지만 몸 상태가 지나치게 좋은 것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감정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깨어남》의 핵심적이고 잔혹한 주제이다. 도저히 알 수없는 어떤 깊은 곳에 결함이 있어서 몇십 년이나 지독하게 고생한 환자가 기적처럼 갑자기 좋아진다. - P160
레너드 L의 경우도 그랬다. 그도 충실한상태를 지나 과잉상태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상태를 신의 ‘은‘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건강하고 활력이 가득 찬 상태는 윤택을 넘어 도를 넘은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화와 안락을 느끼는 가운데 무난하게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그는 이윽고 그렇지 않음을 느꼈다. 지나치고 도가 넘쳐 오히려부담스럽다는 의식이 들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조각조각 분해되고 폭발해서 산산이 부서지는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 P160
어떤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이렇게 말했다. "에너지가 너무 과한 것 같아요. 너무도 활기차고, 힘도 넘쳐요. 너무도.... 열병에 걸린 것 같은 에너지, 그러니까 뭔가 병적인 특출함이라고 할까요." ‘위험하리만치 좋은 몸 상태‘와 ‘병적인 특출함‘, 그것은 기만적인 행복감이다. 그 밑에는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 P161
이런 무시무시한 상태에 대해 <익살꾼 턱 레이>에 나오는 레이는 "나는 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정신이 과도하게 비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투렛토마‘로 갈 수도 있다. 다행히 그는 자아도 강했고 투렛 증후군의 증세도 비교적 가벼웠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까지될 위험성은 없었다. - P161
큐피트병
90세의 쾌활한 할머니 나타샤 K가 우리 병원에 찾아온 것은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88번째 생일을 맞은 지 얼마 되지않아서 어떤 ‘변화‘를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중략)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몰라요. 전보다 훨씬 건강해지고 힘이 넘치는 느낌이 드니까요. 도로 젊어졌나봐요. 젊은 남자들에게도 관심이 생기고요. 그래요, 정말 살맛나는 기분이 든답니다." - P179
"스스로는 어떤 기분이 드셨어요?" "깜짝 놀랐지요. 얼마나 감격했던지,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는전혀 의심하지도 않았지요. 하지만 이제 저도 의심스러워요. 제 자신을 타이르기도 하지요. ‘나타샤, 너는 여든아홉 살이야. 그런데도 벌써일 년이나 이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잖아? 원래 소극적인 성격이던 네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다니.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난데없이이렇게 무작정 행복하다는게 말이나 되는 걸까?‘ 이렇게 무작정 행복해도 되는 건지 생각하다 보니 모든 게 달리 보이기 시작했어요. (후략)." - P180
"아니요. 마음의 병이 아니라 몸이 안 좋아요. 몸속에, 머릿속에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것 같아요. 그래서 기분이 붕 떠버린 거예요. 전 알아냈답니다. 입에 담기도 꺼림칙하지만 이건 큐피드병이에요!" "큐피드병이라고요?" 순간 머리가 멍해진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런 말은 들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P180
만일 초기 감염이 완치되지 않고 증상만 완화되었다면 특이하게 긴 잠복기를 거쳐 신경매독이 발병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내가 전에 진료했던 환자 한 명은 살바르산으로 자가치료를 했지만 50년 넘게 지나서 신경매독의 하나인 척수매독이 발병했다. 그러나 70년이나 되는 잠복기는 들어본 적이 없고, 환자자신이그토록 냉정하게 뇌매독이 아니냐고 물은 적도 없었다. "놀랍네요" - P181
노부인은 기운이 넘치는 듯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큐피드병에 걸린 것 같아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을 찾아왔어요. 더 심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들한테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요. 하지만 치료 받는 것도 손가락질 받는 것 만큼이나 싫어요. 이렇게 넘치는 기운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정말로 살아 있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더도 덜도 말고 지금 이 상태가 계속되도록 해주실수는 없나요?" - P182
우리는 페니실린을 투여하기로 했다. 페니실린은 스피로헤타균을 죽이기는 하지만 큐피드병 즉 일단 생긴 뇌의 변화나 탈억제 상태를 되돌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K부인은 두 가지 희망을 모두 이루었다. 생각과 충동에 얽매임 없이 적당한 탈억제 상태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자제심도 잃지 않고 대뇌피질이 더는 손상될 염려도 없이 말이다. - P182
뒷이야기
아주 최근에, 그러니까 1985년 1월에 진찰한 또다른 환자(미겔O)와 관련하여 나는 똑같은 딜레마와 아이러니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미겔 O.는 ‘조병‘이라는 진단으로 주립병원에 입원했지만 사실은 신경매독에 의한 흥분 상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P182
처음에 만났을 때 그는 아주 흥분된 상태였다. 내가 어떤 단순한 형태를 그려 보이며(그림 A) 이것을 그리라고 말하자 그는 단숨에 입체도형을 그렸다(적어도 나에게는 입체도형으로 보였다). 그러더니 그것을뚜껑이 열린 상자라고 설명하면서(그림 B) 그 속에 과일을 그려 넣으려고했다. 상상력이 흥분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원래의 그림에 있던 동그라미와 가위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P183
그러자 그는 충동적으로,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원래의 형태를 마름모꼴로 바꾸고 거기에 출하나를 연결하더니 끝에 사내아이를 그렸다(그림 C). 그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사내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어요. 연이 하늘에서 펄럭이고 있단 말이에요." - P184
그는 이번에는 정확하면서도 평범하게, 원래의형태보다 조금 작게 그렸다(할돌 때문에 작은 글자증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림(그림 D)에는 앞의 두 그림과 같은 재미와 동적인 움직임도 없었고 상상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전에는 정말 생생하게 보였는데 치료를 받고 나니 모든 게 죽은 듯이 보여요." - P185
이러한 그림은 투렛 증후군에서도 상당히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원래의 형태와 생각이 지나친 장식으로 인해 보이지않게 되는 것이다. 암페타민 중독 상태에서 그리는 소위 스피드 아트speed-art (각성제의 영향하에서 그리는 그림-옮긴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상상력이 눈을 떠 점점 활발해지다가 마침내 끝없는 과잉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 P186
바로 이러한 역설이 《깨어남>의 주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투렛증후군 환자 또한 이러한 역설적인 ‘각성 상태‘를 향한 유혹을 느낀다<<익살꾼 턱 레이> <투렛 증후군에 사로잡힌 여자> 참조). 또한 코카인과 같은 마약을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특수한 불안정 상태도 의심할 바 없이 이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코카인은 엘도파나 투렛 증후군과 같이 뇌 속의 도파민을 증가시킨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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