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당신은 정말로 좋은 여자야..…………. 손 좀 줘볼래?
당황한 그녀가 수줍은 미소를 짓자 에르도사인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내 사랑, 화난 건 아니지?" - P91

"당신이란 걸 알고 이렇게 말하겠지. ‘엘사, 당신 엘사 맞지? 그렇지?"
(중략).
"그럼 지금 난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야." - P92

"말해 봐. 저 녀석과 잔 거야?"
(중략).
"솔직히 털어놔, 엘사 잤어, 안 잤어?"
"안 잤어."
문간에서는 여전히 대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 P93

어둠의 장막

에르도사인은 어떻게 침대로 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시간이 영원히 멈춰버린 것 같았다. 온갖 고통과 슬픔으로얼룩진 그의 육신도 이젠 지쳤는지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P93

고통과 슬픔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와 흰 거품을 일으키며 사라져갔다. 그 어디에도 빠져나갈 틈은 보이지 않았다. - P94

시간이 흐를수록 콘크리트 구덩이 밑바닥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 P95

순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에르도사인은 자신의 존재가 납작하게 짓이겨지는 것을 느꼈다. - P96

(전략).
그리고 갑자기 엘사가 소리친다.
"그래요, 오, 내 사랑. 저도 마찬가지예요."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상기된 엘사는 가볍게 떨고 있는 남자의 단단한 근육을 황홀한 눈길로 바라본다. - P97

이미 팽팽해져 있던 신경이 무섭게 뒤틀리더니 급기야는 모두 끊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나른한 기운이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제 이 세상에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다. - P98

엘사의 모습이 그의 기억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P98

(전략)∙∙∙∙∙. 아, 맙소사! 엘사는 떠나고 없었다………. 게다가 회사에 600페소 7센타보를 갚아야 했다…………. 아니, 수표가 있으니 그 문제는 해결된 거고…………….
아, 이놈의 현실. 넌덜머리 나는 이 현실! - P99

이마와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결국 엘사는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바르수트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 P100

에르도사인, 뺨을 얻어맞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바르트라는 것을 알고 에르도사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 P100

에르도사인이 입을 열었다.
"혹시 봤나? 저기 떨어져 있는 권총 말이야. 두 연놈을 죽일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어. 인간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족속이야, 안 그래?" - P102

아닥친 이 상황이 그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지만,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 P103

"이제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게. 더 이상 숨기고는 못살 것 같아. 못 믿겠으면 내 가슴에 손을 한번 대봐. 진심이야. 음…………, 바로…………, 내가......, 그러니까 회사에 자넬 고발한 사람이 바로 나야…………. 내가 익명으로 투서를 보냈어."
그 말을 듣고도 에르도사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바르수트가 그랬든 다른 사람이 그랬든, 달라질 게 뭐란 말인가? - P104

"이봐, 자네가 얼마나 화가 났을지 나도 잘 알아. 마음만 먹었으면 날 죽일 수도 있었겠지. (중략). 폭탄 소포나 독사를 넣은 상자를 자네에게 보낼까 생각한 적도 있어. 아니면 운전기사에게 돈을 먹여 길거리에서 자네를 깔아뭉개 버릴까도 생각했었지. (후략)." - P106

조바심이 난 에르도사인이 다시 그 얘길 꺼냈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던 거야?" - P107

‘에르도사인은 한 시간 전쯤 엘사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레모,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난 행복하니까. 앞으로 당신은 홀로 지내야겠지?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문이 열리고・・・・・・ 문 뒤에 바로 내가 서 있을 거야…………. 내가 돌아온 거라고! 그럼 레모, 당신은 얼마나 놀랄까?‘ - P108

에르도사인은 엘사의 말이 그의 영혼을 영원히 구원하게 될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순간에도 복수심에 불타는 바르트는 분노를 주절대고 있었지만 말이다. - P109

참, 에르도사인의 이야기를 옮기다 하나 빠뜨린 게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찾을 수 있는데, 많은 행성들이 태양 주변을 돌듯 그가 털어놓은 많은 얘기들도 한가지 ‘생각‘을 중심으로 선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 P112

에르도사인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뭐 내가 돈이 없어서 자네 집까지 걸어갔겠나. 그건 그렇고, 집에 도착해서 자네를 찾았더니 글쎄그녀는 나와 보지도 않은 채 ‘미안하지만 그냥 돌아가. 지금 남편이 없거든? 이러는 거야. 못된 년 같으니." - P113

"자넨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구먼. 물론 나도몰라. 자네가 말한 그 강박관념, 아니면 망상이 뭔지…………. 그나저나 참 재미있군. 자네가 내 아내를 그렇게 쫓아다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태평스럽게 할 수 있지!" - P114

순간 에르도사인의 머릿속에 섬뜩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그건 좀 있다 다시 얘기하고…………. 자네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 회사에서 날 부르더니 그 익명의 투서에대해 말해 주더군. 내일까지 그 돈을 메워 놓지 못하면 난 감방에 가게 돼. 이게 다 자네 때문이야. 자네도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밀 순 없겠지. 그러니까 돈 좀 내놔. 내 처지에 그런 큰돈을 어디서 구하겠어" - P115

바르트가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 날 남의 아내에게나 치근대는 개자식으로 만들어놓고 나보고 책임지라고? 제정신이야? 그러니 그녀가 도망 안가고 배겨! 내가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600페소를 내놔" - P115

에르도사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았다. 마침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권총이 눈에 들어왔다. - P116

나는 범죄를 통해서 ‘존재‘ 한다

우체국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한 줄기 불빛이 템페를레이 역 플랫폼을 외롭게 비추고 있었다. - P116

역 우체국의 노란색 유리창 앞으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녀석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놈을 죽이는 게 좋을까? 솔직히 말해 보자. 녀석을 죽이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를 죽이든 살리든 별상관이 없는 걸까? 하지만 솔직한 심정을 말하면, 그놈을 죽여야 한다는 의지만은 갖고 싶다. (후략)." - P118

"(전략).
그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도 저 멀리 중국에서 일어난 참사 소식처럼 전혀 실감이 나지 않으니 참 이상하지. 지금 살인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니까. 나와 비슷하긴 한 것 같은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사람, 아니면 영화 속에나 나오는 그림자 인간이 범죄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닐까? (후략)." - P120

역무원이 지나가면서 수상한 듯 에르도사인을 힐끗 쳐다봤다. 낌새를 알아차린 에르도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점성술사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름에 가려 달도 보이지 않았다. - P122

살인 계획

점성술사가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개도 안 짖는데…………… 이 시간에 대체 누구야?‘
이상하게 여긴 점성술사는 문을 반쯤 열고 내다보았다.  - P122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어서 들어와요."
에르도사인은 서재로 들어갔다.  - P123

‘파타고니아에서 금 찾으러 돌아다니는 자들도 저런 모습아닐까? - P123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만약에..…………, 제 질문에 절대 놀라진마세요……………. 그러니까 그 비밀 조직을 설립하는 데 2만 페소가필요하다고 하셨죠? 그런데 만일 그 돈을 얻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만약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겁니까"
뜻밖의 질문에 놀란 점성술사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 P124

"간단하지만 기가 막힌 아이디어예요. 오늘 밤 내 아내가 딴놈이랑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자가……………."
(중략).
"바르트라고, 아내의 사촌입니다..... 그레고리오 바르트. 아내가 떠나고 얼마 안 돼서 그자가 우리 집에 왔는데, 들어오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참 기가 막혀서! 자기가 날 회사에밀고했다는 거예요."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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