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피


배는 마치 누군가가 썩은 이빨로 물고 씹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게 끊임없이 흔들렸다. - P12

"물수리다." 페이스는 추워서 이를 딱딱 부딪히면서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페이스의 6살 먹은 동생 하워드가 뒤늦게 몸을 돌리는 바람에 열은 색 몸통에 날개 가장자리만 진한 그 멋진 새는 그만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 P12

"우리 지금 저기 가는 거야?" 하워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있는 유령 같은 섬을 바라봤다. - P13

아버지를 볼 때마다 페이스는 항상 두려운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 P14

오늘 아버지를 보자 사무치는 연민이 느껴졌다. - P15

머들은 이 좁은 공간에 자신의 짐을 넣으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 막으려고 작은 체구로 버티고 서 있었다. - P15

하워드는 엄마 앞에 서면 수줍어하면서도 엄마를 아주 좋아하고, 페이스도 어렸을 때는 하워드처럼 엄마를 숭배했다.  - P16

올해 들어서 페이스는 그런 엄마에게 익숙해지면서 예전에 품었던 엄마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깨지고있었다. - P16

"하지만 우리는 왜 가냐고? 아버지는 우리를 중국에 데려가지 않으셨잖아. 인도도 그렇고, 아프리카도 안 갔고, 몬지아에도 안 갔잖아." 마지막 나라는 몽골 발음을 하워드식으로 한 것이다. - P18

"아, 페이스, 넌 정말 얼마나 의지가 되는 딸인지 몰라." 머틀은 애정어린 하지만 한편으로 지친 끝에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마조를 페이스에게 지어 보였다. - P19

그러다 어느 일요일에 교회에서 집으로 걸어서 돌아오고 있을 때 갈색 홈부르크 모자(좁은 챙이 말려 있는 남성용 모자-옮긴이)를 쓴 한 남자가 다가와 연신 꾸벅꾸벅 인사를 하면서 자기 소개를 했다.  - P20

. 페이스는 마음속에 수많은 의문을 안고 있있고, 그 의문은 나무상자 속의 뱀처럼 똬리를 튼 채 온몸을 비틀고있었다.

아, 하지만 난 할 수 없어. 절대로 그것에 굴복해선 안돼.

페이스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이름 없는 존재였다. - P21

페이스가 가장 저항하기 힘든 건 뜻밖에 생긴 기회였다. - P21

페이스가 난간을 따라 천천히 걷는 동안 보슬비가 우산을 적셨다. 페이스는 자신이 다시 그것에 굴복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 P22

페이스는 아버지와 삼촌을 불과 3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들키지 않고 훔쳐볼 수 있는 자리를 상자 두 개 사이에서 찾아냈다. 아버지 몰래 아버지를 보다니 아주 특별한 신성모독처럼 느껴졌다. - P23

2

베인



사기꾼이라니.
비에 젖어 축축한 갑판 위를 걸으면서 멍하니 지나가는 섬들을 바라보는 동안 그 말이 케이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들이 아버지를 사기꾼이라고 의심할 수 있지? - P25

삼촌이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기가 베인이야."
다가오는 섬은 처음에는 그다지 크지 않아 보였지만 페이스는 곧 그 섬이 가까워지면서 뱃머리가 점점 가늘어지는 배처럼 생긴 걸 알아차렸다. - P26

처음에 페이스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긴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일 거야. 자기가 원해서 사는 섬일 리가 없어. 여기사는 사람들은 분명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일 거야.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전과자들처럼 범죄자들이 살고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처럼 세상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 같아.
우린 도망자들이야. 어쩌면 여기서 영원히 살아야 할지도 몰라. - P26

배가 부둣가에 정박했을 때 빗발이 다시 거세졌다. - P27

클레이는 정중하게 페이스의 아버지와 악수했다.
"그렇습니다. 목사님. 전 베인의 부목사입니다."
페이스는 부목사란 목사가 돌봐야 할 교구가 너무 많거나 일이 너무 많은 목사를 돕기 위해 고용된 일종의 목사보라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 P28

페이스 가족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페이스는 확신했다. 교회의 스캔들이 벌써 메인에도 도착했을까? - P28

일꾼들은 크지만 비바람에 시달리고 낡은 마차 지붕에 아주 힘들게 선더리 가의 짐들을 보기 흉할 정도로 높게 쌓아 올린 다음 밧줄로 묶어 고정시켰다. - P29

페이스는 마음속에서 분노와 짜증이 치밀어 올라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게 뭐 대수인가? 지금 온갖 신문이 우리 가족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있는데, 어머니는 정말 우리가 홀딱 젖으면 사람들이 우릴 더 멸시할 거라고 생각해요?

부목사의 얼굴이 아주 지쳐 보였다. - P32

‘흠, 난 여기 오두막에서 기다리면서 말의 짐을 덜어줘도 괜찮을것 같은데." 마일스 삼촌이 말했다. - P32

"난 내 표본들을 지켜야 해." 에라스무스 목사는 사나운 목소리로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 P33

목사는 차갑고 냉정한 눈빛으로 식구들을 쓱 훑어봤다. 그의 시선이 머틀과 하워드를 거쳐 페이스에 머물렀다. 페이스는 아버지가 자신의 체중과 중요성을 저울질하고 있는 걸 알아채고 얼굴을 붉혔다. - P33

마일스 삼촌과 클레이가 트렁크와 상자 들을 하나씩 끌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페이스는 무용지물이 된 기분으로 멍하니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보닛(아기들이나 여자들이 쓰던 모자로 끈을 턱 밑에서 묶게 되어 있음-옮긴이)을 흔들었다. - P34

이 상자에 아버지의 개인적인 서류가 다 들어 있었다.  - P34

"비가 좀 그칠 것 같아 보이는데요. 클레이 씨, 절벽 주위를 같이 걸으시겠어요 그 발굴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도 해주실 겸?" 마일스 삼촌이 말했다.  - P35

페이스는 편지들에 얼룩이 묻거나 구겨지지 않게 가장자리를 살짝 잡고 봉투에서 하나씩 꺼냈다. 과학 잡지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아버지의 논문을 출판한 출판사들이 보낸 편지들. - P35

 마침내 관심이 가는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중략).

그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서 페이스는 화들짝 놀랐다.
(중략). 페이스는 자신이 편지에 엄지손가락모양의 암묵을 남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장악했다. - P36

3

불 코브


마차가 비탈길을 올라가는 동안 페이스는 장갑에 묻은 얼룩을 감추려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다. - P37

아버지에게 적이 있는 게 틀림없어. 누군가 아버지를 파멸시키려는 거야. - P38

"마일스 캐티스톡 씨와 선더리 양인가요? 전 가정부인 제인 벨렛이라고 합니다." 그 부인은 남자 같은 저음의 목소리에, 작고 빈틈없이 보이는 눈이 깐깐해 보였다.  - P39

어머니가 마침내 숨을 돌리기 위해 말을 멈췄을 때 페이스가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머들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도착하시자마자 식물 표본들을 둘 곳을 찾으러 나가셨다. 온실로는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야. 그 식물 때문에 야단법석을 피우면서 폴리(과거 시골 저택에서 정원에 짓던 장식용 건물-옮긴이)에 가신 지 꽤 됐다" - P40

"폴리가 완성되기 전에 돈이 다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났고요. 한동안 사과를 넣어두는 창고로 쓰였지만.... 비가 새서. 벨렛 부인이 대답했다.
"식물을 두기엔 특이한 곳이네." 머틀은 생각에 잠겨 혼잣말을 하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 P41

페이스가 달려가서 상자 옆에 쭈그리고 앉아, 상자에 귀를 대고 들어봤다. 상자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벨렛 부인, 이 상자를 제 방까지 좀 올려다주시겠어요?" - P42

"자기 전에 우유 술(과거 뜨거운 우유에 맥주나 와인을 섞어 마시던 술-옮긴이)을 갖다줄까요?" 가정부가 물었다. - P42

"아버지가 중국 뱀을 키우시거든요!" 페이스는 서둘러 설명하면서 벨렛 부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고기・・・・・ 신선한 고기 한 조각이면 될 거예요." 페이스는 더듬거리면서 이로써 첫인상을 망쳐놓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P43

뱀이 죽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하고 난 후에야 페이스는 장갑에 잉크 얼룩이 묻은 걸 기억해냈다.  - P44

바람이 덧문들과 빗장이 걸린 문을 사정없이 흔들었고, 가끔 때걱거리는 소리 너머로 멀리서 마치 짐승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 같이 크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P45

페이스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난 아버지를 믿어요. 다른사람이 뭐라고 하긴 아버지를 믿어요. - P45

문을 열자 작은 옥상 정원이 보였다. 정원의 작은 석관들이 이슬에 젖어 얼룩덜룩했다. - P47

페이스는 옷을 입고 탐험을 계속했다. (중략).
안돼! 그건 포기해야 해.
애써 곧 견진성사를 받을 거라는 생각을 다시 떠올렸지만 그 생각을 하자 평소처럼 두려움이 밀려왔다.  - P47

그렇지만 페이스의 머릿속에서는 불 코브의 이 집에서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중얼거리는 사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 P48

목사는 울적한 표정으로 아내를 잠깐 보고 나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없이 아침 식사를 계속했다.
마일스 삼촌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제안했다.
"우리 모두 재클러 박사와 같이 발굴 현장을 보러 가죠. 가족 소풍 삼아서." - P50

잔이 돌아와서 일부러 조신한척하며 빵을 놓은 도마를 내려놓고 다시 나갔다. 1센티미터 두께로 사정없이 썰어놓은 빵은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 P50

머틀은 전에 페이스에게 하인에게 명령을 내리는 적절한 방식이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공손하게 지시를 하기 위해 질문하는 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 P51

하워드가 고집스럽게 왼손을 계속 쓰려고 하자 머틀은 어른들이 그런 습관을 부추기지만 않는다면 걱정할 것 없이 그냥 지나갈 일시적인 변덕이라고 주장했다. - P53

밖에 나온 하워드는 뛰어다니면서 작은 나무 권총을 겨냥해서 집의 2층 창문들을 향해 "빵" 소리를 내며 총을 쐈다. (중략).
누가 그런 하워드를 봤더라면 페이스는 동생이 ‘기운이 다 빠지도록‘ 놀게 했다고 야단을 맞을 것이다. - P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