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은 내 생애에 가장 뜨거운 해였다. - P10

우리는 지쳐가고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폭격과 썩어가는 시궁창 물속의 참호에서 싸우는 1차 세계대전 군인처럼,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연함에 더 두려웠다. - P11

헬기가 말썽만 피우지 않으면 자정 전에 정비를 끝낼 수 있다. (중략), 산불진화 헬기 무진 1호기가 말썽을 피웠다.  - P12

2


헤드라이트 불빛이 한적한 시골길을 깨웠다.
(중략).
"준호야, 수원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다짜고짜 나에게 와서 돈 빌려달라 하고, 빌려주고 나니깐 행방불명이라니?" - P13

"준호야, 아직 주님 곁으로 갈 때는 아니지 않냐? 휴~, 죽을 뻔했네."
(중략).
"찾지 못하면 수원 선배가 죽을지도 몰라요." - P14

"선배가 죽지 않더라도 내일까지 못 찾으면 우리도 끝나요." - P15

첫 번째는 정비검사관들은 계약직이다. (중략).
정규직 공무원은 가벼운 징계로 끝나겠지만 계약직인 우리로서는 바로 계약해지가 될 수 있는 사안이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다. - P15

무진 1호가 출동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국정원에서 조사가 들어올 것이다. 그것이 한 사람의 일탈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면 관리소 소장부터 모두 징계다. 민수원 선배뿐만 아니라 나도 함께 계약해지다. - P16

"그래, 첫 번째 두 번째 문제는 이해했어. 그런데, 왜 수원이가 죽는다는 거야?"
(중략).
"엄마, 형님이 이야기하라면 하는 거야." - P17

3

이야기는 민수원 선배가 스물한 살이던 때 장미 여관방에서 시작한다. 옆에는 나이트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여자가 누워 있었다. 맨살 양어깨가 이불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 P18

"지연이"
잠시 사귀었던 여자친구였다.
(중략).
"나 지금 미혼모 복지시설에 있어." - P19

공장 다니는 스무 살 여자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 건 불가능하다. 지연은 해외 입양을 결정했다. 아이를 떠나보낼 날이 이틀 남았을 때 지연은 선배에게 전화했다. - P20

그런데 막상 같이 살려고 해도 살 집이 없었다.
군대 관사가 배정될 때까지 장모님 집에 얹혀살아야 했다. - P22

하사 월급으로는 결혼 생활이 힘들었다. 알게 모르게 도와주는 따듯한 이들이 많았다. 사무실 선배 하나는 월급날이면 십만 원을 떼서 호주머니에 찔러주고 퇴근했다. - P23

국민에게 큰 고통의 기억을 준 IMF도 선배를 비껴가지 않았다. 부사관 연장신청이 안 되어 강제 전역을 하게 되었다. - P23

큰아이가 초등학교를 마칠 때쯤 대기업 계열 회사로 이직했다. 대기업에 간다는 것보다 가족에게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다는 것에감사했다. - P24

대기업에서 월급을 많이 주는 이유가 있다. (중략). 몸을 움직이지 않는 주말은 오히려 머리가 깨져나갈 것같이 더 아팠다. 문제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라 낮잠 자는 것이 두려웠다.  - P25

형수와의 문제였다.
시작은 부부 잠자리 거부였다. 마음이 안 가 관계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P26

형수는 언제나 선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자기를 만나지 않았으면 이렇게 답답하게 살고 있지 않았을 텐데 다 자기 때문이야. 스무 살에 시집와서 남들 다 하는 것 하지도 못하고 " - P27

선배는 연이어 고부갈등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머니 찾아뵙는 것, 일 년에 한두 번이야. 명절하고 제사 지낼때, 그것도 어머니가 제사상 다 봐놔. 몸만 와서 제사 지내고 설거지하면 끝이야. 갔다 오면 며칠간 화가 나 있어. (후략)." - P28

언젠가 선배가 오공본드를 구하러 사무실로 왔던 적이 있었다. (중략). 신발 밑창이 덜렁덜렁 뜯겨 있었다. (중략).
"새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 P29

선배는 산림청 산림항공본부가 정비복을 많이 주어 옷 살 필요가 없어 좋다고 했다. 내가 선배를 기억하면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기름 묻은 정비복에 초라한 신발이었다. - P30

동료들을 오래간만에 만나면 미소와 함께 안아서 반기는 선배의버릇을 알고 있는 나는 선배가 장모님과 처제에게 어떻게 했을지 눈에 훤했다.
"대기업 복장 규율이 군대보다 더한 것 알고 있어?" - P31

선배는 마지막으로 잠자리 거부 이유 중 하나를 설명했다.
"당신하고 하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
남자로서는 맥 빠지는 이야기다. - P32

부부관계 거부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형수의 불만 사항에도 선배는 내가 열심히 하면 아내가 언젠가 알아줄 거야, 내가 사랑하면 되잖아 하는 심정으로 직장 생활에 더 몰입했다. - P33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형수는 일주일에 네 번은 만취 상태로 자정을 넘겨 들어왔다. 언제 올까, 속 썩으며 기다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또한 형수의 술자리에는 다른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 불안했다. - P34

주말부부로 오 년을 살았다. 아니 오 년을 버텼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주말에 갈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바뀌었다. - P35

 조정 끝에 무진 산림항공관리소로 전입이 결정되었다. 아내가 있는 청주와 오십 분 거리다. 기쁜 마음에 선배는 바로 형수에게 전화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무진 산림항공관리소에는 관사가 없대? 같이 사는 건 좀 그런데, 내가 마음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마음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니깐 시간 좀 줘. 그동안 잠시 다른 곳에서 출퇴근 좀 해." - P36

선배는 불륜남의 아내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다시금 아내와 상간남을 만나지 않게 하겠다고 각서를 쓰고 나왔다.
죄송하다고 말했다. - P37

"유 선배님, 이 아기는 누구 아기예요? 어울리지 않게 유모차를 밀고 오셨어요?"
(중략).
"네 전 형수 아기야." - P38

민수원 선배는 기억하고 있었다.
유선배의 형수가 상간남과 바람을 피워서 그 고통에 선배가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 P39

"두 달만 봐달라고 하는데, 벌써 육 개월이 지났잖아요? 또 출근할 때 아기는 누가 봐요?"
"아주머니 한 분을 고용했어. 한 달에 이백만 원이야. 두 달이 육개월이 되어도 좋아. (후략)." - P40

무진 1호 담당 정비사였던 민수원 선배는 작업공정에 따라 자재수급과 서류작업을 병행해야 했기에 정신적으로도 지쳤다.
다시 말하지만, 그날은 민수원 선배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지쳤던 날이었다. - P41

"자기야, 살려줘."
(중략). 다급한 마음에 아내가 자살하러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위치추적으로 아내의 위치를 찾았다. - P42

경찰서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형수가 이야기했다.
(중략).
아내는 만나지 말라는 상간남을 만나서 또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먹었다. 그리고 모텔로 향하던 중 상간남의 아내를 만났다. 상간남의 아내는 형수를 때리고 발로 차고 길거리에 패대기쳤다. 형수는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도망쳤다. - P43

다음 날, 형수는 선배에게 말했다.
"자기와 떨어져 사는 것이 내게 더 행복할 것 같아. 제발 이혼해줘." - P43

선배는 이혼해주기로 결심했다.
(중략). 선배는 마지막으로 형수와 이혼 여행을 갔다. - P44

가족을 위해 뛰어온 이십 년의 세월,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 모두 악몽으로 변했다.
(중략).
선배는 그리움을 참을 수 없음에 전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전화 걸었어! 이제 남남이라는 것 잊어서 전화 걸지 마!" - P45

이혼은 현실이다.
선배는 미약하나마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정리해보았다. (중략). 그때는 이해가 안 갔는데 이혼을 하니 알 수 있었다. 재산 분할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모든 게 계획된 행동이었다. - P46

선배는 췌장이 안 좋아 보험사가 보험 가입을 거부해 결혼 후 전 형수 이름으로 가입한 보험을 어떻게든 유지해야 했다. (중략).
"아내께서 보험 납부금으로 대출을 다 받으셔서, 보험을 유지하시는 것보다 해지하시는 것이 더 이익입니다." - P46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수원이가 살아 있는 것이 용하구나. 자식 진작 이야기하지, 크." 하고 대현 선배는 미간에 검지를 대었다.
"내가 눈물이 난다."
선배는 낮게 저음으로 말했다. - P47

4

"민수원 선배가 갑자기 찾아와 삼천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는거죠?" - P48

"안전항공 팀장을 만나러 간다고 중얼거리면서 가더라고. 눈이 풀려 있고 걸음걸이도 비틀거리고 있었어. 걔한테 무슨 일이 있는거야?"
"안전항공팀장을 만나러 갔다는 거죠?"
"안전항공팀장이 어디 있는데 만나러 간다는 거야?" - P50

특수부대원 출신으로 150kg의 군장을 메고 천리행군을 한 체력의 소유자지만 연이은 전투에 지쳐가고 있었다. 또 다른 적 잠과싸우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민수원 선배 오지 않았어요?"
"저한테 와서 긴급히 쓸 돈이 필요해서 그러니 돈 좀 빌려달라고해서 빌려줬어요." - P52

대현 선배와 안전항공 팀장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1960년대생으로 형수와 사이가 좋다. 직업 특성상 가족과 떨어져 있지만, 형수가 남편들을 끔찍하게 위한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 P53

1960년대생 아내들의 좋은 남편 기준은 그저 바람 안 피우고 술담배 하지 않고 성실하게 집안 경제를 유지하는 남편이면 되었다. - P53

반면, 1970년대생 아내들은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은 기본에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아이들까지 돌보는 것까지 요구한다. - P54

전업주부에게 독박육아라니?
나의 아내와 민수원 선배의 전 형수가 말하고, 1970년대생 남편들이 공통으로 듣는 말이 독박육아다. 과연 육아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왜 한국 여성들은 유독 이 육아를 싫어할까? - P54

산업화는 남자에게서 육아라는 것을 빼앗았다. 자녀들과 떨어져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해야지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 P55

아버지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오르고 더 뜨거운곳에 들어가고 더 무거운 짐을 들었다. 돈을 더 받기 위해 더 위험한 일을 했다. 산재 병원에 가보면 남성들밖에 없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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