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저도 지금 유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도, 히무라도, 쓰지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예상도 못한 일이다.
이토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고 간절한 눈빛으로 히무라를바라보았다. - P181

사람을 돕는 일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다.  - P181

이토는 쩔쩔매며 자리에 앉더니 마스터에게 술이 아니라 자몽주스를 주문하고 음료가 나오기도 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매일 밤 여자 유령이 머리맡에 나타납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라고 한다.  - P182

"아니요. 다른 사람과 함께 자도 저 혼자만 문득 잠에서 깨서 유령을 봅니다. 친구에게 밤새 지켜봐 달라고 해도 아마 제 눈에만 보이지 않을까 싶어요."
난처하네.
이건 쓰지가 말한 네 가지 경험담과는 종류가 다르다. 일단 유령의 출현을 증명하는 근거가 이토의 증언밖에 없다.  - P183

"그렇다면 유령 스토커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으음, 저는 이 정도밖에 떠오르는 게 없네요."
쓰지는 도움을 청하듯 히무라를 보았지만 히무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P185

"이토 씨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더라도, 생판 남인데도 꽃을 바치는 다정한 사람이라 멋대로 도움을 기대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쓰지가 거들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라면 도와줄 것 같다고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 P187

"유령이라고 생각하니까 한 발 물러나게 되는 거야. 살아 있는여성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소극적인 히무라에게 한 말이었지만, 막상 말하고 보니 이거다 싶었다. 내가 봐도 핵심을 찌르는 발언 아닌가? - P188

원망하는 이유를 알아냈다고 해도 상대는 유령이다. 과연 말이 통할지 의문이다. (중략).
"다음에 유령이 나타나면 사과해 본다거나...... 아, 이토 씨가 버린 꽃을 바친 사람을 찾아내서 한 번 더 꽃을 바쳐 달라고 하는 건요?" - P190

히무라는 심령 현상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과하면 유령이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할 리가 없다. - P191

(전략), 나는 추리소설가다. 진짜 명탐정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희귀한 케이스다. 장르와 상관없는 영능력자와의 연줄을 기대해도 곤란하다. - P191

마스터가 접시를 포개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손님들 말씀이 귀에 들어와서요. 난처하신 것 같아 한 말씀드리고 싶어서."
우리는 나란히 마스터를 쳐다보았다. - P192

"전에 저희 가게에 오신 다른 손님이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탐정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듣자 하니 심령탐정이라나요………….."
히무라가 한쪽 눈썹을 실룩였다. - P192

"전화번호가 특이해서 외우기 쉽거든요. 그래서 기억합니다. 분명 ......."
이토는 서둘러 메모했다. 어째선지 쓰지까지 받아 적고 있다.
언젠가 진짜 심령 현상을 만났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리라. - P193

끈, 밧줄, 로프


아오사키 유고


1991년, 가나가와현 출생. 2012년 <체육관의 살인>으로 아유카와 데쓰야상을 수상하며 데뷔. 2024년 《지뢰 글리코》로 본격 미스터리 대상(소설 부문),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장편 및 연작 단편집 부문), 야마모토슈고로상을 수상. 그 밖의 저서로 ‘노킹 온 록트 도어 시리즈‘, ‘언데드걸 머더 파르스 시리즈‘, 《새벽녘 첫차의 살풍경》, 《11글자 감옥 아오사키 유고 단편 집성》, 《가스등 들개 탐정단》(원작) 등. - P10

1

느지막이 일어나 짧은 에세이 원고를 마무리하고 출판사에서보내 준 증정본을 읽는다. 활동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하루가될 예정이었다. 친구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 P11

아니. 그런 사람은 세상에 한 명이면 족하려나.
그 희귀한 직함을 가진 남자가 고물 벤츠 옆에 서 있었다. (중략).
히무라. 그를 불렀다.
"대학은 얼씨구나 내팽개치고 나와도 되는 거야? 입시다 졸업논문 채점이다 바쁜 시기잖아." - P12

"얼굴을 안 봐도 알아. 올해부터 종합소득세 신고가 복잡해졌으니까."
분하게도 그 추리는 적중했다. 오늘 저녁부터 영수증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 P12

"그래서 이번엔 어떤 사건인데?"
"강도 살인, 시체 유기. 자세한 설명은 이제 들어 볼 건데, 용의자는 어느 정도 좁힌 모양이야."
"부교수가 나설 자리는 없어 보이는데?" - P13

아파트 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훤한 머리를 꾸벅 숙였다. 오사카 부경의 후나비키 경부다. (중략).
잘 아는 얼굴이라 요란한 인사는 필요 없다. - P13

"신고는 오늘 오전 11시경. 맞은편 해안 창고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산책로 아래 피복석*에 걸린 여성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 바닷가 등에서 물과 접촉하는 둑의 경사면이 무너지지 않도록 포개어 쌓은 돌 - P14

(전략).
"보다시피 이 모양이라. 문은 자동으로 잠겼지만 새시는 열려있었고 금품도 사라졌습니다. 지갑 속 현금과 <몬스터 나이츠>라는 카드 게임의 레어 카드가 스무 장 정도." - P15

"몬나이‘ 카드라고 못 들어 보셨습니까? (중략) 야스미 씨는 어렸을 때 뽑은 레어 카드를 소중히 파일에 넣어 이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는 게 여러 지인들의 증언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현재 시세라면 가격은 장당 5만 엔 정도고요. - P16

"이마에 있는 치명상이 전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반신에는 찰과상이 여럿 있었지만 생활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산책로에서 유기될 때 생긴 상처 같습니다."
"머리 상처는 한 군데뿐이었다는 말씀이지요?" - P17

"그것 말인데 언뜻 야스미 씨가 새시 잠그는 걸 깜빡해서 그리로 범인이 들어온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신발장 위에 이 집 여벌 열쇠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열쇠에서도 울 섬유가 검출되었습니다."
"범인이 만졌다는 말씀입니까?" - P18

"오사카 주민 880만 명 중에서 찾는 것에 비하면 비약적인 진전이군요. 하지만 아직 조금 많은걸."
히무라의 혼잣말에 경부가 반응했다.
"안심하세요. 더 좁힐 수 있습니다. 저희는 구속에 사용된 로프 도구에 착안했습니다. 시체가 입고 있던 의복이 바닷물에 잠겨 있어서 섬유는 검출하지 못했고, 굵기도 알아내기 힘들죠. (후략)." - P19

"그걸 찾아내면 범인 확정인가."
내 혼잣말에 경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에게 유리했어요. 범인은 시체가 바다에 떠내려가 발견이 늦어질 거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을 겁니다. (중략). 그렇게 생각하고 아파트 쓰레기 배출상황을 조사했습니다." - P20

"이 아파트 쓰레기 수거장입니다. 부지 안에서 여기만 방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중략). 부피가 크거나 분류하기 어려운쓰레기는 쓰레기봉투가 아니라 옆에 있는 상자에 넣어 두면 야마구치 씨가 나중에 혼자서 분류한다고 합니다." - P21

"있었나요? 저 상자에 로프 같은 걸 버린 주민이?"
"있었습니다.......세명."
기대를 저버리는 어중간한 숫자였다. 히무라가 조용히 물었다.
"실물은?"
"사건 발견이 11시라, 확보에는 실패했습니다. 이미 수거해가서 소각장으로." - P22

2

히무라와 나는 머리도 식힐 겸 가이즈카 앞까지 걸어가 ‘풍차‘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고풍스러운 간판이 취향이라...... 그런 건 아니고 흡연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 P22

"안심해, 일본어의 표현은 다양하니까. 순서대로 끈, 밧줄,  로프로 하면 어때?" - P23

"첫 번째는 이 남자입니다."
(중략).
뒷문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휴지와 음식물 쓰레기가 든 반투명 비닐봉지를 수거함에 던졌다. (중략).
"나가타 도모키, 24세, 106호에 혼자 사는 은행원입니다." - P27

100엔 숍 스티커가 붙은 열수축 필름에 나가타가 버린 것과 같은 끈이 들어 있었다. 제품명은 ‘다용도 마 끈 길이는 ‘20m‘. 굵기는 연필 정도일까. 평범한 갈색에 군데군데 보풀이 일어난, 농사일에 쓸 법한 흔히 볼 수 있는 끈이었다. - P24

"하라 겐이치, 44세. 집은 202호, 영상 제작 회사 직원입니다. 아내와 함께 사는데 아내는 지금 여행 중이라고 합니다."
(중략).
"고공 작업을 할 때 몸에 감는 추락 방지용 로프, 소위 말하는 생명줄이야. 발판 위를 옆으로 이동할 때 쓰는 건 수평 구명줄, 창문 청소처럼 승강 작업을 할 때 쓰는 건 수직 구명줄이라고 하지."
히무라가 설명해 주었다. 어디서 저런 지식을 얻어 오는 건지. - P25

"가토 료타, 30세. 집은 305호. 근처 중화요리점에서 일합니다. 독신이지만 어젯밤은 207호에 사는 시나다 유라는 남자를집으로 불러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알리바이가 있단 말씀입니까?"
"아니요. 새벽 0시 이후에는 둘 다 잠들었다고 해서...………."
(중략).
유명한 아웃도어 브랜드의 ‘반사 소재 텐트 로프‘였다. 길이는 ‘10m‘, 굵기는 끈과 밧줄의 중간 정도. - P27

"한 가지 더, 꼭 말씀드릴 점이. 가토 료타는 전과가 있습니다. 그래 봤자 고등학생 때 불량배들끼리 요란하게 싸움질을 한 게 다입니다만, 상해죄로 기소되어 집행유예를 받았습니다."
경부의 이야기를 들어도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 P27

"오늘 아침 주민들이 버린 로프 형태의 쓰레기는 세 개. 저게전부입니다.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봉투 속 내용물도 야마구치씨가 일단 전부 확인했습니다." - P27

히무라는 천천히 팔짱을 꼈다.
"꼭 이 세 개중에 흉기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텐데요."  - P28

"......세 사람 다 소지품을 버렸다고 증언하던가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누가 현관 앞에 가져다 놓은 걸 기분 나빠서 버린 게아니라?"
"전부 자기 물건이라고 증언했습니다." - P28

"그렇다면 역시 이 세 사람 중에 ………… 앗!"
나는 작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재생되고 있던 영상 한구석에서 쓰레기 수거용 덤프트럭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중략).
귀중한 증거품들은 이리하여 세상에서 사라졌다. - P29

"가능성으로는 로프가 유력하지만 결정적인 판단 근거가 없어. 다른 측면에서 따져 볼까?"
"그럼 단독범인지 아닌지부터."
"단독범이야."
히무라는 확신하며 말을 이었다. - P30

"흉기는 피해자의 집에 있던 장식품이었어. 그것도 교묘한 위장이라고 말하려고?" - P30

"범인이 아파트 주민이라고 단정한 이유는 여벌 열쇠에서 장갑 섬유가 나왔기 때문이야. 우연히 운 좋게 검출되어서 범인이 만졌다는 걸 알아냈지만 검출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피해자가 직접 가져온 것으로 보고 정밀 조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어. 노리고 만든 상황으로 보기에는 불확정 요소가 너무 많아." - P31

"히무라 선생님 의견은?"
"범인이 침입한 시점에 피해자가 깨어 있었는지가 궁금해."
"...……아아, 새벽 1시였으니 피해자가 자고 있을 때 묶었을지도모르겠네." - P33

"끈, 밧줄, 로프, 유의어를 모아 보니 생각나는 단편이 있어. 쓰즈키 미치오가 쓴 <재킷 정장 수트>,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의 퇴직 형사가 나오는 단편이야.‘ - P33

"그 밖에 끈이라고 하면………… 란포의 《D 언덕 살인 사건》이 있지." - P33

나는 작은 고민을 털어놓기로 했다.
"기존 소설 캐릭터를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글로 쓸 수 있을까?"
"있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히무라가 대답했다. - P34

"동일성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호하다고 생각하는데. 네 소설에도 시리즈 캐릭터가 몇 명 있지만 처음 등장했을 때와 지금의 그 인물은 같은 사람이야? 일 년 전과 오늘은? 성격이나 언행은변하는 거야, 작가의 마음속에서조차." - P35

그렇다면・・・・・・ 추리소설에서 독창성이란 무엇일까?
추리소설가들의 필사적인 창작은 전부 대체 가능한 영역인 건아닐까?
"내가 하는 일을 AI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불안해진 거로군." - P36

"재현 가능하다는 점이 그렇게 부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는않는데, 아리스 네가 종종 말하잖아, 본격 미스터리는 논리의 힘을 그리는 이야기라면서? 논리란 결국 과학이야. 과학의 본질은 재현성에 있어. 어떤 사람이 발견한 법칙이나 현상을 다른 사람이 실험으로 재현할 수 있는가. 재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변의 사실로 인정받지. 불가능하다면 유사 과학이야. 미스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 P37

화제를 부교수의 전문 분야로 되돌렸다.
"끈, 밧줄, 로프...... 선택지는 세 개. 추리만으로 증거품 R을맞힐 수 있어?"
"아직 모르겠어. 내일은 문제의 세 사람과 이야기해 보자고."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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