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미오리 레이코의 과거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어요. 그 여자의 과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으니까요. 문신은 그걸 알려주는 단서가 될 거로 생각했죠." - P226

그런 이유뿐이었나, 하고 내심 낙담하면서도 오카베는 혹시나 해서 신주쿠 역 뒤편의 맨션 이름을 메모했다. 그렇게 두 톱모델에게 두 가지 색깔의 나비 문신을 해준 사람을 찾아갔다.
미국인이지만 일본어를 잘하니까 괜찮다, 라고 미리 들었던 대로 벨을 누르자 얼굴을 내민 금발의 남자는 훌륭한 일본어를 구사하며 질문에 답해주었다. - P227

"거짓말로 휴가까지 냈는데 별다른 수확은 없었어요. 다만한 가지 재미있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지난 9월 말에 어떤 젊은 여자가 미오리 레이코의 가슴 사진을 들고 와서 똑같은 문신을똑같은 자리에 해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모델 레이코를 정말 좋아하는 팬이라면서."
"젊은 여자가?" - P228

"그 과도에 찔린 여자가 문신사를 찾아온 여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건가?"
"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오리 레이코와는 다르게 그 여자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다음 달 초에 볼일이 있어 미국에 갈 거라면서 현지 얘기를 꼬치꼬치 물었다고 한다.  - P228

"이를테면 레이코가 어릴 때 가난하게 자라서 지금도 빵에아무것도 안 바르고 먹는다, 라고 웬만해서는 알지 못할 얘기들을 했다는 게 이상해요. 미오리 레이코와 뭔가 특별한 관계였던게 아닌가 싶은데…."
전화 협박자와 밀고자 외에 또 한 명, 사건의 이면에서 수수께끼의 베일에 감싸인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 P229

"자살로 볼 수는 없을까요?" - P230

12장 누군가 誰か

"자네를 이런 번잡스러운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하네.."
점원이 가기를 기다려 눈앞의 사사하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설마 내가 자네에게 부탁한 전화를 받고 사와모리가 자살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 P232

사와모리가 유서에 고백한 사건 날 밤의 행동은 하나하나그날 밤 그 자신이 한 행동이었다. 사사하라에게 죄를 덮어 씌우기로 결심한 것도, 레이코가 담요를 찾으러 잠깐 침실에 갔을 때 지문이 남지 않도록 손수건을 꺼내 독이 든 술잔과 레이코가 마시던 술잔을 바꿔치기한 것도 똑같았다. - P232

그날 밤 사와모리가 그 맨션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레이코와 그의 대화와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고, 알지도 못하는 그를 감싸주려고 자신이 한 짓이라는 거짓 유서를 남긴 채 죽어갔다. 라는 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 P233

어제 아침에 마가키 기미코가 그의 전화에 이상한 반응을보였던 게 떠올랐다.
"모레 밤 11시에 다시 이 번호로 전화하세요. 어떤 얘기든받아줄 테니까."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가키 기미코도 범인인것이다. 똑같은 큰 착각 아래 그도 사와모리도 마가키 기미코도 살인범이 되었던 것이다. - P234

성형수술이 알려질 우려 때문에 숨긴 것도 있었겠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뭔가 더 중요한 비밀이 있었던게 아닐까. - P234

이름 옆에 숫자와 알파벳이 있었다. 이시가미 요시코의 이름에는 ‘4-B‘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표시냐고 물어보니 기숙사방 번호이고, 2인 1실이니까 또 한 명 같은 번호를 가진 아이가있을 거라는 대답이었다.
같은 페이지의 조금 아래쪽에 또 하나의 ‘4-B‘가 눈에 띄었다. ‘가와다 기요코‘라는 이름으로, 기숙사에 들어온 건 이시가미 요시코와 같은 시기였지만, 이쪽도 기숙사를 나간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 P236

"이름까지는 몰라도 얼굴이야 대부분 기억하죠. 같이 찍은사진을 짚어주면 누군지 알 거예요."
사감의 말에 그는 앨범을 들춰보았다. 젊은 여자들이 사감을 둘러싸고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중략)
역시 앨범의 중간쯤에서 문제의 얼굴을 찾아냈다. 오년전뉴욕의 병원에서 그 여자가 의사에게 내민 초상화와 똑같은 얼굴이다.  - P237

"이 아이라면 기억이 나요. 옆에 조금 더 예쁘장한 아이가있죠? 약간 시건방진 데가 있는 이 여자애와 같은 방을 썼어요.
아마 한 삼 년쯤 있었을 텐데 좀 음울한 느낌이었어요. 그러다 남자 친구가 생긴 모양이에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휴일이면 예쁘게 차려입고 신이 나서 뛰어나가곤 했거든." - P237

남자 친구가 생겨 신이 나서 뛰어나가곤 했다는 말을 듣고는 레이코가 어느 날 밤, 모래시계의 모래를 그의 등에 쏟았을 때가 생각났다. 흠칫해서 등 뒤를 돌아보자 레이코는 조금 쓸쓸한듯 중얼거렸었다.
"똑같은 얼굴을 하네?"
그와 똑같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돌아본 그 남자 친구와 레이코는 어쩌면 평범한 가운데 나름대로 행복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 P238

도쿄로 돌아와 항상 가던 카페의 텔레비전으로 사사하라의 석방 뉴스를 보았다. 석방되자마자 가장 먼저 자신에게 연락할 터였지만 그와 마주하는 것을 한 시간이라도 뒤로 미루려고 오랜 시간 카페에서 뭉그적거리다가 밤 10시가 되어서야 겨우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집에 돌아와 우선 이케지마 리사에게 전화했지만 부재중이었다. - P239

기타가와 준은 결국 조용히 침묵해버렸고, 이나키 요헤이는 헉하고 경악하는 목소리를 냈다. 다카기 후미코는 파르르 떨며 "나는 그런 거 몰라!"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큰 착각을 깨닫고 사와모리 에이지로도, 나도, 그리고 어쩌면 마가키 기미코도 범인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착각이었다면 더 많은 레이코 살해범이 있는지도 모른다.  - P240

사사하라가 음식 접시에서 얼굴을 들고 테이블 너머로 그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제 누군가 경찰에 밀고 편지를 보낸 모양이야. 범인은내가 아니라 여섯 명 중 한 사람이라는 내용이야. 거기 적힌 여섯명의 이름이 내가 자네에게 알려준 것과 완전히 똑같았어. 설마자네가 그 밀고 편지를 보낸 건 아니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경찰에 보낸 적은 없다. - P241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오늘 아침 그가 깨달은 ‘큰 착각‘은 아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미오리 레이코의 얼굴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 외에도 미오리 레이코를 살해한 범인이 있다. - P240

어젯밤에는 범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범은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막상 현실이 되고 보니 한여자를 여러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했다는 것은진짜 구역질이 날 만큼 오싹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 P241


그렇게 직원이 내준 잔돈을 상의 호주머니에 넣었을 때 였다.
"이봐, 이게 떨어졌어."
사사하라가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낼 때,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 쪽지는 오늘 아침에 집을나오는 길에 적어온 메모였다. ‘가와구치 시, 세이에이 기숙사,
이시가미 요시코‘라는 세 가지를 급히 갈겨썼다. - P243

어젯밤에 이케지마 리사에게 전화한 것은 경찰에게 자신이 사사하라를 구하기 위해 범인을 찾고 있다는 게 알려져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전화하는 목적은 다르다. 조간신문으로 사와모리의 유서를 확인하기전까지는 어차피 망상에 빠진 얘기라서 경찰이 깨끗이 무시할거라고 생각했다. - P244

우선 이케지마 리사와 접촉해 그녀도 미오리 레이코를 죽인한 명이 아닌지,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상대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고 다음으로 다카기 후미코의 자택 전화번호를 눌렀다. 어젯밤 그의 전화에 다카기 후미코도 특이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 P244

하마노가 수화기를 향해 뭔가 얘기하는 것을 그는 전화박스에서 3미터쯤 떨어진 길모퉁이 뒤쪽에 몸을 숨기고 오로지 시선만 날카롭게 벼린 채 지켜보았다. 하마노는 아주 중요한 것을 그에게 감추고 있다. 그런 눈치를 챈 것은 조금 전 레스토랑 계산대 앞에서 하마노의 호주머니에서 떨어진 한 장의 쪽지를 봤을때부터였다. - P245

누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건가. 어쩌면 그 용의자 목록 중의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대체 왜?
하마노는 유리 전화박스 안에서도 얼굴을 코트 깃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를 응시하는 눈빛이 점점 더 초점이 좁혀지고 어둡게 벼려져 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 P246

"나, 사실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사 개월 전의 그 차가운 목소리가 되살아나 얼어붙은 밤바람과 함께 그의 귀를 때렸을 때, 드디어 하마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수화기를 다시 들고 하마노는 또 번호판을 꾹꾹 눌렀지만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는지 수화기를 내려놓고 전화박스에서 나왔다. - P2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스의 연구 중 하나는 외부에서 적용된 잡음이 확률공명을 통해 작동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입증하기도 했다. 그는 주걱철갑상어(paddlefish)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이 어류는 코에 있는 전기감각기 (electrosensor)로 먹잇감인 플랑크톤이 내는 희미한 전기적 신호를 감지해서 먹이를 찾는다.  - P238

잡음 수준이 중간대일 때 최적의 수행성과가 나오는 것은 확률 공명의 특징 중 하나다. 잡음이 너무 작으면 신호가 역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잡음이 너무 심하면 신호가 잡음에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잡음-이득 관계 그래프를 그려보면 U를 거꾸로 뒤집은모양이 나온다. - P238

하지만 생물 시스템이 내부적으로 발생시킨 잡음을 이용한다는 개념에는 아직 의문이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초파리의 국소신경세포에서 발생하는 잡음이 진정한 잡음인가 하는 점이다.  - P239

잡음은 엄격한 수학적 정의를 가지고 있는데, 복잡한 생물학적 시스템에서 잡음처럼 보이는 것들은 보통 다른 어디선가 새어나오는 신호로 판명되는 경우가 많다. "그 ‘잡음‘의 원천을 가져다가그것이 잡음의 통계학적 발자국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코스코의 말이다. - P240

부자키는 포유류에서 뇌의 활성을 조절하는 잡음 비슷한 신호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미에센뷔크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거기에 특화된 잡음 발생 회로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대신 그는 뇌 전체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신경 활동을 지목한다. - P240

자발적 활성이 신경세포 네트워크로 퍼져나가 초당 약 40회 정도의 속도로 신경 흥분이 동기화되는 과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일례로 소위 감마파(gamma wave)라 불리는 뇌파는 서로 다른 인지 과정을 한데 묶어 지각(perception)을 만들어내는방법이라 제안되고 있다.
부자키는 유입되는 희미한 신호가 이런 자발적 활성파의 등에 올라타 역치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한다. - P241

과연 자연선택이 무작위 잡음 발생기를 장착한 뇌를 만들어 낸것인지, 아니면 그저 다른 신경 신호를 빌려다가 잡음으로 사용하는 능력을 갖춘 뇌를 만들어낸 것인지 밝히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느 쪽이 맞든 초파리의 뇌는 약간의 디더 없이는 기능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마 우리의 뇌도 디더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 P241

3
우연과 수학
기이하기 짝이 없는 우연의 수학

우연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을 정량화하거나, 생물학 표본의 집합처럼 취급해서 분류할 수 있을까? 우연은 서로 다른 강도로 찾아오나? 이 장은 행운과 우연의 과학과 수학을 다루지만 그렇다고 마냥 숫자만 언급하지는 않는다. - P129

내가 아는 우연, 내가 모르는 우연

지금쯤은 당신도 눈치 챘겠지만 인간의 뇌는 패턴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낸다. 이것은 과학의 주춧돌이 되어준 능력 중 하나다.
우리는 어떤 패턴을 알아차리고 나면 그것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밝히려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수학을 이용해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 P130

약 한 세기 전만 해도 모든 것이 간단해 보였고, 세상은 행성의 궤도, 밀물과 썰물 같은 자연현상처럼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과 오솔길에 떨어진 우박의 패턴같이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으로 나뉘었다. - P130

하지만 1870년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의 발견으로 질서(order)와 혼돈(chaos)을 나누고 있던 벽에최초의 균열이 생긴다. 무작위인 사건에도 통계적인 패턴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 P131

날씨는 진정 무작위적인 현상일까? 아니면 어떤 패턴이 있을까? 주사위는 정말 무작위로 수를만들어내는 것일까, 아니면 사실은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것일까? 물리학자들은 아주 작은 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인 양자역학에서 무작위성을 그 절대적인 기반으로 삼았다. - P131

 만약 내가 ‘공정한 동전던지기를 해서 6번 연속 앞면이 나왔다고 해도 7번째 던지기에서앞면이나 뒷면이 나올 확률은 여전히 똑같다. 반대로 한 계의 과거가 미래에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경우 그 계는 질서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다음 날 해가 뜨는 시간을 몇 분의 1초 단위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고, 매일 아침마다 그 예측은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동전 던지기는 무작위적이지만 일출은 그렇지 않다. - P132

일출의 패턴은 지구 궤도의 규칙적인 기하학에서 기원한다. 무작위 동전 던지기에서 나타나는 통계적 패턴은 훨씬 당혹스럽다.
공정한 동전으로 던지기를 오랫동안 하면 앞면과 뒷면이 비슷한 빈도로 나온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 P132

동전을 얇은 원형의 원잔으로 모형화할 수 있다. 만약 원잔을 수직으로 던져 올릴 때 그 속도와 회전속도를 알 수 있다면, 동전이바닥에 떨어져 멈출 때까지 몇 바퀴나 돌지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 원반이 바닥에 닿았다가 튀어 오르면 계산이 더 어려워지기는하겠지만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다. 던져 올린 동전은 고전역학계(classical mechanical system)인 것이다. - P133

당신이 동전을 던져 올린순간 그 동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바람이나 지나가는 고양이, 기타외부 요인은 무시하자). 하지만 당신은 동전의 속도나 회전속도를 모르기 때문에 그 필연적인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 P133

주사위도 마찬가지다. 주사위 역시 역학적인 행동을 나타내고 결정론적인 운동방정식의 지배를 받는 튀어 오르는 정육면체로 모형화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초기 운동을 충분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충분히 빠른 속도로 계산을 할 수 있다면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 P133

카오스는 무작위성과는 다르다. 하지만 모든 측정에 따라오는 정확성의 한계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다. 무작위 계에서는 과거가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반면 카오스계에서는 과거가 미래에 영향을 미치기는 한다. - P134

진정한 카오스계에서는 이런 오류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주사위의 모서리가 바로 이런 기하급수적인 발산(divergence)을 야기한다. 수학적으로 완벽한 정육면체가 편평한 탁자에 부딪혀 튀어 오를 때는 이런 모서리 때문에 카오스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 P135

여기에 답하기 위해 물리학에서 무작위 모형이 처음 큰 성공을거둔 예를 살펴보자. 바로 통계역학이다. 이 이론은 기체의 물리학인 열역학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 P135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은 분자를 작고 단단한 구체로 모형화해서 서로 튕겨 나가는 분자들이 기체 법칙이나 다른 것들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최초로 탐구한 사람이다. 그의 이론에서는 압력, 부피, 온도 같은 고전적 변수들이 내재적인 무작위성을 가정하는 통계적 평균으로서 나타났다. 이런 가정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 P136

하지만 볼츠만은 모든 구체의 정확한 경로를 일일이 추적하는 대신 구체들의 위치와 속도가 어느 특정 방향으로 왜곡되지 않는 통계적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다. - P136

통계역학은 엄청나게 많은 구체의 결정론적인 운동을 평균 같은 통계적 측정치로 표현한다. 바꿔 말하면 거시 수준에서 결정론적 모형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시 수준에서의 무작위 모형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 - P136

그렇다. 당시에 볼츠만 자신은 몰랐지만 이것은 정당한 방법이다. 그는 사실상 2가지 주장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는 구체들의 운동이 카오스적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카오스가 잘 정의된 평균 상태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종류라는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부터 에르고드 이론(ergodic theory)이라는 수학의 한 분야가 통째로 생겨났고, 수학자들이 이룬 발전 덕분에 볼츠만의 ‘가설‘은 이제 ‘정리‘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 P137

그럼 기체는 실제로 무작위적인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이것은 모두 당신의 관점에 달려 있다. 어떤 측면은 통계적으로 모형화하는 것이 가장 좋고, 또 어떤 측면은 결정론적으로 모형화하는것이 가장 좋다. 하나의 정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맥락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전혀 특이한 상황이 아니다. - P137

그렇다면 진정으로 무작위적인 것은 없다는 말인가? 양자세계의 뿌리를 이해하기 전에는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다. 양자역학의 일반적인 해석에서는 아원자 수준까지 파고들어가 보면 우주는 진정으로, 그리고 환원불가능한 방식으로 무작위적이라고 주장한다.  - P138

이런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수학적 논증은 분명히 존재한다.
1964년에 존 벨(John Bell)은 양자역학이 무작위적인지, 숨은 변수에 지배되고 있는지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숨은 변수란 사실상 우리가 아직 어떻게 관찰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양자적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 P138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벨의 연구에 기초한 실험을 통해 양자계는 무작위성이, 그리고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이라는 이상한현상이 지배한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들은 양자론에서 무작위성이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인정하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더 이상의 문제제기를 무시해버리는 경향이있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 P139

(전략), 핵심은 수학적 정리 (mathematicaltheorem)에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벨은 자신의 주된가정은 명확하게 밝혔지만 그의 정리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일부암묵적인 가정도 끼어들었다. 이 점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벨연구의 실험 버전에는 허점도 있다. - P1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렸을 때, 나는 하얀 피부에 검고 큰 눈동자의 인형을 갖고 있었다. 엄마도 없고 자매도 없었기 때문에 너무 외로워서 항상 그 인형을 마주하고 놀았다. 인형은 긴 속눈썹이 달린 눈을 떴다 감았다 했다. 감으면 조용히 잠든 것 같고, 뜨고 있으면 까만눈동자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인형에게 들려주었고 인형도 내게 이런저런 말을 해주었다.  - P193

인형이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 레이스 옷을 입히고 다정하게 품에 안고 긴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쓰다듬으며 나는 엉엉 울면서 애원했다.
"얘, 제발 부탁이야, 뭔가 말 좀 해봐."
하지만 인형은 두 번 다시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 P193

오 년 전 마가키 선생의 패션쇼에서 처음 그 애를 만났을때, 곧바로 어린 시절의 그 인형이 떠올랐다. 긴 속눈썹도, 까맣고 쓸쓸해 보이는 동그란 눈동자도, 이따금 미소 짓는 것 외에는 항상 백지처럼 마음을 닫고 있는 무표정도 완전히 꼭 닮았다. - P194

반년쯤 뒤에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어느 패션쇼 무대가 파한 뒤에 슬쩍 말을 붙였다.
"우리, 친구할래?"
"응, 좋아." 그 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내 집에 따라왔다. "한숨 자게 해줄래? 어젯밤에 거의 잠을 못 잤어."
그렇게 말하고 그 애는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그 애가 잠든 동안 나는 내내 그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 P194

"우리 친하게 지내자. 넌 나의 인형이야."
그렇게 속삭이자 그 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슴을 드러내 붉은 나비 문신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친구가 된 징표로 너도 나비 문신을 하는 건 어때?"
그때도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검은 나비가 좋은데." - P194

우리가 침실에서 은밀히 어울린다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톱 모델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미워한다고 자기들 좋을 대로 소문을 퍼뜨렸다. 오히려 나는 그 애를 지나칠 만큼 사랑했다. 그애가 르네 마르탱의 패션쇼에 나가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떨치고 내 인기를 뛰어넘었을 때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고내 품에 그 애의 얼굴을 안고 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 P195

"너도 웨딩드레스 잘 어울려. 이다음에 마가키 선생에게 꼭입혀달라고 내가 부탁해볼게."
어린 시절의 그 인형은 훨씬 더 무모한 떼를 썼다. 달에 데려가 달라느니 너희 아버지가 너무 싫으니까 흠씬 패주라느니..
침대 위에서 노닐 때, 그 애의 왼편 젖가슴의 나비가 높아진 심장 소리를 빨아들여 살갗에서 불쑥 떠올라 훨훨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좋았다.  - P196

그러면 그 애도 긴 속눈썹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온갖 억지를 부려 나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이 신문기사, 공개해도 돼?"
올 2월 말, 오래 전 신문 기사의 스크랩을 불쑥 내게 들이밀었을 때,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구나 하고 어이없어 했을 뿐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 P197

신문 기사는 내가 어릴 때 살던 연립주택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났고 범인으로 우리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내용이다. 그사건으로 연립 한 동의 반절쯤이 불에 탔고 어린애 한 명과 한창 나이의 회사원 한 명이 숨졌다.  - P197

 나는 고아원에 보내졌고 그 뒤로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어떻게 그 기사를 찾아냈어?"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십칠 년 전의 신문쯤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어." - P197

 하지만 그 애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이 펄쩍 물러서더니 내 뺨을 찰싹 내리쳤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여태까지 네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긴것은 너의 더러운 손에 나도 똑같이 더러워지면 업계에서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제 이런 곳은 견딜 수가 없어. 왜 빙글빙글 웃어? 너를 증오한다니까? 너도 나를 엉망으로 망가뜨린 인간이야. 오늘부터 그 앙갚음으로 너도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려 줄 거야." - P198

"신문 기사만으로 내 아버지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그러자 그 애는 핸드백에서 다른 종이를 꺼내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내게 툭 던졌다.
"흥신소에 의뢰해서 네가 살던 고아원을 조사해달라고 했어. 사진도 있어."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고아원이다. 거기서 찍은 사진들은 그곳을 나올 때,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는데…. - P198

"네가 얘기해준 본명도 가짜였어. 열여섯 살에 고아원을 나온 뒤로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다면서? 하지만 고아원 선생님이 잡지에서 모델로 활약하는 네 모습을 보고 꼭 한번 만나고 싶다던데?"
조사 보고서의 메마른 글씨로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한 가지 과거가 적혀 있었다. 아니, 단 한 사람에게 말했었다. 그 애였다.  - P199

. 그렇듯 동정심을 보여주었던 그 애가 설마 사 년 뒤에 협박자로 표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네가 신문 기사며 흥신소 조사 보고서를 진짜로 주간지기자에게 보내겠다면 나도 지난 팔 개월 동안 네가 나를 협박했다는 거, 세상에 까발려줄게." - P199

"너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있을 텐데?"
4월이었던가, 내가 그렇게 쏘아붙인 적이 있었다.
(중략)
"내일까지 백만 엔 준비해. 내가 입 다물어줬잖아, 싫다고는 못할걸? 돈을 못 주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얘기, 주간지에 알릴 거야."
혼자 주워섬기더니 뭔가 이상했는지 갑자기 말투가 달라졌다. - P200

게다가 사람들에게 알리고싶지 않은 과거의 비밀일 터였다.
"그 전화만이 아니야. 언젠가 톱 모델 둘이 똑같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과거가 있는 게 너무 우습다고 했지? 하지만 가족이 모두 화재로 죽었다는 얘기라면 굳이 숨길 필요가없잖아, 다들 가엾게 생각해서 오히려 인기가 올라갈 텐데, 너,
뭔가 더 큰 비밀이 있지? 나보다 훨씬 더, 사람들에게 알려지면곤란한 과거가 있지?"
"그래, 협박당했어. 하지만 그 여자가 원하는 건 돈뿐이니까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아." - P201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냐. 너의 파멸이지."
그 말과 함께 다른 때보다 더 거친 손길로 20만 엔의 돈을찢어발겼다.
"너를 파멸시킬 거야. 나는 모두 다 잃었어. 그러니까 너한테서도 모든 걸 빼앗을 거야." - P201

"나를 죽여. 나를 죽여…."
그 아이도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죽여..."
두 개의 술잔을 바꿔놓으면서 내 귀는 단지 인형의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인형은 머리칼을 쥐어뜯기고 한쪽 눈이 일그러지고 얼굴이 뭉개진 채 침대 위에 내던져져 있었다. 아니, 인형이 아니라 그 애였다. - P202

돌연 차임벨이 울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베갯머리의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경찰입니다. 밤늦게 죄송하지만, 잠깐 물어볼게 있어서..."
경찰이라고? 조금 전 전화한 남자가 경찰에 신고한 걸까.
하지만 괜찮다. 그런 어이없는 얘기, 당연히 거짓말이다. - P203

추운 듯 싸구려 코트 깃을 세우고 어깨를 웅크린 것이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본 형사를 그대로 닮았다.
"이케지마 리사 씨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형사는 현관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실은 오늘 저녁에 이상한 편지가 경찰서에 도착했어요."
그렇게 말을 꺼냈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편지에 미오리 레이코를 살해한 자는 이케지마 리사라고 적혀 있었다, (후략). - P203

"하지만 편지에 당신이 미오리 레이코에게 협박을 당했다고 적혀 있던데요."
"주간지마다 내가 레이코와 항상 경쟁하고 시샘한다는 기사가 실렸지만, 실은 진짜 친한 사이였어요. 왜 협박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 P204

"알리바이 조사인가요?"
그녀는 번거롭다는 듯이 되묻고 집 안에서 스케줄 수첩을가져왔다.
"어디 보자, 12일부터 14일까지는 일이 없어서 여기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냈네요. 15일과 16일에는 규슈 여행을 했어요. 15일 점심때 비행기로 도쿄를 떠났다가 16일 밤늦게 돌아왔죠. 사진작가 기타가와 준 선생님과 동행했으니까 그 쪽에 물어보시면 알 거예요." - P204

(전략), 12일과 13일 이틀 동안에도 그랬다고 대답했다.
"근데 왜 그 이틀 동안이죠? 신문에는 사망 추정 일시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나왔어요. 그러면 15일이나 16일밤일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미오리 레이코는 15일 아침에 파리로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 P205

문을 닫아걸면서 대체 누가 그런 밀고 편지를 경찰에 보냈을지 생각해보았다. 아까 전화했던 그 남자인가. 하지만 어떻게 레이코가 나를 협박한 것을 알고 있을까. 2월 말부터 둘이 만날 때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특히 주의했던 것이다. - P206

 경찰에서는 자살한 사와모리 에이지로를 진범이라고 단정했다. 그녀가 레이코를 죽인 것은 경찰에서는 결코알 수 없다. 그녀의 소녀 시절을 빨갛게 불태웠던 옛날 얘기도주간지 기자가 알아낼 일은 영원히 없다……

. 그런데 그 이유를 이제야 겨우 알 것 같았다. 나비가 아니라 불꽃 모양을 평생의 낙인으로 가슴에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레이코를 사랑했기 때문에 죽였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레이코의 협박이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 P207

아버지가 범죄자라는 것 따위, 알려져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의 목소리는 항상 그다음 말을 거침없이 내뱉을 것만 같았다.
"불을 지른 건 너희 아버지가 아니야! 너희 아버지는 진짜범인을 감춰준 것뿐이었어!"
거울에 비친 오른편 젖가슴의 나비 모양 불꽃은 금세라도활활 타올라 그녀의 몸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 P208

11장 경찰 警察

12월 2일 밤,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자살 현장에서 돌아온지세 시간 만에 아사이는 책상 위에서 한 통의 봉투를 발견했다.
겉에 경찰서 이름과 ‘형사과장님께‘라고 적혀 있었다. 아침 일찍배달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이조 경찰서 관할의 자살 사건 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사이는 다시 사사하라를 취조했다.  - P210

언론사 기자들에게는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유서 내용은신빙성이 높다. 따라서 사건을 재검토하고자 한다"라는 설명으로 대충 둘러댔다. 하지만 경찰 윗선에는 사사하라 노부오를 체포한 건 잘못이었다고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210

그리고 여섯 명의 남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케지마 리사, 사와모리 에이지로, 마가키 기미코, 기타가와 준, 이나키 요헤이, 다카기 후미코.
편지를 단순한 장난으로 묵살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중한 명인 젊은 사장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유서에는 미오리 레이코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넘겨짚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 P211

경찰에 편지를 보낸 뒤에 오늘 아침에는 직접 사와모리에게 전화했다, 라는 가능성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유서 내용만 봐서는 사와모리에게 전화한 인물은 사건 당일 밤에 우연히 현장 부근에 있었던 것뿐일 거예요. 이 편지를 보낸 자는 조금 더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 같네요. 피해자가 사와모리를 협박했다는 건 장본인 외에는 알 수 없잖아요.
근데 그걸 알고 있어요.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P211

"다만 이 여섯 명의 이름을 보니 생각나는군요. 약혼한 무렵에 레이코가 내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하는 사람이 일곱 명이라고 했어요. 그중 여섯 명이 이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면 일곱 번째 사람은?"
"실은 일곱 번째 사람에 대해서는 레이코가 입을 딱 다물었어요. 아마 남자인 것 같긴 한데. 어쩌면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그 일곱 번째 남자인지도 모르겠네요." - P212

편지에는 ‘진범은 여섯 명 중 한 명이다‘라고 분명하게 단정하고 여섯 명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제7의 인물이 있다면 그자가 자신을 지키려고 이런 밀고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 P212

아니, 사사하라도 실제로 뭔가를 알고서 이런 말을 하는 게아닐지도 모른다.
사와모리가 레이코 살해를 고백하고 자살했다는 소식을전했을 때, 사사하라는 뜻밖에도 한순간 못 믿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부정하듯이 머리까지 가로저었다. 사와모리가 그런 고백을 하고 죽은 게 그에게는 예상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 P213

어요?"
았다.
"당신, 혹시 사와모리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증이라도 있그러자 그는 당황한 기색으로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러더니 갑자기 홱 바뀌어 유서를 긍정하는 말을 늘어놓
"네, 범인은 역시 사와모리겠네요. 레이코가 생전에 그에대해 자주 얘기했습니다.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라면 태연히 살인도 저지를 사람이라고." - P214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의문이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 계속 맴돌았다. 사와모리의 자살 소식에 사사하라가 크게 동요하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사건에는 조금 더 깊은 속사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 P214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취조한 다음에 고려해보겠습니다.
사와모리가 진범이라고 해도 그가 사용한 독약은 당신이 가져간 것이었어요. 미오리 레이코의 맨션에서 자살할 생각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셨지만, 그게 거짓이고 조금이라도 살의가 있었다면 실제로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법률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그보다 미오리 레이코의 사체는 어떻게 되지요?" - P215

"아뇨, 아무도 없을 겁니다. 혈육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어서 자신은 죽을 때도 혼자라고 레이코가 자주 말했으니까요. 그너에게 큰 배신을 당하긴 했지만 그렇게 딱하게 죽었으니 최소한 내 손으로 장례식은 치러주고 싶군요. (중략)." - P215

전원이 탐문 수사를 나간 뒤, 아사이는 혼자 창가에 앉아컴컴한 겨울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징계처분보다사건 자체의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중 하나는 미오리 레이코라는 여자의 신원이었다. 계속수사를 진행했지만 아직까지 오 년 전 데뷔하기 이전에 대한 것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얼굴의 미세한 부분까지 성형을 했다는 건 알아냈지만, 그녀의 과거는 원래 얼굴과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에 감싸여 있었다. - P216

또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날짜와 시각이다.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유서에도 ‘11월의 그날 밤‘이라고만 적혀 있고, 사사하라도 13일인지 14일인지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더욱더 마음에 걸리는 건 그 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발동해온 형사의 직감에 뭔가가 몹시 거치적거리는것이다. 용의자 체포와 그것을 뒤엎는 진범의 자살... 그러나 사와모리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 엽총의 폭발음만으로는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다. - P216

예상은 했었지만, 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미오리 레이코에게서 협박당한 사실이 없다고 부정했다. 허식의 세계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부정했다고 해도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 P217

밀고장에 이름이 적힌 여섯 명 중에 다카기 후미코라는 인물만은 경찰서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연예 주간지에 전화해보니 그녀는 인기 가수 여러 명이 소속된 전국 톱클래스의 레코드회사에서 디렉터로 일하는 여자라고 알려주었다.  - P217

"밀고장에 나온 대로 미오리 레이코가 여섯 명 전부를 협박했을 수도 있어요."
오니시의 의견이었다. 아사이는 사사하라가 얘기했던 일곱 번째의 남자가 다시 어두운 그림자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까지 별다른 말 없이 다른 형사들의 보고며 의견을 듣고 있던오카베가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째서 네 명 모두 가장 중요한 13일과 14일 밤의 알리바이는 없고, 오히려 15일 밤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는 걸까요..." - P218

"맞아, 내가 만난 사진작가 기타가와 준도 13일 밤에는 신주쿠 뒤쪽의 처음 들어간 바에서 술을 마셨다는 불확실한 얘기뿐이고 14일 밤의 알리바이는 아예 없었어요. 혼자 암실에 틀어박혀 일했다는데 그건 증인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15일 밤에 대해서는 이케지마 리사와 규슈에 갔고 나가사키 호텔 바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 확실한 알리바이를 대더라고요."
15일 아침 일찍 갑작스럽게 이케지마 리사가 전화로 규슈에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운젠에서 나가사키까지 돌아보자는 그녀의 제안에 기타가와는 망설임 없이 응했다고 한다. - P219

"13일과 14일 밤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더니 15일밤에 나가사키 호텔에 숙박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서 세세하게 얘기해주더라고요. 호텔 직원과 바텐더 중에 자신과 이케지마 리사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있으니까 그쪽에 물어보면 안다고까지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레이코 씨가 15일아침에 파리로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사건이 일어난 건 그 이전,
즉 13일이나 14일 밤인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때까지 냉정하던 기타가와가 약간 안색이 달라지면서 그걸 어떻게 아느냐, 레이코는 변덕이 심해서 그 전에도 여러 번 외국 여행을 당일에 취소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갑작스레 마음이 바뀌어15일 밤에도 도쿄에 있었을지 모른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케지마 리사도 완전히 똑같은 진술을 했어." - P220

이나키는 13일 밤에는 9시까지 파티에 참석했지만, 그다음 날인 14일은 종일 제삼자가 증언해줄 만한 알리바이가 없었다. 그런데 15일 얘기가 나오자 저녁때부터 다음 날 아침 10시까지 모델 세 명,
조수 다섯 명과 함께 철야로 작업을 했다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다카기 후미코도 마찬가지여서 13일과 14일 밤의 알리바이는 애매한데 15일 밤에는 5시에 회사를 나와 마치다 시에사는 고등학교 동창을 찾아가 밤새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협박이라는 말에 얼굴이 새파래졌던 다카기 후미코도 15일 밤의 알리바이에는 자신감을 되찾은 듯 열을 내어 얘기했다는 것이다. - P220

그리고 다음 날, 사사하라 노부오는 석방되었다.
사와모리의 유서는 이제 결정적인 것이 되어서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사하라가 레이코의 맨션에 청산가리를 지니고 간 것에 대해 살의가 있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한 채, 자살을 위해서였다는 그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 P221

아사이의 마지막 임무는 그날 4시, 정문 앞에 몰려든 보도진을 피해 뒷문으로 몰래 사사하라를 차에 태워 내보내는 것이었다. 차가 떠나기 직전, 사사하라는 지난 이틀 동안 부쩍 핼쑥해진 얼굴을 묘하게 무표정으로 유지한 채 아사이를 향해 목례를 건넸다. - P222

사사하라는 자택이 아니라 아사이가 예약해준 긴자 뒤편의 작은 비즈니스호텔에 은신하기로 했다. 그는 우선 지난 삼일간의 신문을 구해달라고 프런트에 부탁했다.  - P222

7시가 되자 그는 요요기에 있는 하마노의 오피스텔에 연락했지만 아직 집에 오지 않았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음성을 바꿔 병원에도 연락해봤는데 교환 여직원이 하마노는어제부터 삼일 동안 휴가를 냈다고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세 시간을 계속 시도한 끝에 10시에 드디어 콜 사인이 통화 중으로 넘어가서 하마노가 집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귀가하자마자 어딘가에 전화를 한 것이다. - P2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생활하는 것일까? 옷은 어떻게 입고, 화장실에는 어떻게 가고, 목욕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나는 부엌으로 그의 아내를 따라가 그가 어떻게 옷을 갈아입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식사할 때랑 비슷해요. 늘 두는 장소에 제가 남편의 옷을 갖다둡니다. 그러면 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갈아입어요. 하지만 뭔가 방해를 받아 맥이 끊기면 완전히 아무것도 못하게 되죠. (후략)" - P40

"그래요. 그이는 노래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어요. 학교에서해마다 그림을 전시할 정도로요."
나는 그 그림들을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림을 그린 시간순으로 걸려 있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모두 생생한 느낌이 살아 있는 사실적인 그림이었다. 게다가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생생함도 사실성도 구체성도 떨어져갔다. 훨씬더 추상적으로 변해간 것이다. 아니 기하학적이고 입체파적이기까지했다.  - P41

그녀는 "어머나, 의사 선생님. 그림 볼 줄 모르시네요! 선생님은
‘예술적인 발전‘을 보지 못하시나요? 처음에는 사실주의였다가 나중에는 거기서 벗어나 추상적인 비구상 그림으로 발전했잖아요." 하고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차마가련한 P부인에게 그런말은 할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은 분명 사실주의에서 비구상으로, 다시 추상으로 바뀌어갔지만, 발전한 것은 화가 자신이 아니라 그의 병세였다. - P41

그렇지만 부인이 한 말에도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병세와 그의 창작력이 투쟁하는 모습도 어느 정도는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그 둘 사이의 융합도 보였다. - P42

우리는 커다란 음악실로 돌아왔다. 뵈젠도르퍼가 한가운데 있었고 P선생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지막 남은 과자를 먹고 있었다.
(중략)
"저로서는 어디가 잘못된 건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좋은 점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훌륭한 음악가이고 음악은 선생님의 삶 그 자체입니다. 만약 제가 처방을 내린다면, 음악 속에 파묻혀서 생활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음악이 선생님 생활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지내시라고 말입니다." - P42

그는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대신 음악에 맞춰행동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동작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면의 음악이 멈추면 그는 당황해서 행동을 딱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그의 아내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학생이 얌전히 앉아 있으면 누가누군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미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학생이 몸을 움직이면 "너 칼이구나.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 하며 금방누군지 알아맞히곤 했다는 것이다. - P43

뒷 이야기

(전략). 선생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보는‘ 능력즉 관계를 짓는 능력이었다(그의 판단력은 그 밖의 영역에서는 정상적이며 동시에 빠르기까지 했다). 시각정보의 부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까?  - P44

. 시각의 기본틀 즉 시각정보의 처리나 통합 능력에 생긴 결함을 원인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 매크래는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추상적 경향‘을 거론한 골드슈타인은 공공연하게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추상적 태도라는 것은 ‘범주화‘를 인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P선생의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 P44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신경학이나 심리학은 모든 것을 다 말하지만, ‘판단‘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단력의 결함(P선생처럼 특수한 영역의 장애도, 그리고 더 일반적인 장애인 코르사코프 증후군 즉 이마엽 증후군의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정체성의 문제>와 <예, 신부님, 예, 간호사님> 참조)이야말로 수많은 신경심리학적 장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 P44

그러나 철학적인(예를 들면 칸트적인) 의미에서나 혹은 경험론적·진화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 중에서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물의 경우 아니 인간의 경우라도 ‘추상적 경향 없이 살수는 있지만, 판단 능력이 없다면 당장 사멸하고 말 것이다.
판단은 고등한 생활이나 정신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임에도, 고전적인(계량적인) 신경학에서는 무시되거나 잘못 해석되어왔다. - P45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 P45

나로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P선생의 예후를 계속 관찰해 더 실제적인 병리학적 연구를 진행하지못한 일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로 남았다. - P46

P선생과 같은 이상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를 대할 때면 우리는그러한 경우가 ‘독특하고 유례없는 경우가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 그래서 우연히 1956년에 나온 《브레인》지를 읽다가 P선생과 이상할 정도로 똑같은 사례를 발견했을 때, 아주 큰 흥미로움과 반가움을 느꼈다. 아니 일종의 안도감까지 느껴졌다. 이 학술지에 실린 사례는 신경정신학적으로나 현상학적으로나 P선생과 비슷한 아니 거의 똑같은 증세를 보인 환자에 관한 것이었다.  - P46

*이 책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시각인식불능증에 관한 문헌, 특히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병에 대한 사례 보고는 얼마든지 많다. 특히, 최근에 이와 같은 시각인식불능증 환자에 대한 지극히 상세한 연구(1979년)를 발표한 앤드루 커테츠 박사를 만날 수 있어서 나는 무척 기뻤다. 커테츠 박사가 해준 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었다. 얼굴인식불능증세가 점점 심해진 어떤 농부는 결국 자기가 기르던 소나 말의 얼굴까지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사박물관의 안내원이었던 또다른 환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유인원의 입체모형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P의 경우나 매크래와 트롤의 환자 경우와 같이 상대가 특히 살아 있는 생물체일 경우에 터무니없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 P47

(전략)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P선생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기도 했지만, 매크래의 환자는 자기 아내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아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각적으로 눈에 잘 띄는 뭔가 특징적인 것이 필요했다. 그것도 눈에 확 띄는 뭔가가. 예컨대 커다란 모자 같은 것‘ 말이다. - P49

침대에서 떨어진 남자

오래전에 내가 의대생이었을 때, 한 간호사가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해서 내게 아주 기묘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새로 환자가 입원했어요. 오늘 아침에요. 젊은 남자인데, 사람.
도 좋고 아주 멀쩡해 보였어요. 그래요. 몇 분 전에 낮잠에서 깨기 전까지만 해도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흥분해 있는 것이 아주 이상해요. 전혀 딴 사람 같아요. 어찌 된 영문인지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에 퍼질러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침대로 올라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예요. 얼른 오셔서 제발 무슨 일인지 좀 알아봐주세요." - P104

"전 오늘 아침에 몇 가지 검사를 받으려고 병원에 왔습니다.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신경과 의사들이 내 왼쪽 다리가 둔한 것 같다며 나더러 입원하라고 했어요. 그래요, 의사들은 내 다리가 ‘둔하다‘고했어요. 하루 종일 기분도 좋았고 저녁에는 잠까지 곤하게 잤어요. 그런데 침대에서 몸을 좀 뒤척거렸더니 ‘누군가의 발‘이 있는 거예요. 잘린 다리 말이에요.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어찌나 놀랐는지 구역질까지나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어요.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전략)" - P106

"이렇게 소름끼치고 무시무시한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이건 방금 죽은 시체에서 나온 거예요!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에요! 소름끼쳐요! 이놈이 나한테 달라붙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양손으로 있는 힘껏 다리를 움켜쥐고 몸에서 떼어내려고 애쓰다가 안 되자 이번에는 미친 듯이 때려댔다.
"진정하세요. 진정하라고요! 다리를 그렇게 때려대면 안돼요."
"왜 안되죠?"
"당신 다리니까요. 당신 다리라는걸 모르는 거예요?" - P107

내 표정을 보고 그는 내가 아주 진지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이게 내 다리라고요? 설마 내가 내 다리도 못 알아본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래요. 자기 다리는 누구나 다 알아보죠. 자기 다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죠. 놀리고 있는 건 바로 당신 아닌가요?" - P107

이번에는 나도 그만큼이나 당황해서 물었다.
"뭐로 보이느냐고요?"
그는 내 말을 천천히 따라했다.
"뭐로 보이는지 말해드리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어떻게 이런 것이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거죠? 어디서 굴러먹다온 녀석인지 모르겠다고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극도의 공포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 P108

뒷이야기

(전략)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밤에 잠에서 깰 때마다 침대 속에 털이 덥수룩하게 나 있는 사람의 다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도 죽어서 싸늘하게 식은다리라는 겁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합니다. 그래서 그는 성한 팔과 다리로 그것을 침대 밖으로 밀쳐냈고,
그러면 자기 몸도 함께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편마비 증상이 있는 팔다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환자의아주 흥미로운 예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다리는 침대 속에 그대로 있었냐‘고 묻자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기분 나쁘기 짝이 없는 그 낯선 다리에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었던 겁니다. - P109

2부

이 병을 치료하고 싶은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병이라는 것은 알지만병 덕분에 기분이 좋으니까 말입니다. 나는 그런 기분이 좋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좋아요.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그 덕분에 이십 년 동안 느끼지 못했던 원기를 느끼고 기운까지 팔팔하니말이에요. 우습지요. 이게 모두 큐피드 덕분이라니 말이에요. - P153

신경학에서는 ‘결손‘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결손‘은 어떠한 기능장애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신경학 용어이다.
기능은 정상 아니면 비정상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이다. - P155

그러면 결손의 반대 상태인 기능의 과잉이나 잉여의 경우는 어떨까? 신경학에는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러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기능이나 기능 체계는 기능하든지 기능하지 않든지 둘중 하나이다. 신경학적으로는 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 P155

 해부학과 병리학에서도 비대와 기형, 기형종과 같은 말을 사용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생리학에는 그런말이 없다. 기형종이나 조증에 해당하는 과잉을 가리키는 말이 없는것이다.  - P156

고전적인 ‘잭슨파 신경학에서는 과잉으로 인한 이러한 장애를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소위 ‘해방‘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기능의 과잉 혹은 팽창이 있지만 그런 것도 고려에 넣지 않는다. 휴링스 잭슨 자신은 분명히 ‘초양성‘ 정신 상태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언급은 오히려 이례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156

과잉을 고려하기 시작한 신경학자가 등장한 것은 지극히 최근의일이다. 루리야가 쓴 두 권의 임상기록은 그 점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산산히 부서진 세계의 남자》는 상실에 대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과잉에 대해 논했기 때문이다. - P156

나의 책 《깨어남》은 엘도파를 투여하기 전의 놀라운 결핍 상태(운동불능증, 무의지증, 무력증, 무반응증 등)와 엘도파 투여 후의 무서운 과잉 상태(운동과다증, 과다의지중, 과다수축 등) 사이의 균형을 잘 이룬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깨어남》에서는 기능을 가리키는 용어와 개념과는 별도로 새로운 용어와 개념이 나온다. 예를 들면 충동, 의지, 역동론, 에너지 등이다. - P157

루리야의 과다기억증 환자나 엘도파의 투여로 과도하게 고양되고 활기를 띤 내 환자에게서는 섬뜩할 정도로(광기에 가까울정도로) 증대된 쾌활함이 관찰된다. 이 지경에 이르면 단순한 과잉의 차원을 넘어선다. 증식이라거나 기질적 다산성의 문제인 것이다.  - P157

기억상실증과 인식불능증의 병례에 접했을 때, 우리는 단지 어떤 기능이나 능력이 손상되었을 거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기억항진과 인식력항진 환자의 경우에는 기억력과 인식능력이 태어나면서부터 늘 활발하고 생산적이다. - P157

 우리는 과잉의 병례와 마주침으로써 새롭고 중요한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인간의 정신생활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할 수 없다.
전통적인 신경학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분석하고 결함에 중점을 둔나머지, 실제 생활을 고려하지 않았다. 실생활이야말로 모든 대뇌 기능의 궁극적 표현이다.  - P158

고양 상태란, 단순히 건강하고 충실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불안하고 도를 지나친 상태가 되기도한다. 이 때문에 기행과 추악한 행위를 초래하는 일도 있다. 지나치게 흥분한 환자는 통합과 억제를 잃은 상태, 어떤 종류의 ‘과잉‘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충동과 이미지와 의지에 압도되는 상태이며 생리적인 광폭성에 사로잡힌(혹은 내몰린) 상태인 것이다. - P158

겉보기에는 건강하지만 사실은 병에 걸린 상태라면 그것은 하나의 패러독스다. 이것은 스스로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여기며 멋진 기분으로 살아가다가 병의 싹이 숨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가공의 괴물이나 자연이 보여주는 속임수 혹은 재미있는 패러독스의 하나라 할 수 있다. - P159

전부터 나는 이러한 아이러니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한 바 있다. 《편두통》에서 나는 발작의 전조 혹은발작의 시작을 알리는 항진상태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조지 엘리엇을 예로 들어 ‘위험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는 것은 그녀에게 때때로발작의 전조였다고 썼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위험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는 표현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 표현이야말로 바로 지나치게 건강하다‘라는 말 속에 숨은 양면성과 역설을 나타내고 있다. - P159

이렇게 해서 환자는 ‘몸 상태가 좋은‘ 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지만 몸 상태가 지나치게 좋은 것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감정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깨어남》의 핵심적이고 잔혹한 주제이다. 도저히 알 수없는 어떤 깊은 곳에 결함이 있어서 몇십 년이나 지독하게 고생한 환자가 기적처럼 갑자기 좋아진다. - P160

레너드 L의 경우도 그랬다. 그도 충실한상태를 지나 과잉상태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상태를 신의 ‘은‘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건강하고 활력이 가득 찬 상태는 윤택을 넘어 도를 넘은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화와 안락을 느끼는 가운데 무난하게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그는 이윽고 그렇지 않음을 느꼈다. 지나치고 도가 넘쳐 오히려부담스럽다는 의식이 들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조각조각 분해되고 폭발해서 산산이 부서지는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 P160

 어떤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이렇게 말했다.
"에너지가 너무 과한 것 같아요. 너무도 활기차고, 힘도 넘쳐요.
너무도.... 열병에 걸린 것 같은 에너지, 그러니까 뭔가 병적인 특출함이라고 할까요."
‘위험하리만치 좋은 몸 상태‘와 ‘병적인 특출함‘, 그것은 기만적인 행복감이다. 그 밑에는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 P161

이런 무시무시한 상태에 대해 <익살꾼 턱 레이>에 나오는 레이는 "나는 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정신이 과도하게 비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투렛토마‘로 갈 수도 있다. 다행히 그는 자아도 강했고 투렛 증후군의 증세도 비교적 가벼웠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까지될 위험성은 없었다.  - P161

큐피트병

90세의 쾌활한 할머니 나타샤 K가 우리 병원에 찾아온 것은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88번째 생일을 맞은 지 얼마 되지않아서 어떤 ‘변화‘를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중략)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몰라요. 전보다 훨씬 건강해지고 힘이 넘치는 느낌이 드니까요. 도로 젊어졌나봐요. 젊은 남자들에게도 관심이 생기고요. 그래요, 정말 살맛나는 기분이 든답니다." - P179

"스스로는 어떤 기분이 드셨어요?"
"깜짝 놀랐지요. 얼마나 감격했던지,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는전혀 의심하지도 않았지요. 하지만 이제 저도 의심스러워요. 제 자신을 타이르기도 하지요. ‘나타샤, 너는 여든아홉 살이야. 그런데도 벌써일 년이나 이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잖아? 원래 소극적인 성격이던 네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다니.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난데없이이렇게 무작정 행복하다는게 말이나 되는 걸까?‘ 이렇게 무작정 행복해도 되는 건지 생각하다 보니 모든 게 달리 보이기 시작했어요. (후략)." - P180

"아니요. 마음의 병이 아니라 몸이 안 좋아요. 몸속에, 머릿속에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것 같아요. 그래서 기분이 붕 떠버린 거예요.
전 알아냈답니다. 입에 담기도 꺼림칙하지만 이건 큐피드병이에요!"
"큐피드병이라고요?"
순간 머리가 멍해진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런 말은 들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P180

만일 초기 감염이 완치되지 않고 증상만 완화되었다면 특이하게 긴 잠복기를 거쳐 신경매독이 발병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내가 전에 진료했던 환자 한 명은 살바르산으로 자가치료를 했지만 50년 넘게 지나서 신경매독의 하나인 척수매독이 발병했다.
그러나 70년이나 되는 잠복기는 들어본 적이 없고, 환자자신이그토록 냉정하게 뇌매독이 아니냐고 물은 적도 없었다.
"놀랍네요" - P181

노부인은 기운이 넘치는 듯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큐피드병에 걸린 것 같아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을 찾아왔어요. 더 심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들한테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요. 하지만 치료 받는 것도 손가락질 받는 것 만큼이나 싫어요. 이렇게 넘치는 기운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정말로 살아 있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더도 덜도 말고 지금 이 상태가 계속되도록 해주실수는 없나요?" - P182

우리는 페니실린을 투여하기로 했다. 페니실린은 스피로헤타균을 죽이기는 하지만 큐피드병 즉 일단 생긴 뇌의 변화나 탈억제 상태를 되돌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K부인은 두 가지 희망을 모두 이루었다. 생각과 충동에 얽매임 없이 적당한 탈억제 상태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자제심도 잃지 않고 대뇌피질이 더는 손상될 염려도 없이 말이다. - P182

뒷이야기

아주 최근에, 그러니까 1985년 1월에 진찰한 또다른 환자(미겔O)와 관련하여 나는 똑같은 딜레마와 아이러니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미겔 O.는 ‘조병‘이라는 진단으로 주립병원에 입원했지만 사실은 신경매독에 의한 흥분 상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P182

처음에 만났을 때 그는 아주 흥분된 상태였다. 내가 어떤 단순한 형태를 그려 보이며(그림 A) 이것을 그리라고 말하자 그는 단숨에 입체도형을 그렸다(적어도 나에게는 입체도형으로 보였다). 그러더니 그것을뚜껑이 열린 상자라고 설명하면서(그림 B) 그 속에 과일을 그려 넣으려고했다. 상상력이 흥분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원래의 그림에 있던 동그라미와 가위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P183

그러자 그는 충동적으로,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원래의 형태를 마름모꼴로 바꾸고 거기에 출하나를 연결하더니 끝에 사내아이를 그렸다(그림 C). 그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사내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어요. 연이 하늘에서 펄럭이고 있단 말이에요." - P184

그는 이번에는 정확하면서도 평범하게, 원래의형태보다 조금 작게 그렸다(할돌 때문에 작은 글자증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림(그림 D)에는 앞의 두 그림과 같은 재미와 동적인 움직임도 없었고 상상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전에는 정말 생생하게 보였는데 치료를 받고 나니 모든 게 죽은 듯이 보여요." - P185

이러한 그림은 투렛 증후군에서도 상당히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원래의 형태와 생각이 지나친 장식으로 인해 보이지않게 되는 것이다. 암페타민 중독 상태에서 그리는 소위 스피드 아트speed-art (각성제의 영향하에서 그리는 그림-옮긴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상상력이 눈을 떠 점점 활발해지다가 마침내 끝없는 과잉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 P186

바로 이러한 역설이 《깨어남>의 주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투렛증후군 환자 또한 이러한 역설적인 ‘각성 상태‘를 향한 유혹을 느낀다<<익살꾼 턱 레이> <투렛 증후군에 사로잡힌 여자> 참조). 또한 코카인과 같은 마약을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특수한 불안정 상태도 의심할 바 없이 이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코카인은 엘도파나 투렛 증후군과 같이 뇌 속의 도파민을 증가시킨다.) - P1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장 누군가 誰か

전화가 끊긴 뒤에도 그는 일 분 가까이 수화기를 움켜쥐고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몇 장의 사진은 어느 틈엔가 발치에떨어졌다. 겨우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는 사진들을 주워 모았다.
어제 신인 디자이너 이나키 요헤이가 소개해준 열아홉 살모델의 사진이다. 소개라기보다 영업이었다. - P158

그렇다, 아마도 이나키가 지시했을 것이다.
"기타가와 준은 여자에 약해. 딱 한 번만 자면 돼. 그러면잡지든 텔레비전이든 광고든 줄줄이 일이 들어올 테니까."
여자애는 이케지마 리사와 미오리 레이코를 꿈꾸며 지시에 따른 것이다. 열아홉 살의 아직 단단한 젖무덤은 바람에 희롱이라도 당하듯이 잘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전하며 떨고 있었다. - P158

오 년 전에 그가 길거리에서 스카우트한 여자도 꿈의 의상을 입기 위해 자진해서 제물이 되었다. 그녀는 유명해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거라고 말했다. 배우보다는 모델이 더 낫다, 모델이라면 틀림없이 성공한다, 라는 그의 말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수께끼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미처 감추지 못한 기쁨으로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 P159

올 3월 초부터 그녀는 돌연 그에게 분노를 들이댔다.
"내 몸뚱이는 모조리 뜯어먹혔어요. 이제 뼈만 남아 쓰레기와 함께 버려지기를 기다리는 신세예요."
그건 모두 자기 책임이라고 그는 반발했다.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스타 모델을 만들어줬을 뿐이야." - P159

분명 그는 한 번도 레이코를 범한 적은 없었다. 레이코의아름다움은 렌즈 너머에 있을 뿐, 적어도 그가 육체적 욕망을 느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직업적 소재로는 완벽했다. 카메라렌즈로 바라보면 미오리 레이코는 이미 여자도 인간도 아닌 하나의 아름다움이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엄청난 아름다움을초점에 사로잡았다는 감촉이 있었다. - P160

 올 3월, 레이코가 갑작스럽게 표현해서 그를 위협하기 시작한 뒤에도 그는 소재로서의 레이코를 사랑했다.
"당신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나는 살갗이 한 겹 한 겹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어요.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태워버릴 차례예요 살갗만이 아니죠, 기타가와 준이라는 이름도 장래도 모두 불태워버릴 거예요."
3월의 어느 날 밤, 레이코는 그런 말과 함께 핸드백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이 작업실 테이블 위에 내던졌다. 사진에는 지중해 바다와 모터보트, 그리고 운전석 핸들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거센 바람 소리를 자장가처럼 듣고 있는 레이코의 옆얼굴, 그리고 또 하나, 보트 뱃머리 앞쪽 바다에서 고개를 쑥 내민 얼굴 하나가 찍혀 있었다. - P160

어느 인적 드문 해안가에서 바위에 묶여 있는 모터보트를발견했을 때, 차 따위는 버려두고 질주하는 보트 위에서 머리를 휘날리는 레이코의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보트 주인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 십 분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레이코를 보트에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 - P161

다. 순간, 바다에서 뭔가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렌즈 너머로 그렇게 감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가벼운 충격이 덮쳤다. 반사적으로 운전석의 레이코를 밀쳐내고 모터를 껐다. - P161

그날 밤 두 사람은 마르세유의 호텔에서 묵었다. 다음 날아침, 부족한 프랑스어 지식으로 호텔 신문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한 귀퉁이에 주앙 레 팡에 별장을 가진 파리의 사업가 자크뒤랑이 바다에서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자세한 원인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 P162

일본에 돌아와 공항에서 헤어질 때, 레이코는 마치 재미난화제인 것처럼 말했다.
"그 순간에 사진이 찍혔을지도 모른다고 했죠? 만일 진짜로 찍혔으면 나한테도 보여줘요."
레이코는 원래부터 그런 잔혹한 면이 있었다.  - P162

(전략) 그녀가 어떤 성격이든 아무 관심이 없었다. 끊임없이 나쁜 소문이 들려왔지만 제대로 귀담아들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레이코는 기타가와 준이라는 이름의 이용가치를 잘 알고 있어서 그와의 작업을 펑크내거나 도를 넘어 함부로 말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지중해에서의 사고 사진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래서그는 별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상한 사진에는 분명 그 순간이 찍혀 있었다.  - P163

"그런 사진은 얼른 태워버려. 필름은 이미 처분했어."
"왜요? 이 사진, 내가 최고로 아름답게 찍혔는데? 괜찮아요, 프랑스인의 얼굴 부분은 잘라서 없앨 거니까."
그리고 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우린 공범이잖아요."
아니, 입은 미소를 띠었지만 눈 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번뜩임이 바늘처럼 그를 쿡 찔렀다. - P164

또 어느 날 밤에는 카메라를 들고 문제의 사진 속 프랑스인과 똑같은 얼굴을 하라고 요구했을 때도.
레이코가 하라는 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그녀는 만족하지 않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런 표정이 아니잖아요. 죽음이 코앞에 닥쳤어요, 좀 더입을 길게 찢어야죠." - P165

"인간의 얼굴이나 몸은 망가지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레이코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때로는잔뜩 뒤틀린 얼굴 쪽이 실제 내 얼굴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히면서도 그는 여전히 이건 레이코의 별쭝맞은 취미일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 P165

농담이 아닌 진심이라고 깨달은 것은 팔 개월째 시달리던지난달의 어느 날 밤, 그녀의 맨션에서 문제의 사진과 사진 속 프랑스인과 똑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의 사진을 한 장씩 봉투에 넣었을 때였다.
"이거 주간지 기자에게 보내려구요."
"너도 공범이잖아! 이 사진이 세상에 알려지면 너도 똑같이 파멸하는 거라고!" - P166

이나키가 소개해준 여자애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는 이여자애와는 세 번을 자고 끝이었어, 라고 생각했다. 미오리 레이코나 이케지마 리사가 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싹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사진을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이나키에게서2백만 엔을 받았지만 백만 엔을 돌려주면 해결될 것이다. 하긴 계산속 빠삭한 그자가 그 정도로 포기할 리는 없다. - P167

했다. 레이코를 살해한 뒤로 그는 이유도 없이 암실에 틀어박히곤 했다. 마치 빨간 암색만이 자신의 범죄를 감춰준다는 듯이.
하지만 그가 잊고 싶은 것은 범죄가 아니라 두 개의 얼굴이었다. 지중해의 새파란 바다에서 쑥 튀어나왔던 프랑스 남자의얼굴, 그리고 지난 달의 어느 날 밤, 침대에 쓰러져 누워 있던 레이코의 얼굴이다. - P167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두 남녀에ㅜ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게 어쩐지 기묘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렌즈에서 눈을떼고 살인 현장을 나왔다. 그 맨션에 다녀간 흔적을 모조리 지워없애고 복도로 나와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남프랑스에서의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목격자는 아무도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목격자가 나타난 것이다. 조금 전 전화에서 남자 목소리는 그날 밤 그가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했는데 역시 남의 눈에는 다급하게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안색이 홱 변한 채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을..."이라고 그자는 말했다. 그는 수화기에 대고대꾸했다. - P169

그날 밤에는 지난여름에 레이코에게 걷어차인 중년 의사가 먼저 그녀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그의 살의를슬쩍 빌려 단지 독이 든 술잔과 레이코의 술잔을 바꿔치기한 것뿐이었다.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 싱거운 행위를 범죄라고,
살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 P169

그렇건만 엌재서 항상 이 암실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마지막 얼굴이 뇌리를 찌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처음 한동안은 단지 그 프랑스인과 레이코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코를 죽이고 나흘째 되던 날 밤, 그게 두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P170

몸을 더욱더 작게 웅크리고 손끝만 벽의 스위치에 내밀어붉은 등을 껐다. 암실은 완전한 암흑에 감싸였다. 그는 작은 개미가 되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차례 끊기는가 싶더니 다시 울렸다. 협박자가 또 전화한 것일까. 아니면 그자가 정말로 경찰에 가서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을 신고한 것일까. - P170

9장 누군가 誰か

"전화를 안 받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벌써 옷을벗은 채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기타가와가 어딘가 외출한다고 했어?"
여자애는 백치처럼 입을 헤벌린 채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 분명 요시다 가즈코라고 했다. - P174

그가 화를 낸 것은 우선 이 여자애 때문이었다. 애교 있는 달달한 목소리에 보통 남자라면 욕망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단지 짜증을 부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어딘지 미오리 레이코와 비슷했다. - P174

남자만 사랑하고 여자라면 모조리 미워하는 프랑스인이레이코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코는 어떤 일도 당한 적이 없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당신, 질투 나지 않아? 그 늙은이와 내가 그런 짓을 했는데도?"
"난 그런 남자, 사랑하지 않아." - P175

이다.
그렇게 레이코는 오히려 큰 성공이라는 듯이 말했던 것
"몸에 상처는 나지 않았어?"
"전혀 걱정할 거 없어. 나는 성공하고 싶거든. 유럽에서도유명해질 거야. 마르탱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을 수만 있다면 어떤 아픔이라도 견뎌야지. 게다가 나는 상처 따위 무섭지 않아. 인간의 몸이란 상처 입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하긴 중요한 상품이니까 조심해야겠네."
항상 아래로 숙여서 쓸쓸해 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코는 장래에 대한 꿈에 부풀어 금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 P175

사진작가 기타가와 준은 항상 피사체가 아닐 때의 레이코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투로 말하곤 했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벗어나면 레이코가 어떤 여자인지 전혀 몰라." - P176

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미오리 레이코는 단지 자신의 꿈에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 P177

레이코는 올해 초부터 느닷없이 그를 미워하며 무서운 말을 퍼부었다.
"다들 피라냐였어. 내 살을 뜯어먹고 이득을 노리는 자들이야. 당신도 그중 한 사람이었어."
하지만 파티에서 그가 소개해준 유명 인사들을 수수께끼같은 미소로 차례차례 포로로 만들어가는 레이코는 다른 누구보다 힘센 피라냐로 세계 전부를 뜯어먹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 P177

"패션계 같은 좁은 세계에서 톱에 올라봤자 별거 없어. 더유명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야지."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했다. 그런 때도 몹시차가운 무표정이었지만 목소리에서는 그전보다 강한 열기가 느껴졌다. - P178

"뉴욕의 내 친구가 <라이프>지 편집에 발언권을 가진 사람을 잘 안다는데 좀 도와줄래요?"
바로 작년 봄에만 해도 그런 말을 했었다.
<라이프>지 표지에 실리는 거, 예전부터 내 꿈이었어. 하지만 그 사람, 마르탱처럼 여자는 사랑하지 않는다네요.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잖아. 그 대신 <보그> 편집인은 내 손안에 있으니까 당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실어달라고부탁해볼게."
매사에 결단이 빠른 그는 일 분도 안 되어 <보그>지 여섯페이지를 교환 조건으로 레이코의 부탁에 응했다. - P178

"난 더, 더 유명해지고 싶어."
술에 취한 눈을 허공에 고정한 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소리를 들으면 등이 오싹해질 때가 있었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그렇게 보였다.
"당신, 사 년 전에 ‘위‘라고 했었지?"
그렇기 때문에 올 3월에 레이코가 갑작스럽게 한 장의 사진을 내밀며 르네 마르탱과 두 사람의 관계를 빌미로 협박했을 때, 전혀 다른 여자가 나타난 것처럼 생경했다. - P178

"내가 정말로 성공 따위를 꿈꾼 줄 알아요? 나는 단지 이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신들과 똑같은 수위까지 타락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마르탱의 더러운 손도, 당신의 창피한 줄 모르는 눈빛도, 진짜 나를 잊게 해주지는 못했어. 문득 돌아보니 엉망으로 망가진 잔해뿐이었어. 당신과 똑같은 쓰레기였다면 아마 이런 잔해 같은 몸이라도 질질 끌고 살아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였어."
그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레이코는 도무지영문 모를 시비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대꾸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 P180

올 초에 르네 마르탱의 방에서 오래 전에 훔쳐 왔다는 한장의 사진을 그의 눈앞에 들이댔을 때부터 언젠가 이 여자를 죽이고 말 거라고 예감했었다. 마르탱과 그가 벌거숭이로 뒤엉킨 수치스러운 사진이었다.  - P181

그로부터 몇 달 동안 그는 단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날 밤에 그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레이코가 제 손으로 독약을 넣은 술잔과 또 하나의 술잔, 그 두 개를 바꾸기만 하면 되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 끔찍한 협박 재료를 손아귀에 움켜쥔 여자를, 지난 몇 달 동안 자신에게 온갖 굴욕감을 안긴 여자를, 죽일 수 있었다. - P181

"나를 오늘 밤 안에 죽이는거야."
하지만 곧바로 날카로운 웃음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하긴 소심하고 못나 빠져서 당신은 그럴 용기도 없지."
그녀의 비웃음을 보며 마침내 레이코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 P182

오 분 뒤, 자기 대신 범인이 되어줄 의사의 전화가 걸려오고 레이코가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이 사람, 집에 가서 또 혼자 술을 마신 모양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자신의 결심을 재확인했다. 다시 오 분이 지나 레이코가 침실에 담요를 찾으러 갔을 때, 그의 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두 개의 술잔을 바꿔치기했다. - P182

 레이코가 몸을 뒤틀며 거친파도처럼 침실로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삼 초 뒤에는 침대 위에서 이미 숨을 거둔 레이코를똑같은 미소로 내려다보았다.
입에서 황갈색 액체가 흘러나와 긴 줄을 그리며 목을 타고 흘러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 스웨터의 가슴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겪었던 굴욕감이 마침내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 P183

"가슴에 상처가 남았어. 한동안 남들 앞에서 옷은 못 벗어오늘 쇼 무대 때 옷 갈아입는 건 당신 혼자서 도와줘."
쇼가 시작되고 대기실 한쪽에서 드레스를 벗겼을 때, 레이코의 왼쪽 가슴 나비 문신에 또렷한 쇠사슬 자국이 찍혀 있었다.
똑같은 상흔이 그의 가슴에 조금 더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레이코는 알지 못했다. - P184

남자들뿐만이 아니라 만일 여자들이 그의 나신을 볼 기회를 가졌다면 역시 상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한 사람, 레이코만 유일하게그의 몸에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벌거벗은 제 몸을 그의 몸에 맞대며 말하곤 했다.
"그 썩어 문드러진 몸으로 나를 안을 수 있으면 안아봐. 그러면 용서해줄 테니까."
그러고는 빨간색 검은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으로 그의온몸을 애무했다. 증오감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여자의 애무는 채찍이나 사슬보다 더 격한 고통을 그의 몸에 안기곤 했다. - P184

깔끔하게 거실의 지문도 처리했다. (중략). 범죄를 저지른 덕에 미모에 한층 깊이가 더해진 것 같았다. 그는 거울 속에서 그 아름다운 애인에게 아주 잘했어, 라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머플러로 얼굴 아래 부분을 감싸고 깊숙이 눌러쓴 모자 차양으로 얼굴 윗부분을 가린 채 맨션을 나섰다………
"나는 뭘 하면 될까요?"
곁에서 여자애가 물었다. 그는 그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어느새 자신의 침실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P185

그는 말없이 베갯머리로 다가가 꽃병 속의 장미를 모조리뽑아 침대에 던졌다. (중략). 순순히 옷을 벗은 여자애는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침대 위의 장미꽃과 그의 너무도 차가운 눈빛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싶어? 그럼 그 전에 이 장미의상을 걸치지 않으면 안 돼."
순간, 여자애의 눈에 공포가 내달렸다. - P186

"걱정할 거 없어. 이건 일종의 의식이야. 내가 디자인한 이최고의 의상을 소화해내지 못하면 넌 앞으로 어떤 옷도 입을 수없어."
사실 그건 그의 디자인이 아니라 르네 마르탱이 사랑과 증오의 제물들을 위해 고안해낸 의상이었다. - P186

여자애는 드러누운 채 머뭇머뭇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꽃 조각이 자글거렸다. 그때마다 농밀한 향기가방 안의 밤기운에 번져갔다.
"이게 내가 주는 아름다움의 세례야."
육년 전 르네 마르탱이 했던 말을 그대로 입에 올렸을 때,
돌연 베갯머리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짜증 난 손길로 수화기를들었다.
"이나키 요헤이 씨?" - P187

"조금 전에 두 번 전화했는데 두 번 다 통화 중이더군. 실은 내가 그날 밤 우연히 미오리 레이코의 맨션 뒤쪽에 있다가 당신이 안색이 홱 변한 채 비상계단을 뛰어내려와 도망치는 것을목격했어. 당신 얼굴은 잡지에서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잘 알고있어."
"그날 밤이라니, 어떤 밤이라는거야?"
"11월의 그날 밤, 당신이 미오리 레이코를 죽인 날밤."
"거짓말도 잘하는구나. 나는 그때 머플러로 얼굴을 가려서...."
실언이라는 것을 깨닫고 저절로 앗 하고 부르짖었을 때, 그보다 큰 비명이 방 안을 울렸다.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자애가 움직였던 것이다. - P188

전화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오늘 저녁에 사와모리 에이지로가 레이코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엽총 자살을 한 것을 알고 있나? 하지만 사와모리는 레이코를 죽이지 않았어. 실제 범인은 당신이야...." - P188

10장 누군가 誰か

죽은 그 애의 스웨터를 걷어 올리고 왼쪽 젖가슴의 검은 나비에 내 오른쪽 가슴의 빨간 나비를 맞댔다.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곧잘 그렇게 침대 위에서 서로를 탐했다. (중략)
"아, 가엾어라. 너도, 네 젖가슴의 나비도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 애의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스웨터를 반듯하게 다듬어주고 내 가슴팍의 단추를 다시 채운뒤에 침실을 나왔다. - P190

문을 닫은 뒤에는 거실에서 뭔가 내 손이 닿은 게 없는지 생각해보았다. 손댄 것이라고는 내가 마시던 술잔과 그 애가 "술 좀 따라줘"라고 했을 때 손에 들었던 브랜디 병, 얼음 집게뿐이었다.
처음 집에 들어올 때 현관문을 여닫는 건 그 애가 했다. 그리고얘기하던 중에 그 애를 죽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되도록 아무것도 손대지 않도록 조심했었다. - P190

소파 앞 테이블에 남은 술잔은 한 개뿐이었다. 그 잔에는의사와 그 애의 지문이 찍혀 있을 뿐이다. 의사가 마셨다는 술잔과 그 애의 술잔을 바꿔치기할 때, 손수건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가지, 그 애가 침실 문 앞에서 죽기 직전에 바닥에 떨어뜨려깨져버린 유리잔에도 내 지문은 찍히지 않았다. - P191

그렇다, 발소리를 들었다면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두운 비상계단에서 스카프와 선글라스로 가려진 얼굴이 누구 얼굴인지 정말로 알아볼 수 있을까.
오...."
"당신 얼굴은 잡지에서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방금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분명하게 말했다.
"흥, 장난치지 말아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해주었다. 내 얼굴을 알아봤다니, 거짓말이 틀림없다. - P191

"아무튼 거래를 하자. 내일 밤에 다시 전화할 거야. 그때까지 잘 생각해봐."
"좋아요, 내일 밤 아홉 시에 다시 이 번호로 전화해요. 녹음해서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중략)
전화 목소리는 ‘진범은 당신‘이라고 말했다. 분명 그날 밤,
그 아이를 죽인 건 나다. 사와모리 에이지로가 그 아이를 죽였다고 유서에 고백한 것은 전화 목소리가 말했던 대로 죽기 전에 엉터리 같은 소리를 늘어놓은 것이다. - P1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