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차드홀의 <백조의 호수> 공연이 끝나고 화장실에 간 요시노를 현관 앞에서 기다리면서 미오는 꺼두었던 휴대폰에 전원을 넣었다. (중략). 잠시 망설이다 새로이 온 메일을 확인했다. (중략). 복도를 걸어 나오는 요시노의 모습이 보인 것과 ‘새로운 메일 없음‘ 이란 메시지가 뜬 것은 거의 동시였다. - P121
가방 안에서 휴대폰이 울린 건 식사를 마치고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였다. - P124
멍하게 그 문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돌아온 요시노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중략). "그 남자지?" 미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컵 바닥에 조금 남아 있는 에스프레소를 깨끗이 비웠다. - P125
미오는 주변에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춘 다음 얼굴을 요시노의 얼굴 가까이 바짝 들이댔다. "......뭐랄까, 아, 이 사람 몸만 있으면 좋을 텐데, 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 - P128
2주일 정도, 일에 파묻혀 지내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대기업 석유회사 홍보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6년, 자기가 없으면 곤란해질 업무도 늘어나 체력적으로 힘이 부칠 때도 있지만 매일 뭔가를 이뤄낸다는 충족감이 느껴지긴 했다. - P132
료스케가 보낸 메일에 거의 답장을 보내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현저하게 횟수가 줄어들어 사흘에 한 번, 짧은 메일이 오는 정도다. - P132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빌딩 밖으로 나서자, 요시노가 불쑥 "있잖아,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까 ‘소바신‘ 말고 모래사장 쪽으로 나가보지 않을래"라고 말했다. "모래사장? 춥잖아." - P135
"아하, 그러고 보니 학생들은 벌써 봄방학이겠구나." 요시노는 샘이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역시, 오다이바라는 곳은 놀러오는 장소인가 봐. 우리들처럼 이런 데서 일하면 안 되는 건데." - P135
해안 거리를 따라 늘어선 레스토랑에서 테이크아웃 크랩샌드위치를 사들고 햇볕이 내리쬐는 모래사장으로 나가자 나무그늘 아래 시트를 펼쳐놓은 요시노가 "여기, 여기!"라며 손을흔들었다. "그 시트 어디서 난거야?" "편의점에 캔맥주 사러 갔더니 500엔에 팔더라." - P136
미오가 손을 내밀자 "잠깐! 내가 먼저 읽을 거야!"라며 요시노가 미오의 손을 팔꿈치로 밀어냈다. 요시노의 무릎 위에 펼쳐진 것은 여성 패션잡지 《LUGO》였다. - P137
요시노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잡지 페이지를 넘겼다. 어느새 그 손가락은 특집으로 다룬 여름용 샌들 페이지를 지나, 여름 메이크업을 지나, 아오야마 호타루의 연재소설 《동경만경》페이지에서 멈췄다. - P137
요시노는 과장되게 몸을 비틀거리며말했다. "저기,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료스케한테 여자친구가 있는 것 같아." - P139
"작년 여름, 메일로 만나 하네다공항에서 데이트를 했던 여자도 나와 그 여자 이름은 ‘리코‘ 고 하마마쓰초 기요스쿠에서일한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나와 있어." - P139
유리카모메의 종점 신바시역에서 야마노테선으로 갈아탄 미오가 시나가와역 홈에 내려선 것은 9시가 조금 지난 무렵이다. 원래는 야마노테선으로 시부야까지 가고 거기에서 덴엔토시(田園都市) 선으로 갈아타 사쿠라신마치(櫻新町)역으로 향한다. - P142
길을 건넌 미오는 조금 망설여져 도에이 단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직선으로 뻗은 차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중략). 신호는 어김없이 규칙적으로 변하지만 차는 한 대도 보이지않는 넓은 도로이다. - P143
도로 맞은편으로 셔터를 열어둔 창고가 보였다. 셔터 안을 들여다보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어둠이 너무 짙어서 어느 정도의 공간인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 P144
달려가던 스쿠터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10미터 정도 앞에서 스쿠터를 세운 남자가 헬멧을 벗었다. 미오는 일단 내딛기 시작한 걸음을 또 한번 멈칫했다. "료, 료코" - P145
"뭐긴, 아오야마 호타루가 연재소설을 싣는 잡지지. 어? 나오는 거 몰랐어?" "몰라." 료스케는 헬멧과 잡지를 능숙하게 한 손에 쥐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 오늘이 발매일이긴 한데." - P146
미오는 다시 한번 《LUGO》를 들어 보였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여전히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오려면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그, 그게 아니야. 료스케를 찾아온 게 아니라......." "어?" "아이, 아니...... 정말이지 잠깐만 이 주변을 걸어보고 싶었을 뿐이야." - P147
료스케가 핸들에 걸어둔 헬멧을 집어 미오에게 내밀었다. 미오는 순순히 헬멧을 받아들었다. "우리 집에 가자고 하고 싶지만... 오늘은 좀 곤란하거든." - P148
료스케 손을 잡고 스쿠터 뒤에 올라타려는 순간, 문득 아오야마 호타루 소설에 나왔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저어, 혹시 방에 여자친구 있어?" - P149
금방이라도 스쿠터가 앞으로 달려 나갈 듯한 순간, 미오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뭐?" "다른 게 아니라, 나 이쪽에서 오다이바를 한번 보고 싶어." 미오의 말을 듣고 료스케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 P149
스쿠터가 보통 어느 정도 속도로 달리는지는 잘 모르지만, 처음으로 타본 미오에게는 상당한 속도감이 느껴졌다. - P150
료스케는 안벽 끝에 스쿠터를 세웠다. 앞바퀴 수십 센티 전방이 바다였다. 미오는 멍하니 맞은편에 보이는 오다이바로 시선을 빼앗겼다. 마치 검푸른 바다 위에 뜬 조각배에 올라 오다이바에 밀집한 빌딩 숲의 광휘를 온몸에 내려 받는 느낌이었다. - P151
미오는 흥분된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실은 저기서 일해." 미오는 똑바로 맞은편 대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중략). 옆에 서 있는 료스케의 옆얼굴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기요스쿠는 거짓말이었지만 이번엔 진짜야." - P152
"내가 들어올리는 컨테이너가 그쪽에서도 보이는구나." - P152
료스케가 입을 다물자 파도소리만 남았다. 분명 여기저기서부딪치고 있을 파도소리인데도 왠지 하나로 모여 귓전을 울렸다. 하나하나의 파도는 가까울 텐데, 합쳐지니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 P155
료스케가 스쿠터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안 갈래" 처음에는 나지막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엔진소리에 그 소리가 묻혀버렸다. "응?" 이라고 료스케가 다시 물었다. "안 간다구!"라며 이번에는 큰 소리로 외쳤다. - P156
파도소리는 시나가와 부두에 늘어선 창고 안에까지 또렷이들려왔다. 마치 닫힌 셔터에 부딪치는 듯한 거친 소리였다. - P157
료스케는 미오의 손을 뿌리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철 계단을성큼성큼 올라갔다. 쾅, 쾅, 쾅 울리는 그의 발소리가 창고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 P158
물건들 뒤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들고, 마치 모두 사라져버린 도쿄에 자기 혼자만 달랑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들기도 했다. - P158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등에 뭔가가 스치는 기분이 들었다. 등뼈를 따라 쓱 밑으로 내려가는 감촉은 곧바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료, 료스케, 어디야? 거기 있는 거지?" 누군가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뻗어 봐도 주위에는 짙은 어둠만 펼쳐져 있을 뿐, 손에 닿는 건없었다. - P159
(전략). 비로소 미오는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있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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