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누 301 입니다
두 사람은 홀로그램 속 모습과 약간 달라 보였다. (중략). "어머, 홀로그램과 똑같네. 아니, 훨씬 잘생겼다. 그런데……." (중략).. 여자는 무언가 기억해내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내 이름을 말하려는 것이겠지. "제누 301입니다." - P7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디가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예의를 지키라는 신호였다. 실수를 한 건 저들인데 예의는 왜 매번 나만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 P8
"어머, 저렇게 큰 헬퍼는 처음 봐요." "여긴 아이들이 많아서 일반 가정에서 이용하는 헬퍼로는 감당이 안 됩니다. 저희 NC 센터를 위해 정부에서 특별 제작한 헬퍼입니다." - P9
. 요즘 헬퍼들은 인간의 모습과 육십퍼센트 정도 닮은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누가 봐도 로봇 그이상은 아니었다. - P9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두 사람만 사는 집이 적막하더라고요. 나도 남들처럼 아들과 여행도 다니고, 낚시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 P10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춘 태도로 NC 센터를 찾아온 이 프리 포스터 (prefoster)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가세요." "한번 안아주고 싶은데." "아직 신체 접촉은 불가합니다." - P11
가디가 피곤한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 "제 ID 카드에 평생 NC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는 뜻이죠." - P12
평생 NC의 낙인 아래 살아간다는건 분명 힘든 일일 테니까. 성인이 된 후 이곳을 벗어난 사람들이 어떤 차별 속에 사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 P12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NC 출신으로 살아간다는 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일이다." "말도 안 되는 부모 밑에서 살아가는 게 더 어렵죠." 가디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 P13
사방 어디든 초록의 숲이 빽빽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누구도 저 숲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홀로그램일 뿐이니까. (중략). 저 하늘은 진짜일까? 싱거운 생각이 들었다. - P14
NC 센터는 한국 전역에 퍼져 있었다. (중략). 이곳은 ‘라스트(last)‘라는 말뜻 그대로 NC 센터에서 지내는아이들이 마지막으로 거쳐 가는 집이라 할 수 있었다. - P14
나비와 무당벌레, 벌과 잠자리 같은 곤충 모양의 드론이 가끔NC 센터에 날아들었다. NC 바깥의 사람들은 우리의 존재를 궁금해했으니까. 개중에는 우리가 불법적으로 신분 세탁을 한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 P15
나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의 짙은 암갈색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잘 아는 분이 싫다는데 왜 억지로 페인트를 진행시켜요?" - P16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키가 번쩍 고개를 들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형, 페인트 했어?" 잔뜩 흥분한 아키를 피해 나는 풀썩 침대에 누웠다. "블라인드 내리고 취침등." - P17
"불공평해. 왜 형 목소리만 등록되어 있지? 나는 일일이 리모컨을 눌러야 한다고. 그리고 나 아직 안 잘 거야." - P17
중요한 것은 이름 뒤에 붙는 숫자였다. - P18
. 우리는 부모를 선택해 가족을 이루어야만 혜택들이 주어졌다. 물론 우리를 키우려는 사람에게도 그에따른 여러 혜택이 생겼다. - P18
"아니, 준 203. 왜 준이 유독 많은 걸까? 여자애들이 생활하는 센터G에도 주니가 많다던데." 왜일 것 같냐? 되물으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 P19
아이 낳기를 기피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갔다. (중략). 정부는 결국 새로운 길을 찾았다. "이제 아이는 국가에서 책임지고 키웁니다." 단순히 양육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 P19
상담실 문을 열자 테이블 너머에 최가 앉아 있었다. (중략). "어땠어?" (중략). 반드시 입이 무거울 것. NC의 가디들이 지켜야 하는 중요한 원칙 중 하나였다. - P20
"제누, 꼭 정부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 그들이 NC를 방문하는건 아니야."로 존재 "모든 아이들이 꼭 부모가 필요한 건 아니듯이요?" - P21
"태어날 때 만나야만 부모니? NC의 아이들은 모두 열세 살 때부터 부모를 가질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우린 버려졌다는 뜻이죠."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최의 눈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 P22
최의 말은 사실이었다. 우리는 부모가 될 사람의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면접에서 좋은 인상을 받거나, 이 사람이면 괜찮겠다 싶으면 추가로 두 차례 더 면접을 진행했다. - P22
"15점짜리 부모 밑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아이도 있어." 최는 우리들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 P23
"그 사람들은 사실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 속이 훤히 보였거든. 박이 왜 그 사람들에게 너를 추천했고, 싫다는 너에게 억지로 면접을 진행시켰는지 알아?" 가디는 웃었지만 나는 썩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 센터에 열일곱이 몇 명 없잖아요." - P24
최를 따라 일어서면서 나는 말했다. "너, 요즘 먹는 게 부실해." "지난달 보디 체크에서 상위 십퍼센트 안에 들었는데요." - P25
설립 당시부터 NC 센터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팽했다. 부모가 아이를 버리는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출생률을 높이지 않으면 국가의 존속마저 위태로워진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고,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며 찬성의 목소리를 높이는 쪽도 늘었다. - P26
"건강은 절대 자신하는 거 아니야. 그거라도 꼭 먹어." - P27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아키가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형! 나도 하게 됐어! 페인트." - P27
부모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전략). 아이를 잘 낳지 않고, 낳아도 키우지 않으려는 사회였다. (중략).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듣고 가장 예쁜 짓을 할 때인 다섯 살 정도의 어리고 귀여운 아이들을 주로 원했다. 갓난아기는 부담스러워했다. - P29
그러나 정부에서 받는 혜택만을 노리고 무분별하게 부모 면접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P29
연령 제한을 높이자 오히려더 많은 사람들이 NC 센터에 관심을 보였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힘들여 어린아이를 키워야 하는 시간이 보통보다 십년 넘게 단축되었다는 것과, 양육 수당과 연금을 앞당겨 받을 수 있다는 혜택. - P30
남북한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사실상 종전이 선포된 이후, 국방비로 들어가던 예산의 일부가 국민 복지와 출생률 안정을 위한 자금으로 더해졌다. - P30
사람들은NC 출신과 자신들을 구분 지으면서 특권의식을 느꼈다. 낳아 준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에게 NC 출신은 자신과 결코 같을 수 없었다. - P31
"글쎄, 내가 팔려 가는 느낌이야." 그런데도 모든 것이 가식으로 느껴졌다. 부모들이란 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각종 혜택과 보장 제도에만 침을 흘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 P31
"결혼이라는 게 그런 거 아냐? 남남이던 두 사람이 계약을 맺고 한 집에서 사는 거. 서로 맞춰 가느라 처음에는 싸우기도 할 테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아니면 헤어지면 되고, 부모 자식 관계도 그런 거 아닌가." (중략). 글쎄, 부모 선택과 결혼이 과연 비슷할까. - P32
이를 진화하기 위해 정부는 NC 아이들의 ID 카드에서 출신 기록을 삭제하는 법을 정비했다. 새로운 부모에게 입양되는 즉시 ID카드에서 NC 출신이라는 기록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 P33
아이를 입양하려는 사람들과 NC의 아이들을 아무도 모르게 가족으로 묶어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NC 센터의 핵심 역할이자 목표였다. - P33
프리 포스터와 NC의 아이가 만나 가족을 이루는 가정이 많아지자 겉으로 보이던 문제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NC의 아이들은 소리도 냄새도 없이 점차 자연스럽게 사회에 스며들었고, 차별은 눈에 띄게 줄었다. - P34
8월에는, 긴 여름휴가가 있었다. 반복되는 빡빡한 일상을 벗어나 산이나 바다, 섬, 해외로 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눈부신 풍경 속에서 자유로움에 취했다. 다음 해 6월에 아이들이 태어났다. 준, 주니가 많은 이유였다. - P35
"너는 분명 좋은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녀석에게 진짜 좋은 프리 포스터가 나타나길 바란다. 아키는 밝고 천진한 아이니까. - P36
NC에서 열일곱은 사실상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다. 대부분 열다섯 살이되기가 무섭게 페인트에 성공해 센터를 떠나니까. - P38
센터에서 데려온 아이를 파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부지원금을 토해 내야 하는 것도 모자라 벌금까지 낸다고 들었다. 노아는 열다섯 살에 센터를 떠났다가 반년 만에 제 발로 돌아온 녀석이었다. - P38
다시 센터로 돌아온 아이들이 비단 노아만은 아니었다. 막상 부모를 선택했지만 예상 밖으로 권위적이거나, 무심하거나, 뭐가 됐든 마음이 심하게 불편하면 아이들은 주저 없이 돌아왔다. - P39
바깥세상에는 넘쳐 나는 VR룸이 NC 안에는 몇 개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연령별로 지정된 날이 아니면 출입이 불가능했다. 게임 종류 또한 제한적이었다. - P40
"친부모 밑에서 자란 애들도 그런다는 거야." (중략). "부모들도 저 녀석들을 귀찮아하지 않을까? 저 녀석들에게 짜증도 내고 화도 내지 않았을까? 나는 절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 P41
. 늦은 시각에 사무실로 오라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생활 태도나 수업 태도 불량 문제라면 멀티워치로 간단히 경고만 주었을 것이다. - P45
한 무리의 아이들을 스쳐 갈 때 등 뒤에서 나직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지난번에 같이 본 영화의 남자 주인공 이름, 괜찮지 않아? 너는 생각해 놓은 이름 있어?" "오랫동안 주노 408로 불려서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게 어색해." - P47
"너희 모두에게 좋은 부모를 소개해 주는 게 우리의 의무다." 가디다운 발언이었다. 사설은 이쯤에서 끝내자는 뜻일까. "그래야 실적도 올라가니까요." 실적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물론 잘 알고 있다. - P47
내가 멋쩍게 웃자, 박이 손끝으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구나. 네 말대로 우린 실적이 중요하다. 이곳 NC 센터가 전국에서 실적이 가장 낮기로 유명해. 본부에서 지침이 내려왔다. 프리 포스터들을 위해 심사의 문턱을 낮추라고 하는구나. 그렇다고 아무나 들일 수는 없겠지만......." 박의 낯빛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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