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슈마허

(전략).
엔초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 루카 디 몬테제몰로는 페라리로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 P142

페라리는 화려한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 P143

엔초의 시대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환영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몬테제몰로는 마라넬로를 떠나 있는 동안 이탈리아의 다른 스포츠 현장을 두루 경험했다. - P143

그는 독일이 1대 0으로 우승컵을 차지한 것보다 더 따분한 일이 페라리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곧 알게 되었다. - P143

몬테제몰로는 ‘엔진, 출력, 기어박스‘야말로 엔초가 믿는 삼위일체라고 말했다. 페라리를 위기에서 구하려면 약간의 신성 모독과 함께, 2억 달러 정도가 필요했다. - P144

복귀 초기, 몬테제몰로는 이탈리아 건축가 렌초 피아노 Renzo Piano에게 설계를 맡겨 거대한 풍동 건설을 지시했다. 이 시설은 F1 카의 50퍼센트 축소 모형은 물론 실제 자동차까지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 P144

몬테제몰로는 그 건물 안에서 모든 관리 프로세스를 간소화하고 페라리의 F1 협력사들을 재검토했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 P145

몬테제몰로는 로드카 사업에도 똑같은 성실함과 신화의 정신을 불어넣었다. 페라리에서 레이싱과 로드카는 다른 어느 곳보다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 P145

몬테제몰로의 첫 조치는 생산량을 즉각 줄이는 것이었다.
(중략).
그는 럭셔리 산업의 핵심 원칙을 이렇게 설명했다. "브랜드의 독점성을 지키려면 수요보다 한 대 적게 파는 게 좋다. 페라리는 갈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P146

하지만 페라리에서 일하기를 갈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중략).
물론 바너드는 일부 혁신적인 결과물을 내놓기는 했다. - P146

장 토트Jean Todt는 1993년에 몬테제몰로의 제안으로 스쿠데리아의 팀 대표가 될 때까지만 해도 F1 경력이 전무했다. (중략).
토트는 커리어 대부분을 푸조에서 보냈다.  - P147

토트는 페라리가 재건의 초기 단계에 합류했다. 1993년에도스쿠데리아는 우승이 없었고, 오히려 4위로 밀려났다. - P148

시즌 초 어느 날, 토트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적어두는 노트를 꺼내 할 일 목록에 항목 하나를 추가했다.
‘1996년을 위한 드라이버 문제‘ - P148

1996년 드라이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너무나 분명했다. 페라리가 월드 챔피언 컨스트럭터가 되려면 월드 챔피언 드라이버가 있어야만 했다. - P149

미하엘 슈마허 Michael Schumacher는 아직 역대 최고는 아니었지만, 그 길에 들어선 인물이었다. - P149

그 점은 슈마허의 F1에 입성한 첫 주간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 P149

슈마허는 팀에 합류하자마자 토요일 예선에서 7위를 차지하며, 그 판단이 옳았음을 분명히 보여줬다. - P149

베네통은 1985년에야 등장한 비교적 신생 팀이었다. 패션 기업가 루치아노 베네통 Luciano Benetton은 자신의 화려한 스웨트셔츠를 더 파는 데는 F1에 진출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 P150

유일하게 이례적인 인사 결정은 바로 최고 책임자였다. - P150

의도치 않게 타이밍도 완벽했다. 1994년 시즌은 F1의 규정이 혼란해진 보기 드문 시기였다. FIA는 윌리엄스의 컴퓨터 보조장치를 금지하는 한편, 엔진 규정은 놀랄 만큼 완화하여 페라리의 마력 욕심을 달래려고 했다. - P151

로스 브런은 레이스카가 유일하게 멈추는 순간, 피트스톱pitstop에서 속도 우위를 차지할 참이었다. - P151

슈마허는 운전대를 잡았을 때 철학적인 질문을 별로 하지 않았다. 알랭 프로스트처럼 엔지니어 기질의 드라이버도 아니었고, 아일톤 세나처럼 콕핏을 신성한 영역으로 여기는 타입도 아니었다. - P152

그 사건은 1994년 시즌 마지막에 일어났다. - P152

 슈마허가 1위였고 바로 뒤에 힐이 따라붙었다. 그때 슈마허가 이례적인 실수를 범했다. 좌회전 코너에서 코스를 넓게 벗어나며 타이어가 벽에 닿았다. 힐은 틈을 봤고, 바로 다음 우측 코너에서 인코스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슈마허도 똑같이 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이것은 정당한 레이싱 동작일 수도, 라이벌을 제거하기 위한 비열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 P153

힐은 슈마허가 속임수를 썼다고 공개 비난한 적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모든 영국 언론이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 P153

슈마허는 이번에도 마지막 경기에서 단 1점을 앞서며 우승했다. 또다시 슈마허가 1위였고 윌리엄스가 바로 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금발로 염색한 프랑스계 캐나다인 자크 빌뇌브 Jacques Ville-neuve가 드라이버였다. - P154

. 몇 주 후 FIA는 슈마허의 행동을 재조사했고, 그것이 고의적이라고 판정했다. - P154

슈마허의 도덕성은 확실히 의심스러웠지만, 그의 헌신만큼은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 P155

 메카닉들은 평소처럼 오전 8시 15분에 서킷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슈미는 이미 레이싱 슈트를 입은 채 모터홈 계단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이기고 싶으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지." - P155

F1 역사에서 슈마허만큼 체력 관리에 진지하게 임한 사람은없었다. 슈마허는 F1 드라이버가 된다는 것이 곧 프로 운동선수로 살아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온전히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는 매일 두세 시간씩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했다.  - P155

슈마허가 스쿠데리아로 옮긴 직후 테크노짐Technogym이라는 이탈리아 회사는 그에게 50만 달러짜리 이동식 운동시설을 만들어주었다. 이 ‘바퀴 달린 고문실‘은 그랑프리든 시험 주행이든 그를 따라다녔다. 페라리는 그를 맞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156

로스 브런이 F1 피트 레인에서 귀한 존재였던 이유는, 그만큼보기 드문 자질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 P157

브런은 1978년에 윌리엄스의 패트릭 헤드 밑에서 기계공으로 F1 경력을 시작했다. 낡은 카펫 공장에 차려진 그 팀의 직원은 그를 포함해 겨우 11명뿐이었다. 그는 이후 20년 동안 승진을 거듭하며 메카닉, R&D 기술자, 공기역학자, 수석 디자이너, 레이싱 전략가, 기술 감독까지 F1의 거의 모든 직책을 거쳤다. 브런은 우편실에서 시작해 이사직까지 오른 인물의 F1 버전이었다. - P158

F1에서의 35년간 브런이 결코 듣지 않았을 비판이 있다면, 규정을 너무 보수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일 것이다.  - P158

 슈퍼 닌텐도를 켜고 ‘위, 아래, 좌, 우, B, A, 그리고 스타트‘를 입력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베네통의 차에는 말 그대로 ‘치트키‘가 감춰져 있었다.
브런은 당연히 결백을 주장했다. 차에 비밀 런치 컨트롤 기능이 있는 것은 맞다. 그래서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다. - P159

이 사건에서 브런이 얻은 교훈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는 F1 규정집에 수천 가지의 정밀한 사양과 측정치가 있지만, 그중 어디에도 ‘한계를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가‘에 대한 규정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160

마라넬로로 옮긴 지 3년 만에, 브런과 그의 팀은 마침내 우승을 노릴 수 있는 레이스카를 개발했다. 유일한 걸림돌은 드라이버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 P160

그러나 페라리의 도전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 P161

두 드라이버가 각자의 목표를 위해 경쟁하는 것보다, 하나의 팀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이었다. 페라리의 목표는 분명했다. 미하엘 슈마허를 월드 챔피언으로 만드는것이었다. - P161

슈마허가 시즌을 거의 통째로 결장하면서, 페라리의 작전은 어바인이 이어받았다.  - P162

브런은 나중에 쓴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분명한 것은, 타이어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 P162

그러나 1998년에 포뮬러 1은 사상 최초로 타이어에 관한 규정을 신설했다. 세나의 사망 사고 이후 시작된 안전 강화 조치에 따라, 자동차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의무적으로 앞뒤 타이어에 홈groove이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 P163

그래서 1999년 말 프랑스 대기업 미쉐린Michelin이 브리지스톤의 라이벌로 포뮬러 1에 복귀를 선언했을 때, 대부분의 팀은 곧바로 일본 제조사를 버리고 더 가까운 곳의 제품으로 갈아 끼웠다. - P163

브런의 지시로 브리지스톤은 타이어 공급업체라기보다 페라리의 새로운 부서처럼 움직였다. - P164

F1 역사상 그 어떤 팀도 타이어 생산에 이렇게 깊이 관여한 적은 없었다. - P164

다행히 페라리에는 그 일에 딱 맞는 사람이 있었다. 슈마허는 브리지스톤 타이어를 끈질기게 테스트했다. - P165

브런은 이렇게 말한다. "동에서 몇 주 몇 달을 보낸 뒤에 얻는 결과는 고작 한 바퀴당 0.5초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 타이어를 끼우기만 하면 바로 0.5초의 이득을 얻었습니다." - P165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2000년에 슈마허는 맥라렌의미카 해키넨Mika Häkkinen과의 최종전 승부 끝에 페라리의 오랜 드라이버 챔피언 가뭄을 간신히 끝냈다.  - P166

그 시즌 슈마허는 5연속 타이틀과 통산 일곱 번째 챔피언을 여유롭게 따냈다. (중략). 운 나쁘게도 슈마허만 졸졸따라다니던 한 사진작가가 그 전 과정을 필름에 담았고 사건을 담은 사진은 영국의 타블로이드지 「더 선The Sun」에 ‘사고뭉치 슈마허‘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하지만 이마저도 슈마허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미지가 훼손되기는커녕 독자들은 오히려 그가 더 친근하고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 P167

그 이상한 규정은 성공했다. 페라리는 망했다.
2005년 시즌 개막전부터 스쿠데리아의 시대가 끝났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중략).
하지만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타이어 규정을 건드리는 일이 F1의 본질에 큰 파장을 낳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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