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런 비극도 채프먼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그가 개발한 초고속 레이스카를 기꺼이 몰고자 하는 드라이버들의 열망도 잠재우지 못했다. - P42

1976년 어느 날, 안드레티와 채프먼은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한 호텔 식당에서 각각 따로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중략).
채프먼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리오, 내가 자네에게 줄 딱맞는 차가 있다면 좋을 텐데." - P43

채프먼은 안드레티에게 "내년에는 런던 버스와 같은 외관의 신차를 선보일 것"이라고 약속했다.
물론 버스와는 전혀 닮지 않은 이 신차는 이후 포뮬러 1의 방향을 영원히 바꿔놓게 된다. 그것은 이른바 그라운드 이펙트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레이스카의 첫 모델이었다. - P43

채프먼은 1977년형 신차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타이어를 지면에 최대한 밀착할 아이디어를 샘솟듯 떠올리며 다시 활력을 얻었다. (중략). 채프먼은 1975년 말 로터스팀의 연구 부서에 보낸 27페이지분량의 서신에서 자신의 모든 구상을 밝혔다. - P44

로터스는 쐐기 모양의 차체 하부에 슬라이딩 스커트sliding skirts*를 달아 노면과 유연하게 밀폐되도록 설계했다. 

* 말 그대로 차체 하부 가장자리에 달린 움직이는 ‘치맛단‘으로, 그라운드 이펙트를 극대화하기 위해 차 아래의 공기가 옆으로 빠져나가는것을 막는다 - P44

이 개념은 워낙 극적인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에, 1976년 말어느 대회에서 안드레티가 한번 사용해 봐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채프먼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 P45

안드레티의 입장에서 그건 너무 아슬아슬한 도박이었다. 그래서 그는 출발하기 직전에 메카닉에게 몰래 연료를 반 갤런(약 2리터) 정도 더 채워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 P45

그라운드 이펙트로 무장한 레이스카가 마땅히 거머쥐었어야할 월드 챔피언 타이틀은 결국 이듬해까지 기다려야 했다. 안드레티는 시즌 초반까지 로터스 78을 몰았지만, 한층 더 개선된 로터스 79가 곧 출시될 예정이었다. - P46

하지만 축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로터스팀의 동료 드라이버였던 로니 피터슨Ronnie Peterson의 차가 출발선을 떠나자마자 화염에 휩싸였고, 결국 그날 밤 그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 P46

이제 이야기에 들로리언이 등장할 차례다.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제너럴모터스GM의 임원을 지낸 들로리언은 말솜씨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채프먼에게 찾아가 두 가지 솔깃한 제안을 했다. 하나는 로터스팀 전체를 인수하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중략). 다른 하나는 영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유치해 북아일랜드에 들로리언 자동차 공장을 짓자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 P47

이 계획에서 로터스는 1,767만 달러의 수수료를 받고 차량의 섀시 설계를 돕기로 했다.
그러나 이 돈 중 단 한 푼도 로터스의 자동차 개발에는 흘러가지 않았다. - P47

이야기의 마지막 반전은 1982년 가을에 찾아왔다. (후략).
10여 년의 징역형을 앞두고 있던 채프먼은 당시 54세였다.
당시 항간에는 그가 사망으로 위장한 채 돈을 가지고 어디론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 P48

그가 남긴 유산은 단순한 성적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그의뒤를 이은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포뮬러 1의 모든 규칙을 한계까지 비트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 치열한 경쟁으로 단련된 그들의 집요함은 이 스포츠를 자동차 기술 창의성의 최전선으로 끌어올렸다. - P48

레이싱을 아는 이들이라면, F1의 한계를 밀어붙인 이들을 확실한 천재라고 인정할 것이다. (중략). 빨간 레이싱카를 만드는 그들이 보기에 영국 엔지니어들은 결코 찬사를 받는 예술가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가라지스타garagistas, 즉 기름때에 찌든 정비공들일 뿐이었다. - P49

3장

프랜싱 호스

(전략).
엔초는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아름답다고 믿은 레이싱카를 생산하는 데 바쳤다. 비록 그가 페라리라는 회사를 설립할 때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말이다. - P52

1950년, 포뮬러 1이 출범한 첫 시즌부터 페라리는 자기 팀이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이 대회에 빠지는 일만큼은 없도록 하리라고 굳게 결심했다. 이후 70여 년이 흐른 지금, 페라리는 이 대회의 모든 시즌에 빠짐없이 참가한 유일한 팀으로 남아 있다.  - P53

페라리는 TV 광고도 하지 않고, 연간 판매 대수도 약 1만대에 불과하다. 페라리가 파는 모든 것은 F1 서킷 위에서 쌓아 올린 역사에 기대어 거래된다.  - P53

페라리는 그런 ‘감성‘ 위에 세워진 제국이었다. - P54

그러나 자신의 역사를 기반으로 브랜드 가치를 이어온 페라리이지만, 정작 포뮬러 1 무대에서는 오래도록 기억될 만한 성과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 P54

(전략). 그는 언제나 이탈리아인이 페라리의 운전대를 잡기를 선호했지만, 1958년 그에게 F1 타이틀을 안겨준 것은 요크셔 출신의 마이크 호손Mike Hawthorn이었고, 1964년 또 다른 타이틀을 선사한 것은 모터사이클 챔피언 출신의 존 서티스John Surtees였다. - P55

페라리가 전 세계 왕족들에 힘입어 어느 정도 당당한 기풍을 갖출 무렵, (중략). 그들은 지위를 중시하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이 많았으며, 남성성을극도로 존중하는 마초 집단이었다.
바로 미국인들이었다. - P57

 그들은 차를 사는데 들인 돈보다 오히려 유지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대서양 건너편의 페라리 대리점들이 부품값과 정비료로터무니없는 값을 불렀기 때문이다. (중략). 페라리 부품은절대 고장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형편없는 서비스에도 불구하고 고객들은 다시 페라리를 선택했다. - P57

사실 엔초 페라리는 자국민이라고 딱히 더 나은 대우를 해주지도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월급을 주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 P58

(전략).
피로 얼룩진 시즌들을 겪으며 페라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두 집단을 정면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스포츠 언론과 가톨릭교회였다. 엔초가 아무리 이탈리아의 빛나는 상징을 일궈냈다고 한들, 그것이 이탈리아 젊은이들을 계속 죽음으로 몰아넣는 대가라면 모든 업적은 허사로 돌아갈 터였다. - P60

레이싱은 결국 파괴적인 집착임이 틀림없었다. 동시에 매우 많은 돈이 드는 중독이기도 했다. 아무리 많은 로드카를 팔아도 페라리는 늘 자금이 부족했다.  - P61

결국 문제의 핵심은 레이싱이었다. 스쿠데리아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중략).
상대방은 "출전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로써 모든 것은 없던 일이 되었다. - P61

페라리가 실제로 포드에 회사를 매각할 생각이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진짜로 관심을 두고 있던 상대, 이탈리아 대기업 피아트Fiat를 염두에 두고 미리 몸값을 올리려는 제스처였다는 것이다.  - P62

계약을 마무리하는 데는 무려 2년이 걸렸다. 결국 페라리는 포드가 제시했던 금액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피아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P62

이 협약으로, 홀로 빛나던 페라리의 위상은 이탈리아 최대 수출 기업과 완벽한 한 몸이 되었다. - P63

1970년대 초, 할리우드 영화가 그려낸 페라리는 현실과 사뭇달랐다. 스크린 밖에서 스쿠데리아의 F1 카는 맛이 간 키안티 와인한 병보다 못한 처지였다.
더 심각한 것은 페라리는 이제 이탈리아 차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라는 점이었다. (후략). - P63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마라넬로라는 거대한 종교 집단의 내부인들은 감히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 P64

니키 라우다Niki Lauda는 1973년 테스트 트랙에서 페라리를 처음 몰아본 후 삐걱거리는 스쿠데리아의 모든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 P65

라우다는 자서전에도 썼듯이 이렇게 대꾸했다. "뭐가 잘못됐죠? 이 차는 언더스티어가 심하고, 코너링은 형편없어요. 도저히 운전할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요."
라르디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 역시 곤란했다. 노인이 라우다가 차를 칭찬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챘다고 해도 말이다.  - P65

엔지니어가 일주일이라고 답하자, 엔초는 신입 드라이버를 향해 약속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을 했다. 차를 고칠 테니, "다음 주 이 시간까지 정확히 1초를 단축하지 못한다면 해고"라는 것이었다. - P66

라우다는 엔초가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 P66

라우다는 그때부터 한 주 내내 엔지니어들과 함께 차에 매달렸다. 다루기 힘든 그 기계의 모든 디테일에 개입하며 하나하나 통제했다. 그리고 엔초가 요구한 대로 일주일 만에 정확히 1초를 단축했다. - P66

(전략).
반면 라우다는 그다지 감상에 젖지 않았다. 그해 시즌 열린13번의 레이스에서 다섯 번 우승하고 세 번 포디움에 올라선 그는 한 아름 쌓인 트로피를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여기며 오스트리아의 한 정비소에 넘겼다.
그 대가로 라우다가 받은 것은 평생 무료 세차권이었다. - P67

그러나 페라리의 행복한 승리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P68

4명의 드라이버가 즉시 차에서 뛰어내려 불길로 달려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탈리아인 아르투로 메르자리오Arturo Merzario가 안전벨트를 뜯어내고 라우다를 끌어냈다. (중략).
라우다는 이 모든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다. - P69

독일의 「빌트Bild」는 "도대체 그의 얼굴은 어디로 갔나?"라는 헤드라인의 기사에서 라우다가 최소 6개월 동안은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라우다는 단 6주도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 P69

라우다는 수술로 재건한 눈꺼풀 사이로 앞을 보며 테스트 트랙을 맹렬히 질주하더니 레이스 복귀를 선언했다. - P70

그가 복귀전에서 보여준 가장 놀라운 대목은, 그가 여전히 월드 챔피언십 우승에 근접해 있었다는 점이다.  - P70

마치 노아의 시대가 되돌아온 듯 계속되는 비를 바라보며 라우다는 후지 스피드웨이 Fuji Speedway 에서의 레이스가 너무 위험하다고 목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경기가 강행되자 그는 몇 바퀴만 돈다음 아예 피트로 들어와 차를 세워버렸다. - P71

그해 라우다는 거의 앙심 하나로 월드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그는 엔초는 물론이고 팀 동료 카를로스 로이테만Carlos Reutemann도 싫어했다.  - P71

라우다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팀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다."
페라리는 또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 P72

페라리는 F1에 수많은 유산을 남겼지만, 거기에 ‘질서‘와 ‘체계‘가 포함된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혁신적인 기술이나 드라이버와의 건전한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 P73

 F1의 계획이 엔초의 마음에 차지 않을 것임은 자동차광이 아니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계 최고 모터스포츠에걸맞지 않은 초라한 엔진이라니, 그의 상식에는 맞지 않았다. - P73

그래서 엔초는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엔진 합의가 되지 않으면 F1을 떠나겠다고 한 것이다. 모나코도 몬차도 다 필요 없고 인디카INDYCAR 레이스에나 나가겠다는 협박이었다.  - P74

그러나 1988년이 되자 마라넬로에는 엔초의 시대가 막바지에접어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중략).
엔초는 그해 8월에 세상을 떴다. - P74

에클스턴은 이렇게 말한다. "단언컨대 포뮬러 1은 페라리이며페라리는 곧 포뮬러 1이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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