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위대한 세 명의 자연주의자도 흑인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당대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린, 지질학, 고생물학, 근대 비교해부학의 창시자인 조르주 퀴비에 (Georges Cuvier)는 토착 아프리카인에 대해 "가장 퇴화한 인종으로 그 형태는 짐승의 그것과 흡사하며, 그 지능은 어느 모로 보나 질서정연한 통치에 도달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말했다(Cuvier, 1812, p.105). - P89
인정 많은 자유주의자였고 정열적인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찰스 다윈은 침팬지나 호텐토트인(Hottentot, 부시맨이나 흑인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남아프리카 원주민/옮긴이)과 같은 중간형의 멸종이 예상되기 때문에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간격이 더욱 멀어지게 될 미래에 대해이렇게 말한다.
(후략).
* 예를 들어 다윈은 「비글호 항해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리우데자네이루 근처에서자신의 여자 노예의 손가락을 으깨기 위해 나사못을 준비해둔 노부인의 맞은편에 살고 있었다. 또한 매일 잠시도 쉬지 않고 욕을 먹고, 매를 맞고 혹사당해서 그로 인해 이 최저동물의 마음이 파괴될 지경에 이른 어린 흑백 혼혈아 하인이 있는 집에 머물렀다. 나는 깨끗하지 않은 컵을 내게 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나서서 말릴 때까지) 말 채찍으로 머리를세 번이나 얻어맞은 6, 7세 가량의 소년을 보았다. (……) 이러한 행위는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고백하고, 신을 믿으며 신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또한 변명되고 있다! 자유를 떠벌이는 우리 영국인과 우리에게서 파생한 미국인들이 그러한 죄를 범했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온몸의 피가 끓고 마음이 떨린다." - P92
세계여행가이자 정치가, 그리고 19세기 과학의 최대 계몽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선구자를 찾는 오늘날 모든 평등주의자들의 영웅이다. 당시 어떤 과학자보다 지적이었던 그는 정신적 또는 심미적 근거로 인간에게 순위를 매기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했다. - P93
다윈과 함께 자연선택이론을 발견한 알프레드 러셀 월러스(Alfred Russel Wallace)는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모든 사람들의 타고난 지적 능력이 거의 동등하다고 단언했다. - P94
월러스는 자연선택이 동물에게 당장의 유용성*을 주는 구조를 만들어줄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옮긴이 당장의 유용성은 ‘immediately useful‘을 번역한 것이다. 진화는 미리 예정된필연적인 길을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질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월러스는 자연선택의 이러한 특성을 동물에게 국한시켰다. - P94
인종차별론의 두 가지 모습-에덴동산의 완벽함과 또 다른 아담
진화론이 등장하기 이전에 인종의 서열화에 대한 정당화는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부적절한 정의지만 다시 사용하자면, 하나는 ‘온건한‘ 이론에 해당하며 모든 사람이 아담과 이브의 일회적인 창조에 결부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 P95
성서를 가볍게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퇴화론이 더 인기가 높았다. - P96
퇴화론자 중에는 인간의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적극적인 주장을 편 사람들도 있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해부학자 에티엔 세레스(EtienneSermes)는 1860년에 하등한 인종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자신의 노력에 의해 개량될 수 있는 유일한 종(種)이라는 것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썼다. - P9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레스는 보다 하등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열등성의 징후를 기록하기 위해 연구했다. 해부학자인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그 증거를 찾았지만 기준이나 데이터를 수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했다. - P97
인기는 떨어지지만 다원발생설에도 유력한 지지자들이 있었다. 데이비드 홈(David Hume)도 순수한 사색으로 일생을 보내지는 않았다. (중략). 흄은 각각의 인종이 별개로 창조되었고, 백인종 이외의 인종은 천성적으로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 P97
아가시의 다원발생설-흑인은 백인과 평등하게 살아갈 수 없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정치적 독립에 이어 지적해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이상 미국 학자들이 유럽의 방식이나 이론에 굴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P100
19세기 중반 초기에 막 형성되고 있었던 미국의 과학자 집단은 에머슨의 충고에 따라 스스로를 조직했다. 절충적인 아마추어들은 유럽 이론가들의 위신 앞에 굴복하면서도 토착 사상과 유럽에서의 지속적인 연료공급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내부 동력을 갖춘 전문가 그룹이 되었다. - P100
스위스의 위대한 자연주의자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 1807~1873)는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원래 퀴비에 학파에 속했고, 물고기 화석의 연구자였다. 1840년대에는 미국으로 이주해 곧바로 미국 자연사연구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도 했다. - P101
아가시는 정치적 교의에 따라 의도적으로 다원발생설을 받아들이지는않았다. 인종 서열화의 타당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노예제의 반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P101
아가시가 다원발생론자가 되기 쉬웠던 근본적인 원인은 그의 개인적 이론과 방법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1. 아가시는 동식물의 지리적 분포를 연구하여 ‘창조의 중심들(centersof creation)‘에 대한 이론을 개발했다. (후략).
2. 아가시는 분류학적 실행에서 극단적인 세분파(派, splitter)에 속했다. (후략). - P102
아가시는 유럽에서 한번도 흑인을 보지 못했다. 1846년 필라델피아의한 호텔에서 하인으로 일하던 흑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 P103
(전략). 즉 다원발생설은 인간의단일성이라는 성서의 교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각각의 인종이 별개의 종으로 창조되었다 해도 인간은 공통의 구조와 공감에 의해 맺어진다. 성서는 고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 P105
아가시는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사회정책을 제시하며 논문을 끝맺었다. 그는 타고난 능력에 맞는 교육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흑인에게는 손으로 하는 작업, 백인에게는 지적 작업을 훈련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 P107
링컨조사위원회(Lincoln‘s Inquiry Commission)의 위원이었던 S. G.호우(S. G. Howe)는 아가시에게 재통일된 국가에서의 흑인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구했다(호우는 교도소 개혁과 맹인교육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공화국의 전쟁 찬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의 저자인 줄리아 워드 호우의 남편이기도 하다). - P108
그는 법률상의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허용되어야 하지만 흑인들에게 사회적인 평등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P109
아가시는 해방된 노예에게 법률상의 자유가 주어지면, 인종 사이의 엄격한 사회적 분리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다행스럽게도, 자연은 윤리적 미덕과 같은 편이다. - P111
아가시의 세계는 그의 생애 마지막 십 년 동안 붕괴했다. 제자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고, 지지자들도 사라졌다. 그는 사회적으로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과학자들은 그를 다윈 조류 이전의 낡아빠진 신념을 강고하게지키며, 점차 나이를 먹어가는 독단주의자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 P112
그러나 인종격리에 대한 그의 사회적 선호는 널리 퍼졌다. - P112
객관주의자 모턴-미국의 골고다
아가시가 필라델피아에서 흑인 웨이터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며 모든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 P113
모턴은 미국과학의 위대한 데이터 수집가, 객관주의자, 미성숙의 기획을 공상적 추론의 수렁에서 구해낸 사람이라는 명성을 획득했다. - P113
1851년에 모턴이 죽었을 때, 뉴욕 트리뷴』지는 "모턴 박사만큼 전세계의 학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은 미국 과학자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썼다(Stanton, 1960, p.144). 그러나 모턴이 두개골을 수집한 이유는 추상적 관심이라는 도락적 동기나 완전한 표현을 얻으려는 분류학자의 열의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확인하고 싶은 가설이 있었다. - P114
모턴은 처음에는 동요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곧 미국 다원발생론자들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여러 편의 논문을 통해 인종이 별개로 창조된 종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 P115
모턴은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트산에 도착한 시기를 자신이 살던 시대로부터 4179년 전으로, 그리고 이집트의 무덤을 그로부터 1천 년 후라고 계산했다-이것은 노아의 자손들이 서로 다른 인종으로 분리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그는 불과 1천 년 동안 인종이 그렇게 급격하게 변화했고, 그후 3천 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물었다). 따라서 인종은 처음부터 별개로 시작되었던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Morton, 1839, p.88). - P116
. 따라서 모턴은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상대적 서열화를 확립하려고 시도한것이다. - P116
그러나 모턴이 과학자로 명성을 얻은 것은 두개골 컬렉션과 그것을 사용해서 인종을 서열화한 덕분이었다. - P116
모턴은 인간의 두개골 크기에 관한 세 편의 주요 저서를 발표했다. 첫번째는 1839년에 출판된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크라니아 아메리카나(Crania Americana)』로, 여기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많이 들어 있다. - P117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이 자료에는 백인이 정점에 위치하고, 인디언이 중간에 그리고 흑인이 최하위를 차지한다. 더욱이 백인 중에서도 튜턴족과 앵글로 색슨족이 정점에 놓이고, 유대인이 중간, 그리고 인도인이 맨 아래에 놓이기 때문에 양키들의 편견에 훌륭하게 부응하고 있다. 게다가 이 패턴은 유사 이래 계속 안정적인 것이었다. - P117
모턴이 그린 미국에서의 지위나 권력에 대한 접근은 생물학적 가치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상주의자나 평등주의자들이 자연의 명령을 거스를 수 있었을까? - P118
1977년 여름의 몇 주일 동안 나는 모턴의 자료를 분석했다(자칭 객관주의자였던 모턴은 자신의 모든 원자료를 공개했다. 따라서 그가 어떻게 원래의 측정값에서 표를 이끌어냈는지를 분명하게 추론할 수 있었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모턴의 정리는 선험적인 확신을 억누르려는 뚜렷한 목적으로 속임수와 날조를 이어붙인 조각이불과 같다. - P118
과학에서 의도적인 사기는 드물다. 또한 그것은 과학 활동의 본질에대해 거의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도 못한다. 만약 그런 사례가 발견된다면, 거짓말쟁이로 제명될 것이다. - P120
『크라니아 아메리카나』가 기본적으로 인디언의 열등한 능력에 대한 논문이기 때문에, 먼저 모턴이 인디언의 두개골 평균값을 82세제곱 인치로 기술한 것이 부정확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 P124
그러나 80.2 세제곱인치라는 ‘정확한 수치는 너무 낮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적절한 방식으로 산출된 값이기 때문이다. - P124
나는 모든 그룹에 똑같은 가중치 (weight)를 주는 동일한 방식을 사용해서 인도인의 두개골을 모턴의 표본에 부활시켰다. 모턴이 계산할 때 사용한 코카서스 인종의 표본에는 네 개의 하위 그룹 두개골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인도인은 전체 표본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 P126
(전략).
뇌와 신체의 상관관계는 앞서 논의한 ‘크라니아 아메리카나에 남아있던 문제를 함께 해결해줄 것이다. 즉, 인디언 종족간의 뇌 크기의 평균값 차이는 무엇에 근거하는 것인가? (이 차이는 모턴에게는 큰 골칫거리였다. 작은 뇌를 가진 잉카인이 어떻게 그토록 정교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복자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기는 했지만 말이다.) - P130
흑인의 평균값을 속인 사례
(전략). 모턴은 1839년과 1844년 사이에 두개골을측정하는 방법을 겨자씨에서 납 탄환으로 바꾸었다. 나는 이것이 흑인의 평균값이 높아진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모턴은 대부분의 두개골을 하나 하나 직접 다시 측정했다. - P131
나는 겨자씨를 사용해서 측정한 쪽이 낮은 값을 나타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중략). 모턴 역시 같은 두개골을 여러 차례 측정한 결과 몇 세제곱인치의 차이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 P132
(전략). 모턴이 (겨자씨로측정한) 『크라니아 아메리카나』에서 이들 인종에 대해 두개골을 개별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카서스 인종의 경우, 19개의 식별가능한 두개골에서 납 탄환으로 측정한 수치가 겨자씨로 측정한 수치보다 평균값에서 겨우 1.8 세제곱인치의 차이를 나타낼 뿐이었다. - P132
우리는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모턴이 종자를 사용할 때, 엄청나게 큰 흑인의 두개골에 씨앗을 가볍게 채우고 몇 번 흔드는정도로 그친 반면 지독하게 작은 백인의 두개골에는 씨앗을 채운 후 세게흔들고, 엄지손가락으로 강하게 눌러댄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기대가 행위의 강력한 지침이 된 셈이다. - P133
1849년의 최종적인 표
모턴이 1849년에 최종 자료를 표로 만들었을 때 그의 훌륭한 컬렉션에는 모두 623개의 두개골이 모여 있었다-이 표는 앵글로 색슨족이라면 누구나 기대하는 서열화를 압도적으로 확인해주었다. 그런데 코카서스 인종의 부표본들은 오류와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 P133
여섯 개의 중국인 두개골은 모턴에게 82세제곱인치라는 몽골 인종의 평균값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낮은 값은 묘하게도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그의 두 가지 건망증의 사례를 기록한다. - P134
(전략).
모턴은 이 두개골들을 납 탄환으로 재측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겨자씨로 측정했을 때의 인디언의 평균값 86.8세제곱인치에 2.2 세제곱인치의 보정값을 더하면 89세제곱 인치라는 평균값을 얻을 수 있다(1336번의 중국인 두개골을 추가하고, 에스키모 두개골을 보수적으로 보정한 경우). - P135
요약하자면 모턴이 편의적으로 매긴 순위를 수정한 결과 나는 그의 데이터에서(표 2.5) 인종간에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모든 그룹은 83에서 87세제곱인치 사이에 위치하며, 코카서스 인종이 그 정점을 차지한다. - P136
결론
모턴의 속임수는 네 가지 일반적인 범주 속에서 그 위치를 부여할 수있다.
1. 편의주의의 모순과 수시로 바뀌는 기준: 모턴은 미리 예상한 그룹의 평균값에 부합하기 위해 종종 큰 부표본을 포함시키거나 제외했다. (후략).
2. 선입관을 향해 방향 지워진 주관주의: 겨자씨를 이용한 모턴의 측정 방법은 주관적 편향에 따라 폭넓은 영향을 받을 수 있어 부정확했다. 하지만 이후 납 탄환에 의한 측정은 재현가능한 데이터이며 객관적이라고 생각된다. (후략).
3. 우리에게는 명백하게 보이는 절차적 생략: 모던은 두개골의 크기 차이가 타고난 지능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믿었다. (후략). - P137
4. 잘못된 계산과 편의주의적인 생략 : 내가 찾아낸 계산 오류와 생략은 모두 모턴이 가진 편견의 산물이다. 그는 이집트 니그로이드의 평균값을 80세제곱인치로 반올림하지 않고 79 세제곱 인치로 내렸다. 독일인과 앵글로 색슨인의 경우에는 90세제곱 인치라는 평균값을 사용하고있지만, 정확한 값은 88과 89세제곱인치 사이다. (후략). - P138
그러나 이러한 속임수를 통틀어 나는 사기나 의식적인 조작의 징후를발견할 수는 없었다. 모턴 역시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자신이 남긴 흔적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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